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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3000원의 식사

삼천원의 식사 연작. 2014. ⓒ 김지연


행운집 할매는 자기가 나온 책 <삼천 원의 식사>(눈빛)를 가져다주러 간 나를 반긴다. 지금은 시장이 모두 새로운 구조로 바뀌었지만, 이전에는 세 평 남짓한 낡은 가게에 탁자 두어 개와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 몇 개가 전부인 허름한 국숫집이었다. 처음 찾아간 날이었다. 중년 남자 둘이 들어와 앉자마자 그곳의 분위기가 객쩍은지 한 남자가 친구를 가리켜 무슨 회사 전무라고 하니까 주인 할머니가 코웃음을 쳤다. “여긴 시인도 오구먼요.” 나는 그 시인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지만 ‘시인’을 주저 없이 우선으로 여기는 주인장의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이 집의 메뉴는 잔치국수, 비빔국수, 팥 칼국수, 동지 죽으로 단출하다. 잔치국수는 맑은 장국에 양념간장 한 술 넣고 애호박 채 몇 가닥 얹은 국물 맛이 시원하고, 애기상추와 직접 담근 고추장을 넣어 손으로 조물조물 무친 비빔국수도 맛깔 난다. 막걸리 한 병을 시켜도 눌린 돼지 머리와 얼갈이김치 안주가 나온다. 국수 씻을 때 곁에 서 있으면 국수 몇 가닥을 집어 올려서 손가락에 감아 입에 넣어준다. “맛나제라. 이것이 젤로 맛나.” 흐흐 웃음이 절로 난다. 잔치국수 시켜놓고 옆에서 주문한 팥 칼국수가 맛있겠다고 하자 한 국자 나누어 끓여서 작은 그릇에 떠준다. 늘 무심한 얼굴 뒤에 이런 정이 숨어 있다. ‘행운집’ 할매는 십년 전에 3000원 하던 국수값을 500원 더 올릴까 말까를 망설이면서 아직도 3000원을 받고 있다.


<김지연 |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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