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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무너진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무너져내린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사랑에 실패해서, 경쟁에 밀려나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져서 무너진다. 믿었던 사람들과 세상이 무심하게 등을 돌리고 비난해서 무너지고,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신념을 배반당해서 부서진다. 그 자신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망가진 상황에 내려앉기도 한다. 오류와 모순을 헤치고 나서려 해봐야 출구를 찾을 수 없고, 지금보다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는 친구들은, 차라리 지금 여기 있는 내 존재의 명분을 설득하기 위해서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들이 하늘이 무너지고 마음도 몸도 부서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나면, 서로의 어깨가 쓸모 있는 버팀목이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도 무너진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삶의 바닥에 도달한 친구들이 보내는.. 더보기
어두울 때 보이는 것 어둠이 필요하다. 찬란한 빛이 쏟아내는 정보를 처리하며 세상과의 만남을 앞장서 주선해 온 두 눈의 수고로운 세월은 잠시 뒤로하자. 너무 밝은 빛은 오히려 눈을 가리는 법. 지금은 차라리 이 부지런하고 영민한 시각이 그간 축적해 온 경험을 내세워 판단하고 타협하고 수용할 여지를 줄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필요하다. 빛에 취한 망막에 기대고 싶은 그 어떤 가능성마저 온전히 차단당한 어둠 앞에 섰을 때, 동공은 더 크게 열릴 것이다. “어둠은 빛의 부재이나, 빛 없이 어둠을 말할 수 없다.” 빛에 제대로 닿고 싶다면 어둠을 파헤칠 일이다. 도달하고 싶은 세상이 있다면, 차라리 그 반대를 살핀다.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일은 종종 당혹스럽지만, 극과 극은 동전의 앞뒤처럼 닿아 있다. 극에서 극으로 가는 .. 더보기
저격수의 거리 색깔 있는 옷은 입지 말 것. 화려한 색은 건물 꼭대기 곳곳에 몸을 숨긴 채 거리로 총구를 겨눈 저격수에게 손쉬운 타깃이다. 일상을 사는 시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를 걷는다. 어느 날은 3777발의 포탄이 시내로 떨어졌다. 건물 아래 골목길에 몸을 숨긴 채 대기하고 있다가 한 사람씩 거리를 가로지르며 목적지로 달려간다. 그렇게 그들,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시민들은 매 순간 죽음을 각오하는, 길 위에서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1395일을 살았다. 이슬람교인 보스니아계, 세르비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계, 가톨릭 신자인 크로아티아계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보스니아가 갈등에 휩싸인 것은 서로가 다른 삶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내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세르비아계는 그들과 다른 비전을 제.. 더보기
화가의 초상 “필립 거스턴은 너무 감동적이에요. 그의 작품을 보면서 계속 작업할 수 있는 에너지를 받았어요.” 좋은 그림을 만났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미술계 지인들이 필립 거스턴(1913~1980)에 대한 무한 애정을 고백했다. 화가로서 그가 보여준 집념, 선택을 보면서 예술가는 누구인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유대인 정체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름 ‘골드스타인’ 대신 ‘거스턴’을 사용하면서, 잭슨 폴록 등과 함께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표화가로 활동하던 그는, 화면의 순수함과 평평함을 추앙하던 당시 주류 미술 담론 안에 온전히 있었다. “순수함에는 이제 염증이 난다. 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당시 화단의 분위기상 추상화라는 대세에서 비켜나와 화면 안으로 형상을 돌려놓은 것.. 더보기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플로어의 미래 관계는 상대적이다. 너는 그가 세상에 다시없을 좋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계기가 있다면, 어제의 우리와 오늘의 우리가 만드는 관계는 달라질 수 있겠다. 다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 옷이 너에게 찰싹 달라붙는 걸 보며, 내가 멀리하는 음식이 너에게는 보약이 되는 걸 보며, 나에게 추억을 소환해주던 물건이 네 손에 들어가서는 주저 없이 쓰레기가 되는 걸 보며 세상은 온통 상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전시장에 빼곡한 비치볼은 내 발목 근처에서 오종종 굴러다녔다. 네댓 살쯤으로 보이는 꼬마가 들어 올리자, 가슴팍으로 한아름 안겨든다. 비치볼이 더 이상, 내 무릎 아래에서 보았던.. 더보기
마스크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의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잘 썩지 않습니다. 세계 최고의 테라코타는 1만년 전 것이 있지요.” 권진규(1922~1973)는 “불장난에서 오는 우연성을 기대할 수 있고, 결정적인 순간에 딴 사람에게 마무리 손질을 맞길 일이 없는” 테라코타를 사랑했다. 미술품 복원가 김겸이 확대경을 끼고 권진규의 테라코타 내부를 들여다보았던 경험을 남긴 칼럼을 보니, 예민하고 섬세한 예술가의 초상이 보인다. 대개의 점토작업이 수제비를 뜨는 정도의 밀가루 덩어리 크기로 점토를 떼어내 매만지는 데 반해 권진규는 작은 콩알만 한 크기의 점토를 붙여가며 형상을 빚고 있었단다. 이 전문가는 작가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살아 움직일 듯한 생명의 긴장감이 “고집스럽게 심어 넣은 작은 생명.. 더보기
분수의 꼭짓점 ‘분수’는 물의 판타지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을 숙명으로 알았던 물이 모처럼 하늘로 솟아오른다. 분수의 힘에 의지해 시원하게 하늘을 가르지만, 중력과 속도의 영향을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정점에 다다르면 이내 땅으로 쏟아져 내린다. 하늘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는 물줄기를 보며 권현빈은 물방울이 가장 높이 치솟아 ‘하늘을 톡톡 치는’ 순간에 시선을 멈췄다. 물방울이 분수의 꼭짓점에 닿는 순간은 너무 짧다. 정점은 한계점의 다른 말이다. 정점에 도달하면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물줄기는 세상을 움직이는 커다란 법칙을 전한다. 간혹 어떤 물방울은 변수를 만나 정해진 동선에서 벗어나거나, 조금 더 높은 하늘을 찍어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물방울도 결국은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분수의 포물선 위로 서로 .. 더보기
미어캣의 스카프 어느 날, 외국 여행에서 돌아온 미어캣의 목에는 붉은 천조각이 펄럭이고 있었다. 마을의 미어캣들은 시선을 빼앗겼다. “이건 스카프라고 해. 아주 먼 곳에서는 가장 똑똑하고 사냥을 잘하는 미어캣들만이 이런 스카프를 두르고 있지.” 그는 자신에게 먹이를 많이 가져오는 미어캣들에게만 이 스카프를 주겠노라 선언했다. 사실 마을의 모든 미어캣이 처음부터 이 붉은 천조각에 매료된 것은 아니다. 스카프 없이도 그들 공동체는 행복했다. 아침에 일어나 적당히 사냥한 식량으로 배를 채우고, 볕을 쬐며 낮잠에 빠져드는 고요한 일상이 당연했다.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살던 미어캣들의 삶은 스카프를 두른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스카프가 용맹함, 특별함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면서부터 다른 속도와 욕망으로 빨려들어갔다. 스카프가 없는.. 더보기
브릭 하우스 모타운 레코드의 간판 그룹 코모도스가 1977년 발표한 ‘브릭 하우스’에서 제목을 가져오긴 했지만, 그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건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벽돌집, 그녀는 힘이 넘쳐요”라는 가사가, 여성은 깨지기 쉽고 연약한 것이 아니라 강하고 견고한 존재라고 말하고 싶었던 작가 시몬 리의 마음과 닿았을 뿐이다. 5m 높이에 이르는 조각상 ‘브릭 하우스’는 6월 초, 도시재생의 이상적인 사례로 꼽히는 뉴욕 맨해튼 하이라인파크 위에서 대중에게 첫선을 보였다. 허드슨 강변의 초대형 재개발 프로젝트 허드슨야드와 맞물려 주목도가 점점 높아져 가던 하이라인파크는 공공미술 커미션 프로그램 ‘좌대’를 계획하면서 이 장소에 산책코스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현대미술을 통해 대중에게 다양한 영감을 불어.. 더보기
사랑은 메시지, 메시지는 죽음 7분간, 우리 눈앞에는 미국에 살고 있는 흑인들의 삶이 흐른다. 작가 아서 자파 혹은 어떤 개인들이 기록하거나 매스컴이 포착한 영상 안에는 마틴 루서 킹, 마이클 조던, 마이클 잭슨처럼 명성 높은 흑인, 인권을 보장받고자 거리로 나선 흑인, 영웅이 된 흑인, 체포당하는 흑인, 공격당하는 흑인, 춤추고 노래하는 흑인, 결혼하는 흑인, 대통령이 된 흑인이 있다. 그들의 일상은 행복과 분노의 감정을 넘나들고 핍박과 혐오를 거부하는 투쟁의 역사를 기억하고, 춤과 음악이 충만한 아름다운 순간들을 아우른다. “음악은 우리 흑인이 완전히 자신을 실현시킨 공간입니다.” 흑인 예술가 아서 자파는 흑인 뮤지션 카니예 웨스트가 복음성가에 영감을 받아 만든 힙합 트랙 ‘울트라이트 빔’의 속도 위로 이 순간들의 클립을 올려놓는.. 더보기
데이터의 오류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러 왔어. 선명함의 세계에서 뒤편으로 떠밀리고 사라진 주인공들의 논픽션이지.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선명한 시각을, 확실한 생각을, 그리고 정확한 정보를 알고자 하지.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을, 그물망을 만들었어. 그리고 제2의 눈을 만들어 모든 것을 바라보도록 하지. 다음 발을 어디에 내디뎌야 할지 가늠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러나 이는 여기 주인공들에겐 아무 소용없는 것이야. 왜냐하면 그들은 보여지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이지. 그들은 우리의 그물망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야. 우리의 데이터베이스 속에 살지 않기 때문이야.” 이 카메라는 사람의 얼굴을 따라간다고 했다. 내 얼굴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카메라가 왼쪽, 오른쪽, 위아래, 심지어 앞뒤로 움직이.. 더보기
VR 퍼포머 “뚜껑이 열렸어!” 나는 노란 스커트에 하얀 스니커즈를 신은 흑인 여성이었고, 다른 누구는 또 다른 누가 되어 어둑한 동굴에 모여 있던 그 순간, 동굴이 서서히 머리 위로 들어 올려졌다. 우리는 5m의 거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광활한 대지 위에 있다. “거인들과 하이파이브 하고 싶은데 눈에 초점이 없는 것 같아.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어.” 거인들의 움직임을 좇느라 분주한 우리의 눈은 어디인지 특정할 수 없는, 사막 같은, 대지 같은, 아니면 다른 행성일지도 모를 공간을 두리번거린다. “코로 숨을 쉬니까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광활한 대지인데도 밖으로 나갈 수 없군.” 거인들은 순식간에 우리를 사막에서 산으로, 도시공원으로, 마티스, 베이컨, 이브 클랭의 작품이 걸려 있는 실내로 이동시킨다. 난쟁이가.. 더보기
목격자 “일단 살아남을 일이다.” 라디오에서 한 출연자가 말했다. 억울하더라도 살아야 한다고, 억울할수록 살아남아야 한다고 했다. 시대가 잠시 눈감을지라도, 결국 누군가는 목격하고, 증언한다. 자신의 회화세계를 ‘탐욕스럽다’고 표현하는 헨리 테일러는 시대의 증인으로서 캔버스 앞에 선다. “회화는 심미적인 작업이 아닙니다. 이 이상하고 적대적인 세계와 우리 사이의 매개자가 되도록 고안된 마법 같은 형식입니다. 우리의 공포와 욕망에 형식을 부여해서 권력을 장악하는 방법입니다.” 피카소가 깨달았다는 이 회화의 의미는 헨리 테일러에게 이어진다. 그는 궁핍한 사람부터 성공한 사람까지, 친한 주변 사람들부터 전혀 모르는 사람들까지 화면에 끌어들인다. 그가 모은 얼굴들은 그들이 겪었을 사건마저 불러낸다. 그는 개인의 초상이.. 더보기
당신이 외롭게 죽고 난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든 그저 숨이 끊겼든, 당신이 외롭게 죽고 난 후, 그 죽음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전기료, 수도료가 연체되고, 끊기고, 기다리다 못한 업체가 당신의 방문을 두드리면, 그때서야 당신의 죽음은 문밖으로 흘러나올 것이다. 비밀스러웠던 시간만큼 넘쳐나는 구더기가 당신 곁에서 토실토실 자라고 있을 것이다. 체격이 좋은 당신이라면, 몸에서 흘러나온 기름 ‘쩐내’로 방을 채울 것이다. 겨울이라면,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톡 쏠 것이다. 미술관의 도슨트가 미술을 쉽게 설명해주는 것처럼, 세상 속 난해한 이야기를 조금은 다가가기 쉽게 보여주고 싶은 다큐멘터리 작가팀 ‘더 도슨트’는 그 고독한 죽음의 현장을 정리하는 ‘특수청소부’의 작업현장을 영상에 담았다. .. 더보기
시뮬레이션 구글의 카메라가 포착한 스트리트뷰를 자신의 작업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고, 인터넷 속의 가상 커뮤니티를 관찰하고, 비디오 게임에 집중하는 사용자의 행동을 분석하면서, 웹이라는 ‘깊고 어두운’ 온라인 세계와 그 안의 하위문화를 탐구해온 작가 존 라프만. 럭셔리와 스트리트 패션의 감성을 혼합하여 패션에 대한 고정 관념을 뒤집으면서 영향력을 획득한 베트멍을 만들고, 유서 깊은 발렌시아가에 ‘파괴적이고 반문화적인 관점’을 주입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한 패션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 이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아트바젤 행사장에서 만났다. 상위문화와 하위문화를 구별하는 계층 구조를 수긍할 수 없었던 81년생 동갑내기 두 사람은, 발렌시아가의 2019SS의 패션쇼 무대 디자인과, 캠페인 영상작업을 함께하기로 했다. 존.. 더보기
주름 아들 부부도 처음부터 아버지 에밀리오를 요양소에 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침대에 앉아 수프를 먹다 말고, “솔직히 말씀드리죠. 이 정도 수입이면 대출 승인이 힘들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한때 은행원이었던 아버지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에밀리오를 돌보느라 예매해 둔 공연을 놓치는 생활에 진절머리가 난 아들은 당신 아버지는 우리들이 필요하다는 아내의 말을 뒤로한 채, 에밀리오의 아파트를 팔아 수영장 사진이 5성급 호텔처럼 근사한 요양원으로 모셨다. “오래된 아파트보다 낫지 않아요?” 아버지 때문에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었던 아들은 자신의 일상을 돌려받을 수 있는 ‘효도’를 했다. ‘현실’에서 거리를 두는 선택을 한 그는 기억을 지워가는 아버지를 지척에서 지켜보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 더보기
두번째 사랑의 여름 구치의 더블G 로고가 촘촘히 박힌 구치컬렉션으로 치장한 디제이 비너스엑스는 우창의 카메라 앞에서 말한다. “다양성이란 말, 난 별로예요. 계급, 인종…… 다양성이 있지도 않은 단일성의 반대말처럼 쓰이잖아요.” 1988년, 애시드 하우스 뮤직, 레이브 파티가 퍼져나가면서 젊은 클러버들은 ‘해방’, ‘협력’, ‘기성 체제의 거부’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들은 익숙했던 세계와 쿨하게 결별하고, ‘전에 없던 세계’를 행복하게 만날 수 있었던 1988년 무렵의 시절을 ‘두번째 사랑의 여름’이라고 불렀다. 그 여름이 지난 후, 춤추는 방식, 장소, 관계 그 모든 것이 바뀌었고 확실해 보였던 것들도 사라졌다. ‘기성’의 땅 위에 살던 이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해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변화의 시간이 흘렀다. 이.. 더보기
그곳에 아무도 없다 맥박보다 느리게 뚜벅뚜벅 걷는 검은 자의 걸음은 숲을 지나 철문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울렁이는 소리에 둘러싸여 건물을 맴돈다. 이 오래된 곳에는 먼지가 화석처럼 붙어 있고, 부스러지는 벽 사이로는 풀이 자란다. 하루에 1만5000t의 하수를 처리하는 장소가 되기 위해 2만9041㎡의 땅 위에 1997년 등장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22년째 버려진 이곳은 ‘성남시 구미동 하수종말처리장’이라는 이름의 폐허다. 용인시 수지의 하수를 처리해주기로 한 이곳의 용도가 성남시 구미동의 지역 공동체는 불쾌했다. 남의 동네 하수를 처리하는데 악취마저 심했다. 시험가동을 마친 뒤 ‘혐오시설’은 문을 닫았다. 10년 후, 하수종말처리장이 되지 못한 이곳은 특수목적고등학교가 되고자 했다. 사람들은 반대했고, 다시 .. 더보기
‘1과 4, 다시’ 이윤정 무대 위에 선 네 사람은 움직인다. 서거나, 걷거나, 돌거나, 달린다. 안고, 눕고, 구르고, 기댄다. 그들의 동작은 서로의 움직임에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무심하게 영향을 미친다. 하나가 셋에게, 둘이 둘에게, 셋이 하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서로의 동작을 모방하거나 외면하면서 힘의 구도를 드러낸다. 움직임이 지나고 난 자리의 공기는 여전히 흔들리고, 그 파장은 객석에 앉아 있는 몸들에게로 가닿는다. 몸 안에서 살고 있는 한, 그 사이로 얽혀드는 관계와 몸 밖의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어렵다. 이윤정은 몸의 안팎을 흐르는 힘의 구조 안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면서 걸어가는 인생을 선택했다. 그의 몸은 균형을 찾는 찰나의 순간이 전하는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다. 안무가 이윤정을 비롯한.. 더보기
마음의 건축 “조각을 만들 때, 나는 지적으로 통제하고 싶지 않다.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지성을 발전시켜나가고 싶다.” 작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이제 그의 작품은 자신을 벗어난 존재다. 데이비드 알트메즈는 거대한 아크릴 박스 안에 그가 펼쳐놓은 풍경을 마주한 관객들이 그의 작업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가 숲에 들어섰을 때, 자연이 탄생하고 성장하고 소멸해가는 과학적인 원리를 굳이 이해하지 않더라도 경외감이나 어떤 느낌을 포착할 수 있는 것처럼, 그는 관객이 그의 작품 앞에서 긴장을 풀고, 복잡한 세상을 그저 대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인간의 몸이 하나의 우주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 알트메즈에게 인체는 그 어떤 발명품보다 경이롭고,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