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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조선령의 NO Limit: 현대미술과 극단의 실험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나는 가수다' 열풍이 가요계를 넘어 다른 분야에까지 확산되고 있는 모양이다. 신문 잡지에 배우, 소설가, 발명가에 이르기까지 '나는 -다'란 제목으로 실린 가상 오디션 기사가 심심찮게 눈에 띠는거 보면. '나가수'를 모르면 대화에 끼기 어렵다 싶을 정도다.

신인급도 아니고 기성 가수의 노래에 순위를 매길 수 있느냐는 의문부터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의 문화버전이라는 질타까지 비판도 많았다. 이 지적들이 틀린 건 아니지만, 적어도 가수라는 직업의 본령에 주목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 기능이 있다. 그러니까 노래부르는 사람을 '가수'라고 부르고 그 능력과 정체성을 한번 되짚어보자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 않느냐는 거다. 

'나가수'는 언제부터인가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 듯한 '한 길을 파는 전문인'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이것저것 다하는 '만능 예능인'이 아니라 '가수'에 대해 묻는다. 가수는 노래부르는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짚어줌으로써 "그럼, 노래를 잘부른다는 건 뭐지?'란 질문을 새삼 던지게 만든다. 노래 좀 부른다는 쟁쟁한 가수들이 종종 나가수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하거나 나가수를 언급하는데서 그 파급효과를 알만 하다. 물론 '노래 잘 부른다'는 것을 '고음으로 내지르는 것'과 동일시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은 듯하지만 적어도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과 못해서 안하는 것의 차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다. 



'나가수'의 미술 버전을 만든다면 뭐가 좋을까? 모델을 세워놓고 단시간에 똑같이 그리게 하는 거? 미대 입시도 아니고 너무 단순하고 재미없다 싶긴 하다. 물론 '똑같이 그리는 것'에 대한 로망과 경탄은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있었기에 인기는 끌지 않을까 싶지만. 뒤러나 다 빈치의 정밀 소묘가 다다른 경지를 보면 정말 감탄이 나오지 않는가. 그리고 생각보다, '똑같이 잘 그리는 것'은 미술가의 중요한 능력 중 하나다. 고음으로 못올라가는 것과 안올라가는 것의 차이가 있듯이, 묘사 능력도 있으며서 안하는 것과 없어서 못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똑같이 그리는 것'은 단순 테크닉이 아니라 두뇌와 손의 협업이 잘된다는 증거이며 미술가의 창의력과 무관하지 않다.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거다. 

딴 소리 같지만 미술가들이 명사수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사격 역시 두뇌와 손의 협업 능력을 보여주는 분야다. (필자가 아는 모 작가는 어두운 전시장에서 삼각대도 없이 전혀 흔들리지 않은 사진을 찍는 재주가 있는데, 왈, 군대에서 사격왕이었다는 거다. 또 한 작가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찾곤 했던 실탄사격장에서 사격 종결자였다고...)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대로 그리기는 재미가 없다. 그렇다면 "거장의 옛 그림에 대한 창의적 재해석"이란 미션은 어떨까? 남이 작곡한 노래를 자기 것으로 발표하면 표절이지만 레전드 음악가들에게 바치는 노래를 잘 만들면 창의적 재해석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보여주지 않았는가? 창의력은 생각보다 과거와 대화를 잘한다. 이 주제를 놓고 미술가들의 '가상' 콘테스트를 지어낼 필요도 없는게, 이미 많은 미술가들이 이런 작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럼 몇몇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관건은, 과거의 작품들을 얼마나 똑같이 재현했는가가 아니라 옛 작품의 맥락을 이어받으면서도 얼마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라는 글  제목이 이제야 나온다. 고야의 이 유명한 에칭 작품은 몇 세기에 걸쳐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797년작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로스 카프리초스(Los Caprichos)>라는 고야의 판화 시리즈 중의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계몽주의에 의해 억압된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려는 낭만주의적 세계관의 표현으로, 또는 스페인을 침공한 나폴레옹 군대의 학살행위를 비판한 정치적 의미를 담은 작품으로 다양하게 해석된 바 있다. 역사적 무게가 가볍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 강렬한 비주얼이 선뜻 이 작품을 차용해서 작업하길 망설이게 만든다. 1988년 미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Bill Viola)가 이 어려운 과제에 도전했다. 



제목부터 <이성의 잠(Sleep of Reasn)>인 비올라의 작품에서 관객이 먼저 만나는 것은 빈 방처럼 꾸며진 전시장이다. 꽃병과 스탠드가 놓인 갈색 나무 테이블 위에 작은 흑백 모니터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잠자는 중년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소음이 들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단순하다. 이게 다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조명이 꺼지면서 전시장이 암흑으로 변한다. 소음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테이블을 둘러싼 삼면 벽에 수수께끼같은 이미지들이 나타난다. 불타는 건물, 울부짖는 개, 밀려드는 파도, 커다랗게 날개짓하는 올빼미의 영상 등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조명이 다시 켜진다. 고야의 작품이 보여준 정지된 악몽의 이미지들이 여기서는 점멸하는 시간적 차이와 공간적 경험, 사운드의 효과 속에서 입체적으로 펼처진다. 스케일이 켜졌지만 요란한 화려함보다는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효과가 돋보인다. 거장의 작품에 도전할 만한 솜씨다.


http://www.sfmoma.org/media/features/viola/BV03.html
(비디오 클립을 감상할 수 있는 사이트)



다음으로 나이지리아 출신 영국 작가 잉카 쇼니바레(Yinka Shoibare)의 2008년 작품을 보자. 이 작가는 입체 작업을 주로 하는데 이번엔 사진이다. 고야의 원작을 거의 똑같이 재현한 눈썰미와 솜씨가 놀랍긴 하지만 오히려 너무 똑같아서 재미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원작의 주제를 이어 받으면서 자기 식으로 변형한 부분은 눈여겨 봐야한다. 고야의 원작과의 차이는 중앙에 앉아서 자는 사람의 화려한 복장과 흑인과 백인 한 쌍으로 구성한 세팅 방식이다. 한 쌍을 이루는 두 작품의 제목은 각각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아프리카)>와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유럽)>이다.

쇼니바레는 아프리카 출신 미술가로서 서구 제국주의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비틀고 비판하는 작품을 주로 해왔다. 하지만 단지 일방향적인 비판만은 아니다. 피식민지인이 식민지 서구 문화를 모방해온 방식 역시 그의 비틀기 대상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위의 작품처럼 종종 옛 서구 거장들의 작품을 패러디하는데,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에 전통 아프리카 문양을 넣어서 비슷하면서도 생경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가 사용하는, Dutch Wax라고 불리는 이 직물 자체가 서구 제국주의와 아프리카 문화의 혼성이 낳은 산물이다)

서구문화의 도상들에 강렬한 색채와 문양이 들어간 아프리카 문화를 충돌시키는 쇼니바레의 작품은 생생한 꿈처럼 기묘한 현실성과 환상성을 함께 지니면서 문화란 것 자체의 근본적인 '뿌리없음'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쇼니바레의 작품 역시 만만치 않아 보인다. 고야의 원작이 갖는 정치적 뉘앙스를 다른 방식으로 잘 살려내었기 때문이다.


(번외로 게스트 작품 한 점을 더 소개한다. 로리 립튼(Laurie Lipton)의 드로잉 작품이다.) 

 


다음으로는 이른바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의 작가로 불리는 19세기 영국 작가 존 에버릿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어>(1852)에 도전한 선수를 보자. 미국 작가 그레고리 크루드슨(Gregory Crewdson)이 다음 도전자이다.


우선 원작을 살펴보자. 밀레이의 <오필리어>는 화사한 색채와 정교한 묘사, 아름답고 낭만적인 분위기로 일반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그림이다. 라파엘 전파는 이름 그대로 '라파엘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내세운 일군의 젊은 영국 작가들의 움직임이었다. 이들은 중세 초기의 밝은 색채와 섬세한 세부묘사를 이상으로 삼은 이른바 복고풍 작품을 그리고자 했는데 묘한 것은 결과물이 중세풍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19세기 사실주의와 중세지향이 믹스된 신상품이 되었고 그 독특한 분위기가 20세기에 와서 새삼 주목받게 되었다.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도전작 역시 사진이라는 매체를 이용했다. 
<무제(석양의 오필리아)(Untitled (Ophelia from Twilight)>(2001)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구도는 원작과 거의 같지만 내용과 분위기는 상당히 다르다. 아름다운 여인의 낭만적인 죽음이 꽃과 이파리들이 우거진 연못의 환상
적인 풍경과 어울렸던 원작과 달리, 크루드슨의 사진 작품은 헐리웃에서 만든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자세히
보면 이상할 것이 없는, 동시대 서구 중산층 가정의 거실이다. 그러나 거실엔 물이 가득 차 있고 속옷만 입은 젊은 여자의 시체가 떠 있어서 마치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이 집을 휩쓸고 간 듯한 그로테스크함이 느껴진다.



어떤 면에서 크루드슨의 이 작품이 밀레이의 작품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크루드슨은 밀레이나 라파엘 전파 자체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헐리웃 영화, 드라마 등 미국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도상들을 빌려와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러나 기괴하고 생경한 장면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 하나가 꼼꼼하게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묘한 느낌이 드는 세부묘사만큼은 밀레이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어쨌거나 여인의 죽음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가지고 다른 문화 코드 속에서 다르게 변주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다음 미션은 '미스터 빈' 영화에 나와서 유명해진 19세기 미국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McNeill Whistler)의 <회색과 검정의 배열 : 화가의 어머니의 초상>(1871)에 대한 재해석이다. 화가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그린 작품으로, 미국 최초의 어머니날 기념 우표에 실리기도 했다. 그만큼 이 그림 속의 어머니는 미국의 '국민 어머니' 급으로 대접받아왔다.  


하지만 이 작품의 제목은 '어머니의 초상'이기 이전에 '회색과 검정의 배열'이다.  회색-검정-흰색으로 이어지는 무채색의 색채와 단순한 모양이 이 작품의 간결함과 소박함을 구성하는 정체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어떤 작품을 성격을 결정짓는 것은 모델이기 이전에 구성과 색채 그 자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성지연 작가의 사진 작품 <뜨개질 하는 여인>(2006)은 구도와 모델을 바꾸었지만 작품의 핵심 성격을 따온 경우이다. 뜨개질하다 말고 어딘가 다른 곳을 쳐다보는 젊은 여자의 모습은 휘슬러의 어머니와는 다른 인물이고 여자의 치마에 수놓인 꽃무늬가 작은 변화를 주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작과 똑같은 태도를 갖고 있다. 그것은 불필요한 치장은 모두 없애고 미술작품의 본질을 이루는 것들만 남겨놓겠다는 작가의 담담하면서도 강한 태도이다. 깊이가 없는 듯한 추상적 공간이 지극히 사실적인 소재를 묘하게 초현실적인 느낌으로 바꾸는 것도 비슷하다.  


그 다음으로는 도전작 역시 원작 못지 않은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경우를 하나 보자.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Le Bar aux Folies-Bergere)>(1981-2)을 재해석한 캐나다 작가 제프 월(Jeff Wall)의 <여성을 위한 사진(Picture for Woman)>(1979)이다. 

      



19세기말의 파리. 공연과 술, 사교의 장소였던 캬바레 겸 카페 '폴리 베르제르'의 실내를 소재로 그린 마네의 그림에서 중앙의 여자는 이 술집의 여급이다. 유니폼을 입고 스탠드 뒤에 서 있는 이 여급 앞뒤로는 샹들리에와 조명등, 공연을 보면서 담소를 나누는 세련된 옷의 사람들, 술과 과일, 유리잔이 뒤섞이는 화려하면서도 시끌벅적한 술집 실내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여급의 모습과 그 뒤의 실내 광경은 모두 거울에 비친 광경이다. 여급 오른쪽에 그녀의 등과 어떤 신사의 모습이 비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원근법의 각도상 이런 식으로 여자의 등이 보일 수는 없으며 더욱이 신사의 실재 모습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네가 포착한 것은 실상과 허상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을 정도로 술과 분위기에 취한 파리 밤문화의 한 단면이며 시대의 풍속도이다. 여급의 지치고 공허한 표정에서 그녀는 이 장면에서 소외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마네가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 그점은 아니었다.  


제프 월은 마네의 이 그림만이 아니라 들라크루아나 세잔느 같은 옛 거장들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차용해서 작업을 많이 한 작가로 유명하다. <여성을 위한 사진>은 마네가 잠시 뉘앙스만 풍기고 넘어 갔던 젠더 정치학(gender politics)을 작품의 주된 테마로 삼았다. 다시 말해, 사진찍히는 수동적 대상으로서의 여성과 사진찍는 능동적 주체로서의 남성이라는 권력구도를 거울을 이용한 교묘한 구도를 통해 역전시켰다. 마네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지친 표정의 여급을 그린 장소에 월은 거울 속에 비친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능동적인 여성 모델을 배치했다. 카메라와 연결된 셔터 줄을 잡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남성 작가는 오히려 왜소하고 수동적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런 구도가 만들어진 것은 현대에 와서 남성 작가의 위치가 카메라로 대표되는 기계에 의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월의 작품은 이런 내용만이 아니라 마네의 시대와 현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사진이라는 매체, 광고판 형식으로 작품을 전시하는 방식)의 관계, 독창성과 모방성의 관계를 재검토하는 일종의 기호학적 유희이다. 외형적으로는 원작과 크게 비슷하지 않고 핵심 주제로 다르지만, 원작이 갖고 있는 작은 부분을 확대시켜 자기 작업에 적용시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 작가 안정주의 도전을 살펴보자. 지금까지의 도전작들이 대체로 사진이라는 매체를 사용한 것들이 많았던 데 비해, 이번에는 영상이다. 안정주 작가가 도전 대상으로 삼은 원작 역시 특이하다. 미국의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의 <4' 43''>(1952)이 그것인데, 이 작품은 '미술'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케이지의 이 작품은 4분 33초 동안 연주자가 아무 것도 안하고 악기 앞에 앉아있는 것으로 구성된다. 피아니스트 데이빗 튜더(David Tudor)에 의해 이 곡이 초연되었을 때 청중들은 수근수근대었으며 일부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케이지에 따르면 청중들의 이런 반응도 곡의 일부이다.이 곡은 '소음과 침묵조차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케이지의 주장을 실현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도전하는 안정주의 작품 <4' 33''>(2006)은 4분 33초 짜리 싱글채널 영상이다. 작품은 단순하다. 둥근 시계가 하나 보이며, 분침과 초침이 4분 33초 동안 움직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이다. 케이지 작품의 아우라에 도전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고?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케이지의 원작 역시 극도로 단순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다. 안정주의 작품은 시간의 경험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질문을 순하지만 위트있게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시계바늘의 움직임이 약간 점프하는 지점이 있다. 영상의 시간 자체는 4분 33초이지만 그 시간 속에서 시계바늘은 불연속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상을 보는 사람은 그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다. 그냥 시간이 가는구나, 하고 느낄 뿐이다. 시간을 보는 것은 시간을 느끼는 것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이 간격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각일까 믿음일까? 




http://dl.dropbox.com/u/2538340/home/html/video_433.html
(비디오 클립을 볼 수 있는 곳. 작가 홈페이지 http://www.anjungju.com/의 일부)


이상과 같이 도전자들의 작품을 살펴봤다. 누가 우승자이고 누가 탈락자일까가?
글머리에서 말했듯이, 사실 무한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가치는 예술이나 문화와 맞지 않다. 그래서, 순위 따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