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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반복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 파제, 스티브 라이히 음악에 대한 네 가지 움직임, 1982, ⓒYi-Chun Wu/MoMA


해가 뜨고 지는 일, 눈을 뜨고 감는 일,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일, 전원을 켜고 끄는 일, 일어나고 잠드는 일,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 꽃이 피고 지는 일, 계절이 오고 가는 일, 만나고 헤어지는 일, 달이 차고 기우는 일, 태어나고 죽는 일, 새것이 낡아가는 일. 나는 소소한 일, 거대한 일이 촘촘하게 반복되는 세상에 파묻혀 살고 있다.

 

전통을 거부하는 일이 전통인 예술계에서, 작곡가 스티브 라이히가 음악의 전통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선택한 것은 지독하게 단순한 반복이었다. 반복되는 악절을 일치시켰다가 어긋나게 만들고 다시 일치시키는 전개가 되풀이되는 그의 음악은 진부하거나, 지루하거나, 기존 체계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법한 정도의 혁신이었다.

 

벨기에를 떠나 뉴욕 유학길에 올랐던 무용수 드 케이르스마커의 짐가방에는 스티브 라이히의 음반이 있었다. 1982년, 22세의 드 케이르스마커는 그의 음악과 교감하여 ‘파제, 스티브 라이히 음악에 대한 네 가지 움직임’을 발표했다. 엄격하게 반복적인 동작으로 구성한 이 실험적인 작품으로 그는 ‘무용에 혁신을 촉발한’ 안무가가 되었다. 무용수가 반복하는 회전 동작이 쌓여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은 움직임을 따라 무대 위 하얀 모래 위에서 꽃처럼 피어올랐다.

 

평론가들은 그의 작업에 대해 ‘그저 음악에만 기대지 않고, 음악 위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했다’고 덧붙이며, 그의 행보에 독보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초연 이후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공연하기까지, 300회인지 400회인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해 온 이 춤은 이제 ‘전설’이 되었고, 여전히 그 춤을 추고 있는 ‘미니멀리즘 무용의 교과서’ 드 케이르스마커는 이제 58세가 되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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