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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껍데기 미술관’ 더 짓겠다는 문체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는 ‘박물관·미술관 진흥 중장기계획(2019~2023)’을 발표했다. 박물관·미술관의 양적 확대를 골자로 하는 내용도 담겼다. 공공성 강화와 전문성 심화, 지속 가능성 확보라는 3대 목표 아래 추진할 16개의 전략 및 핵심 과제 중 일부다. 문제는 ‘모두가 누리는 박물관·미술관’ 전략에 포함된 박물관·미술관 확충 계획이 과연 미래지향적인 것인지 의아하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2018년 기준 우리나라 국공립 및 사립 박물관·미술관 수는 이미 1124개에 달한다. 5년 전에 비하면 약 23%나 많은 수치다. 그러나 국민의 박물관·미술관 이용률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 ‘2018 문화향수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박물관·미술관 이용률은 16.5%이다. 2.. 더보기
미술계, 그 답답하고 속상한 풍경 대한민국의 국공립미술관장은 곧잘 부유하는 자들의 몫이다. 비정주적 삶이 일상임에도 자리에 대한 욕망은 고정적이다. 다만 그 욕망에 비례해 과연 그들이 지역과 미술계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성과는커녕 들려오는 소식이라곤 내리고 타기 바쁜 지하철 내부에 포스터 형식의 이미지 몇 점 걸어놓고 “예술의 즐거움과 치유의 시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하는 궤변 따위다. 많은 이들이 돈과 시간을 들여 미술관에 가는 것은 ‘예술의 효과’ 때문이다.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예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체감하기 위해서이다. 한데, 국립현대미술관장이라는 이는 그저 또 다른 광고의 하나로 소비될 복제물을 열차 내에 늘어놓곤 예술의 즐거움과 치유의 시간을 말한다. 이미 낡고 흔한 방식을 ‘혁신적인 시도’라고 자.. 더보기
‘문외한’ 정치인보다 못한 미술전문가 지난 4월 미술평론가 이선영은 한 매체에 ‘공무원이 책정하는 이 지면의 원고료는?’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해 큰 공감을 얻었다. 모 지자체가 운영하는 창작공간 입주 작가들의 평론을 써서 보냈더니 원고료가 달랑 13만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관료주의를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많은 예술인들이 그 글에 동의를 표했던 이유는 전문성 따위가 들어설 자리 없는 원칙을 신봉한 채 정량적, 기계적, 보수적으로 일하는 관료제의 견고함을 일찌감치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언급된 사례가 글쓴이만의 황당한 경우는 아니었던 것도 반향에 일조했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숱했다. 얼마 전만 해도 그랬다. 하루는 모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로부터 평론을 의뢰받았다. 하.. 더보기
설 자리 좁은 한국작가들 많은 전시공간이 해외 작가 작품들로 채워지면서 국내 작가들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유수의 갤러리와 국공립미술관들은 외국 작가 모시기에 혈안이고, 한국에 진출한 외국 미술유통업체 역시 한국 작가들에 대한 관심은 그리 높지 않다. 실제로 국내 주요 화랑 중 하나인 국제갤러리는 지난 4월 덴마크 출신 듀오 엘름그린&드라그셋의 전시를 개최한 이후 스위스 출신의 현대미술가 우고 론디노네 작품전을 잇고 있다. 콜롬비아 태생의 오스카 무리요까지 포함해 지난해 말부터 현재까지 개최된 서울 전시의 적지 않은 수가 외국작가들이다. PKM 갤러리 또한 최근 1년간 진행된 전시의 절반가량을 외국 작가로 채웠다. 학고재갤러리도 구미작가들에게 자주 전시공간을 내주고 있다. 국내 진출한 외국 화랑들의 양태도 비슷하다. 201.. 더보기
베니스비엔날레 단상 여기, 베니스의 기온은 차다. 반팔을 입고 다니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그러나 베니스비엔날레의 열기는 계절의 스산함을 밀어내기에 충분하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인파만 놓고 보자면 베니스는 벌써 한여름인 셈이다. 58회를 맞은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의 주제는 ‘흥미로운 시대를 살아가기를’이다. 흥미롭다는 형용사로 인해 왠지 긍정적 의미로 읽히지만, 실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녕과 평화가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정한 것인지 되묻는다는 게 핵심이다. 살아가기 버거운 세상을 역설적으로 꼬집는 주제 때문인지 79명의 작가들이 내놓은 작품 역시 환경, 난민, 전쟁, 여성, 인종, 소수자 등 당대 인류가 처한 시대 징후에 집중되어 있다. 하나같이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슈들이다. 문제는 잘 정돈되어 .. 더보기
예술지원에 왜 내 세금을 쓸까? 지난달 4일 발표된 ‘2018 예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예술인들의 약 70%는 예술 활동을 통해 얻는 수입이 월 100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수입이 아예 없다는 예술인도 30%에 달한다. 그나마 미술인들의 수입은 월 수십만원에 불과하다. 통계만 보면 예술가들은 예술로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은 미술인을 포함한 예술인들의 처우개선에 목소리를 높인다. 안전판을 만들어줘야 한다거나 강화된 창작지원 및 예술인복지 제도를 통해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국민 입장에선 정부나 지자체가 어째서 예술과 예술가들을 세금으로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에 만족스러워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관련 기사나 글에는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내가 낸 세금으로.. 더보기
병약한 지성의 보루, 노쇠한 비평가들 권력은 동종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철저한 공생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생명력을 이어간다. 특히 정치권력은 세간의 시선이나 상식 따윈 아랑곳없이 인맥을 투하하고, 비호세력들은 ‘내 편’이라는 선 긋기를 통해 그릇된 절차상의 하자(瑕疵) 앞에서조차 입을 다문다. 세속의 관점에서 ‘내 편’은 타인에겐 한없이 가혹할지언정 ‘내 편’이기에 용서되는 아이러니한 개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는 기준인데, 그건 바로 자기 이익과 맞닿는 득실의 무게이다. 공생의 가늠도 여기서 비롯된다. 예술계, 아니 미술계에도 ‘편(便)’은 존재한다. 미술 없는 미술협회나, 사상적 동지를 주춧돌로 문화권력이 되고픈 패거리들, 학연과 지연 등의 온갖 연을 바탕으로 한 무리 등이 그것이다. 이들 또한 공생.. 더보기
작가들만 모르는 것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참여한다는 건 외형상 한 나라의 시각예술을 대표하는 성격을 띤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척박한 미술생태의 반영이자, 빈약한 인적 자산과 구조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틈’이기도 하다. ‘아트팩트넷(ArtFact.net)’ 등, 유명 미술전문 분석지에 이름을 올린 한국 작가들의 활약은 주목할 이유이긴 해도, 반드시 미술사적 평가까지 긍정적인 건 아니다. 분석의 단초로 활용할 수는 있어도 작가와 작품에 관한 절대적 기준인 양 맹신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비엔날레 대표작가가 되고, 유력 매체가 제공하는 지면 한 귀퉁이에 새긴 이름 석 자는 어떤 가능성을 담보한다. 적어도 새로운 방식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문화적 상태인 ‘동시대성’에 근접해 있다는 건 인정받는다. 동.. 더보기
빈약한 해외 진출 지원정책, 고립무원의 작가들 동시대 미술은 오늘의 의제를 예술을 통해 해석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새로운 모더니티를 생성하는 데 방점을 둔다. 이는 전 지구적 현상으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비평가든 기획자든 그들의 시각은 국지적이지 않다. 글로벌 흐름이 만들어내는 맥락과 상호 관련 속에서 미술을 이해한다. 작가들도 매한가지다. 개별적이면서 타인과 공유되는 경험이기도 한 동시대성을 발판으로 미적·물리적 확장을 끊임없이 도모한다. 특히 시대흐름에 신속하게 반응하는 젊은 작가들은 동시대 미술 특유의 영토 구분 없는 교류에 민감하며 자신만의 미술언어로 지구촌 곳곳의 예술현장에 서기 위해 부단히 경주한다. 하지만 세계로의 접근을 위한 ‘통로’는 대체로 작가들 개별 노력에 의해 마련된다. 낡은 교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술대학은 큰 도움이 .. 더보기
예술계 교수의 민낯 최근 방송된 한 시사프로그램의 ‘제자인가 노예인가, 예술계 교수의 민낯’을 시청하던 중 문득 옛일 하나가 스쳤다. 오래전이라 기억마저 가물가물해질 법하건만, 희한하게도 아직 망각의 영역에 들지 않은 그 사건. 아마 쉽게 치유되지 않을 깊고도 시린 상흔 때문일 것이다. 갓 30대였던 당시 나는 기사 하나를 썼다. 제자들이 함께한 전시에 무임승차한 교수들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2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실명을 죄다 거론한 것이 그만 소송의 발단이 됐다. 피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어느 다다미방 비슷한 곳으로 나를 불러 무릎을 꿇으라고 할 때 순순히 응했으면 말이다. 하나 그러지 않았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무엇보다 잘못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송사는 1년을 넘겼다. 홀로 두 명의 변호사와 상대.. 더보기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자가당착 지난 1일 임명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2015년 한 칼럼을 통해 “관장 공모 형식은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술관에 관장이 꼭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역량 있는 적임자가 응모할 수 없는 구조”라고 썼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공모로 뽑는 현행 제도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한 셈이다. 하지만 그는 불과 3년 만에 자신의 발언을 뒤집었다. 정권이 바뀌자 없애야 한다던 관장 공모에 나선 모순을 드러냈고, 제도 자체를 ‘촌스럽다’고까지 한 소신은 온데간데없이 임명장을 받았다. 윤 관장은 같은 칼럼에서 당시 관장 선임을 차일피일 미루던 문화체육관광부에 대해 인사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했다며 질타하기도 했다. 한데 문체부는 이번에도 인사 잡음을 냈다. 공직자의 최소 기준인 역량평가를 건너뛰려다 이미 .. 더보기
도시 흉물 양산 ‘건축물미술작품제도’ 필요한가 공공장소에 놓인 미술을 공공미술이라 한다. 수준 높은 공공미술은 시대의 번역이자 정체성을 반영하는 기호이면서, 인간 감성을 환기시키는 심리 환경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공공미술을 일컬어 ‘공공재’라고도 부른다. 대가 없이 불특정 다수가 공동으로 마음껏 향유할 수 있고, 사회 구성원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공공미술을 공공재라고 하면서 적지 않은 작품의 제작·설치 비용을 민간이 떠안는다. 정부지원금은 없다. 도리어 거리를 오가는 다중의 선호를 고려해야 하고, 적절한지 여부를 다루는 지자체 심의까지 거쳐야 한다. 내 땅에 내 돈으로 세우는 것임에도 그렇다.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건축물 준공검사도 받기 힘들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해야 한다. 1만㎡ 이상 건축물.. 더보기
예술과 똥 역사를 통틀어 예술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은 없다. 오히려 당대 권력자를 비롯해 부유한 상인들, 그림을 주문했던 역대 숱한 이들의 품 안에서 안위했다.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들 또한 그 대가를 취하며 창작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자본에 종속된 예술가로 해석하는 건 무리이다. 그들 곁에는 구스타브 카유보트나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 페기 구겐하임 같은 후원자들이 포진해 있었으며, 이 안목 높은 예술 우군들은 브뤼야스가 쿠르베에게 그러했듯 ‘예술가는 존경받을 만한 권리를 지녔다’고 봤다. 작가들도 자본의 과잉 간섭, 자본으로 인한 예술의 자율성 침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현명하게 이해했다. 쾌감의 대상이자 우리를 더럽히는 배설물일 수 있다는 점에서 똥과 돈을 등치시킨 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