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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어떤 속박

건설현장처럼 전시장 곳곳에 툭툭 쌓여 있는 시멘트 벽돌담 너머로 화면 곳곳이 떨어져 나간 대형 모니터가 서 있고, 부서져 나온 모니터 조각들은 전시장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깨진 화면 위로 모델이자 배우로 활동 중인 드리 헤밍웨이의 모습이 보인다. 노란 블라우스를 입은 그는 채광이 좋은 사무실에 앉아 옥수수를 먹는 중이다.

관절재활치료기구(CPM)의 도움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 테이블 위 옥수수에 닿는 것은 영 쉽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옥수수를 입에 넣는 데 성공한다.

 

예스퍼 유스트, servitudes, 2015, 영상, 설치, 아이뮤지엄 설치장면.

 

옥수수를 씹는 촉촉한 소리와 피아노의 영롱한 선율이 하모니를 이루는 가운데, 어색하면서도 우아한 몸짓으로 옥수수를 먹으면서 간간이 관객을 향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헤밍웨이의 모습은 아름다운 옥수수 광고모델 같다.

 

덴마크 출신 작가 예스퍼 유스트는 영화 <모던타임즈>에서 기계의 힘을 빌려 옥수수를 먹는 찰리 채플린을 보았다.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손발이 묶인 그는 점심시간을 아끼기 위해 공장주가 도입한 자동 급식 기계의 도움을 받아 옥수수를 먹었다. 빠르게 회전하는 급식 기계는 채플린의 이빨을 갈아버리고, 컨베이어 벨트의 미친 속도는 그의 정신을 갈아버렸다.

 

<모던타임즈>의 시간으로부터 세월이 꽤 흘렀으니, 무언가 달라졌을까. 채플린의 시대와 드리 헤밍웨이의 시대를 옥수수(GMO)와 기계로 연결한 예스퍼 유스트는 옥수수 뒤에서 이익을 거둬들이는 이의 그림자를 작품 속에 포착했다.

 

전보다 섬세한 속도로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통제하는 그림자의 몸짓은 더없이 우아했고 매력적이었다. 그림자가 마련한 판타지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 기꺼이 올라탄 이들은 옥수수를 즐겼고.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그들의 욕망을 연료 삼아 컨베이어 벨트는 서서히 속도를 올렸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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