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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승효상의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그리고 헤테로토피아

이상향으로 번역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는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지은 소설책의 제목이었다. 그는 그리스어 두 단어를 합성해서 이를 만들었는데, 그 뜻이 이중적이다. Topia는 장소, 땅이라는 분명한 뜻을 갖지만 U는 뜻이 모호하다. 그리스어 eu, ou는 다 같이 ‘유’로 발음되는데, eu는 좋다라고 하는 뜻이며 ou는 아니라고 하는 뜻이라 e와 o를 빼고 그냥 ‘u-topia’라고 하면, 좋기는 좋은데 이 세상에 없는 곳이 된다고 한다. 즉 상상할 수는 있지만 현실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는 도시가 유토피아인 셈이다.

그 책 속에는 유토피아를 그린 그림이 있다. 그림 속 유토피아는 위쪽에 그려진 육지로부터 떨어진 섬이어서 이곳을 가려면 배를 타고 하나의 입구에 도달해야 한다. 모든 출입을 감시하는 망루가 섬의 입구에 솟아 있고, 이를 통과하면 다시 전체를 두르는 해자가 있어 내부로 접근하기 쉽지 않다. 곳곳에 설치된 감시탑을 피해 들어간 섬의 가운데에는 이 땅을 다스리는 영주의 성채가 있다. 한 사람의 지배와 감시를 거쳐 안전을 담보 받는 세계, 그게 유토피아의 모습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유행처럼 번진 이상도시 건설의 열망을 비판하기 위해 쓴 책이었지만 이 책은 오히려 도시건설의 시대적 이론이 되어,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한 신도시들이 북부 아프리카에서 스칸디나비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세워졌다. 그 도시들은 하나같이 단일중심의 구조로, 둘레에는 높은 성벽을 쌓고 그 밖으로 해자를 깊게 파서 철저히 외부를 차단한 통제적 모습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견고한 성벽은 허물어졌지만 단일 중심의 도시구조는 지금도 남아 독존의 세계를 꿈꾼 것을 증거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에도 이 유토피아의 꿈은 변하지 않는다. 시대마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등장한 신도시 모두가 이상세계를 동경한 것이었고, 현대의 마스터플랜이라는 도시계획의 수법도 유토피아의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다. 실현된 유토피아의 사회가 그야말로 이상향이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다. 범죄는 잘 계획된 도시에서 오히려 더욱 많아졌고 갈등과 대립은 전형적인 도시의 문제가 되었다.

유토피아에 반대되는 말이 있다. 지옥향 혹은 암흑향으로 번역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라는 단어다. 1932년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이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그려진, 비극적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도록 철저히 통제된 사회가 디스토피아였다. 외부와 소통되지 않는 이 디스토피아의 세계 역시 애초에는 유토피아를 꿈꾼 사회였으니, 결국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와 같은 뜻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똑같이 폐쇄적 공동체인 까닭이다.

디스토피아를 묘사한 일러스트 (출처 : 경향DB)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의 개념을 현실에 끌어들인 이가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다. 그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는 특별한 단어를 소개하면서 도시공간에 대한 인식을 넓히며 새롭게 했다. 예를 들어 어린이들이 부모 몰래 숨고 싶어하는 이층 다락방 같은 공간, 신혼의 달콤한 꿈을 꾸는 여행지, 혹은 일상으로부터 탈출한 듯한 카니발의 세계나 놀이공원 같은 공간이 실제화된 유토피아인데 이를 헤테로토피아라고 이름하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변에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적 공간과 시설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상의 피로를 보상하는 듯한 노래방이나 디스코텍, 혹은 공연장이나 전시장 심지어 박물관이나 공원도 그런 범주에 들어갈 게다. 이런 공간은 도시에 활력을 부르는 시설인데, 공통되는 특징은 그 속에서의 활동이 늘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상상해 보시라. 그런 공간에서 평생을 보내는 이가 있다면 결코 그 공간은 그에게 유토피아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헤테로토피아는 한시적으로 유효한 유토피아이며 그러므로 일상의 도시공간에서 유용한 존재가치를 가진다.

문제는 이 한시적이어야 할 헤테로토피아가 영구적 유토피아를 꿈꾸면 비극이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 도시의 한가운데 있는 아파트다. 고층의 집합주택은 로마시대에도 있었을 정도로 아파트의 역사는 오래며 이제는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세계 공통의 주거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땅에 세워진 아파트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형식을 띠는데 바로 ‘단지’라는 개념 때문이다. 이 땅의 아파트는 그 가구 수가 얼마이든지 들어서기만 하면 그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주변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단지가 되었다. 이 단지 속에는 그네들만을 위한 놀이터와 공원과 상가, 유치원과 학교, 마을회관과 행정조직까지 두어 자치적 공동체를 염원한다.

환상적인 조감도 위에 영어단어를 조작한 이름을 붙이고 몽환을 꾸게 하는 이 독존적 조직, 불과 몇 개의 출입구로 출입을 통제하는 이 낙원을 도시의 일반 도로는 가로질러 통과할 수 없다. 그냥 둘러서 지나야 하니 이 아파트 단지는 도시 속의 섬이 되고야 만다. 이런 섬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마치 군도처럼 도시 곳곳에 둥둥 떠 있게 된 이 섬들끼리는 부동산 가치를 놓고 늘 대립하는 적대적 공동체였다.

더구나 지난 시대 우리가 지어온 아파트는 사실상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야합한 결과 아닌가? 정치가가 몇 채를 짓겠다고 공약하고 건설자본은 이를 뒷받침하여 그 임기 내에 졸속으로 지어댔으니 어디에도 우리들 공동체의 삶을 위한 담론이 없었고 건축의 시대적 정신도 없었다. 오로지 고립된 부동산공동체로 나타난 이 아파트단지는 분별없는 헤테로토피아였던 것이다.

얼마 전 한 아파트단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우리의 한 이웃이, 그 주민으로부터 먹다 남은 음식물을 던져 받는 모멸감을 끝내 참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그곳에서는 그런 식의 비인간적 행위가 거듭되어 왔다고 했다. 낙원의 삶을 만끽하는 단지의 거주자에게 경비원은 이웃이 아니었으니 폐쇄적 낙원에 소속될 수 없는 그의 인간적 존엄은 웃기는 단어였다. 이 일이 하나의 극단적 사건이라고? 아니다. 단지라는 울타리를 가지고 있는 한 늘 잠재되어 있는 비극이며, 따라서 그 단지는 역사에서 보듯 늘 디스토피아의 결말을 가진다. 단지를 해체하라.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