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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

그릴수록 사라지면

박세진, 검은 그림, 흰 그림(feat. 부원희 작가의 시 ‘부동시’), 2018, 캔버스에 유채, 50.5×60.8㎝, ⓒ박세진 누크갤러리 제공

부원희의 시구절처럼 ‘자꾸만 갸웃대며/뒤뚱거리는’ 날들을 보내면서 화가 박세진은 검은 그림을 그렸다. 애초에 검은 캔버스는 물감을 올려 색과 형태를 표현해봐야 그저 삼켜버렸고, 반복적으로 쌓은 유화물감의 반사층만 남아 간혹 반들거렸다. 박세진은 검은 그림을 그리면서, 그릴수록 사라지는 지난 1년의 노력과 고생 끝에 깨닫고 말았다. “흰색 바탕에서 시작했으면 쉬웠겠다.” 검은 화면에서 형태는 뭔가 지나가고 난 뒤의 흔적처럼, 어쩌다 남은 얼룩처럼 있었다. 애초에 흰색 바탕을 선택하지 못한 그는, 흔적과 얼룩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위한 다른 통로가 필요하다.

 

화가는 햇빛 찬란한 여름날 역광 안으로 들어가 그 한때의 어두움을 캔버스에 담았다. 화면 한가운데에는 인물인 듯, 돌인 듯 무언가를 앉혔다. 어쩌면 ‘구도’ 중일지도 모를 ‘이것’은 흔들림이 없이 꽤 고요하다. 그림 바깥에서는 여름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작가는 역광 한구석에 오리 무리와 앉았다. 어둠 속에서 하얀 오리들은 꽤 역동적이고, 화가도 그렇다.

 

그는 자기 발밑에 흰 그림과 (보이지도 않는) 검은 그림을 던져놓은 채, 예전에 그렸던 그림을 회고하고, 지인이 보내온 박경리 선생의 오리 사진을 생각하고, ‘공간이 움직이는 순간을 들려주는 힘’을 가진 시인의 시구절도 떠올려보느라 그 나름 분주하다. 그는 약속된 시간 안에 그림을 그리지도 못했으면서, 두리번거리기를 멈추지 못하고 그림 바깥 오른쪽 공간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있다. 얼룩처럼 어둠에 깃든 채, 약속된 시간을 유예하는 그는 지금, 이 어둠이 고마울지도 모른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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