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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방 연상게임 채승우는 신문사 사진기자였다. 우리나라 신문 사진의 성향은 유독 보수적인 편이다. 적은 인원으로 사건 중심 보도에 치우치다 보니 사진기자 특유의 시선을 담아낼 여지가 거의 없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중년이 다 돼 장가를 가는 늦복을 누리더니, 홀연 19년의 사진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아내와 세계여행을 다녀왔다. 평소에도 끼가 많던 그이기에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가지 못한 곳을 다녀온 사람에게 부리는 심술인지 모르겠으나 뻔한 여행 사진이면 왠지 서운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1년 동안 31개국을 돌며 깊이 있게 찍는다는 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호기심에 답하려는 듯 마침내 그가 류가헌에서 ‘여관방 연상게임’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열었다. 여관방은 ‘여행 관광 방랑’의 줄임말이다. 그는 수많은.. 더보기
“지난 상처로 미래를 대비하다” 충효당 길사에 다녀왔다. 충효당 길사란 서애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종가인 충효당에서 종손이 바뀐 것을 조상님께 고하는 제사다. 한 종가에서 종손이 바뀌는 것은 30~40년 만에 한번 있는 종손 교체식과 같은 중요한 행사로, 각 문중의 어른들이 모였다. 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아침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을 탔다. 먼동이 트면서 드러난 한국의 산천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류성룡이 보여준 조선의 생각가치는 무엇일까? 그 핵심에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반성적으로 기술한 이 있다. 그 가치는 지난 상처로 미래를 대비하는 태도다. ‘징비’는 시경의 ‘작은 것을 삼간다는 소비(小毖)’의 첫 구절이다. ‘징비’의 부분을 나름대로 현대어로 쉽게 풀어본다. “지난날의 상처를 살펴, 앞날의 우환을 대비한다. 벌을.. 더보기
현과 백 빛과 시간을 응축하면 상은 단순해지고, 색은 깊어진다. 손성모의 바다 사진에는 선과 색으로만 이뤄진 가장 단순한 세계만이 존재한다. 대형 카메라로 한 시간 가까이 장노출을 주자 바다와 하늘은 각기 짙은 회색과 흰색으로 무화되었다. 미니멀리즘 회화처럼 보이는 사진은 육안으로 지각하지 못했을 뿐 하늘의 밝음과 땅의 어둠이 대자연의 이치임을 깨닫게 한다. 디자이너 하라 겐야의 말을 빌리면, 백(白)은 색채가 아니라 하얗다고 느끼는 감수성으로 존재한다. 그 감수성은 텅 빔, 고요함, 맑음 등의 의미를 포함한다. 모든 찬란한 빛들을 합쳐 놓으면 아무런 빛도 없는 백의 세계가 되기에 그것은 있음과 없음의 양면이기도 하다. Lock wait timeout exceeded; try restarting transacti.. 더보기
백제, 그 웃음의 힘 석수(石獸)야, 너는 백제 무령왕릉의 수호 동물이다. 돌로 만든 동물이라는 의미로 석수라고 부른다. 애칭을 붙여주면, ‘통통 수호 전사’가 어떨까. 1971년 무령왕(462~523)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너도 세상에 소개되었다. 네가 무령왕의 무덤을 지켰으니, 벌써 1500살도 넘었구나. 석수야, 너를 보면 웃음이 난다. 큰 눈이 툭 튀어나오고, 입을 헤벌린 모습은 보는 이를 웃게 한다. 수호 동물은 악귀를 쫓으려고 무섭게 생겼다는데, 너는 반대로 웃긴다. 맞다. 너의 수호전략은 두려움보다 웃음이구나. 그래, 웃음은 적까지 친구로 만들어 버린다. 석수야, 네가 무령왕과 왕비를 지켰구나. 부드러운 능선 속에 감추어진 무덤은 다행히 일제강점기의 도굴을 피했다. 천만다행이다. 네가 무덤을 잘 지켜서 그런 듯하.. 더보기
은마 아파트 은마 아파트는 단순한 아파트가 아니다. 1970년대 말 강남 개발의 주역이자 상가 건물까지를 거느린 대규모 아파트의 원조 격이기도 하다. 팰리스와 타운 등을 붙인 고층 아파트에 밀려 구식으로 취급받을 때조차도 사교육 열풍에 힘입어 대치동 명당 자리의 위용을 굳건히 지켜냈다. 심지어 재개발이 확실시되면서 아파트 불패 신화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우리가 겪어온 경제개발과 주거, 교육 환경의 변천사가 이 은마 아파트라는 이름 하나에 응축되어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 벨기에 사진가 세바스티앵 쿠벨리에가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은마 아파트를 꼽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몇 년 전 미국 교포인 여자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왔다가 처음 은마 아파트를 발견했다. 아무런 연고.. 더보기
“책을 태우는 자는 인간까지 불태우게 된다” 히틀러의 동역자였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오래전 이 칼럼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요즘 역사교과서 문제와 다시 오버랩되었다. 건축을 통해 히틀러를 신격화하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그는 종전 후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그의 지위에 비하면 비교적 낮은 형량인 20년을 선고받는다. 재판과정 중에 스스로 죄를 뉘우쳤으며 히틀러와 나치의 잔학성을 밝히는 데 기여한 점을 감안한 것이다. 본래 그는 대단히 유능한 건축가의 자질을 가졌었다. 그의 스승인 테세노프는 20세기 초 독일 현대건축의 선봉에 있던 건축가이자 학자였으며 슈페어는 그의 후계자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연설에 감동받아 스스로 나치당원이 된 그는 나치의 뇌라고 불렸던 괴벨스의 눈에 띄어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만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치를 .. 더보기
한·중·일, 도원의 꿈 한·중·일 정상회의가 곧 열린다고 한다. 외교가 국가이익의 각축장이라면, 문화는 화합의 열쇠다. 과연 한·중·일이 같은 이상을 품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도원(桃源)’을 보게 하라. ‘도원’은 평범한 마을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이다. 그 마을에 한·중·일 정상들의 꿈도 있기를 바란다. 20세기까지 한·중·일은 한자문화권에서 같은 고전을 읽고 생각하는 사고공동체였다. 다시 한·중·일이 공유해온 고전에서 공통의 화두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도원’은 동아시아에서 이상적인 사회의 고전적 상징이다. 중국 동진시대에 지방관료였던 도연명(365~427)이 쓴 ‘도화원기’라는 짧은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한 어부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곳에 이른다. 배에서 내려 동굴을 통과하니, 남녀노소가 평화롭.. 더보기
미장센 광장에는 무수한 말들이 떠돈다. 절실함으로 가득 찬 이들이 찾는 이 열린 공간에서는 설령 혼자서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외침이지 독백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광장 자체는 말이 없다. 극우 기독교 단체의 구국 기도회와 해고 노동자의 복직 투쟁은 같은 장소에서 돌림노래처럼 퍼져나간다. 백만명을 끌어모은 나치의 정치쇼도 북한의 화려한 매스게임도 월드컵을 뜨겁게 물들였던 붉은악마의 응원도 모두 광장에서 일어났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라면 한번쯤 찾아오기 마련인 집회장에서 노기훈은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아니라 장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뜨겁지만 멀리 퍼지지 못하는, 혹은 서로 다른 말들이 부딪치며 아수라장이 되는 그곳이 그에게는 마치 연극 무대 같았다. 광장은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며 신고된 일정에 .. 더보기
슬픈 전설의 역사 천경자 화백(1924~2015)은 ‘슬픈 전설’과 화려한 작품으로 살아간 20세기 한국화의 전설이다. 그의 부고 역시 전설처럼 세상에 알려졌다. 마지막까지 ‘슬픈 전설’을 놓지 않은 삶이다. 천경자의 전설은 20세기 한국에서 예술가로, 여성으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한국의 역사다. 정치사가 한국 근현대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예술과 삶으로 방증한다. 천경자의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는 50대에 22살을 기억해낸 자화상이다. 그녀가 22살이던 1945년에서 70년이 지난 올해 ‘슬픈 전설’은 역사가 되었다. 천경자의 슬픈 전설은 의 뱀과 장미를 떠올리게 한다. 욕망의 뱀. 머리에 뱀 4마리가 오글거린다. 뱀은 어린왕자에게 “사람들이 있어도 외로운 것은 마찬가지야”라.. 더보기
쇼룸 아날로그 시절의 앨범 사진은 기술적으로만 보면 거의가 B컷이다. 초점은 흔들리고 신체의 일부는 구도 밖으로 잘려나가기 일쑤다. 그럼에도 찍는 사람이나 찍히는 사람이나 꽤 진지했다. 똑딱이 수준의 카메라여도 필름을 사고 사진으로 뽑아내는 데는 값을 내야 했기에 촬영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종의 의식 같았다. 그만큼 카메라를 쥔 사람의 주문이란 절대적이었다. 의욕이 클수록 모두가 얼어붙은 자세로 나오는 정반대의 결과가 허다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같아진 셀피 시대에는 상황이 다르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불편함 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누르면 그뿐이다. 엉뚱한 표정, 흔들리는 동작이 담긴 B컷을 일부러 즐긴다. 네덜란드 사진가 윌렘 포펠리에는 이런 표정들을 수집한.. 더보기
[선승혜의 그림 친구]‘부드러움의 힘’ 한국문화에서 ‘곱은옥’은 부드러움의 상징 원형이다. ‘곱은옥(曲玉)’은 누에고치가 살짝 구부러진 듯한 모습으로 옥을 깎은 꾸미개다. ‘곱은옥’은 길을 상상하게 한다. 곱은옥은 아시아대륙 가운데 한국, 만주, 일본에서 발견되고 있다. 곱은옥은 한국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를 풍미했다. 중국의 홍산문화에 ‘C’자형 옥기가 있지만, 곱은옥과 모양도 크기도 다르다. 손에 쥐면 쏙 들어오는 크기는 이동하는 사람들의 상징적 표시물로 어울린다. 긴 이동의 여정에서 곱은옥을 가진 자가 우리의 지도자라는 상징 같다. 곱은옥으로 연결되었던 사람들의 마음에서 아시아의 고대 미감을 상상해본다. 곱은옥의 모양은 부드러움이다. 비정형 윤곽선은 각지지 않고 흐르듯 부드럽다. 표면은 부드러운 촉감을 위해 정성껏 갈려 있다. 손에 .. 더보기
구름 그림자 영혼 구름과 그림자와 영혼은 각각 이름이다. 짧고도 깊은 의미를 품은 인디언의 이름인가 싶은데, 모두 반려동물을 부르던 이름이다. 금혜원은 촬영을 하면서 알게 된 이 이름들을 아예 작업의 제목으로 삼았다. 듣고 보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몽실한 애완견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기는 하다. 우리나라 인구의 4분의 1이 반려동물을 키우는 시대, 반려동물을 둘러싼 문화 현상은 이제 비켜갈 수 없는 질문이다. 키우던 개의 죽음을 아버지를 떠나보낸 상실감과 동일시하던 친구의 말이 작가로 하여금 반려동물의 장례 문화를 추적하게 만들었다. 의식으로서의 장례를 치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람과 같은 지위에 있다는 뜻일 것이다. 금혜원은 한국은 물론이고 반려동물의 장례 문화가 오래되었다는 일본과 미국까지 찾았다. 반려동물과의 이별.. 더보기
“붉은 먼지와 황금빛” 문화는 빛으로 이어진다. 빛은 한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시대의 빛이다. 빛은 먼지투성이의 세상마저 붉게 단장시켜, 빛으로 물든 속세를 ‘붉은 먼지(홍진·紅塵)’라고 부르게 한다. 빛은 볕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희로애락으로 뒤엉킨 응어리를 녹여내 영원에 닿게 한다. 빛은 마음속에 곱디고운 비단결을 보는 순간을 선사한다. 빛의 아름다움은 붉은 먼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성스럽다. 각 시대의 빛은 세속의 홍진과 어우러져 제 빛깔의 문화로 이어지고 있다. ‘금귀고리’, 신라 6세기, 경주 합장분 출토, 국보 90호 10월에는 경주로 가자. 신라로 가자.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은 빛을 찾는 순례다. 신라의 황금빛은 권력의 군림이 아닌 자연과 사람, 성과 속의 연결빛이다.. 더보기
붉은 실 일본에는 이런 옛이야기가 있다. 천생연분은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서로의 손가락을 묶고 있다는. 그러나 운명의 신도 실수는 하는 법이라서 그토록 단단해 보이던 실 또한 살다 보면 끊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후지 요시카쓰의 부모님도 그렇게 해서 각자의 인생을 살기로 했다. 이럴 때 문제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묶인 붉은 실이다. 이 실은 연인 사이보다 단단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혼란스럽던 후지 요시카쓰는 이 붉은 실을 작업 대상으로 삼아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작업은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으로 시작해 자신과 동생의 등장이 잦아지는 두툼한 가족 앨범을 한 축으로 삼는다. 여기에 독립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홀로서기를 촬영해 덧보탠다. 이 과정에서 서먹했던 아버지와의 느슨한 관계.. 더보기
건축은 부동산이 아니다 지난달 말 베이징 디자인위크라는 행사의 개막식에 기조강연을 요청받아 가게 되었다. 6회를 기록하는 행사지만 그 수준을 몇 해 전에 경험한 적이 있어 올해의 행사도 만만히 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기조강연인데도 다른 일을 핑계로 처음부터 참석하지 않고 내 순서가 닥쳐서야 강연장에 입장하는 오만을 부렸다. 게다가 중국 땅에서 건축설계 작업도 15년째 하고 있으니 중국의 건축과 도시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했다. 솔직히 말하면 낮춰본 게다. 근데 이 모든 게 오산이었으며 이 행사로 끝내 적잖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예컨대 중국의 건축가 100인을 불러모아 펼쳐놓은 전시회는 모두가 대단한 질적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소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왕슈만큼 혹은 그보다 더.. 더보기
당문화는 다시 깨어나는가? 역사는 순간마다 문화기억을 축적하고 되살린다. 최근 중국은 당나라의 문화기억을 부활시키고 있다. 한국인에게 당나라는 정치적으로 신라의 나당연합으로, 인물로는 당에 조기유학을 가서 외국인 과거시험에 합격한 최치원으로 기억되고 있다. 21세기 더 다양하고 복잡한 국제관계의 구조 속에서 우리의 시야에 당문화가 되살아나고 있다. 당의 수도였던 시안(옛 이름 장안)은 무왕이 통치한 주나라의 서주, 전국을 통일한 진나라, 한나라의 전반부인 전한, 당나라까지 1000여년 동안 수도였다. 시안은 20세기 중국이 수도를 정하는 투표에서 베이징과 경합해, 한두 표 차이로 베이징에 수도를 내어주었다고 할 만큼 중요한 도시다. 현재 시안은 신(新)실크로드의 핵심도시로서 시진핑 주석이 주목하는 지역이다. 시안은 당문화를 주제로.. 더보기
모이세스 마리엘라 산카리와 그의 쌍둥이 언니는 일찍 아버지를 잃었다. 우리가 흔히 모세로 알고 있는 작가의 아버지 ‘모이세스’는 어느 날 스스로 생을 마쳤다. 안타깝게도 어른들의 만류로 어린 자매는 아버지의 마지막 주검을 보지 못했다. 유대인의 전통 때문인지 아니면 죽음의 방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별 의식을 생략한 채 상실감을 견뎌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워서 자매는 사춘기를 거쳐 어른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죽음을 내내 의심했다. 아버지는 현실 세계에서는 사라졌지만, 마리엘라의 마음속에서는 이별을 고하지 않았다. 거리를 걷다가도 문득 아버지의 환영과 마주쳤고, 카페 한쪽에서도 아버지를 봤다고 착각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마음속 아버지도 같이 늙어갔다. 결국 작가는 아버지의 사진과 함께 아버지.. 더보기
혼자가 아니다 김홍도가 ‘취한 다음 꽃을 본다(醉後看花)’라는 글을 쓴 그림이다. 무엇에 취해 꽃이 보일까? 송나라의 시인 임포가 서호에서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아 혼자 살았다는 은유를 그리면서, 친구도 그려 넣었다. 조선시대에 작은 집에서 친구 한둘과 이야기를 즐기는 ‘은일’은 지혜의 문화였다. ‘은일’은 고립이 아니다. 은일은 나만의 시공간을 가져서 마음의 평정을 찾는 방법이다. 은일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산은(山隱), 시은(市隱), 조은(朝隱)이다. 은일은 어디서든 가능했다. 아름다운 자연에서, 북적거리는 시장에서, 정치의 격돌에서 틈새 시간을 이용한 마음의 은일이다. 한·중·일의 은일은 강조점이 다르다. 중국은 나라가 큰 만큼 복잡한 권력투쟁 속에서 생존을 위한 정치적 은일이 발달했다. 일본은 .. 더보기
어쩌다 이런 곳까지 창신동은 몹시 가파른 동네다. 수직 비탈에 가까운 이 동네에는 동대문시장에 기생하는 자그마한 봉제 공장이 즐비하다. 옷가지를 싣고 하루에도 수십차례 이 좁은 골목을 질주하는 오토바이를 뚫고, 그야말로 숨이 턱에 찰 만큼의 깔딱 고개를 지나면 젊은 사진가 둘이 운영하는 ‘지금 여기’라는 실한 전시 공간이 나온다. 힘겹게 이곳에 도착한 누군가가 ‘어쩌다 이런 곳까지’라고 말했다는데, 사실 이유야 뻔하다. 개발이 덜된 이 지역은 젊고 가난한 기획자들에게 월세를 가지고 텃세를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자연의 엄숙함을 동경하는 이들은 산 정상에 오르고, 그 무엇도 아쉬울 것 없는 이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 펜트하우스에서 살지만 사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이들 중에서는 가장 낮고 힘겨운 사람들이 가장 높은 곳으로 .. 더보기
한 조각 조각 이 땅의 문화 오세창(1864~1953)은 ‘삼한일편토(三韓一片土)’(1927)로 문화란 이 땅에서 한 조각 한 조각 무명(無名)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록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삼한의 한 조각 흙’이라는 ‘삼한일편토’는 상단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와당 탁본을 오려서 콜라주처럼 붙이고, 하단에 촘촘하게 해설을 쓴 작품이다. 글의 마지막에 삼한의 한 조각의 와당, 그 흙이 우리 땅의 보배라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병상에서 약탕 화로를 곁에 두고, 먹을 갈고 탁본해 겨우 그 형태를 보존하고 그 연유를 기록한다고 썼다. 탁본을 오려서 운율감 있게 배치하고, 어울리는 인장으로 강약을 더해준 조형감각이 세련되다. 오세창은 시대전환기에 한국미학의 정초자로서 적극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인물이다. 조선말 중인의 역관으로, 일제강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