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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병약한 지성의 보루, 노쇠한 비평가들

권력은 동종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철저한 공생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생명력을 이어간다. 특히 정치권력은 세간의 시선이나 상식 따윈 아랑곳없이 인맥을 투하하고, 비호세력들은 ‘내 편’이라는 선 긋기를 통해 그릇된 절차상의 하자(瑕疵) 앞에서조차 입을 다문다.


세속의 관점에서 ‘내 편’은 타인에겐 한없이 가혹할지언정 ‘내 편’이기에 용서되는 아이러니한 개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는 기준인데, 그건 바로 자기 이익과 맞닿는 득실의 무게이다. 공생의 가늠도 여기서 비롯된다.


캐나다 작가 데이비드 알트메드의 인체 작품은 상상 속 이미지를 통한 리얼리티에 방점이 있다. 모호한 내러티브와 초현실주의적인 형상은 오히려 동시대 사회 속 이야기와 현실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그리고 그 현실 내부엔 인간을 비롯한 관계, 권력, 경계, 분류 등의 다양한 화두도 들어 있다.


예술계, 아니 미술계에도 ‘편(便)’은 존재한다. 미술 없는 미술협회나, 사상적 동지를 주춧돌로 문화권력이 되고픈 패거리들, 학연과 지연 등의 온갖 연을 바탕으로 한 무리 등이 그것이다. 이들 또한 공생의 시효가 유효하다면, 이로움과 해로움을 스스럼없이 시도하며 모두로 포장된 그들만의 권력을 좇는다. 


공정한 과정 및 기회의 평등을 훼손하는 ‘편’의 공생을 끊을 수 있는 이들은 ‘알아야 할 것을 다른 이들도 알게 하는’ 기자와, 잠들지 않는 이성을 통한 정의로운 결과를 숭배하는 비평가이다. 그중에서도 비평가들의 역할은 중요하다. 예리한 비판의식과 날카로운 눈으로 건강한 미술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 지성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단지 기대에 불과하다. 문화예술계에 낙하산이 횡행하고, 무능력한 인사들이 권력에 의해 또 다른 권력이 되는 현실 앞에서도 말수는 적다. 불편부당함에 맞설 용기는커녕 자신들을 옹립시키는 데 공헌해온 작가들의 창작환경과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고 있는 오늘에도 딱히 관심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비평가라는 직업은 무색무취해졌다. 심지어 병약하다. 권력에 저항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과도 거리가 있다. 대신 무미건조한 언어로 무언가를 적당한 선에서 부풀려 치하하며 알량한 사익을 위해 대상의 명망을 가시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소임에 충실하다. 


그러니 내 시각에서 비평가란 더 이상 문무를 겸비한 감성과 행위가 유전되는 식자는 아니다. 예술과 예술가의 삶에 등불이 되는 비판적 선각자라기보다는 침묵을 신주로 삼는 보신주의자들에 가깝다. 아니면 잉여의 감상을 대안으로 착각하는 낭만주의자이거나.


이러한 감정은 후배들이 경력과 자존감에 상처를 받아도 하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개인미디어에 넋두리를 늘어놓는 게 전부인 선배 평론가들의 처신에서 가까이 느낄 수 있다. 누릴 것 다 누린 이들이 가상의 공간에 앉아 후배들을 위하는 양 벌이는 결론 없는 호들갑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다. 지금까지 어디에 살았기에 자다 봉창이냐고 되묻고 싶을 정도다. 


역대 훌륭한 비평가들에 의해 생산된 비평은 예술적 절망에 빛을 선물했으며, 신화화되는 현실의 오기(誤記)에 제동을 걸었다. 과거만 해도 비평가는 그 자체로 예술의 질량을 재는 천칭이자 시대의 분동이었다. 하나, 소수를 제외한 작금의 비평가들은 그런 역할도,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다. 권위는 잃었고 필력도 무뎌졌다. 이제라도 본연의 자세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