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칼럼=====/유경희의 아트살롱

줄리어스 시저와 로마 초상조각 7월이다. 줄라이(July)는 줄리어스 시저(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희대의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따왔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저”와 같은 간단명료한 언어 속에 모든 것을 담아낸 정치예술가 줄리어스 시저! 영어단어 시저(Caesar)는 독일에서는 카이저(kaiser), 러시아에서는 차르(czar)라고 하며, 모두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황제 중에서도 실권을 장악한 무소불위의 독재적인 전제군주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결국 절대적인 힘을 가진 황제를 뜻하는 시저라는 단어가 줄리어스 시저에서 비롯됐다는 말이다. 실제로 줄리어스 시저는 황제가 아니었다. 황제나 왕은 아니었으나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한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가,.. 더보기
마그리트의 거대한 나날들 그림은 보는 사람에 따라 수만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한들 무슨 상관있겠는가! 작품은 하나의 생명체이고, 그림은 그것을 그린 화가와는 무관하게 자기만의 운명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 그림으로 철학을 한다고 여겼던 르네 마그리트의 ‘거대한 나날들’ 역시 내게는 그런 작품이었다. 그림 속 여성은 거대한 공포상태에 빠져 있고, 남자를 힘껏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그 남자는 몸의 일부를 점령해버렸다. 마그리트는 이 작품이 한 여인을 강간하려는 장면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 여인을 사로잡은 공포를 일종의 시각적 속임수를 통해 포착하려 했다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화가 가운데서도 마그리트의 그림만큼 비밀스러운 요소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지속적으.. 더보기
내가 제일 잘나가! 루소의 새 발견 앙리 루소는 미술사상 가장 특이한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세관원 출신의 그는 세관원이라는 뜻의 ‘두아니에(Le Douanier)’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렇지만 그의 업무는 거창한 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센강을 타고 올라온 상선들에 통행료를 징수하는 단순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이처럼 세관원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그리던 루소는 40세경 작업실을 마련하고 공식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49세가 되어서야 전업화가의 길을 걷기 위해 22년간 몸담았던 세관을 떠나게 된다. 이렇듯 정식으로 미술대학을 나온 적도,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도 없었던 일요화가회 출신의 루소는 자신을 아주 위대한 화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후배였던 피카소와 자신만이 당대 최고의 화가라고 말했을 만큼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루소의.. 더보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키냐르 “갈망된 시선은 눈꺼풀을 반쯤 내린다. 나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들을, 그 놀란 듯한 정중함을 좋아했다. 오직 이곳만을 보고 있지 않은 눈. 예전 세계에 중독된 얼굴들. 두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동시대가 아닌 눈. 반쯤 감은 눈. 포식한 사자의 눈. M과 함께 우리는 1997년 여름 반쯤 감은 이 놀라운 눈꺼풀들을 조사하러 갔다. 그것들은 마치 보이는 것을 가리기 주저하는 동시에 드러내지도 않으려고 주저하는 베일, 인간의 두꺼운 피부에 씌워진 매끄럽고 희미한 베일들 같았다.”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의 의 부분이다. 자전적이면서 문헌학적인, 소설 같지 않은 이 소설을 만났던 경험은 전율 그 자체였다. 그리고 지난 여름 나는 L과 함께 키냐르의 길을 따라갔다. 바로 이탈리아의 아레초로 향했던 .. 더보기
월계관에 숨겨진 비밀 아폴론이 월계수로 만든 관을 쓴 이유는 순전히 한 여자 덕분(?)이다. 첫사랑의 여자 다프네! 사실 그리스 신화 최고의 미남 아폴론은 사랑의 아픔이 많은 남신이다. 게다가 첫사랑의 실패는 순전히 올림포스 신궁의 꼬마 악동인 에로스 때문이었다. 신도 사랑에는 속수무책인 거다. 아폴론이 사랑의 신 에로스를 만나 그의 활솜씨를 조롱했다. 장난감 같은 화살로 무얼 하겠느냐며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에로스는 아폴론에게 황금 화살을 쏘아 아름다운 요정 다프네를 사랑하게 만들고, 다프네에게는 미움의 납화살을 쏘았다. 화살에 맞는 순간, 아폴론은 하필이면 남자에겐 도통 관심이 없는 선머슴 같은 다프네에게 반하여 끈질기게 구애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대로 다프네는 아폴론을 미워하고 피해 다녀야 할 운명이 .. 더보기
200년 전의 세월호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인 1816년 7월2일, 프랑스의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전 국민은 분노했다. 자격도 갖추지 않은 채 왕실의 연줄로 선장이 된 사람으로 인해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메두사호는 당시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세네갈로 향하던 길이었다. 자국의 군인들과 이주민 등 400여명을 태운 이 배가 침몰하자 선장과 고급 선원 등 250명은 구명보트를 타고 떠났고, 나머지 하급 선원과 승객 등 149명은 급조된 뗏목을 타고 표류했다. 12일에 걸친 표류 끝에 작은 범선 아르귀스호에 의해 구조되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5명뿐이었다.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는 사회적 화제가 된 이 사건을 그림으로 구상한다. 실제로 그는 난파선의 뗏목 모형을 .. 더보기
아버지와 아버지의 젊은 내가 나이 든 나를 안고 있다. 과거의 내가 어느 날 지금의 나를 찾아와 성모마리아가 그 아들을 품듯이 지그시 안아준다면,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있을까. 나의 모든 지난 행적과 망설임을 알고 있는 나의 과거에는 굳이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이 그냥 흐느끼기만 해도 될 것이다. 어쩌면 가까운 이들에 대한 집착은 이렇게 온전히 나를 이해할 또 다른 분신에 대한 갈증 때문에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와 다르듯이, 그 누구도 내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결핍과 외로움과 집착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젊은 작가 조니 브리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뜬 탈을 쓴 채 아버지를 안고 있다. 사진 속에서 그는 젊었을 때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그 자신이기도 하며, 스스로 아버지가 된 미래의 모습이기.. 더보기
죽은 동물에 대한 예의 데미언 허스트의 박제된 상어 이전에 죽은 짐승을 그린 그림이 있었을까? 본격적으로 죽은 사냥물 그림이 그려진 곳은 1650년대 이후 남부 네덜란드였다. 죽은 사냥감을 그린 그림의 특징은 바로 그 압도적인 크기와 실제처럼 보이는 트롱프뢰이유(눈속임그림)에 있었다. 따라서 이런 그림은 작은 주택에는 걸맞지 않고, 성이나 저택의 중앙홀에 걸려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잠시나마 진짜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사냥은 왕과 귀족, 기사의 품위에 걸맞은 취미활동으로 근본적으로 특권계층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림은? 원래 사냥감 정물화도 사냥처럼 왕족과 귀족을 위한 그림이었지만, 상류 부르주아들이 앞다투어 구매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대개 사냥에 대한 취향을 가지기에는 교양적,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던 부르주아들.. 더보기
삶에 번번이 얻어맞은 얼굴 오랫동안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대가의 유명 작품보다 훨씬 더 마음을 끄는 작품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공부가 주는 축복이다. 통상 로댕의 경우 ‘지옥의 문’ ‘영원한 우상’ ‘키스’ 등을 대표작으로 꼽는다. 그런데 이들보다 점점 더 마음을 사로잡는 뭉클한 작품이 있다. 바로 ‘코깨진 사내’다. 젊은 시절 로댕이 생활고로 버젓한 모델을 구할 수 없을 때, 이웃집에 사는 ‘비비’라는 별명을 가진 가난한 노인이 모델을 서주었다. 그러나 난방 시설이 없는 아틀리에는 너무 추워서 노인의 머리를 빚은 점토가 얼어 갈라졌으며, 두개골은 깨졌다. 간신히 얼굴만(뒤통수가 없다)을 겨우 지탱할 수 있었고, 코가 깨진 이런 얼굴의 형태가 되고 말았다. 1864년 로댕은 이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낙선하고 말았다. 지.. 더보기
세잔의 아빠생각 인상파 화가들은 대부분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은 대개 연인을 숨긴다든지, 결혼하지 않고 동거한다든지, 아이를 낳고 나서 여자가 있음을 알린다든지, 아버지의 죽음 이후 혼인신고를 한다든지 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 즉 아버지의 말이 법이었던 시절에 아버지를 거역하고 제멋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예술가들은 섬세하고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인 데다 그들이 선택한 여자들은 대개 모델이나 재봉사, 점원 같은 신분이 낮은 여자들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이를테면 마네는 집안의 피아노 가정교사와, 밀레는 농사꾼의 딸과, 모네와 르누아르는 모델과 사귀고 동거한 사람들이다. 세잔은 직공 출신의 모델과 아이를 낳았지만, 오랫동안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숨겼다. 그들이 동거한.. 더보기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맹세 기원전 7세기경 로마에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형제가 있었다. 호라티우스 가문의 형제들! 그들에게 조국에 봉사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패권을 다투던 도시국가 로마와 알바는 전면전을 하는 대신, 세 사람씩 용사를 뽑아 결투를 하게 하고, 그 결과로 승자와 패자를 가리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 그림은 로마대표로 선발된 호라티우스 가문의 삼형제가 조국을 위해 소중한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감동적인(?)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버지는 칼을 건네주고 있고, 삼형제는 그 칼을 향해 무쇠처럼 강인한 팔을 뻗치고 있다. 투지에 불타는 눈과 꽉 다문 입술, 힘줄이 불거진 팔다리는 그들의 각오가 얼마나 투철한지를 잘 보여준다. 오른편에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여인들이 비탄에 빠져 있다. 호라티우스가의 딸이 큐라티우가.. 더보기
‘씨 뿌리는 사람’이 그립다! 반 고흐가 아버지보다 사랑했던 화가 밀레. 밀레는 노동의 가치를 평생 그림 속에서 실현했던 최초의 화가였다. 그는 화가로 출세하기 위해 머물렀던 파리에서 어린 아내를 폐병으로 잃고, 빈농 출신의 새 아내와 함께 바르비종에 정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가난한 농부처럼 살면서, 자연과 더불어 척박하지만 소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목가적인 서정성이 우러나오는 ‘만종’과 ‘이삭줍기’ 못지않은 걸작으로 알려져 있는 ‘씨 뿌리는 사람’은 밀레가 바르비종에서 처음 그린 유화 중 하나다. 이 그림은 어둠이 오기 전인 해질 녘, 가파르게 경사진 산비탈을 배경으로, 건장해 보이지만 아주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농사꾼이 씨를 뿌리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어둡게 가려진 눈, 마른 듯 굳건한 턱과 벌어진 .. 더보기
광기의 꽃, 튤립포매니아 꽃 중의 꽃은 어떤 꽃일까?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 단연 장미꽃일 것이다. 그러나 장미 이전의 꽃의 제왕은 튤립이었다. 서양의 옛 그림에서 장미보다는 튤립이 대단히 정묘하게 역동적으로 그려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튤립은 보통 네덜란드를 떠올리게 되지만 사실은 수입한 것이다. 원래 천산산맥(파미르고원) 구릉지대가 원산지인 튤립은 페르시아와 터키를 거쳐 유럽에 들어왔고, 네덜란드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튤립은 꽃이 크고 튼튼하게 잘 자라서인지 곧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특히 네덜란드의 할렘과 레이덴이 제2의 고향이 됐다. 황금기 네덜란드에서 비싼 가격으로 매매됐던 튤립은 단색이 아니라 흰색 바탕에 붉은색 무늬 등 두 가지 이상의 색이 섞여 있는 품종이었다. 이 화려한 튤립은 ‘모자이크 바이러스’.. 더보기
수잔 발라동의 올랭피아 근대 여성화가 중에는 모델 출신이 여럿 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비천한 신분 출신의 모델들은 천재화가들 옆에서 진정한 사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네의 ‘올랭피아’ 모델 빅토린 뫼렝,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모델 엘리자베스 시달 등이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독보적으로 화려한 경력을 자랑했던 모델은 수잔 발라동이었다. 발라동은 당대 밑바닥 직업이었던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생업에 뛰어들어 청소부, 직공, 양재사 등 갖가지 궂은일을 경험했다. 비교적(?) 안정된 서커스단의 무희가 되었지만 추락으로 부상을 입어 서커스단에서 쫓겨난다. 그때 16세의 발라동은 늙은 퓌비 드 사반의 모델이 되었고, 이후 르누아르의 모델이 된다. 마침내 로트렉의 모델이 되었을 때, .. 더보기
부활절, 다시 산다는 것 부활절 무렵에 방문한 피렌체에서 발견한 숨은 보석은 산마르코 수도원의 프레스코 벽화였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탁발 수사인 프라 안젤리코(Fra는 ‘형제’, Angelico는 ‘천사’란 뜻)의 작품이다. 1436년에서 1445년까지 이곳에 살았던 그는 42개의 독방, 회랑, 회의실, 1층 복도에 자신의 작품 일부를 남겼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 거장의 작품만큼 드라마틱한 감동을 안겨주지는 않지만, 은근하고 친근한 것이 보면 볼수록 매혹적이다. 안젤리코가 속해 있는 도미니크 수도회는 설교와 청빈한 삶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모두 사용하라는 신의 강령에 따라 일종의 기도의 행위로서 그림을 그렸다. 예수의 부활을 그린 이 그림은 수도사의 소박하고 자그마한 방 벽에 .. 더보기
르누아르, 여체 탐닉은 무죄? 얼마 전 (2012)라는 영화를 보았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남프랑스 코다쥐르에서의 르누아르의 말년을 담담하게 그려낸 영화다. 이야기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부탁으로 모델 일을 하러온 ‘데데’라는 배우 지망생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말년의 르누아르에게 예술혼을 다시 불태우게 만든 마지막 모델이자 매혹적인 뮤즈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훗날 거장의 아들 중 드물게 성공한 프랑스의 유명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르누아르는 전쟁 중에도 꽃과 여체를 주로 그렸다. 아들 장은 아버지에게 도덕이 무너지고 인간성이 황폐해가는 이런 시기에 속물적인 그림을 그린다고 비난한다. 르누아르는 전쟁에서 두 아들의 팔과 다리를 잃은 것으로 자기의 역할은 다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더보기
괜찮아! 나를 위한 초긍정 존 레넌과 그의 뮤즈였던 개념미술가 오노 요코가 한창 사랑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요코는 존의 광팬으로부터 소포 하나를 받게 된다. 소포 속에는 바늘뭉치로 만들어진 인형이 들어 있었다. 마치 자기 남자를 빼앗아 가버린 여자한테 음해와 복수의 심정으로 보낸 이 물건은 일종의 폭탄 테러 비슷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괜찮아!(Forget it)’를 처음 본 순간 떠오른 이 에피소드는 사실상 이 작품이 제작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코는 마치 미래의 사건을 예견이나 한 것처럼 이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작품은 ‘개념미술’이라고 부르는데, 쉽게 말해 아이디어와 생각 자체가 예술이 되는 것을 말한다. 개념미술은 제목(혹은 지시문)이 매우 중요한데, 이 작품에서도 제목과 바늘이.. 더보기
이런 복수 어때요?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지조있는 유대인 과부 유디트가 아시리아 군대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구했다는 구약 외경의 이야기를 표현한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논개’인 유디트가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술에 취하게 한 뒤 목을 베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라는 17세기의 한 여성화가가 그린 이 그림은 화가 자신이 겪었던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다. 그녀는 19세 때 그림을 가르쳐주었던 아버지의 친구이자 당대 해경(海景)에 능통한 화가였던 아고스티노 타시라는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다. 이 사건은 아버지의 고소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녀는 쫓기듯 피렌체의 한 화가와 결혼하게 된다. 이 그림은 피렌체 시절 그린 유디트 연작 중 하나이다. 아르테미시아는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강간한 남자를 그려.. 더보기
쇠라의 비밀스러운 소풍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미술관이 자랑하는 대표작으로 신인상파의 점묘법이 가장 잘 표현된 작품이다. 인상주의의 짧은 붓터치를 더욱 심화시켜 점으로만 그린 그림을 점묘법이라고 부르는데, 이 화파를 신인상파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신진비평가 펠렉스 페네옹이 1886년 인상주의 마지막 전람회에서 쇠라의 이 작품을 보고 붙인 것이다. 쇠라의 그림은 당시 19세기를 주도한 과학적인 색채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사물이 다양한 색채의 대비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그의 점묘법은 보색대비로 점을 찍으면 인간의 눈이 그것을 혼합하여 멀리서 보면 하나의 색채로 보인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쇠라는 이 작품을 통해 점묘법이 갖는 불안정함과 순간성이라는 한계를 보상하.. 더보기
남자들의 화가 구스타프 카유보트, 대패질하는 사람들, 1875년, 오르세미술관 인상파 화가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화가 중 하나가 구스타프 카유보트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화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처음부터 화가가 아니라 미술품 콜렉터였기 때문일 것이다. 법학을 전공한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카유보트는 당시로선 드물게 인상파 회화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인상파 화가들의 경제적 후원자인 동시에 그들 그림의 최초 수집가가 되었다. 카유보트는 인상파 화가들의 카페 게르부아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르누아르의 작품을 구입했고, 이후 피사로, 모네 등의 작품을 사들였다. 이뿐만 아니라 모네에게 작업실을 저렴하게 빌려주기도 했다. 그때 모네의 격려로 취미로 그렸던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게 되었던 것! 그러다가 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