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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승효상의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빈자의 미학’을 재론하며 나는 건축가가 본업인데도 여러 권의 책을 펴낸 저자가 되었다. 뜻한 바도 없었고 모두 어쭙잖은 글로 채운 책들이지만 그중 몇몇은 해외에서 번역 출판되는 민망함을 겪기도 했는데, 급기야 나의 첫 책인 도 중국에서 지난달 출간되었다. 국내에서 나온 지 20년도 지난 이 작은 책을 중국에 소개하겠다는 출판사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지금의 중국에 필요한 글이라고 했다. . 서로 모순되는 듯한 두 단어의 나열로 반감까지 가끔 불러일으키곤 하는 이 제목은, 1992년 가을에 개최된 한 건축전시회에서 선언하듯 뱉은 말이다. 나는 한때 신학을 전공하려 했다. 나는 왜 기독교도인가에 대한 의문이 어릴 적 내내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실한 신자임에도 장남이 성직자 되는 것을 반대하시는 부모님에게 걸려 뜻을 이루.. 더보기
터무니없는 도시, 터무니없는 사회 오래된 서양 도시들, 예컨대 런던이나 파리, 빈, 프랑크푸르트의 원도심은 2000년 전 로마의 군단 주둔지였다. 이 도시들의 중심지역인 시티지역, 시테섬, 그라벤, 뢰머광장 등이 카스트라라고 불렸던 로마군단 캠프가 설치되었던 곳이며, 군단 주둔이 장기화하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도시가 확장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 캠프의 중심 공간이었던 포로나 중심 도로인 카르도, 데쿠마누스 같은 공간은 이름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장구한 역사를 전하고 있다. 캠프라는 시설은 필요에 따라 쉽게 설치하고 해체해야 하므로 평활한 땅을 고르는 게 우선이다. 오늘날 대도시로 변모한 이 캠프가 설치되었던 평지라는 지형은 결국 서양인들의 도시에 대한 관념에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봇물.. 더보기
“책을 태우는 자는 인간까지 불태우게 된다” 히틀러의 동역자였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오래전 이 칼럼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요즘 역사교과서 문제와 다시 오버랩되었다. 건축을 통해 히틀러를 신격화하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그는 종전 후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그의 지위에 비하면 비교적 낮은 형량인 20년을 선고받는다. 재판과정 중에 스스로 죄를 뉘우쳤으며 히틀러와 나치의 잔학성을 밝히는 데 기여한 점을 감안한 것이다. 본래 그는 대단히 유능한 건축가의 자질을 가졌었다. 그의 스승인 테세노프는 20세기 초 독일 현대건축의 선봉에 있던 건축가이자 학자였으며 슈페어는 그의 후계자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연설에 감동받아 스스로 나치당원이 된 그는 나치의 뇌라고 불렸던 괴벨스의 눈에 띄어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만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치를 .. 더보기
건축은 부동산이 아니다 지난달 말 베이징 디자인위크라는 행사의 개막식에 기조강연을 요청받아 가게 되었다. 6회를 기록하는 행사지만 그 수준을 몇 해 전에 경험한 적이 있어 올해의 행사도 만만히 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기조강연인데도 다른 일을 핑계로 처음부터 참석하지 않고 내 순서가 닥쳐서야 강연장에 입장하는 오만을 부렸다. 게다가 중국 땅에서 건축설계 작업도 15년째 하고 있으니 중국의 건축과 도시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했다. 솔직히 말하면 낮춰본 게다. 근데 이 모든 게 오산이었으며 이 행사로 끝내 적잖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예컨대 중국의 건축가 100인을 불러모아 펼쳐놓은 전시회는 모두가 대단한 질적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소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왕슈만큼 혹은 그보다 더.. 더보기
‘포촘킨파사드’와 도시의 속살 18세기 중엽, 프러시아 출신으로 러시아의 절대군주가 된 예카테리나 2세는 남편인 표도르 3세를 축출하면서 제위에 오를 만큼 권력지향적 인물이었다. 그녀의 러시아는 폴란드 분할과 크림반도의 합병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내부로는 행정개혁과 문예부흥을 성공적으로 이뤄 절정의 시대를 구가한다. 이방의 여인임에도 러시아의 전통과 풍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러시아 국민들의 사랑을 얻은 그녀는 예카테리나 대제로도 불렸으니 성공한 통치자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당나라의 측천무후와도 곧잘 비교되는데, 특히 남성편력에서 둘은 막상막하였다. 그녀의 많은 정부 중에 크림반도 총독으로 임명된 그레고리 포촘킨이라는 인물이 있다. 1787년 여제가 크림반도를 시찰하겠다고 하자, 조잡하고 낙후된 마을 풍경이 마음에 .. 더보기
건축과 장소, 그리고 시간 오만과 편견의 아베도 이 건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착공을 앞두고 있던 2020년 도쿄올림픽 주경기장의 설계를 원천적으로 바꾸라는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공사비가 당초 계획보다 훨씬 많이 든다는 이유를 받아들였다지만 사실은 더 미묘한 문제가 있었다. 국제현상공모를 통해 당선된 이 경기장은 그 크기나 모양이 주변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이 자랑하는 건축가 단게 겐조가 설계한 기존의 경기장들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모습에, 건축계를 중심으로 건립 반대운동이 일었던 차였다. 점잖은 인품을 지닌 노건축가 마키 후미히코까지 그 선봉에 있었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싫어하는 일본의 지식인과 건축가가, 남이 설계한 작품 그것도 공모형식을 통해 당선된 세계적 외국 건축가의 건축을 두고 안된다.. 더보기
우리는 위로받고 싶다 갑자기 미테랑 대통령이 생각났다. 내가 아는 한, 금세기에서 가장 문화적인 대통령이었다. 우파 정권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그는 도시 재생과 관련한 ‘그랑프로제’라는 정책을 바로 추진한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그냥 지시만 하는 게 아니었다. 예컨대 루브르박물관의 신관 설계를 중국계 미국 건축가 이오 밍 페이에게 맡겨 놀라게 하더니, 이 동양인이 바로크 형식의 기존 박물관과 대비되는 유리 피라미드의 설계안을 내놓아 많은 이들이 주저하자 대통령은 그 파격적 디자인을 적극 옹호하고 짓게 했다. 물론 그 결과로 루브르박물관은 현대적 아름다움도 같이 가지게 된다. 이뿐만인가. 가운데를 텅 비운 ‘그랑아르세’를 쇠락해가던 라데팡스 지역 끝에 지어 파리의 도시 중심축을 한껏 넓히게도 했고, 파리 외곽의 소.. 더보기
이 시대 우리의 건축 그리고 그 문화풍경 지난주 10년 만에 헬싱키를 찾았다. 이 도시가 야심 차게 추진하는 도시디자인 전략을 알아보는 공식적인 일 외에, 나는 핀란디아 홀 바로 옆에 최근 새로 지은 ‘뮤직센터’라는 콘서트 홀을 보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 1971년에 개관한 핀란디아 홀은 작곡가 시벨리우스를 기념하여 이 나라가 자랑하는 건축가 알바 알토가 지은 걸작이다. 그런데 아무리 잘산다고 해도 인구 60만명에 불과한 도시에 또 새로운 음악당이라니…. 이 의문은 현지의 설명을 듣고 풀렸으나,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핀란디아 홀은 핀란드의 토속적 아름다움을 건축의 형태와 공간으로 치환하여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일컫는 현대건축의 보물이다. 근데 이 아름다운 건축이 음향에서 문제가 줄곧 제기되었다. 내부의 천장 형태가 건축가 고유의 디자인.. 더보기
내 친구의 서울은 무엇인가 요즘 세계에서 가장 ‘핫’한 도시가 서울? 적어도 내 주변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그렇다. 근래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내가 아는 외국의 건축가들이 서울을 찾는다. 특별한 목적이 아니면 오기 힘든 동북아 끝에 위치해 있건만 도쿄나 베이징, 홍콩 온 길에 일부러 들렀다고 하니 예삿일이 아니다. 또한 밖에 나가 그곳 건축가들과 만나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서울에 관한 게 대단히 많아졌다. 전시회나 심포지엄을 해외에서 개최해 보면 전례 없이 많은 현지인들이 모여 서울을 논한다. 전과 확연히 다르다. 한류의 영향?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실에 냉소적이기 쉬운 건축가들이 그런 것으로 영향받지 않는다. 서울의 재발견이라고 해야 옳다. 사실 서울은 그동안 너무도 저평가되어왔다. 건축가들이지만 도시에서 정작 그들이 좋아하는.. 더보기
“이 집은 당신만의 집이 아닙니다” 건축에 시간의 때가 묻어 윤기가 날 때, 그때의 건축이 가장 아름답다고 나는 즐겨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남루했어도 거주인의 삶이 덧대어져 인문의 향기가 배어나는 건축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경이롭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건축은 건축가가 아니라 거주인이 시간과 더불어 완성해 가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물론, 건축이 거주인에 의해 완성된다고 해서 건축가의 책임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는 모름지기 그 건축이 담아야 하는 시간을 재는 지혜를 가져 그 풍경의 변화를 짐작하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그런 건축가가 만드는 건축이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기 마련이며, 그렇지 못하면 시간을 견디지 못해 소멸되거나 아니면 우리 환경의 일부가 되기 위한 비용이 만만찮게 들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 건강한.. 더보기
동네를 잃어버린 주소 오래전의 일인데, 외국유학을 갓 다녀온 한 조각가의 푸념을 듣게 되었다. 청계천 철물상에 가서 직각으로 된 자를 만들어 달랬더니 어느 한 곳도 90도 정각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슬며시 외국과 비교하며 직각도 만들지 못하는 한국의 장인정신 부재를 트집했다. 그렇게 비난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가구들을 보면 자로 잰 듯한 정확함이 없는 게 사실이다. 어딘가 틀어지고 어딘가 모자라는 불완전한 상태를 두고 한국인이 가진 해학이며 미학이라고 학술적으로 논문을 쓰며 해석까지 해왔다. 건축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옛 건축에서 궁궐이나 사찰의 주된 건물을 얼핏 보면 좌우대칭의 당당한 입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실측으로 따지면 실제는 정확한 대칭이 아닌 게 대부분이다. 이를 두고, 한 치의 틀림도 없는.. 더보기
마스터플랜의 망령 1955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세워진 ‘프루이트이고’라는 2870가구수의 주거단지는 세워지기 이전부터 건축매체로부터 최고의 아파트로 칭송받았다. 이 단지는 일본계 미국인 건축가 미노루 야마자키(그는 2001년 테러로 무너진 뉴욕 무역센터도 설계했다)의 설계로, 그 당시 세계 건축계를 이끈 르 코르뷔제와 국제건축가회의(CIAM)가 주창한 신도시에 대한 마스터플랜 강령을 충실히 추종하여 ‘미래 도시의 모범’으로도 불렸다. 합리와 이성을 절대가치로 믿는 모더니즘을 시대정신으로 가진 그 강령은, 7만여평의 땅 위에 11층의 33개동의 아파트를 균일하게 배치시키며 흑인과 백인 가구로 나눈 후 모든 공간을 기능과 효율로 재단하여 분류하고 계급화시켰다. 보랏빛 꿈을 약속한 마스터플랜은 마치 전지전능이었다. 우리의 미.. 더보기
집의 이름, 인문정신의 출발점 내가 운영하는 건축사무소의 이름은 ‘이로재(履露齋)’이다. 뜻으로는 ‘이슬을 밟는 집’인데 에 연유한다. 어느 옛날 노부를 모시고 사는 한 선비가 부친이 아침에 일어나시기 전에 겉옷을 걸치고 부친 처소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시면 따뜻해진 겉옷을 건네드렸다는 이야기다. 새벽녘에 이슬 앉은 마당을 밟아야 하는 집 ‘이로재’를 의역하면, 효성이 지극한 가난한 선비가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1990년대 초, 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가 내게 집 설계를 의뢰했을 때는 그 밀리언셀러의 책이 나오기 전이어서 학자 신분에 집 지을 돈이 넉넉할 수 없었다. 내게 준 설계비도 충분치 않다고 여겼는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200년 된 현판을 답례로 주었는데, 내.. 더보기
‘불란서 미니 2층집’과 ‘마당 깊은 집’ 건축역사에서 주거의 변천양식을 일반 건축처럼 구분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옛날이나 요즘이나 집은 마찬가지라는 것인데, 냉난방이나 자동화 시스템 등 현대기술의 덕택으로 주택의 편리함이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고 해도 건축의 본질인 공간의 구조에는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다. 특히 지역의 특수한 조건을 받아들여 지을 수밖에 없는 민간주택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예컨대 대략 9000년 전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있었던 차탈휘위크의 집단 취락지 풍경은 지금의 터키 민간주거와도 비슷한 모습인 데다가, 놀랍게도 중국 허난지방에도 그 비슷한 형태의 주거가 있어 건강한 삶을 지금도 산다. 또한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도시 우르에서는 부자와 빈자가 서로 섞여 산 것이 분명하다. 큰 집과 작은 집들이 흙벽들을.. 더보기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그리고 헤테로토피아 이상향으로 번역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는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지은 소설책의 제목이었다. 그는 그리스어 두 단어를 합성해서 이를 만들었는데, 그 뜻이 이중적이다. Topia는 장소, 땅이라는 분명한 뜻을 갖지만 U는 뜻이 모호하다. 그리스어 eu, ou는 다 같이 ‘유’로 발음되는데, eu는 좋다라고 하는 뜻이며 ou는 아니라고 하는 뜻이라 e와 o를 빼고 그냥 ‘u-topia’라고 하면, 좋기는 좋은데 이 세상에 없는 곳이 된다고 한다. 즉 상상할 수는 있지만 현실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는 도시가 유토피아인 셈이다. 그 책 속에는 유토피아를 그린 그림이 있다. 그림 속 유토피아는 위쪽에 그려진 육지로부터 떨어진 섬이어서 이곳을 가려면 배를 타고 하나의 입구에 도달해야 한다. 모든 출입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