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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예술계 교수의 민낯

최근 방송된 한 시사프로그램의 ‘제자인가 노예인가, 예술계 교수의 민낯’을 시청하던 중 문득 옛일 하나가 스쳤다. 오래전이라 기억마저 가물가물해질 법하건만, 희한하게도 아직 망각의 영역에 들지 않은 그 사건. 아마 쉽게 치유되지 않을 깊고도 시린 상흔 때문일 것이다. 

 

갓 30대였던 당시 나는 기사 하나를 썼다. 제자들이 함께한 전시에 무임승차한 교수들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2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실명을 죄다 거론한 것이 그만 소송의 발단이 됐다. 피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어느 다다미방 비슷한 곳으로 나를 불러 무릎을 꿇으라고 할 때 순순히 응했으면 말이다. 하나 그러지 않았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무엇보다 잘못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쿠엔틴 메치스, 환전상(대부업자와 그의 부인), 1514. 종교화 외에도 권력과 무관한 소시민의 삶을 자주 그린 쿠엔틴 메치스는 여러 풍자적인 작품을 통해 정직과 성실, 청렴과 도덕성을 강조했다. 남녀, 부부 등 종속적이지 않아야 할 관계에 대한 메시지도 그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특징이다. ⓒ 홍경한

송사는 1년을 넘겼다. 홀로 두 명의 변호사와 상대하는 건 꽤나 버거웠다. 지치다보니 개중 한 명이 휘두른 ‘그 유리컵에 맞았다면 차라리 덜 힘들었을 텐데’라는 아쉬움까지 밀려왔다. 그렇다고 불의를 불의하다 말한 걸 후회한 적은 없다.

 

훗날 그들 중 몇은 내게 사과했다. 한데 그때의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오히려 현재 가지고 있는 방법의 전부를 동원하여 억누르려던 양태에 곪았고, 개인 또는 집단이 다른 개인 또는 집단을 지배하려는 행태권력, 그 통제의 힘에 마음의 생채기는 더욱 덧났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교수는 미술계 권력이다. 작가에겐 대접하지 않는 사회지만 교수라는 직함을 달면 달라진다. 미술동네에서도 교수란 곧 성공을 의미하고, 이는 재벌작가로 성장할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담보한다. 제도권의 핵심중추로 들어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기도 하다.

 

문제는 직위권력에 비해 초라한 실력이다. 가끔 조악하고 경박한 이발소 그림이나, 전혀 동시대적이지 못한 작품을 보면 대체 어떻게 교수가 되었는지 의아하게 한다. 자신이 배우던 시대와 오늘이 다름에도 공부하지 않은 채 낡고 식상한 커리큘럼으로 강단에 서는 모습에선 저런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는지 궁금해질 때도 있다.

 

흥미로운 건 그들의 적지 않은 수는 교육자인지 작가인지, 전문 교육자도 전업 창작자도 아닌 어정쩡한 정체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배워야 할 이가 가르치고, 실력보다는 인맥·학연·지연에 얽매이는 시스템 속에서 답답한 보수적 성향을 가보처럼 대물림한다. 인정을 하던 안 하던 이는 일부 교수들의 현주소 이다.

 

측은한 건 아무 죄 없는 학생들이다. 당대 미술 흐름을 발 빠르게 수용하는 학생들 입장에서 교수들의 안일함과 게으름, 구닥다리 조형언어는 현실적 괴리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상아탑의 권력이자 생살여탈권을 쥔 교수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든 구조다. ‘예술계 교수의 민낯’에 등장하는 발언처럼 “키울 수는 없어도 밟을 수는 있다”.

방송에 나온 공연계 교수들만큼은 아닐지라도 미술계 또한 캔버스에 예술 대신 권력을 그리는 사람들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19세기에나 유행했을 법한 그림을 작품이라 강요하는 ‘미적폭력’이 다른 나라의 얘기인 양 눙치기도 어렵다.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은 아니지 않은가.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