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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은마 아파트

은마 아파트는 단순한 아파트가 아니다. 1970년대 말 강남 개발의 주역이자 상가 건물까지를 거느린 대규모 아파트의 원조 격이기도 하다. 팰리스와 타운 등을 붙인 고층 아파트에 밀려 구식으로 취급받을 때조차도 사교육 열풍에 힘입어 대치동 명당 자리의 위용을 굳건히 지켜냈다. 심지어 재개발이 확실시되면서 아파트 불패 신화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우리가 겪어온 경제개발과 주거, 교육 환경의 변천사가 이 은마 아파트라는 이름 하나에 응축되어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 벨기에 사진가 세바스티앵 쿠벨리에가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은마 아파트를 꼽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몇 년 전 미국 교포인 여자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왔다가 처음 은마 아파트를 발견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그가 아파트 내부까지 촬영하기에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 집과 친해지자 옆 동 주민을 수월하게 소개받는 한국 특유의 친근함을 경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파트의 외관은 물론이고 세대를 막론한 주민 인터뷰까지를 갖춘 그의 작업은 은마 아파트에 관한 치밀한 보고서라 할 만하다. 그는 아파트에 살고 싶어 했던 중산층의 열망 속에서 경제 발전이, 뜨거운 교육열 속에서 다재다능한 신세대가 출현했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정확히 꿰뚫은 한 이방인 사진가의 시선 속에서 해질 녘 은마 아파트는 중년의 사내처럼 꽤 쓸쓸한 분위기를 풍긴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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