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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의심 충격은 착각 때문이었다. 예수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지는 자가 도마(Thomas)가 아니라 바로 나인 것 같다는 착각 말이다. 마치 3D 영화를 보는 듯한 친밀한 접촉의 느낌이었다. 카라바조는 어떻게 캔버스와 관자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버릴 수 있었을까? ‘의심하는 도마’의 주제는 요한복음 20장 24절에 등장한다. 예수의 예언은 기적처럼 일어났다. 무덤에 묻힌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가 살아생전에 예언한 대로 제자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자기 손으로 예수의 상처를 만져보기 전에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 온몸이 축 늘어진 채 죽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8일이 지난 후 제자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 다시 나타난 예수는 의심 많은 도.. 더보기
삼팔선 사진은 유령을 찍을 수 없다. 우리의 망막에 포착되지 않는 것은 사진기에도 상을 맺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실재하는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이를테면 삼팔선처럼. 미국과 소련이 군사작전상의 업무 분담을 위해 설정한 이 군사분계선은 지도상의 좌표로만 존재한다. 다만 이런 곳에는 으레 어떤 식으로든 의미심장한 표시가 있다. 38도선이라는 표지석이나 탱크 저지선이 늘어서 있기도 하다. 사진가 지영철은 이 삼팔선을 가지고 고민하는 작가다. 엄밀히 말해 그는 삼팔선을 매개로 이념, 역사 등의 거대한 말들이 시각화되는 방식을 고민한다. 부피도 무게도 갖지 못한 선 하나가 탄생시키는 이념의 공간을 탐구한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삼팔선의 복합적인 풍경들은 삼팔선을 기념하거나 이 선이 여전히 현실에서.. 더보기
눈삽과 남근 작년 1월 만난 폭설은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했다. 뉴욕에 사는 친구가 마련한 롱아일랜드의 세컨드하우스를 보러간다는 설렘은 폭설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간단히 무시하게 만들었다. 길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속도로에는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는 차를 마을 입구에 내버려두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수도가 터지는 등 집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문제는 그 이튿날. 평상시에는 한없이 아름다웠을 설경이 재앙처럼 느껴지는 건 그날 밤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만 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맨해튼까지 실어다줄 차는 눈 속에 파묻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우리는 눈삽 두 개로 꼬박 두 시간 눈을 퍼냈고, 겨우겨우 차를 몰았지만 길은 아수라장이었다. 9시간의 사투 끝에 맨해튼에 돌아왔을 땐 어깨와 팔에 심한 통증이 .. 더보기
낯선 도시를 걷다 방병상, 삼성역, 고개숙인 여자, 2001 같은 장소에 머물렀다고 해서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 하루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우리는 숱한 얼굴들과 마주쳤지만 그 누구도 기억해내지 못한다. 오히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하릴없이 휴대폰을 뒤적거린다. 도시라는 공룡 뱃속에서는 혹시라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내가 그의 꽃이 될까봐 불안하다. 우리는 그 자체가 섬일 뿐이다. 방병상의 ‘낯선 도시를 걷다’ 연작은 대도시의 익명성과 장소성을 시각적으로 탐색한 탁월한 작업이다. 그의 사진이 포착한 장소들은 너무 낯익어서 오히려 낯설다. 삼성역 주변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무료한 표정들이다. 놀랍게도 북적거리는 그곳에서 시선들은 어느 하나 만나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절묘하게 서.. 더보기
늙은 유혹녀 사람들은 죽음보다 늙음을 더 비참하게 여기는 것 같다. 젊은 시절 여배우가 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영영 은막을 떠나듯이 늙은 모습을 과시하는 여자는 거의 없다. 더구나 미술사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의무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7세기 바로크 시대 이전까지는 늙은 여자가 그려지는 예가 거의 없었다. 늙음은 병듦과 마찬가지로 천대받고 무시당해도 어쩔 수 없는 시절이었으며, 노인은 측은한 존재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존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시절이었다. 퀸틴 마시스의 ‘그로테스크한 늙은 여인’(1525~1530)은 생전에 아주 추악한 인물이었던 티롤의 공작부인 마가렛 마울타시의 초상으로 추정된다. 한편으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즐겨 그렸던 광인과 기형인 그리고 추녀와 추남 등의 드로잉을 참고해.. 더보기
경계의 땅 심학철, 두만강변의 조선군인, 2010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지 못한 풍경은 슬퍼 보인다. 산인데 오르지 못하고, 강인데 건너지 못하면 그것은 분명 순리를 거스르는 어떤 사연을 갖게 마련이다. 그런 사연들은 대개가 사람 탓인데, 한번 만들어내고 나면 사람도 어찌하지 못한다. 자연을 볼모로 삼은 이념과 국경의 장벽들은 눈에 띄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주변 삶을 옥죈다. 심학철의 ‘경계의 땅’은 이런 연유로 넘나들 수 없게 된 두만강변의 풍경에 관한 작업이다. 지린(吉林)성에서 태어난 조선족 3세인 그 또한 쉽사리 강을 넘을 수 없기에 그는 늘 강 저편의 북한 땅을 바라볼 뿐이다. 강 이쪽 편은 큰물이 지나갔는지 흙이 파여 나갔지만 얼핏 보기에는 나무가 울창한 고즈넉한 강변 풍경이다. 그러나 강가에 앉아 사.. 더보기
어떤 인간혐오주의자의 시선 드가의 ‘기다림’은 오디션을 기다리는 무용수와 그녀의 엄마를 포착한 작품이다. 그런데 오디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디션을 마친 후의 분위기를 표현한 것처럼 느껴진다. 무용수는 오디션에서 실수로 발목을 다쳤는지 혹은 실수한 것이 겸연쩍었는지 발목을 만지작거리고 있고, 엄마는 오디션을 망친 딸을 원망하며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디션 전이거나 후거나 이 장면은 난감하고 처연하다. 엄마와 딸은 동상이몽이다. 같은 의자에 앉아있지만 시선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더구나 고꾸라질 듯 바닥을 향한 딸의 얼굴은 검게 물들었고, 엄마의 얼굴은 무엇인가를 포기한 듯 훨씬 냉랭하고 차분해 보인다. 드가는 어린 무용수들을 수없이 그렸다. 무희들을 그리기 위해 오페라극장의 연간 회원권을 구입.. 더보기
태양들 페넬로프 움브리코, 2006년 1월26일, 플리커의 일몰 사진에서 얻은 54만1795개의 태양 중 일부. 페넬로프 움브리코는 인터넷 시대 우리가 소비하고 있는 이미지들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중견 작가다. 홈쇼핑의 상품 책자, 이베이와 같은 인터넷 경매 사이트 등의 이미지들을 새롭게 재구성해 상품 이미지들이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이미지의 덫에 걸린 채 살아가고 있는지를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작가에게 대량 생산된 이미지들은 가짜의 세상을 믿게 만드는 속임수이거나, 우리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과시욕의 산물이다. 그녀가 플리커라는 사진 공유 사이트에서 캡처해온 태양 사진들은 이런 작가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사이트에 올라온 일몰 사진들을 다운받아 그 사진 속에서.. 더보기
섬뜩하지만 왠지 볼매! 혐오와 공포를 야기시키는 대상은 오히려 그 점 때문에 더욱 매혹의 위력을 갖는다. 여기 시선을 사로잡는, 흉하지만 어쩐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초상화가 있다. ‘토니나’라는 애칭으로 알려진, 얼굴에 온통 털이 난 소녀 안토니에타 곤살부스. 그녀는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시작한 1572년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페트루스 곤살부스는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 섬 출신으로 선천성 다모증으로 얼굴은 물론 손과 팔 등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파리로 건너와 난쟁이와 광대를 좋아했던 앙리 2세의 궁정에서 음악과 미술, 문학, 라틴어를 배우며 자랐다. 그리고 스무 살 무렵 아름다운 네덜란드 여인과 결혼, 네 명의 자녀를 낳았다. 자식들은 모두 아버지의 질병을 물려받았.. 더보기
달빛 없는 밤 “산타클로스, 당신이 오기 전에는 삶이 달빛 없는 밤 같았습니다.” 한 편의 시 같은 이 말은 사진 작품의 제목이다. 이탈리아 사진가 안드레아 알레시오의 작품을 보고 어느 큐레이터가 붙여줬다. 어쩌면 우리는 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산타를 기다리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타는 신보다 더 친근하고 더 쉽게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어김없이 일 년 단위의 기다림을 선물해준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워하기 위해 존재한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어두운 밤을 가로질러 찾아올 산타가 아니라, 오지 않을 그를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을 위해 반짝인다. 따지고보면 달빛조차 없는 듯한 삶이 싫어 우리는 영원히 산타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드레아 알레시오, Before You, San.. 더보기
아주 아름다운 예배 마리아와 갓 태어난 아기,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는 요셉, 그리고 천사들의 합창, 목동들의 경배는 미술사에서 흔한 예수 탄생 장면이다. 동방박사가 오기 전 단계의 상황을 그린 장면이랄까. 요셉과 마리아는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의 법령에 따라 호구 조사에 응하기 위해 나자렛에서 베들레헴으로 떠났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마리아는 진통을 느꼈으나 묵을 곳을 마련하지 못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곳을 묘사하지는 않았으나 아기가 구유에 놓였음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그곳이 마구간임을 암시했다. 플랑드르의 화가 후고 반 데르 구스의 ‘목자들의 경배’는 1475년쯤 메디치은행의 브뤼헤 지점장이었던 이탈리아인 토마소 포르티나리의 의뢰로 그려졌다. 3년 동안 브뤼헤에서 그려져 배로 운반되어 피렌체까지 들어온 이 그림은 14.. 더보기
기념일 무릇 ‘작품’은 어렵다는 편견을 깨고, 이 사진은 모든 것을 한 번에 말해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 속 그 분은 지금 ‘개’가 되어 있다. 배경에 즐비한 버선과 목걸이로 보아 그 분은 여자도 좀 밝힌 듯하다. 크리스마스 무렵의 연말 분위기를 내기 위해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라면, 평소 사는 멋을 좀 아는 분이었을 텐데 완전히 망가졌다. 술이 원수라거나 ‘망년회’가 한 해를 망친다는 진부한 교훈을 위한 좋은 사례 같기도 하다. 사진가 난다의 ‘기념일’ 연작은 이렇듯 각종 기념일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와 은유로 가득하다. 작가는 기념일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면서, 굳이 직설과 독설을 감추지 않는다. 어버이날의 엄마는 제단에 바쳐진 살찐 ‘돼지’처럼 보이며, 생일을 맞이한 아이는 ‘괴물’처럼.. 더보기
삼미신과 삼위일체 서구의 미술관에 가면 세 여자가 서로의 어깨를 만지며 서 있는 조각상이 있다. 조각뿐만 아니라,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같은 유명한 회화작품 속에도 이런 포즈의 여자들이 등장한다. 이런 전형적인 여성 누드를 ‘카리테스’(Charites)라고 한다. 카리테스는 그리스어 카리스(Charis)의 복수형으로, 그리스 신화에서 미와 우아함의 여신을 일컫는다. 로마 신화에서는 ‘그라티에’(Gratiae)라고 부르며, 미술사에서는 삼미신이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는 에서 이들의 이름을 에우프로쉬네(Eu-phrosyne·기쁨), 탈리아(Thalia·꽃의 만발), 아글라이아(Aglaia·빛남)라고 밝히고, 제우스와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의 딸 에우리노메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더보기
안보관광 임태훈, 안보관광, 2013 안보를 관광하는 것이란 도대체 뭘까. 안보관광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다. 안보와 가장 관련이 있는 비무장지대 지역이나 임진각 등을 둘러보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 혹은 외국인들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둘러보는 것은 아니니 관광이나 여행이라는 말 외에 다른 대안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파주를 중심으로 경기도와 강원도의 인근 지자체들은 이 안보관광에 꽤 열을 올리는 눈치다. 전쟁의 불안을 가장 뜨겁게 안고 있는 군부대 밀집지역이라는 편견을 깬 역발상이라고나 할까. 분단국가의 특수성을 강조한 관광 활성화로 휴전선 인근의 도시들은 오히려 더 활기를 띠는 것 같기도 하다. 임태훈의 ‘안보관광’ 연작들은 안보와 관광이라는 이질적.. 더보기
거미로 태어난 엄마 마흔에 작업을 시작해서 일흔에 명성을 얻고, 팔십에는 스튜디오에서 작업만 하겠다고 외부 출입을 삼가며 하루 서너점의 작품을 완성했던 여자. 그리고 ‘새터데이 아티스트 토크’를 만들어 전 세계의 작가들을 자기 작업실로 끌어들였던 예술가. 내 삶의 큰 스승이기도 했던 루이즈 부르주아! 부르주아는 1911년 파리에서 태피스트리 보수공장(숍)을 운영하던 가정에서 태어났다. 권위적이고 호색가였던 아버지와 조용하고 인내심이 강한 어머니 아래서 세 남매 중 둘째딸로 성장했다. 특별히 둘째딸을 사랑했던 아버지가 들인 영어 가정교사는 10년 이상 아버지의 정부로 살았다. 어머니는 둘 사이를 알고도 묵인했지만, 똑똑했던 부르주아에게 아버지와 정부를 감시하는 일을 맡겼다. 그때부터 부르주아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증오라는 .. 더보기
클라이맥스의 재구성 임안나, 클라이맥스의 재구성, #02, 2011 현대 문명의 특성을 속도의 질주로 보고 있는 속도사상가 폴 비릴리오에게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더 멀리 더 빨리 보고자 하는 지각의 병참학과 맞닿아 있다. 적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해 선제공격을 하는 것만이 가장 효율적인 승리인 것처럼, 우리는 인공위성과 감시카메라와 각종 첨단 장비를 동원해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현실 사회를 통제하고 싶어 한다. 이처럼 시각적 점령을 욕망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것들이 스펙터클해진다. 영화는 전쟁처럼, 전쟁은 영화처럼 시각적 강렬함을 흉내 내고, 결국 그 둘은 현실이 되어 우리 삶을 지배한다. 임안나의 ‘클라이맥스의 재구성’은 이 스펙터클 사회에 대한 시각적 은유다. 영화에서만 보던 무기들의 실제 몸값과 놀라운 파괴력을 알았을 .. 더보기
게이들의 수호신, 성 세바스찬 남성 누드의 전형인 아폴론을 제치고 르네상스에 새롭게 등장한 누드가 있다. 바로 성 세바스찬! 그는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의 근위장교다. 세바스찬은 당시 공인되지 않은 기독교 신자였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기독교도들을 격려한 탓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군중이 보는 앞에서 나무기둥에 묶인 채 화살을 맞는 형벌을 받았던 것이다. 화살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세바스찬은 황제를 찾아가 그리스도교를 전하고자 했고, 결국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는다. 7세기에 흑사병이 로마를 휩쓸었을 때, 로마인들은 마치 궁수가 활을 쏘듯이 신이 이 질병을 내려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화살에 맞아도 죽지 않았던 역사 속 인물인 세바스찬을 기억해냈다. 그들은 세바스찬을 흑사병에서 백성을 .. 더보기
아무렇지 않은 날 정주하, 불안, 불-안, 2005 바닷가에서 사내가 투망을 하고 있다. 밀물 때라 운이 좋으면 잡어라도 몇 마리를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군데군데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여름의 끝 혹은 여름의 시작을 앞에 둔 바닷가 마을은 꽤 평화로워 보인다. 단정하고 안정감 있는 사진의 구도는 이 나른한 풍경이 영원할 것 같은 신뢰감마저 풍긴다. 다만 오른쪽으로 눈에 들어오는 원자력 발전소의 육중한 존재감이 조금 거슬릴 뿐이다. 사진 속 일상은 이 생뚱맞은 콘크리트의 돔에 아무런 이질감도 느끼지 않는 눈치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설 때마다 그토록 무수한 반대 여론에 부딪혔건만, 막상 사진으로 보니 아무 일도 없어 보인다. 콘크리트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 ‘평범한’.. 더보기
우울의 창조력 11월 말은 가장 멜랑콜리하다. 이 멜랑콜리한 느낌이 적어도 내겐 슬픈 행복이다. 심연의 상상력을 끌어올리는 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멜랑콜리의 감정을 인문학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을 창의적인 것으로 변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멜랑콜리는 ‘검은 담즙(melaina chole/black bile)’이라는 뜻으로 우울로 해석된다. 15세기 말, 피렌체의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중세의 체액우주론(humoral cosmology)과 더불어 점성학에 관심을 가졌다. 다시 말해 점성술적인 견해와 신화적인 비유들을 결합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멜랑콜리의 행성을 토성(saturn:새턴/사투르누스/크로노스)으로 삼고, 전통적으로 흙, 겨울, 건조, 차가움, 북풍, 검은색, 늙음과 관련지었고, 그 특징을 내향.. 더보기
로버트 프랭크 1950년대 미국은 한없이 풍요로웠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와 함께 경제는 호황이었고, 부의 재분배도 안정적이었다. 덕분에 대다수 미국인들은 조국과 집단에 더 충실한 대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스위스 태생의 유대인 사진가 로버트 프랭크의 눈에 그러한 미국의 모습은 오히려 불온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애초 미국을 동경하는 한편 여전히 뿌리 깊은 유럽의 반유대 정서를 피해 40년대 말 미국으로 이민을 왔던 젊은이였다. 그가 느낀 점진적인 이질감은 1955년부터 3년 동안의 미국 여행을 통해 사진으로 드러났다. 초점은 의도적으로 맞지 않았고, 사람들의 모습은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가거나 과감하게 생략되었다. 형체를 온전하게 보여주면서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좋은 사진이라 여기던 당시의 사진 분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