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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무진형제,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2019, 영상, 30분34초 ⓒ무진형제, 아트스페이스 풀


멕시코만 바다에서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하던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마침내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청새치를 낚아 올렸다. 그러나 좋은 일은 오래 가지 않는가 보다. 그는 청새치의 살점을 상어 떼에게 고스란히 뜯기고, 앙상한 뼈만 매단 채 돌아왔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 성공의 기억을 뒤로하고 노인은 피로한 몸을 뉘었다.


‘길 위쪽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작가그룹 무진형제는 나이가 들면 남을 따분하게 만들지 않는 현명한 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던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문장으로 적은 것을, 낡은 집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서 시작한 작업의 제목으로 삼았다.


오래된 집, 오래된 땅, 오래된 삶, 오래된 기억의 안팎을 엮어 나가는 영상 설치 작업 안에는 시공간 안에서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이 쌓인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지 않으려는 이의 무심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치밀하게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의 주름진 살결, 깊게 휘어진 손가락에 가 닿았다. 말 그대로 ‘고목껍질’ 같은 노인의 피부는 물기 하나 없이 메말랐다. 이제 그는 격정의 시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을 것이다. 노동의 세월을 새긴 듯 울퉁불퉁한 손가락으로 우편물 봉투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은 고요하고 담담한 것이, 그저 이렇게 멈추어 있어도 좋겠다.


사람은 늙고, 땅의 쓸모는 변하지만, 그저 이곳에 그대로 있고 싶은 자의 마음은 가만히 있다. 그를 지켜보는 젊은이들은 늙은 자의 그 마음을 만났을까. 노인이 꿈꾸었을 ‘사자’를 만났을까.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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