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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역사를 기억하는 예술

예술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정한 유형의 힘을 알아차리는 데 유난히 밝은 눈을 가진 작가라고 평가받았던 한스 하케는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참여 작가 제안을 받고, 독일관에 축적되어 있는 히틀러의 욕망에 주목했다.

 

한스 하케, 게르마니아, 1993, 설치,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 파빌리온 ⓒ한스 하케

 

1909년 베니스의 자르디니 정원에 세 번째 국가관으로 자리 잡은 독일관은 히틀러가 추구하는 나치의 미학 원리, 독일 예술의 새로운 정신을 담기 위해 1938년 재건되었다. 로마제국을 넘어서는 거대한 독일제국의 건설을 꿈꾼 히틀러는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으로 도시계획을 추진했고, 베니스의 독일관도 그 맥락 안에서 리노베이션을 마쳤다. 히틀러의 비전을 그대로 투영한 독일관은 패전 이후, 나치즘 시대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참여 작가들의 과제는 독일관이 품어내는 나치의 역사를 지우고, 건물의 메시지를 무력화시키는 데 집중했다.

 

1991년 통일 이후 독일 사회에 네오나치즘이 기승을 부리는 현실을 바라보며, 그는 1934년 히틀러가 베니스비엔날레를 방문했던 당시의 사진을 국가관 입구에 걸었다. 입구를 통과해 실내로 들어선 관객은 공허하게 빈 공간과 산산이 부서진 바닥면을 만난다. 그는 내부 바닥 판을 조각내어 방문객들이 비틀거리며 걷도록 만들었다. 나치의 깃발 아래, 부서지는 콘크리트 조각을 밟으며 ‘게르마니아’를 통과하는 관객들은 ‘합법적’ 파괴와 학살이 자행된 전쟁의 참상을 연상했다. 독일의 건강한 미래는 그릇된 역사를 철저히 분쇄한 후에나 올 수 있음을, 사람들은 느낄 수 있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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