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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화이트앨범을 삽니다

작가 러더퍼드 창의 ‘상점’에는 ‘화이트앨범을 삽니다’라는 네온사인 간판이 걸려 있다. 한쪽 벽에는 흰 레코드판을 마치 빈 캔버스처럼 진열해 두었고, 테이블 위에는 시리얼 번호 순서대로 정리해 넣은 박스를 올렸다. 관객은 앨범을 넘겨보고, 공간 한쪽에 마련된 턴테이블에서 음악도 들을 수 있지만, ‘화이트앨범’이라고 불리는 이 레코드판을 구매할 수는 없다. 혹시 그들이 이와 동일한 음반을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러더퍼드 창, 화이트앨범을 삽니다, 2013~2017, 설치, 함부르크 다이토어 미술관 설치 장면

 

영국의 팝 아티스트 리처드 해밀턴이 커버를 디자인한 이 앨범은 1968년 발매된 비틀스의 10번째 레코드다. 아무 그림 없이 하얀 표면에 비틀스의 이름만 새겨 넣은 이 더블 앨범은 300만장이 제작되어 커버 오른쪽 하단에 고유의 시리얼 번호를 달고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 0000번은 존 레넌이, 1·2·3번은 다른 비틀스 멤버들의 차지가 되었다.

10대 시절 처음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비틀스의 이 앨범을 본 창은 앨범의 소장자마다 자기 방식으로 이 앨범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떤 재킷에는 날짜가, 어떤 재킷에는 온갖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또 다른 화이트앨범에서 그는 누군가의 연애편지도 발견했다. 작가는 대량생산되어 공급 유통되는 이 ‘공산품’ 같은 하얀 음반이 서로 다른 소장자를 만나 그들의 흔적을 담고, 하나하나 다른 모양을 갖춰가는 현상에 매료되었다. 음악 앨범은 더 많이 복제되어 팔려나갈수록 좋은 법이니, ‘사본’의 확산을 독려하는 마음과, 여전히 원본의 가치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예술하는’ 마음 사이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보았다.

 

이제는 음원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듣는 생활에 익숙하지만, 그는 오늘도 온라인 매장과 중고 레코드 가게를 다니며 비틀스의 화이트앨범을 모으고 있다. 현재 2295장을 모아들였으며, 그의 수집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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