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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폭력과 거짓의 기념비 아델 압데세메드가 홍콩 탕컨템포러리 아트 개인전에 펼쳐놓은 장면은 핏빛이다. 전시장 가운데 놓인 조각을 둘러싼 붉은 캔버스는 피를 연상시키고,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자극적이다. 아직 제대로 말라붙지 않은 붉은 덩어리가 끈끈하게 흘러내려 바닥까지 떨어진다. 알제리 출신인 아델 압데세메드는 내전으로 폭력이 확산되던 1994년 모국을 떠났다. 알제리 정부는 민간인을 상대로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다른 계산을 머리에 담고 전쟁에 가담한 외부자들로 인해 내전은 점점 ‘더러운 전쟁’이 되었다. 극단주의자들의 한계 없는 폭력과 공동체의 울타리 안으로 숨어든 인간의 야만성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던 그는 매우 극단적인 방식으로 난폭한 이미지를 내세워,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있는 사람들을 긴장시키는 작가가.. 더보기
아말감 미국 북동부 메인주 핍스버그를 흐르는 뉴 메도스 강 입구에는 미국 원주민들이 1000년 전부터 모여 살았던 가난한 어촌 마을 말라가 섬이 있다. 1794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벤자민 달링이 말라가 섬 인근의 ‘홀스 섬’을 구입하면서 이 지역으로 이주하는 흑인이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혼혈인구가 증가했다. 그들은 1860년대부터 말라가 섬에 본격적으로 정착하면서 혼혈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흑인 미국인’인 티어스터 게이츠는 2017년 메인주 콜비 칼리지에 머물면서 이 공동체가 정부와 언론에 의해 왜곡되고 해체된 역사를 접했다. 1900년대 초,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미국으로 모여 들자, 미국의 기득권자인 앵글로색슨은 그들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우생학의 잣대를 .. 더보기
화이트앨범을 삽니다 작가 러더퍼드 창의 ‘상점’에는 ‘화이트앨범을 삽니다’라는 네온사인 간판이 걸려 있다. 한쪽 벽에는 흰 레코드판을 마치 빈 캔버스처럼 진열해 두었고, 테이블 위에는 시리얼 번호 순서대로 정리해 넣은 박스를 올렸다. 관객은 앨범을 넘겨보고, 공간 한쪽에 마련된 턴테이블에서 음악도 들을 수 있지만, ‘화이트앨범’이라고 불리는 이 레코드판을 구매할 수는 없다. 혹시 그들이 이와 동일한 음반을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영국의 팝 아티스트 리처드 해밀턴이 커버를 디자인한 이 앨범은 1968년 발매된 비틀스의 10번째 레코드다. 아무 그림 없이 하얀 표면에 비틀스의 이름만 새겨 넣은 이 더블 앨범은 300만장이 제작되어 커버 오른쪽 하단에 고유의 시리얼 번호를 달고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 00.. 더보기
불면증의 무게 류샤오동은 런던 트라팔가르 광장 위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광장의 풍경을 지켜보는 카메라는 이미지 스트리밍 데이터를 수집하여 컴퓨터로 보내고, 컴퓨터는 그 데이터를 로봇에 전달하고, 로봇은 전달받은 정보로 그림을 그린다. 간혹 인터넷의 버퍼링이 심하거나, 끊어지거나 심지어 전원이 꺼지면, 데이터 전송이 멈추고 로봇의 붓질도 멈추지만, 그 결과 캔버스 위에서 발생하는 ‘사고’는 기꺼이 예술의 한 부분이 된다. 광장을 거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고요한 풍경에 동선을 그을 때, 로봇의 붓질은 캔버스에 추상적인 선을 쌓는다. 모순과 갈등이 있는 어딘가, 역동적인 현실이 놓여 있는 바로 그곳에 이젤을 설치한 후, 매우 성실한 태도로 풍경과 사람들의 초상을 기록하던 그가 로봇에 붓을 맡긴 이유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묻는.. 더보기
카를 라거펠트 한 해에 6번의 샤넬 컬렉션 쇼, 5번의 펜디 쇼, 2번의 개인 브랜드 쇼 기획은 기본이고, 패션 사진을 찍고, 전시회를 열고, 단편영화를 제작하고, 브랜드 캠페인을 기획해온, 샤넬보다 더 오래 샤넬을 이끈 카를 라거펠트가 작고했다. 그는 1954년 국제 양모 사무국(IWS)에서 주최한 공모전 코트 부문에서 수상하며 패션계에 발을 들였다. 호주산 양모를 전 세계에 홍보하고 시장을 확장하기 위한 이 프로그램은 재능 있는 신진 디자이너들을 통해 업계의 비전을 확산시키기 위한 유용한 전략이었다. 발망의 어시스턴트를 시작으로 일을 시작한 그는 오트 쿠튀르에서 옷의 정석은 배울 수 있었지만, 지루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당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기성복’ 디자이너의 길을 택한다. 이후 대담한 아이디어를 .. 더보기
미래를 위한 그림 누군가가 지금 이 시대, 이 세상은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마저도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면,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상 사람의 평가로부터 초연하게, 자기 확신과 미래 비전만으로도 뒤틀리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으려면 어떤 능력을 연마해야 할까.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출중한 예술가 지망생들이 진학하던 왕립미술학교에 입학, 우등생으로 졸업한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평가받는 시점을 스스로 유예시키기로 했다. 풍경화·삽화·초상화에 능했던 그는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생명과 우주가 만들어내는 유대감을 비롯한 영적인 세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과학적 근거를 놓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세계를.. 더보기
허니문 건물 입면 대부분을 전광판으로 뒤덮은 뉴욕 타임스스퀘어의 시공간 안에서 현실감을 장착하는 건 어색하다.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지이다 못해 ‘우주의 중심’이고자 한다는 이 ‘세계의 교차로’에 들어서면, 빠른 섬광을 날리며 롤리팝처럼 돌아가는 현란한 광고 영상에 시선을 빼앗겨 생각을 멈추기 일쑤다. 타임스스퀘어 연합이 뉴욕 광고 클럽과 제휴하여 광고용 전광판에 ‘예술’을 담기 시작한 것은 더 다양한 홍보 콘텐츠를 확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능하고도 불가능한 모든 것을 끌어와 배양하고, 활용도 만점의 콘텐츠로 성장시키는 역량을 과시하여, 100년 이상 오락, 문화, 도시 생활의 아이콘으로 군림해 온 타임스스퀘어의 창의성과 에너지를 무한 작동시킨다. 이 모든 작업은 파트너들에게 여기 전광판이.. 더보기
시계 지우는 사람 다른 시간대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국제공항에서 시계는 사람들을 통제한다. 시간대를 넘나드는 동안 신체 시간이 엉켜버린 이들은, 시계에 의지하지 않고는 시간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 국제선 라운지에서 유럽 대륙을 떠날 준비를 하는 여행객이라면, 천장에 매달린 대형 시계 속 노동자의 안내에 따라 현재 시간을 확인한다. 파란 작업복을 입은 그는 3m 높이의 시계 안에서 1분마다 분침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현재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 롤러로 시곗바늘을 그린 뒤, 잠시 시계 안을 서성이거나 구석에 세워둔 붉은색 양동이에 노란 걸레를 헹구면서 시간을 보내던 그는, 다음 1분이 다가올 즈음이면 다시 노란 걸레를 들고 분침을 지운다. 롤러는 다음 ‘분’으로 향한다. 언제 출근과 퇴근을 하는.. 더보기
행복한 삶의 기록에서 삭제된 부분 요나스 메카스(1922~2019)의 편집실에는 1950년 이후 지금까지 작품을 완성하고 남은 필름조각을 담은 통이 잔뜩 있었다. 90번째 생일을 몇 달 앞둔 2012년 어느 날, 그는 이 빛바랜 푸티지 가운데 1960년부터 2000년 사이의 장면들을 추려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기로 한다. 그의 작업이 늘 그렇듯, 필름통에서 건져 올린 가족의 일상, 친구의 모습, 도시며 자연의 소소한 풍경, 고향 리투아니아로의 여행 장면이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질서’에 따라 연결되어 한 편의 서정시처럼 흐른다. 한때는 ‘완성작’에 적합하지 않아 잘려나갔던 장면이지만, 카메라가 스치듯 포착한 그 모든 순간은, 삭제되었던 과거가 무색할 만큼 아름답다. 오래된 필름을 편집하면서 그는 지금은 사라진 것들, 떠나간 사람들을 만났.. 더보기
관용의 배 일리야와 에밀리아 카바코프는 다른 대륙, 서로 다른 문화환경에서 성장하고 다른 정체성을 가진 어린이들을 예술언어로 교육하고 연결하는 작업을 기획했다. ‘관용의 배’라고 명명한 이 프로젝트는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진 다양한 민족의 어린이들과 예술가들이 ‘관용’을 주제로 3~4주 워크숍을 하고, 어린이들의 그림으로 돛을 만들어 배에 달고 출항시키는 과정으로 진행한다. 이 작업의 바탕에는 인류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공감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름을 지켜나갈 수 있는가 하는 카바코프의 질문이 담겨 있다. 더불어 이 작업은 분열된 공동체를 예술의 이름으로, 어린이의 순수함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가능한지 시도해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작가들은 문화권마다 관용을 어떻게 해.. 더보기
뮤지엄 리그 옛날에, 독일 출신 예술가 요제프 보이스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면, 요새, 이탈리아 출신 예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모든 사람이 컬렉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목표를 위해 그는 ‘모두를 위한 예술’이라는 야심찬 아이디어에 뿌리를 둔 소소한 프로젝트들을 진행 중이다. 예산이나 수장고에 대한 고민 없이도 누구나 컬렉터가 될 수 있도록 그는 하루 한 개 포스팅을 한 뒤 다음날 삭제해서 결국 매일 한 점의 ‘작품’만 전시하고, 한 점씩 배포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 중이고, 메이드인카텔랜드의 웹사이트에서 자화상을 활용한 ‘얼간이 죽이기’ 게임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으며, 뉴욕의 구겐하임, 바젤의 바이엘러 파운데이션, 베를린의 함부르크 반호프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함께 ‘모두.. 더보기
알고 있는 세계 너머 새해, 중국의 달 탐사선 ‘창어4호’가 인류 최초로 달의 뒷면에 착륙하고, 미국의 소행성 탐사선 ‘오시리스-렉스’가 소행성 ‘베누’ 상공에 도착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작은 천체의 궤도 진입에 성공할 때, 미국 우주선 뉴호라이즌스호는 태양계의 경계에 있는 카이퍼 벨트의 소행성 2014 MU69, ‘울티마 툴레’에 접근했다. 행성과 위성의 중력을 이용해 연료를 아끼는 우주항해술 ‘중력도움(flyby)’ 비행을 시도하며 눈사람 모양의 울티마 툴레 사진을 찍어 보낸 뉴호라이즌스호는 역사상 태양계의 가장 끝에서 이루어지는 첫 중력도움 비행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태양계 형성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힌트를 담고 있다는 이 소행성은, 알려진 세상의 경계에 있는 땅을 일컫던 ‘울티마 툴레’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더보기
서커스단의 리마 “나의 이름은 리마/ 계단 위를 걷고/ 링을 뛰어넘고/ 죽은 척을 해도/ 알고 싶은 것은/ 이 안에 있지 않아” ‘쇼타임’이 시작되었다. 어두운 철창문이 열리자, 얼룩말 리마는 빛나는 서커스 장내를 달리며 장애물을 뛰어넘는다. 왈츠 박자에 맞춰 관중들이 들썩이고, 피에로가 흥을 돋우는 사이, 리마의 묘기는 서커스장의 울타리를 넘고, 조련사를 뿌리치고, 도로를 질주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너도 알잖아/ 갇혀있는 그곳에선/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는걸” 지난 12월17일, 인간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의 화려함을 만끽하는 사이, 독일 드레스덴에서는 얼룩말 4마리가 크리스마스 서커스에서 탈출해 도심을 달렸다. 엘베 강가를 그림처럼 달리는 그들의 모습이 소셜 미디어에 올라왔다. 얼룩말의 자유는 짧았.. 더보기
더 나은 세상 “열기에 반응하는 잉크를 사용했어요. 신체로부터 나온 열기가 모이면 신체 아래 숨은 이미지가 드러납니다.” 2018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의 현대커미션 작가로 선정된 타니아 브루게라가 터빈홀에 설치한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바닥에 눕거나, 손을 댄다. 그들의 온기가 바닥에 닿으면 비로소 형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나의 몸이 닿은 부분의 형상으로 보일 뿐이다. 바닥 아래 숨겨진 내용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의 온기가 필요하다. 내 몸 하나로는 전체를 드러낼 수 없다. 작가는 사람들의 온기를 모아야만 전체가 보이는 이 작품이 우리가 살아 있는 시간을 은유한다고 설명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동의하지 않아도,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가 서로 알지 못한다고 해도.. 더보기
얼마나 무거운가 바야흐로 기부의 계절이다. 메일함을 열어보니, ‘후원자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로 시작하는 메일이 들어와 있다. 지난해보다 조금만 후원금을 늘려준다면, 더 많은 이들이 무사히 겨울을 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부독려의 문구가 무겁다. 12월 초, 그라피티 작가 뱅크시는 그의 작품 한 점을 난민 구호 단체 ‘사랑을 선택하자’에 기부했다. 난민들이 배에 타고 있는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원격조종이 가능한 일종의 장난감이다. 그가 2015년에 약 한 달간 운영한 ‘음울한 테마파크 디즈멀랜드’에 설치했던 이 작품은, 관객이 동전을 넣으면 비로소 ‘지중해 보트 연못’ 안에서 움직였다. 폐관 직후 디즈멀랜드의 자재들을 난민 수용소로 보냈던 그는, ‘꿈의 보트’라는 푯말이 붙은 이 작품을 난민을 돕기 위한 후원금 마련 행사.. 더보기
뮤트 “이 작품은 실패다.” 차이콥스키는 1888년 5번 교향곡의 초연을 마친 후, 자신의 음악에 대해 스스로 혹평을 던졌다. 그 자신도 느낀 것처럼, 이 곡은 “조악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그는 “지독한 피비린내가 나며,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다”는 평론가들의 비판에 시달렸다. 그러나 대중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는 이 곡을 사랑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대포의 포격이 이어지는 가운데에도 연주를 멈추지 않아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들을 위로한 곡으로 더 유명해졌다. 홍콩 출신으로,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작가 삼손영은 독일 쾰른의 플로라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 전곡 연주를 요청했다. 이때 그가 덧붙인 하나의 조건은 연주는 하되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게 하라는 것.. 더보기
타협하지 않는 자 2003년 어느 날, 함부르크시 관계자가 함부르크 하펜시티의 오래된 코코아 보관 창고 사진을 들고 스위스의 건축가 듀오 헤르조그와 드 뫼롱을 찾았다. 사진 속 벽돌 건물을 들여다보던 그들은 이내 건물 위에 파도처럼 바람처럼 일렁이는 드로잉을 하나 얹었다. 그 드로잉은 14년 후에 함부르크의 랜드마크 엘브필하모니로 탄생한다. 새로운 랜드마크의 등장은 순조롭지 않았다. 2010년으로 약속한 개관은 2017년에야 이루어졌고, 1억8600만유로로 책정했던 건축비는 7억8900만유로까지 늘어났다. 공사가 중단되고, 책임자가 교체되고, 공사기간이 늘어지고, 예산이 증가할 때마다 정치적 공방이 줄을 이었고, 시민사회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콘서트홀은 그저 “상류계층의 퇴폐적 기념비” 아니냐는 비판, 다른 프로젝트.. 더보기
여섯 개의 기도문 세상은 조금씩 살기 좋아지고 있는 걸까. 지금 여기에서 그 믿음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을 ‘조금 앞서’ 기념하면서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애니 알버스(1899~1994)의 개인전을 열었다. 직물을 ‘공예’에서 ‘예술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그는, 바우하우스의 학생이자 선생이었다. 공식적인 교육제도 안에서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여성들의 입학을 허용한 바우하우스는 진보적 교육기관이었다. 공예와 순수예술 간에는 경계가 없고, 성차별도 없다고 강조하며 자유와 혁신을 이야기하던 바우하우스였지만, 여성이 남성의 영역으로 접근하는 것은 교묘한 명분을 들어 완곡하게 막았다. 이곳을 졸업한 후 ‘전문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었던 대다수의 여학생들은 .. 더보기
지금 ‘지금’은 언제인가. ‘당신이 가진 것은 시간뿐’이라고 말했던 작가 샹탈 애커만은 ‘지금’의 이름으로 사막의 풍경을 소환한다. 허공에 V자 형태로 매달린 다섯 개의 스크린에서는 마치 달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처럼, 각각 다른 속도와 시점으로 덜컹거리는 사막이 흘러가는 중이다. 그 안에서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전시장은 간간이 암전에 가까운 어둠에 휩싸였다가, 곧이어 붉은 모래, 바위 절벽이 펼쳐지는 예의 그 사막 풍경을 거칠게 흘려 보낸다. 다섯 개의 스크린 사이로 시선이 겹치고 흔들리는 가운데, 문득 파란 하늘이 화면을 채울 때면, 사막의 바위와 모래는 더 건조하고 거칠게만 보인다. 텅 빈 사막에 시선을 준 사이, 전시장 안에는 두려움 가득한 울부짖음, 엔진 소음, 동물의 괴성이 만드는 .. 더보기
.jpg 영화 는 실종된 딸의 행적을 추적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줄거리만 들어도 몇몇 영화들이 떠오를 만큼 익숙한 장면이 예상된다. 그러나 영화는 신선한 형식과 참신한 화면 구성으로 스토리 라인을 풀어낸다. 영화 내내 전지적 시점으로, 장면을 직접 보여주는 경우가 없다. 모든 장면이 액자 구성처럼 PC 모니터와 모바일 액정, CCTV 등의 또 다른 화면을 통해 펼쳐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진과 동영상은 구글부터 인스타그램, 텀블러, 라이브 방송 등 다양한 인터넷 플랫폼을 활용해 생산되고 재생된다. 가족사진 또한 카메라로 촬영되지 않고 모니터 캠을 통해 캡처된다. 그리고 인화해 가족앨범에 보관하지 않고, 컴퓨터 바탕화면이 되거나 폴더에 저장된다. 보기 힘든 망자의 사진은 검색 제한을 걸거나 온라인 메모리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