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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회귀

피터 도이그, 100년 전, 2001, 캔버스에 오일, 229×358㎝, 퐁피두센터 소장, ⓒ 피터 도이그


딱히 돌아가고 싶은 시점이 있는 건 아니다. 아니다. 이 시큰둥한 마음은 어쩌면, 과거의 결정적인 순간 모두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이 역설적으로 튀어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험을 보기 전. 면접에 들어가기 전. 탈락하기 전. 집값이 오르기 전. 주식이 폭등하기 전. 휴대전화가 나오기 전.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건물이 무너지기 전.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 전쟁이 나기 전.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


웹소설 한쪽을 점령하고 있는 ‘회귀물’을 뒤적이다보면,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 있는 자들의 아쉬움, 미련, 후회, 욕망이 눈에 들어온다. 한번 살아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인생살이에 대한 노하우와 미래에 대한 정보로 무장한 ‘젊은’ 회귀자는 과거의 나와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존재감을 발휘하며 그의 인생뿐 아니라 주변의 인생을, 환경을 변화시킨다. 빛나는 미래의 보석을 알아볼 안목이 생길 리 없는 나는, 위기를 기회로 돌리기 위해 의지를 불사르는 주인공들에게 빙의하여 악을 응징하고, 세상을 구하고, 콤플렉스도 해결해본다.


모든 것이 왜소한 한 남자를 화면 안에 그려넣은 피터 도이그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의 어두운 눈을 알고 있다. 고요하지만, 조심스럽게 일렁거리는 화면 안에서 긴 머리에 깡마른 이 남자는 우리를 본다. 메마른 이 남자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녔으나, 세상은 아직 그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다. 


그런 눈은 아마도 100년 뒤에나 등장할 것이다. 그래서 화가는 잔잔한 풍경을 고요하게 흔드는 붓질로, 푸른 물결에 깊이 박힌 오렌지빛 그림자로, 지나고 나면 그제서야 그때가 결정적인 순간이었음을 알 수 있는 시간을 기록한다. ‘100년 전’이라는 이름으로.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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