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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방문자들

라그나르 카르탄슨, 방문자들, 2012, 9채널 비디오 설치 ⓒ라그나르 카르탄슨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저 방문객일까. 타인의 삶에 잠시 동행하다가 다시 자기의 길 위로 돌아와 홀로 걷는, 결국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고독자일까. 아이슬란드 작가 라그나르 카르탄슨은 아내와 헤어진 후 그가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만나면 헤어지고, 시작하면 끝나는 삶의 질서는 여기저기서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뉴욕에 머물던 그는 지인의 소개로 뉴욕시 북쪽 허드슨 밸리에 있는 오래된 맨션을 만났다. 2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 맨션에는 43개의 방이 있었지만, 아무도 살지 않았다. 집주인의 가족, 지인들이 종종 들러 쉬었다 가는 은신처로 운영 중이었다. 카르탄슨은 이곳에서 보헤미안의 향기를 느꼈다. 친구들과 함께 어딘가에 얽매일 필요 없는 이 느슨한 공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먼저, ‘전처’가 쓴 시 ‘내 여성의 길’로 곡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고향 레이캬비크 출신 뮤지션 8명을 뉴욕의 맨션으로 초대했다. 서로 다른 밴드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조금은 황폐하지만 낭만적인 맨션에 모였다. 정원, 다락방, 거실, 주방 등에 자리 잡은 이들은 헤드폰을 낀 채 ‘내 여성의 길’ 연주를 시작했다. 화장실을 택한 카르탄슨은 욕조에 누워 기타를 친다. 헤드폰으로 들려오는 타인의 연주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파트에 집중할 때면, 그는 진한 외로움에 빠져들었다. 동료의 연주 소리가 그를 고독에서 길어올렸지만, 다시 곧 외로워졌다. 작가는 ‘인생’이라는 길에 잠시 들렀다가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는 이 방문자들의 시간을 담아 9채널 영상 설치 작품을 완성하고, 작품 제목으로 스웨덴 팝 밴드 아바가 마지막으로 남긴 공식 앨범의 타이틀 ‘방문자들’을 선택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kimjiy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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