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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불법 이민자 신분으로 뉴욕에 체류하고 있었던 대만 출신 작가 테칭 시에는 집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는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살고 있던 맨해튼 아파트에 출퇴근 기록기를 설치한 뒤 매시 정각에 출근카드를 찍고, 기계 옆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잿빛 유니폼 차림이었다.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을 기록하던 이 기계는 예술가의 예술 활동을 냉정하게 관리 감시한 끝에 예술 작품이 되었다. 이 퍼포먼스는 1980년 4월11일을 시작으로 1년간 이어졌다. 365개의 펀치 카드, 365개의 필름 스트립이 쌓였다. 삭발한 채 시작한 이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 그의 머리는 장발이 되었다. 1년간 그는 50분 이상 아파트를 떠날 수 없었다. 50분 이상 잠들 수 없었다. 1년은 8760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133장.. 더보기
형세 인간계는 복잡하다. 쉬운 길을 어렵게 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어찌나 얽혀 있는지, 하나의 에피소드가 엉뚱한 곳에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미국 만화가 루브 골드버그(1883~1970)는 아주 간단한 일도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해결할 수 있는 장치를 다룬 만화로 인기를 끌었다. 생김새도, 작동원리도 한없이 복잡하고 심오해 보이지만, 결국 하는 일은 냅킨을 흔들거나, 우산을 펼치거나, 등을 긁는 정도다. 효율성 제로의 ‘골드버그 장치’를 고안해, 복잡하게 머리 굴리며 살아가는 인간 세상을 풍자한 그는 원자폭탄의 위협을 다룬 카툰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가 고안한 비효율적 기계는 “최소의 결과를 얻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는 인간”의 행동방식을 비판하면서 등장했지만, 그의 의도는 살짝 빗나가 인간.. 더보기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못하겠다 마음이 슬프면 몸짓이 슬퍼지는 걸까, 슬픈 동작이 슬픈 마음을 가져오는 걸까. 카메라 앞에 앉은 바스 얀 아더르는 슬퍼하기 시작했다. 슬픔의 종착역은 눈물인 모양이다. 그는 울기 위해 집중했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는 눈을 감고, 입술을 오물거리고, 볼을 찌푸렸다. 손으로 머리칼을 휘젓고, 눈꺼풀을 문질렀다. 슬픈 제스처로 슬픈 감정을 끌어올리는 사이사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살짝 턱을 들어 올리고 슬그머니 눈을 뜨는 순간 그의 표정에서는 불현듯 슬픔이 사라졌다. 그는 계속 슬퍼했지만, 곧바로 충분히 슬퍼지지는 않았다. 슬픔의 동작이 커지면서, 드디어 그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성인 남성의 눈물을 볼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 소리 없는 흑백 영상 속에서 그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오열 사이사이 한숨.. 더보기
다이얼 히스토리 구름 사이를 가로지르며 비행기는 서서히 하강 중이다. 영상에 맞춰 흐르는 잔잔한 클래식 선율에 취해, 늘 그렇듯 평화로운 비행과 여행의 마무리를 예감한다. 멀리 보이는 활주로에는 안전한 착륙을 도와줄 조명등이 길을 밝힌다. 착륙 중인 듯 비행기 조종석이 조금씩 흔들리고, 뒤편에서 문득 불꽃이 번져 나오더니 조종석이 폭발한다. 비행기는 폭발했다. 미디어가 어떻게 비행기 납치 사건을 묘사해왔는지에 대한 역사를 추적한 ‘다이얼 히-스-토-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벨기에 출신 작가이자 영화감독 요한 그리몬프레즈는 뉴스, 영화, 홈비디오 클립 등에서 발췌한 장면들만을 모아 경쾌한 편집으로 하이재킹 연대기를 완성했다. 작가는 돈 드릴로의 소설 가운데 기술을 맹신하는 현대인들의 현실을 비판한 와 소비자본주의 사회 속.. 더보기
지구는 평화 평화란 무엇인가. 질문은 간단하지만 대답은 간단하지 않은 이 주제를 안고, 2017년 프랑크푸르트의 쉬른미술관은 ‘평화’전을 열어 우리 생활 속에서 평화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평화의 역사는 인류 자체만큼 오래 되었습니다. 전쟁은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되는 데 반해, 평화는 뭔가 허약해 보입니다. 언론에 전쟁과 폭력은 수익성을 보장하는 사건이며, 정치인들에게도 중요한 관심 대상입니다. (…) 전시회 ‘평화’는 평화로운 삶과 평화를 향한 다른 접근법을 제안하고자 합니다”라고 언급한 큐레이터 마티아스 울리히는 평화를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을 비롯해 생태계에 관련된 모든 것들 사이의 상호 작용과 의사소통의 과정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인간을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물.. 더보기
예술가와 갈등 2016년 콜롬비아 대통령 후안 마누엘 산토스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지도자 로드리고 론도뇨와 평화협정에 서명하여, 52년간 22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콜롬비아 내전 종식의 가능성을 열었다. 하지만 국민투표 결과, 협상안은 부결되었다. 그래도, 산토스 대통령은 콜롬비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한 공을 인정받아 376명의 후보 가운데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택되었다. 평화협상이 부결되자, 콜롬비아 국민들은 국가의 평화 협상 추진을 지지하기 위해 거리에 모여들었다. 콜롬비아 출신으로, 명성이 높은 국제적 예술가 도리스 살세도는 3500명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내전의 희생자 2300명의 이름을 재 가루로 흐리게 써넣은 천 조각을 꿰매 볼리바르 광장을 뒤덮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천의 길이는 7000m에 달했다... 더보기
반복 해가 뜨고 지는 일, 눈을 뜨고 감는 일,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일, 전원을 켜고 끄는 일, 일어나고 잠드는 일,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 꽃이 피고 지는 일, 계절이 오고 가는 일, 만나고 헤어지는 일, 달이 차고 기우는 일, 태어나고 죽는 일, 새것이 낡아가는 일. 나는 소소한 일, 거대한 일이 촘촘하게 반복되는 세상에 파묻혀 살고 있다. 전통을 거부하는 일이 전통인 예술계에서, 작곡가 스티브 라이히가 음악의 전통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선택한 것은 지독하게 단순한 반복이었다. 반복되는 악절을 일치시켰다가 어긋나게 만들고 다시 일치시키는 전개가 되풀이되는 그의 음악은 진부하거나, 지루하거나, 기존 체계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법한 정도의 혁신이었다. 벨기에를 떠나 뉴욕 유학길에 올랐던 무용수 드 케이르스마.. 더보기
역사를 기억하는 예술 예술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정한 유형의 힘을 알아차리는 데 유난히 밝은 눈을 가진 작가라고 평가받았던 한스 하케는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참여 작가 제안을 받고, 독일관에 축적되어 있는 히틀러의 욕망에 주목했다. 1909년 베니스의 자르디니 정원에 세 번째 국가관으로 자리 잡은 독일관은 히틀러가 추구하는 나치의 미학 원리, 독일 예술의 새로운 정신을 담기 위해 1938년 재건되었다. 로마제국을 넘어서는 거대한 독일제국의 건설을 꿈꾼 히틀러는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으로 도시계획을 추진했고, 베니스의 독일관도 그 맥락 안에서 리노베이션을 마쳤다. 히틀러의 비전을 그대로 투영한 독일관은 패전 이후, 나치즘 시대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참여 작가들의 과제는 독일관이 품어내는 나치의 .. 더보기
어떤 속박 건설현장처럼 전시장 곳곳에 툭툭 쌓여 있는 시멘트 벽돌담 너머로 화면 곳곳이 떨어져 나간 대형 모니터가 서 있고, 부서져 나온 모니터 조각들은 전시장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깨진 화면 위로 모델이자 배우로 활동 중인 드리 헤밍웨이의 모습이 보인다. 노란 블라우스를 입은 그는 채광이 좋은 사무실에 앉아 옥수수를 먹는 중이다. 관절재활치료기구(CPM)의 도움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 테이블 위 옥수수에 닿는 것은 영 쉽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옥수수를 입에 넣는 데 성공한다. 옥수수를 씹는 촉촉한 소리와 피아노의 영롱한 선율이 하모니를 이루는 가운데, 어색하면서도 우아한 몸짓으로 옥수수를 먹으면서 간간이 관객을 향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헤밍웨이의 모습은 아름다운 옥수수.. 더보기
흘러간다 세상에 멈추어 있는 것은 없다. 지구는 여전히 시속 1600㎞의 속도로 자전하고, 시속 10만㎞의 속도로 공전 중이니, 멈추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가만히 있어도 분주하고 번잡한 이유는 모두 정신없이 돌고 달리는 지구 때문이다. 하루를 돌리고, 계절을 달리는 지구의 속도 위에 흐르지 않는 건 없다. 네쉬린 코드르는 베이루트의 야외 풀장에서 흘러가는 하루의 절반을 영상 속에 붙잡았다. 어둠을 뚫고 화면을 가로지르는 어떤 움직임과 물살을 가르는 소리로 영상은 시작한다. 지구 자전의 속도에 맞춰 붉은 기운이 어둠을 서서히 걷어내면 순식간에 날이 밝는다. 수평의 평평한 프레임 안에 포착한 야외 풀장 너머 지중해가 잔잔하게 펼쳐져 있고 그 위로 푸른 하늘이 시원하다. 작가는 야외 풀장에서 줄기차게 헤엄치고 있다.. 더보기
권력의 남용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82년 제니 홀저가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권력의 남용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는 메시지 작업을 내건 이후, 사람들은 권력 남용의 현장에 이 경구를 소환했다. 급기야 지난해 미국에서는 가장 많이 인용된 문장으로 언급되며, 권력 앞에 침묵하는 이들을 각성시켰다. 지난해 10월, 미술전문잡지 아트포럼에서 일했던 아만다 슈미트는 잡지의 공동 발행인 나이트 랜즈맨의 성희롱을 폭로했다. 신디 셔먼, 로리 앤더슨, 제니 홀저 등의 예술가뿐 아니라 아트딜러 사디 콜, 바버라 글래드스톤, 큐레이터 로라 호프먼, 리사 필립스 등 7000명 이상의 미술계 여성들이 아만다 슈미트의 용기를 지지하며 미술계 내 권력을 이용한 성희롱을 고발, 비판하는 움직임에 동참했다. ‘우리는 놀라지 않았다(We Are Not Sur.. 더보기
6144 ×1024 극장에서 상영 중인 마거릿 혼다의 작품 ‘6144×1024’는 그저 ‘색’이었다. 영화 전체를 한 컷에 담고 싶어서 영화 상영시간 내내 카메라 조리개를 열어놓았던 사진작가 히로시 스기모토가 필름에 포착한 스크린이 하얀 색이었다면, 영상의 의미에 다른 방식으로 다가가고 싶었던 마거릿 혼다의 작품은 색의 스펙트럼이었다. 하나의 색이 다른 색으로, 또 다른 색으로 일정한 속도에 맞춰 변해갔다. 어둠에 몸을 묻고,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와 영상에 몰입할 기대감으로 극장을 찾는 이들이라면 불편할 수도 있는 화면이었다. 서사의 개연성이랄 것도, 미장센이랄 것도 없는 이 영상에서는 1초에 24프레임씩 약 300만장의 컬러 스펙트럼이 36시간22분2초간 흘러갔다. 경험을 지배하는 물질의 세계와 그 과정을 깊이 살펴.. 더보기
우리만 남겨두고 떠나지 말아요 2002년 덴마크의 코펜하겐과 오덴세, 스웨덴의 말뫼, 오스트리아의 린츠와 그라츠 거리에 “외국인 여러분, 우리를 덴마크 사람들끼리만 남겨두고 떠나지 말아요!”라는 메시지의 주황색 포스터가 붙기 시작했다. 코펜하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그룹 슈퍼플렉스가 ‘글로벌 콤플렉스’라는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었다. 2001년 가을, 77년간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해 온 중도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선거에 패배했다. 세금 인상, 유로화 도입 등의 정책이 유권자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라고 했다. 9·11 테러 이후 반이슬람 정서가 전 세계를 강타하던 시기, 집권당의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향한 덴마크 사람들의 불안감도 이들의 선거 패배에 일조했다. 정권을 잡은 보수연립정권은 강경한 이민 정책을 추진했고 자국민 중심주의를 추.. 더보기
슬립시네마호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6일 동안 특별한 호텔을 운영하기로 했다. 4시가 넘으면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겨울,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기간이었다. 로테르담 세계무역센터 한쪽에 ‘슬립시네마호텔’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투숙객을 맞이했다. 전면의 큰 유리창 너머로는 전쟁의 폭격에 초토화된 도시를 과거 그대로 복원하기보다, 개성 있고 실험적인 새로운 건축에 내주어 현대건축의 메카가 된 로테르담의 마천루가 펼쳐졌다. 어둠이 조심스럽게 벽을 대신할 뿐, 전체가 하나로 개방된 객실이라 잠자리가 다 노출되는 환경이었지만, 객실은 일찌감치 매진되었다. 과거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다가 잠 들어도 괜찮다는 말을 몇 차례 반복한 작가는 도시의 스펙터클을 담은 큰 창문 위로 ‘가장 오래된 TV’라는 보름달을 닮은 .. 더보기
화가와 모델 미술관 큐레이터, 동료 작가, 이웃, 가족 등 주변 지인의 초상을 평생 화폭에 담아온 앨리스 닐은 모델과 여러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영혼을 포착하는 화가’라는 수식어는 그냥 얻은 게 아니었다. 모델들은 그 과정이 불편했지만, 화가는 그 시간을 통해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인물의 내밀한 감정을 잡아냈다. 모델을 향한 화가의 통찰력과, 화가를 대면한 모델의 친밀하기도, 불편하기도 한 시선이 캔버스 위에 교차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교감은 형태를 만들었다. 작가의 며느리였던 지니는 종종 앨리스의 모델이 되어 의자에 앉았다. 발랄했던 젊은 날의 하루, 아이를 안고 있는 행복한 순간이 작품으로 남았다. 80대의 노화가 앞에 지니는 다시 앉았다. 제비꽃 색 원피스를 입고 .. 더보기
내생성 디메틸트립타민을 위한 방 그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룬 미르자 특유의 사운드 비트와 이미지가 혼성되어 있는 공간을 지나가야 했다. 그는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 전기를 잡아내 전기가 흐르는 과정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드러내 보이곤 했다. 특정 속도로 깜박이는 불빛, 스크린의 영상, 잡음 같기도 한 소리로 드러나는 전류는, 흩어져 있는 개별적인 존재들이 서로 다양한 모드로 복잡하게, 하지만 그 나름의 조화를 지향하면서 연결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하룬 미르자가 조율한 빛과 소리의 파장 안으로 진입한 몸은 곧 그가 연출한 전류의 관계망과 동기화된다. 그 몸은 하룬 미르자의 세상에 안착하는, 아니면 포섭당하는 기분을 맛보곤 한다. 현란한 공간 너머에는 ‘내생성 디메틸트립타민을 위한 방’이라 명명한 밀실이 있었다. .. 더보기
오늘 새로운 결심을 하고, 마음을 다독이며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좋은 새해가 왔다. 매일 새로운 하루, 매분, 매초가 다시 오지 않을 새로운 시간이지만 ‘일상’이라는 이름 아래 그 모든 새로움은 빛을 잃는다. 해가 바뀌는 정도는 돼야, 나의 습관을 돌아보고 재정비할 마음이 선다. 명색이 새해인데 목표도 좀 세워야 한다. 목표를 향한 집념이 얼마 안 가 흔들리고, 흐려지다가 다음 새해를 다시 기다리는 상태가 곧 온다 해도, 새해니까, 일단 의지를 세워본다. 죽음에 한 발짝 다가서면서 맞이한 새해니까, 올해를 어떻게 살면 좋을지 생각해본다. 1966년 1월4일, 온 카와라는 ‘오늘’을 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굳이 기억할 것이 없는 그저 그런 하루, 또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특별했을 그 하루를 그리는데 그는 .. 더보기
10원의 가치 2015년 미얀마 시장 골목에서 이원호는 한 상인의 좌판대에 시선을 빼앗겼다. 빛바랜 동전이 무심히 쌓여 있었다. 동전 더미를 뒤적이다 익숙한 한국 동전을 발견한 그는 어디서 여기로 굴러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동전들을 끄집어내 쌓으며 가격을 물었다. 500원은 400원이기도 했고, 100원이기도 했으며 10원은 300원이기도 했다. 상인은 여러 개를 묶어 사면 깎아주겠다고도 했다. 2017년 작가는 인도 거리에서 한국 동전을 발견했다. 그곳에서도 그는 환율과 무관하게 거래되는 동전 가격을 흥정했다. 상인과의 흥정 여부에 따라, 거래는 성사되기도, 안되기도 했으며 그는 이익을 보기도, 손해를 보기도 했다. ‘통화’의 역할을 부여받고 탄생한 ‘동전’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상황에서 손해와 이익을 판단하는 것.. 더보기
소멸을 생각하는 일 기억은 어디에 깃드는가. 건축가 조성룡은 존 러스킨의 말을 인용하며 ‘집’이라고 했다. 집 없이도 어디선가 살기야 하겠지만, 집이 없다면 불안한 기억은 그저 사라진다.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거나 지우고 싶은 걸까.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 걸까. 여관이던 시절의 흔적을 폐허처럼 유지하고 있는 예술 공간 ‘보안여관’에서 열린 ‘소록도’ 전시는 ‘기억하는 일’에 대해 질문한다. 지난 5년간 조성룡과 성균건축도시설계원 구성원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들과 함께 소록도를 방문하면서 진행한 작업은 ‘은폐된 섬’에서 살았던 이들의 삶과 기억의 흔적을 담고 있다. 이제는 폐허가 된 마을의 모습을 폐허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보안여관에 펼치니, 세상 모든 사.. 더보기
잘 잤니 이야기는 짧다. 방 안에는 카드며 꽃이며 선물, 빈 술잔 같은 생일파티의 흔적이 있고, 침대에 모로 누워 있던 여성은 알람이 울리자 인상을 찌푸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냉장고로 향한다. 음료를 꺼내 마신 후, 칫솔을 들고 다시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텔레비전을 켜고 양치질을 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세수를 한 뒤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맞추고 경쾌하게 인사한다. “잘 잤니.” 그렇게 1분짜리 영상은 끝난다. 단순하다. 주인공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인사하는 순간까지 여럿으로 분리된 채 시간차를 두고 움직였다는 점을 빼면 말이다. 곤 사토시의 작업에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좀처럼 구별할 수 없다.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알아차리는 일도 어렵다. 환상은 극대화되고 꿈과 현실의 경계도 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