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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청계천

이한구, 청계천, 2003

메리야스 차림의 사내가 아랫도리가 시원한 아이의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는다. 숱 많은 검은 머리의 사내는 아직 젊고, 아이는 그런 아빠의 품이 넉넉하여 공중에 뜬 채로도 평온하다. 동네 소박한 식당 앞, 막걸리라도 한 잔 걸쳐 흥이 난 아빠가 춤사위를 대신해 아이를 어르는 여름밤. 그런 평범한 밤일 것이라 착각했다. 대책 없이 떠나야 하는 재개발이 두려워 아이 품에 기댄 채 흐느끼는 여린 아빠라는 사실은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다.

이 한 장의 사진도 오독하는 판에 제멋대로의 해석과 이해가 뒤엉킨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파란만장할 것일까. 어쩌면 아들은 아빠의 팔뚝 안에서 든든했고, 아빠는 그런 아들을 의지해 그 뜨거운 여름날들을 지나온 것만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고 난 뒤 사내가 이내 멀쩡하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듯이. 그렇게 착각과 사실, 웃음과 울음이 뒤죽박죽인 채로 생은 꾸역꾸역 앞으로 밀려나가기도 한다.

사진가 이한구가 1980년대 말부터 30년 넘게 습관처럼 드나든 청계천에는 이런 미로 같은 인생들로 가득하다. 이한구 스스로도 아직 지난 30년의 필름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여는 전시에는 ‘서곡’이라는 수식을 붙였다. 그에게 청계천은 밥집 딸, 철물점집 아들과 골목을 누비던 유년의 놀이터였고, 비장하기만 한 사진학과 새내기를 품어준 첫 작업의 터전이었다.

그곳에는 머리 위로 쟁반을 가득 포갠 채 눈발보다 가볍게 눈 내리는 골목을 헤집고 지나가는 아주머니, 검정 팬티 바람으로 곯아떨어진 털보 아저씨, 얼굴에 검댕을 묻힌 채로 해맑게 웃는 청년들이 산다. 복잡해 보이지만 일사불란한 구조로 움직이는 거대한 골목, 전태일을 낳고 전태일이 낳은 그곳에서는 여전히 몸을 움직여 생을 지탱하는 땀 냄새가 진동한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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