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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

토마토와 손가락

Invisible Vision, 2016-17 ⓒ한경은


한동안 토마토를 먹지 못했다.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토마토의 살을 베려던 부엌칼은 미끄러져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토마토보다 붉은 액체가 하얀 도마를 흥건히 적셨다. 신발 끈으로 동여매도 멈추지 않던 피는 기억에도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몸에 새겨진 고통보다 기억력이 강한 것은 드물다. 의식적으로 망각하려고 해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그렇게 토마토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이 시리고 아렸다. 고백하자면 토마토가 무서웠다. K와 M이 서로의 벗은 몸을 촬영한 한경은의 ‘비가시적인 전망(Invisible Vision)’을 바라보면서 토마토와 아린 손가락이 떠올랐다. K와 M은 고통이 새겨진 몸을 서로 바라보며 아렸을까. 또 무서웠을까.

 

K와 M은 버디무비 <델마와 루이스>처럼 여행을 떠났다. 둘은 얘기하며 울고 웃다가 말하기를 멈추고, 옷을 벗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아리고 무서운 기억을 마주하며 더욱 몸을 움직였을 것이다. 땀이 나고 숨이 차고 심장이 요동치는 몸을 통해 시린 기억을 조금이나마 떨쳐낼 수 있었을까. 그렇게 서로의 몸을 통해 자신을 다시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토마토를 똑바로 쳐다보려 노력하면서 뒤늦게 알게 된 건, 그 칼이 결국 내 손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쩔 수 없이 행복한 기억보다 고통을 더 많이 지니고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우리 몸의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몸인 저주, 그 고통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일은 아린 손 맞은편에 칼을 쥔 손마저도 ‘나’라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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