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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원의 살랑살랑 미술산책/오늘의 산책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 미술의 보고(寶庫)


잠깐 넋 놓고 있다 보면, 금새 포스팅 할 시기를 놓치고 만다
. 전시 일정이라는 것이 대체로 길지 않고, 또 다른 전시가 계속 이어지다보니 , ...’ 하다가 적당한 타이밍을 놓치기 십상. 이런건 미술 쪽만의 이야기는 아닐텐데, 세상의 '파워 블로거'들은 도대체 얼마나 빠릿빠릿하고 부지런한 분들인건지. 마음 속 깊이 존경심이 일지 않을 수 없다. 블로그 업데이트에 대한 압박에, 소박하게나마 지난 1주일의 행적을 적어보기로 한다. 말 그대로 (나름) 폭풍 업뎃이닷!


신라 구법승 혜초를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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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영하 17도의 강추위를 뚫고 가면서 움화핫~ 오늘 박물관은 내가 접수한다고 속으로 뻐겼지만, 이런, 웬걸,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다. -,.-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학부모 관객들을 간과한 탓이다. 그러고 보니, 새로 지은 박물관이 터무니없이 크고 넓다며 불평한 것 역시 생각이 짧았다.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우리에겐 매우 적당한 크기였던 것이다. 요즘 소그룹으로 어린아이들을 인솔하고 와서 유물을 설명하는 분들이 부쩍 눈에 띄는데(한 바퀴 도는 동안 열 팀도 더 보았다) 박물관이 넓으니까 서로 크게 부대끼지 않고 관람하는 모습이었다. 연초에 용산으로 이전한 후 국립중앙박물관 관람객이 1500만 명을 돌파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과연, 요즘 대세는 박물관이었던 것이다.




현재 기획전시실에는
<실크로드와 둔황-혜초와 함께하는 서역 기행전>(2010.12.18-2011.4.3)이 열리고 있다. 8세기 신라승 혜초의 서역 여행지를 따라 파미르고원 동쪽의 실크로드 문화를 4부로 나누어 보여주는 흥미로운 전시다. 각 전시장은 실크로드 오아시스 도시들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전시용 모형까지 제작해 실감나고 입체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활발한 동서 문명 교류의 장()으로서, 찬란하고 다채로운 중앙아시아 문화를 감상하고 동시에 동서양 문화의 영향관계와 그 연결고리를 찾는 즐거움도 함께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말로만 듣던 <왕오천축국전>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왕오천축국전>은 신라승 혜초의 서역 여행기를 말한다. 723727년 다섯 천축국(인도의 옛 이름)과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 서역지방을 4년간 기행하고 쓴 여행기라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8세기 이후 여러 고문서에 <혜초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이름으로 내용이 인용되기만 할 뿐 실체를 볼 수 없다가, 20세기 들어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세상 빛을 보게 됐다. 서양인으로 드물게 유창한 중국어와 한자실력, 풍부한 동양학 지식을 갖추고 있던 펠리오는 1908년 중국 둔황 막고굴 장경동에 가서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각종 불경과 고문서 더미 중 <혜초 왕오천축국전>의 필사본 두루마리를 발견해 이듬해 학계에 보고했다. 그리고 1915년 일본인 학자에 의해 혜초가 신라의 승려라는 것이 밝혀지게 됐다.



  <왕오천축국전>(부분) 자료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 혜초는 704년경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719년 열다섯 살에 밀교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723년 홀홀 단신 인도로 구법(求法) 여행을 떠난다. 광저우에서 뱃길로 인도로 건너가 불교의 8대 성지를 차례로 순례하고 서쪽으로 간다라를 거쳐 페르시아와 아랍을,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쿠차와 둔황으로, 드디어 당나라의 수도 장안(현재 시안)에 도착한 것이 72711월!2km의 대장정이었다. 하지만 이 4년간의 여행 후에도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장안에 남아 밀교를 연구하며 78076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그러니까 ‘1300년 만의 귀향이라는 표현은 조금 잘못되었다는 생각. 또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공연히 우리가 화를 낼 일도 아니라는 생각. 왜냐하면 완전히 헐값이긴 해도 펠리오는 장경동의 석실을 지키고 있던 왕 도사에게 엄연히 돈을 주고 문서 뭉치들을 사왔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갖고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말이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라는 승려의 구법여행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불교는 물론 당시 그가 거쳐 간 여행지의 의식주, 언어, 지리, 기후 등 일상생활과 자연환경을 비롯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풍부한 내용이 생생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어 현지견문록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와 관련해 더 자세한 내용을 공부하고 싶다면, 정수일 역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학고재, 2004)을 추천한다.

 


밑에 깔려있는 종이는 이 책의 부록으로, 1987년 문화공보부에서 영인한 <왕오천축국전> 두루마리를 축소 제작한 것이다. 전시장에서 실물로 보시길. :-)

심화학습을 위한 참고문헌으로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께,

피터 홉커크 지음, 김영종 옮김, 실크로드의 악마들(사계절, 2000),

중앙아시아 미술에 대한 책으로는,

권영필 지음, 렌투스 양식의 미술(사계절, 2002)

을 추천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일단 실제 유물을 보는 것이 책보다 먼저일 듯. 그럴땐, 주저하지 말고 국립중앙박물관의 3층 중앙아시아실로 올라가보자. 놀랄만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은 중앙아시아 타림분지에 있는 고대 오아시스 도시들-미란, 호탄, 쿠차, 투르판, 돈황 등 주요 유적지의 유물을 대량으로 소장하고 있다. 석굴사원 등에서 뜯어온 벽화가 60여 점, 불화, 불상, 토기, 토우 및 생활용품 등 조각과 공예품만 17백여 점이 있는데, 이 정도면 세계 유수의 박물관과 견주어도 절대 빠지지 않는 수준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어찌된 영문일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중앙아시아에 탐험대를 보내 보물을 수집 약탈해 간 실크로드의 악마들은 대부분 서구 열강 출신의 탐험대였다. 당시 우리는 일제 강점기. 우리가 중앙아시아에 발굴 탐사대를 보낼 수나 있었을까. 우리 것을 지키지도 못하는 판에 남의 것을 빼앗아 올 여력이 있었을 리 없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이 의외의 결과는 유일한 아시아 제국주의 국가로 중앙아시아 탐사에 참가한 일본 오타니(大谷) 탐험대와 절묘한 타이밍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승려들로 조직된 오타니 탐험대는 중앙아시아를 세 차례나 답사하며 수많은 유물을 수집했다고 한다. 거리상 이들 수집품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어 있었는데, 그중 일부가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전시되던 중 광복을 맞게되었고 그결과 그대로 눌러앉게 되어버린것.


                                         조선총독부박물관 시절, 조선시대 임금의 집무공간이었던 경복궁의 수정전(修政殿)에 일본 오타니 탐험대가 수집해 온 벽화 등을 전시했다.


기획전 <실크로드와 둔황-혜초와 함께 하는 서역 기행전>4월 초까지 하지만, 이렇게 긴 전시일수록 놓치기 쉽다. 서둘러 가보자. 더불어 용산까지 먼 걸음을 한 김에, 중앙아시아실의 상설전도 둘러보고 오면 더 좋은 공부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참에 중앙아시아 문화와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져봄은 어떨지.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그 문화적 친연성에 분명 놀라운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게다가 중앙아시아의 출토 유물들은 다른 지역의 유물을 감상할 때보다 더욱 멜랑콜리한 감상에 젖어들게 한다. 대부분 사막과 고원으로 이루어진 건조한 지역이어서인지, 천년 이상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종이, 나무, 의류는 물론이고 항아리 속에 남아있는 구운 과자까지 한입 베어 물고 싶을 정도다. 바로 엊그제 일 같이 생생한 듯하면서도 돌아올 수 없는 세월의 강이 가로놓인듯 신비롭고 아득한 그 느낌. 동서교역의 요충지로서 최첨단 유행을 자랑하던 오아시스의 여러 상업도시들은 지금은 비록 모래바람 속에 파묻혀 잊혀져버렸지만, 그 화려한 영화의 흔적은 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