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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선승혜의 그림친구

한국 종이의 ‘참을성과 질김’

중국 명대 문인화의 거두 동기창(1555~1636)이 맑은 가을날을 소재로 ‘강산추제도’를 그렸다. 그가 이 명작을 완성한 것은 한국 종이의 미감 덕분이다. 동기창은 그림에 “거울 표면처럼 부드러운 한국 종이를 구하여 영감을 받아서 이 그림을 그렸다. 만력황제에게 보내는 종이로, 조선 왕실의 인장이 보인다”라는 글을 써넣었다. 그가 조선의 외교사절단이 중국 황실에 선물한 한국 종이를 구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 종이는 ‘고려지’라는 국제 브랜드로 인기가 높았다.

‘강산추제도’에는 기운생동을 얻기 위해 “만권의 책을 읽고, 천리를 여행한다”라는 동기창의 깨달음이 담겨져 있다. 동기창이 추구한 문인의 기운은 무엇일까. 어떤 점에서 한국 종이의 미감과 통할까.



한국 종이의 미감은 참을성이다. 한국 종이는 닥나무를 소재로 외발뜨기라는 기술로 상하좌우로 흔들어 만들기 때문에 섬유질이 사방으로 섞인다. 그 결과 한국 종이는 섬유질이 촘촘하게 섞여서, 필선이 목탄과 같이 칼칼하게 그려진다. 필선을 그어 내려갈 때 생각할 시간을 주고, 마음을 조절할 수 있게 한다. 먹의 번짐을 조절하여 순간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이 지나치게 흘러가지 않도록 인내심을 길러준다. 한국 종이의 미감은 질김이다. 한국 종이는 꼼꼼히 방망이질을 해 섬유질의 틈을 줄인다. 사방좌우로 섬유질이 촘촘해지면서 쉽게 찢기지 않고 질기다. 한국 종이는 구겨지면 다림질을 해서 펴도 된다. 오래갈 수 있다는 지속성이다. 글과 그림이 오래 남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종이는 인류문명의 최고 발명품이다. 종이 덕분에 사람들은 훨씬 더 자유롭고 풍부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종이가 없었을 때는 글을 돌이나 금속에 새겨야 했다. 비석은 돌을 쪼아서 글을 새겨야 하는 수고로움으로 기념비적 기록이 주를 이루었다. 금속 도구에는 이름과 날짜와 같은 기본 기록만 남길 수 있었다. 죽간에 글을 쓰기도 했지만, 경전과 같은 글들만 보존되었다.

종이가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게 하는 자유를 주었을 때, 오히려 우리는 어떤 가치를 남길 것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한국 종이의 참을성과 질김이라는 가치를 다시금 되새겨보면서.




선승혜 | 아시아인스티튜트 문화연구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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