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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

빛나지 않아도

Untitled_hawon1695, 2013 ⓒ김옥선

Untitled_hawon1695, 2013 ⓒ김옥선

 

사진에는 눈부신 제주도의 하늘이나 싱그럽게 푸른 야자수가 없었다. 햇빛이 표백된 회색빛 하늘, 활력 없이 타들어가는 야자수, 모든 것은 볼품없이 회색빛으로 말라갔다. 사람의 얼굴마저도 회색빛으로 보였다. 남성도 여성도, 원주민도 이방인도 아닌, 모두 생기가 빠진 회색인일 뿐이었다. 하늘과 야자수, 사람들까지 사진 속에서는 모두 빛을 잃어가는 회색의 존재였다.

 

빛나는 백(白)으로 태어나 빛을 잃고 어두운 흑(黑)으로 향하는 회색. 백과 흑, 어느 쪽도 아니면서도 둘을 동시에 지닌 회색. 흙과 먼지가 묻고 점점 녹아가면서 다시 하얗게 빛날 수 없는 눈사람의 회색. 그런 회색빛만 가득한 사진은 ‘모든 존재는 빛난다’거나 ‘저마다 빛나는 순간이 있다’고 말하는 일이 얼마나 ‘빛나야 한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것인지 환기한다. 회색 사진은 오히려 빛을 잃어도, 빛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공평하게 회색의 존재라고, 모두 빛을 잃어가며 점점 녹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가는 생이란, 눈사람이 빛을 잃고 더러워지며 녹는 과정을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카메라를 들었다는 이유로 애써 반짝거릴 장면을, 빛나는 순간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그것이 잠깐의 위안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빛을 잃지 않거나 녹지 않는 것은 아니다. 회색의 존재가 회색의 얼굴과 나무를 회색으로 수긍하는 회색 사진에는 결연한 의지와 산뜻한 체념이 동시에 느껴진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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