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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지슈토프 보디츠코, 외국인 지팡이, 1993(1994년 스톡홀름에서 작품을 시연 중인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방인의 기분을 느껴보지 않는다면, 이방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1943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크지슈토프 보디츠코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규범 사이 긴장감, 그 긴장이 창작에 미치는 영향을 경험했다.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고민하며 작업하던 그는 1977년 캐나다로 이주한 후 이방인으로 살면서 사회 안에서 상처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외국인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분위기, 이방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억압하는 현실을 본 작가는 이방인이 자유롭게 의견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는 기구를 만들어 ‘문화적 보철기구’라고 명명했다.

 

‘외국인 지팡이’는 이방인이 사용하는 일종의 합법적이고 윤리적인 의사소통 기구다. 작가는 이 지팡이 안에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물건들을 넣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 이주민들은 지팡이 속에 넣은 자신의 물건들을 매개로 자신을 소개하고 대화를 이어나간다. 보디츠코에게 말하기는 공동체 일원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지만, 이방인들은 공공의 장소에서 자신들만의 목소리나 이미지를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투표권도 가질 수 없는 이방인들은 발언권을 박탈당한 채,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지만, 침묵하기에 길들여져 있었다. ‘외국인 지팡이’는 이방인들에게 ‘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고, 그들이 침묵의 늪에서 한 발짝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독려했다. 그렇게 보디츠코의 작업은 이주민들이 그들 스스로 가장 강력한 억압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각성하고 치료할 수 있도록 돕는 문화적 보철기구가 되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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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 마클레이, 시계, 2010, 비디오 설치, 24시간 상영


“우주는 신성한 존재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시계와 비슷하다.” 르네상스 시대 천문학자이자 점성학자였던 케플러는 우주의 질서에서 시계의 시스템을 보았다. 이 시기, 시계태엽 장치와도 같은 우주에서 신은 뛰어난 시계공이 아니겠느냐는 발언도 등장했다. 해시계, 물시계처럼 기존에 시간을 알려주던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계 시계의 등장은 유럽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근대산업을 견인하는 중요한 동력으로서 과학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기계 시계가 내는 소음은 사람들이 시간을 물리적으로 인식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돈뿐만 아니라 시간도 계산하고 계량화하기 시작했다.

 

보는 것을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바탕에 두고 작업을 풀어온 크리스찬 마클레이는 인류 문명사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합리성의 개념을 개인에게 탑재하는 데 일조한 시계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멜로, 액션, 스릴러, 공상과학 영화 및 유럽 예술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망라하는 5000여편의 영화 중 시계 또는 시간을 언급하는 대화가 등장하는 클립과 컷을 찾아 24시간을 연결했다.

 

작품 ‘시계’는 실제 24시간 동안 상영하며, 장면이 지시하는 시각과 실제 관객이 만나는 시각이 일치하여 흐른다. 극장에 앉아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들은 서로 다른 서사 구조에서 역할을 수행하던 장면이 ‘시계’를 매개로 완전히 다른 맥락에 놓이면서 또 다른 흐름을 형성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시간을 편집하여 서사를 구축하는 영화가 예술가 시계공의 손을 거쳐 새로운 시계태엽 장치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동참하는 이들은 새로운 시계가 지시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를 둘러싼 물리적 시간의 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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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매퀸, 애시, 2002~2015, 투채널 비디오, 포스터, 20분31초 @스티브 매퀸


늘 당연하게 흘러갈 것이라 믿고 몸을 맡기는 일상은, 문득 당연한 듯 믿음을 배반한다.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생이 의미를 갖는다는 말은 기대를 빗나가는 삶을 납득하기 위한 주문일지도 모른다. 배신의 가능성을 품은 일상은 다른 이야기를 숨긴 채 표표히 지나간다.

 

2002년 스티브 매퀸은 카리브해 그레나다에서 비디오 작품 ‘카리브 리프’를 촬영했다. 1651년 유럽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싸우던 카리브인들이 ‘카리브 리프’라고 불리는 소튜 마을 절벽에서 몸을 던졌던 역사와 이곳의 현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10여년이 흐른 뒤 다시 그 지역을 찾은 매퀸은 당시 촬영을 위해 섭외했던 청년 애시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작업에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필름에 담은 지 두 달 뒤, 애시가 마약 문제에 연루되어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작가는 청년의 짧은 생을 애도하며 10여년간 묻어두었던 장면을 꺼내 ‘애시’를 제작했다.

 

공중에 매단 스크린 양쪽으로 서로 다른 영상을 보여주는 이 작업의 한쪽 화면에서는 건강미 넘치는 젊은이가 바다 위 보트 끝에 앉아 미소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는 장면이 흘러나온다. 카리브해의 푸른 바다와 녹색 섬, 싱그러운 청년의 미소로 가득한 이 영상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홈비디오 카메라로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더욱 그리운 공기와 노스탤지어가 가득하다. 반대편으로 돌아가면 관객은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동료들의 음성과 함께 애시의 묘비명을 새기고 무덤을 조성하는 지난한 과정을 대면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삶과 죽음의 장면은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단면을 담담하게 풀어놓으며 지금 이 순간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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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닛 카디프, 조지 뷔레스 밀러, 갈림길의 도시, 2014, 영상설치


걷기는 세계를 여행하는 방법이자 마음을 여행하는 방법이건만, 인간이 운전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걷기는 일상에서 멀어졌고, 세계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했다. 그곳에 닿고 싶다면, 자동차의 속도에서 내려와 걷기가 만들어주는 리듬에 몸을 맡길 필요가 있다. 인간 신체에 최적화된 속도로 자연과 문명을 가로지르는 걷기는 생각의 근육을 키워주는 철학이기도 했다. 재닛 카디프는 캐나다 앨버타의 밴프 센터에 머물던 1991년, 처음 걷기 작업을 시작했다. 출발은 느슨했다. 관객은 12분간 흘러나오는 작가의 내레이션에 귀를 기울인 채 숲을 거닐면 된다.

 

걷기 시리즈는 회를 거듭하면서 공간 탐색의 방법을 확장시켜 나갔다. 특히 2013년 카셀도큐멘타와 2014년 시드니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업은 아이팟을 이용하여 가상과 현실 세계를 절묘하게 혼합시켜 주목을 받았다. 시드니비엔날레 출품작이었던 ‘갈림길의 도시’는 보르헤스의 소설 <갈림길의 정원>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실시간 도시를 배경으로 카디프와 조지 뷔레스 밀러는 거리가 기록하고 있는 역사를 떠올리면서 걸었을 때 발견할 법한 가상의 사건, 공연 및 음악, 경험 등을 시나리오에 배치했다.

 

영상이 담겨 있는 아이팟과 헤드셋을 빌린 관객은 내레이션이 인도하는 동선을 따라 항구, 분주한 거리, 계단을 올라가며 외로운 골목길을 만난다. 그곳에서는 문득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하지만 그 퍼포먼스는 지금 현재 이곳 내 눈앞이 아니라, 과거 언제 이곳에서 있었던 퍼포먼스로, 화면 속에만 있다. 비디오의 가상성과 현실 세계의 구체성이라는 두 가지 현실이 혼합된 상황에서 혼돈을 느끼는 관람자는 자신이 걷고 있는 공간, 걷는 행위, 내가 머무는 시간의 의미를 돌이켜본다. 걷기가 선사하는 낯선 순간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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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 기억의 잡초, 2016, 혼합재료, 가변설치


‘기억의 궁전’은 장소에 기억을 심는 기술이었다. 사람들이 장소에 관한 특별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는 이 기억술은 책이 없던 시절, 구두로 정보를 전달해야 했던 사람들이 애용했다. 방법은 이렇다. 내가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장소와 동선을 생각한 후 동선에 따라 기억해야 할 정보를 이미지화해서 배치한다. 기억을 꺼내고 싶다면 이 궁전에 발을 들인 뒤 동선을 따라 걸으면 된다. 궁전에 들어서지 않으면 그 기억은 다시 만날 수 없다. 기억하기 위해 본인이 만든 공간 안으로 반드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 이 기억술의 치명적인 단점이긴 하지만, 기억을 오래 묶어 두기에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기 때문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들이 이 기술을 익힌단다. 클레오파트라가 즐겨 사용했고, 셜록 홈스도 기억의 궁전을 여러 채 지었다 했다.

 

기억의 주인이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궁전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공간 곳곳에 새겨 넣었어도 쓸모를 다한 기억이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공간에서 파생된 기억, 경험, 감정을 표상하는 작업에 집중해 온 홍범에게 기억은, 한때 다른 이의 인생이 흘렀을 곳, 어떤 생명이 성장하고 소멸했을 곳에서 무성하게 자라 공간을 가득 메워버리는 잡초 같다.

 

아주 선명하게 떠올릴 수는 없을지라도 특정 공간에서 시간을 담고 남아 있는 기억들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다른 이미지들과 연결되고 증식하면서 유기체처럼 자라 공간을 뒤덮는 것 같다. 홍범은 이런 가정 아래, 공간과 그것을 인식하는 관찰자 사이 어디에선가 자생하고 있을 알 수 없는 기억들을 잡초의 형태로 표현했다. 그렇게 원주인의 기억망을 벗어난 이 잡초들은 공간에 영롱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새로운 기억의 표상을 새기는 중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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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애, 오래된 잠수, 2016, 장지에 아크릴릭, 116.7×85㎝


세상에 나오면, 그 다음에는 늙어가는 일만 남는다. 어린 것과 젊은 것과 늙은 것이 공존하는 시간 속에서 세상 모든 것들은 태어난 뒤 줄곧 처음을 경험한다. 이 땅의 시간은 선형적으로 흘러간다. 여기 머물고 있는 존재라면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 유사 경험으로 미래를 예측하면서 늙고 병들고 사라진다. 두꺼비에게 헌집을 주고 새집을 받듯, 늙은 것은 새것에게 자리를 내주고 흐릿해진다.

 

박주애는 과거를 품고 있는 현재의 공간을 서성이면서 ‘폐지를 줍듯’ 늙어가는 것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관찰하는 중이다. 살펴보니, 사람이든 집이든 돌이든 바람이든 사는 것은 다 비슷한 것 같다. 관계는 관계로 이어져 있고, 이것은 저것으로 대치되며, 새것은 그을려졌다. 사라지는 것은 어쩐지 애틋했다. 그것이 나를 둘러싼 보통의 삶이었다.

작가는 추억으로 그을린 풍경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만 품고 사는 침묵하는 노인의 회색 눈빛을 보았다. 그들이 늙어가는 동안 도시에는 젊음이 늙음의 자리에 들어섰다. 할머니의 늙은 집이 어느 순간 담장만 남겨둔 채 지워졌을 때, 작가는 자신의 추억이 절단되는 기분이었다. 기억을 수채 구멍에 콸콸 버리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상실감은 흐릿해졌지만 할머니 집이 있던 동네를 지날 때면 잠겨 있던 추억이 떠올랐다.

 

작가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바다 위로 오래된 지붕을 둥실 띄웠다. 인간과 비인간, 문명과 본능의 구분에서 자유로울 것만 같은 반인반수 생명체에게 그 바다를 내주었다. 녹색 식물은 지붕만 남은 오래된 집 주변에 생명의 기운을 채워나갔고 반인반수는 오르락내리락 잠수했다. 

 

그 시간의 바다에는 아직 오래된 것들이 머물고 있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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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풍경-노근리, 2016, 피그먼트 프린트, 110×150㎝


사슴이 숨어 있다고 전해지던 한 부락 마을을 사람들은 ‘녹은(鹿隱)’이라 불렀다. 신화 속에서 지상과 천상을 매개하는 신령스러운 영매이자 영생, 재생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사슴이 숨어 사는 곳이니, 그 마을의 기운은 상상 가능하다. 마을이 이름을 잃은 것은 일제강점기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노근(老斤)으로 개명당했다. ‘녹은’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름을 빼앗긴 마을에도 일상은 흘렀다. 앞으로는 서송원천이 흐르고 주변을 산들이 둘러싼 전형적인 농촌 마을 사람들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터였다.

 

일상이 어그러진 것은 전쟁의 폭력성 때문이었다. 1950년 전쟁을 피해 길 떠나던 이들, 굴 속에 대피해 있던 사람들을 향해 미군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았다. 300여명이 살해당했다. 당시 미군은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한 민간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단다. 사람이 죽었으나, 그 죽음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권력은 입을 꼭 닫았다. 집집마다 매년 떼제사가 벌어졌으나 진실을 만나기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해방 이후 정치적 혼란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공동체 붕괴라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업해온 고승욱은 노근리 쌍굴다리를 바라보았다. 벽 곳곳에 동그라미와 세모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유족들이 학살의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총알 흔적에는 ○, 총알이 박힌 흔적에는 △ 표시를 해나간 결과 완성된 기묘한 벽화였다. 전쟁 이후 공동체적 규범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공동체가 제공하던 사회적 안전망까지 무너져 내렸던 마을에서, 제대로 이름을 찾지 못한 채 지워질 것을 강요당한 이들이 남긴 학살의 흔적, 죽음에 대한 소리없는 증언이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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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정복에 대한 이야기, 정복욕에 대한 이야기다. 김웅현은 해마다 새해 결심을 하듯 산에 다녀왔다. 등산을 즐기는 그가 관련 서적에서 발견한 일종의 기념화 ‘체르마트 클럽룸’에는 알피니즘의 황금기에 활약한 산

 

김웅현, 안자일렌, 2011, 혼합재료, 가변설치


악인 18명이 그려져 있었다. 한 장의 이미지 속에서 그는 숭고한 도전정신을 발휘해 목숨 건 사투 끝에 산을 정복한 이들의 쾌감을 마주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위험하다고 해도 오늘의 산행은 레포츠 정도의 무게감을 가질 뿐이다.

작가는 정복에 대한 역사적 위상과 대상이 변한 것을 알았다. 그는 등반뿐 아니라 세계대전, 산업개발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흔적들을 조사하면서 ‘정복’이라는 행위를 시대에 따라 다른 형식을 갖추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각적 클리셰라고 보았다. 거기에는 ‘신체’가 있었다.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오늘의 환경에서도 여전히 사건의 중심에는 신체가 있다. 원시시대처럼 수렵 채집에 육체를 사용하는 대신, 우리는 가상의 세계와 접속하기 위해 몸을 쓴다. 그 과정에서 신체는 어깨 결림, 체중 증가, 시력 저하를 경험한다. 몸이 마주하는 자극은 어떤 활동의 명확한 증거가 된다. 다만 어지간한 자극에는 반응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 우리 앞에 작가는 과장되게 클리셰를 반복하는 몸을 제시한다.

 

그는 1865년 난공불락의 마터호른산에 처음 오른 에드워드 휨퍼와 마터호른산 등반을 계획했다. 등반 코스를 구성하고 자금을 모았으며 클라이밍 강습을 받았다. ‘정복’ 행위에 미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공부도 했다. 이후 그는 마터호른을 ‘휨퍼’로 분한 지인과 함께 등반했다. 힘겹게 절벽을 오르고 길을 걷는 여정을 고스란히 영상에 담았다. 그들은 정상에 오를 때까지 산을 벗어나지 못했다.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며 정복의 쾌감을 누렸다. 영상에는 모종의 성취감도 담겼다. 험난한 등반이 이루어진 장소는 대한민국 어디의 운동장, 가상의 마터호른이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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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모든 인간은 늘 아주 단순한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그 두려움을 무대에 올린다. 1974년 그는 미술관 중앙에 섰다. 옆에는 72개의 사물을 올려놓은 탁자가 있었다. 작가는 관객이 마음껏 그 사물 가운데 무엇이든 선택하여 작가에게 어떤 행위든 할 수 있도록 했다. 처음 관객은 물을 선택하고, 꽃을 선택해 작가에게 전해주었지만 이내 가위로 옷을 자르고, 가시로 몸을 찌르고, 칼로 목을 베고, 피를 마시는 가혹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울라이, 연인들. 만리장성 걷기, 1988


고향인 베오그라드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간 그는 울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작가 우베 라이지펜을 만났다. 곧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함께 ‘관계의 에너지’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했다. 울라이가 아브라모비치의 가슴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아브라모비치가 활을 잡은 퍼포먼스 ‘정지에너지’는 상대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전제로 한 작업이었다. 둘 사이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화살은 곧바로 아브라모비치의 심장을 관통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공포의 감정은 상대방에 대한 완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바뀌었고, 작가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다. 12년간 이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이별을 맞이했다. 이들은 3개월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만리장성 중간으로 걸어갔고 그 길에 만난 두 사람은 작별의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길을 갔다.

 

“우리는 항상 삶 속에서 좋아하는 것만 합니다. 그래서 변하지 못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살다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해결책은 제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혹은 제가 모르는 것을 말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거나 그래서 실패를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자신의 육체가 다다를 수 있는 한계 지점까지 밀어붙이는 작가가 단 한번 경험할 수 있는 퍼포먼스 끝에 만나는 것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다.

 

김지연|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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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 5월 6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샌정, 무제, 2017, 혼합매체, 가변크기(두산갤러리 제공)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억의 잔상, 평소 누적된 상념의 부스러기는 그림이 될 수 있다. 동일한 장소에서라도 사람마다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기억을 쌓을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이들의 기억 간에는 조금의 연관관계도 필요 없다. 내면세계라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도 없고, 말해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그 세계를 일단 꺼내 놓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 왜 꺼내 놓으려고 하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겠다.

 

그 세계는 말하지 못하는 것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인지, 의미를 전하는 것인지 숨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비언어적 사유의 세계다. 그곳이 바로 화가 샌정이 화폭에 담는 세계다. 형태를 그리고 지우기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통해 경험은 누적되고 감정은 감추어지고 의미는 흐려진다. 말하지 못할 무엇은 그렇게 그림 속에 자리 잡는다.

 

사적인 기록을 소재로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타며 새로운 이미지를 길어 올리는 그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 형태로 자신의 심리적 경험을 담는다. 회화는 그 모호함을 정서적으로 담아내기에 꽤 유용한 장르다. 그래서 작가는, 회화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 롤러코스터를 타든 말든 꾸준히 그림을 그려 왔다. 하지만 그 모호함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친절한 소통을 할 의지가 없다면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공동체의 건강한 삶을 꿈꾸는 날선 예술적 발언, 그 선명성이 세상을 물들인다. 그런 예술작품이나 태도에 동의하는 것과 무관하게, 샌정의 화면 앞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흐릿한 그 세계가 주는 자유로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필자는 칸딘스키를 인용하여 샌정의 태도를 옹호한다. “작가의 눈은 자기 개인의 내적 세계로 뜨여 있어야 하며, 귀는 내적 필연성에 기울이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한 작품의 기본적인 요소인 신비스러운 필연성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제목 없는 그의 세계가 울림을 갖는 이유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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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낙원의 가족, 1950년대, 은지에 유채, 새김, 8.3×15.4㎝, MoMA 소장


낙원을 상상하는 일은 시공을 초월한 전 인류의 유희거리였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 속에 전해오는 낙원에 대한 이야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보면 ‘아무런 괴로움이나 고통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이라는 이상세계를 꿈꾸는 일은 인간이 현생을 이어갈 수 있는 일종의 동력일 수도 있겠다.

낙원을 다룬 대표적 소설 가운데 도연명이 남긴 <도화원기>에는 전란을 피해 산속 깊이 숨어든 유민이 등장한다. 물고기를 잡으러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다 길을 잃은 어부가 흐드러지게 핀 복숭아 꽃길을 따라 정처없이 노를 젓던 중 한 마을을 만난다. 잘 가꾸어진 풍요로운 그 마을에, 혼잡한 세상을 등지고 산속 깊이 들어와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는 유민들이 있었다.

도연명은 전란과 군벌항쟁의 세파 등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되풀이되는 시대에 살았던 인물인데, 당대에는 실제로 혼란스러운 도시를 벗어나 인적 없는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새로운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유민이 많았다. 늘 전원을 꿈꾸었다고 알려져 있는 도연명에게 그들의 선택은 삶을 살아가는 일종의 대안적 방식이고 이상향이었다. 그의 이런 가치관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었다.

작품의 진위를 둘러싼 숱한 스캔들, 행려병자로 이승을 떠난 비극적 말년,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고독과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불살랐다는 예술혼 같은 수식어에 받들어져 ‘신화’의 반열에 오른 이중섭에게도 ‘낙원’은 현실의 행복을 극대화시켜주는 곳, 현실의 고통을 상쇄시켜주는 곳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모마가 소장하고 있는 ‘낙원의 가족’에는 복숭아 꽃과 열매가 탐스럽게 피어 있는 숲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다. 고통이나 갈등은 없고 평화만 가득한 <도화원기`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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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뭍에 올라온 물고기는 재물을 약탈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감시자 역할을 하느라 반닫이며 뒤주의 자물통에 새겨졌다. 불가에서 물고기는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채 나태와 방일에 빠진 수행자에게 경각심을 주는 존재다. 물고기는 목탁이 되어 구도자의 타락을 방지한다. 불가에서 물고기의 상징은 중생을 생각하는 부처의 자비, 장애가 없이 자유로운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로까지 이어진다.


심점환, 바다에 누워 2, 2016, 캔버스에 유채, 100×119.8㎝


신라 실성왕 15년 3월, 동해변에서 뿔 달린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해 5월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솟구쳤다. 이듬해 5월 왕이 죽었다. 백제 의자왕 19년 5월에는 사비하에서 길이가 30척이나 되는 큰 물고기가 죽어서 떠올랐다. 이듬해 백제는 망했다. 물고기가 죽고나면 누군가의 세상은 사라졌다.

화가 심점환은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사람으로 살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차라리 곤충이나 식물처럼 미물로 태어났다면 희망과 불안에 얽매이지 않았을 것이란다. 불안은 종종 허무를 낳는다. 생겨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이왕 생겨났으니 가능한 한 빨리 썩어서 없어지는 것이 좋겠단다. 빨리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은 그의 마음은 붉은 화면 가득 물고기를 해체하여 쌓아놓았다. 머리를 잘라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냈다. 생선찌개를 주문하면 쉽게 만날 수 있는 모양새건만, 어쩐지 입에 침이 고이지는 않는다.

생명을 잃은 물고기는 무엇인가의 밥이 될 것이고, 악취를 풍기며 썩을 것이고, 흙으로, 어쩌면 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생명이 될지 모른다. 누군가의 세상은 소멸하지만 또 누군가의 세상은 열릴지 모른다. 이것은 희망일까 불안일까. 희망이 있어서 불안한 것일까. 그때도 희망이 없을까봐 불안한 것일까. 희망이 있으니 불안하지 않은 것일까. 희망이 없으니 불안할 일 없는 것일까. 물고기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해체된 몸통 밖에서 부레만 보석처럼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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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만든 자.” 이는 ‘죄악에 물든 타락한 일상’을 무덤덤하게 살아내는 인간을 향해 악마 가득한 지옥그림을 내놓아 경종을 울린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 추정)의 별명이다.


신학철, 한국현대사 095, 콜라주, 2010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를 주제로 작업한 그는 환상적인 이미지와 기묘한 상징성이 어우러진 화풍으로 오늘날까지 주목받고 있다. 그가 묘사한 왜곡된 신체, 동물과 벌레, 인간을 혼종한 군상은 그로테스크한 정서를 견인하면서 인간세계의 죄악을 풍자하고, 세기말 특유의 염세적 세계관을 분출한다.

그의 화면은 천재지변, 전염병, 전쟁, 반란 등 역경의 14세기를 겪은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닿아 있는데, 이들에게 세상은 부도덕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섭고 추한 곳이었다. 그 시대 몇몇 사람들은 1500년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신학철이 2010년 경향갤러리에서 열린 노무현 서거 1주기 추모전 ‘노란선을 넘어서’ 출품작을 준비하면서 보스의 작품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1515-1516)를 떠올린 것은 노무현 서거 전후 그를 둘러싼 정치 사회적 지형을 지켜본 소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 작품 이미지와 노무현의 사진을 콜라주했다.

화면 중앙에 얼굴을 잔뜩 찡그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다. 원작에서는 십자가를 멘 예수가 있던 자리다. 그 주위에는 추악한 분위기를 감출 수 없는 극적인 표정의 인물이 가득하다. 보스는 이들의 거친 외양을 통해 죄악에 눈이 먼 인류의 한 극단을 표현했고, 신학철은 이 메시지를 고스란히 현재로 가져왔다. 인간의 원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자리에 세워진 노무현의 사진은 비행기 안에서 고도로 인해 귀가 먹먹해진 순간 찍힌 것이다.

그가 떠나고 7년이 흘렀다. 시간이 흘러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상황에 따라 해석과 평가가 흔들릴 뿐이다. 작가가 이 작품에 처음 붙인 제목은 ‘귀가 막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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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내내 낙원동에는 ‘낙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잊지 마세요. 5월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입니다’라고 적힌 분홍색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질병으로 취급했던 동성애를 1990년 5월17일에야 비로소 질병 분류에서 삭제했고, 2004년 5월17일 미국 최초로 매사추세츠주가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 이 의미 깊은 날은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 이성애 중심 문화는 종교의 산물이라고 정의 내린 루이 조르주 탱의 제안으로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로 선포되었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즈, ‘무제(피)’, 1992, 플라스틱 비즈


쿠바 난민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한 미술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즈는 동성애자가 범죄자와 다를 바 없던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다. 연인을 에이즈로 잃고, 그 역시 에이즈 합병증으로 죽어가면서도 유색인종, 성소수자에게 쏟아지는 혐오와 차별의 시선에 매몰되지 않고 예술적 정체성을 확보했다.

그가 1992년 처음 발표한 설치 작품 ‘무제(피)’는 소수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불편함을 절묘하게 표현한 작업이다. 그는 전시장 통로에 붉은 구슬로 만든 발을 설치했다. 관람객은 이 발을 통과해야 전시장에 들어설 수 있다.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발은 성소수자를 은유한다.

그들과 접촉하는 순간, 사람들은 내가 어떤 질병에 감염되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두려워한다. 그 불쾌함과 불안감을 촉각적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이 작품은 에이즈로 공포에 떨던 시절 성소수자와의 접촉을 꺼리던 사람들의 혐오 가득한 태도에 대한 작가의 심리상태를 전한다. 이후 이 작품은 구슬의 색깔과 설치 면적을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전시됐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혐오는 성소수자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장애인 복지시설을 혐오시설이라 규정하며 설립을 반대하던 어느 지역 주민들의 단체 행동에서도 공포에 가까운 혐오의 시선을 봤다.

다양성이 공존하는 환경이 내 삶에 더 커다란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절대로 믿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토레즈의 작품은 무거운 의미로 다가온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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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희, 한길, 1980, 162.7×130.3㎝, 캔버스 유채


하늘을 가득 메운 것은 틀림없이 먹구름이다. 좋지 않은 징조를 비유할 때 등장하는 먹구름이 공기를 압박하면서 무겁게 땅으로 내려앉을 기세다. 그래서인지 거리는 어둡기만 하다. 구름 아래 동네에는 아이들이 모여 있다. 얼굴에 표정은 없지만 이들은 볼이 빨갛게 상기될 정도로 집중해서 뛰어노는 중이다. 저 멀리 자전거 타는 아이들이 보이고, 동생을 등에 업고 길에 나온 소녀의 모습도 보인다. 일군의 아이들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무심히 화면을 훑어내리다보면 한 인물과 눈이 마주친다. 관람자를 향해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고 서 있는 이 아이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오싹하다. 그러고 보니, 화면 속 몇몇 아이들이 총을 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누군가는 감시당하며 바닥에 엎드려 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곳곳에서 보인다. 어떤 아이는 포박당한 채 끌려간다. 아이들은 다름 아닌 전쟁놀이에 몰두하고 있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다니던 노원희는 대구 변두리에서 전쟁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전쟁놀이를 즐긴다. 그 장면을 보면서 작가는 왜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장난감 총, 칼을 가지고 골목길을 누비면서 뛰어놀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성’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성장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가 거리에서 마주한 장면은 작가에게 개인의 사적인 폭력성 차원이 아니라 사회가 품고 있는 거대한 호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작가는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은 이 장면을 담은 그림을 1979년 시작해서 80년 초에 마무리했다. 작업의 출발은 전쟁놀이지만, 거리에 짙게 깔려 있는 어두운 분위기는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암울한 근미래, 곧 들이닥칠 위기에 대한 징후처럼 보인다.

그 시절로부터 세월은 꽤 흘렀지만 오늘날 우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놀이에 몰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36년 전 노원희의 작품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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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은 어쩌면 동시대 우리의 일상에서는 멀어진 유물이다. 방에서 구들장을 들어내면서 아궁이가 사라졌고, 그 위에 자리 잡았던 가마솥도 부엌을 떠났다. 환경이 바뀌면 도구는 달라진다. 하지만 대가족의 세끼 식사를 감당해야 하는 큼직한 무쇠 가마솥이 부뚜막에 걸려 있던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직 있다.


임옥상, 가마솥은 어머니 어머니는 가마솥, 2010, 철, 70×70×120㎝


가마솥에서 구수하게 올라오는 밥 냄새를 맡으면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쉽게 뜨거워지지 않지만 한번 뜨거워지면 쉽게 식지 않는 무쇠 가마솥만이 전해줄 수 있는 음식의 풍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그런 이들에게 가마솥 밥은 그리움이다. 몇몇 식당은 여전히 커다란 가마솥을 사용해서 밥을 짓고, 탕을 끓여 사람들의 추억 여행에 동행한다.

어느 날, 임옥상은 길에서 가마솥을 주웠다. 잔뜩 녹슨 채 길가에 버려진 가마솥을 보며 가마솥 근처를 떠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는 가마솥을 보면 어머니가 떠오르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마솥이 따라온다. 어머니는 늘 가마솥 앞에서, 밥을 달라면 밥을 해주시고, 죽을 달라면 죽을 쑤어 주시고, 고구마니 옥수수, 밤, 감자도 쪄주셨다. 곰국도 끓여 주고, 떡도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가마솥으로 생명을 키우셨다. 작가는 부뚜막을 떠나온 가마솥에 어머니 이야기를 담았다. 가마솥 곁에 머물면서(사실은 엄마 곁을 좀처럼 떠나지 않은 채) 맛난 것을 해 달라 보채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적었다. 그렇게 정리한 글귀로 기둥을 짓고 그 위에 가마솥을 올렸다. 철판을 레이저로 잘라내 만든 글기둥은 마치 아궁이의 불길처럼 용도를 다한 솥을 받쳐 일으켜 세웠다. 언제 길에 버려져 있었던가 싶게, 가마솥은 그 길 위에 다시 섰다.

글의 불기둥은 나도 모르게 그만 식어가던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 불을 지핀다. 가마솥은 낡고, 혹여 사라진다 해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마음이 구시대 유물이 되지는 않을 터. 임옥상의 가마솥은 아마도,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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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들어서면 아홉 개의 모니터에서 아홉 사람의 손이 움직인다. 양손을 꼭 쥐기도 하고, 비비기도 하고 주먹을 쥐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한다. 프랑스 작가 말릭 오하니안은 손의 동작과 연동해 그들 손이 만드는 박수 소리를 리드미컬하게 편집해 전시장을 채웠다. 경쾌한 박수 소리가 있으니 손동작이 흥겹게 보이는데, 화면에 집중하다보면 거칠고 투박한 손등이며 손가락 마디가 눈에 들어온다,


손의 주인공들은 아르메니아의 실직 노동자들이다. 1991년 독립을 선언한 이후 아르메니아는 시장경제로 전환을 시작하는데, 대량실업, 빈곤, 양극화 현상을 겪으면서도 2004년에 이르면 1990년대 수준으로 경기를 회복한다. 2002년 무렵부터는 한 해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경기가 회복되었지만, 생산 시스템이 변하고 공장이 줄어들면서 숙련된 노동자들은 실업 이후 쉽게 직장을 찾지 못했다.

말릭 오하니안은 인력시장에서 ‘취업’을 기다리는 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손을 보았다. 손은 말, 눈과 더불어 사람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손짓이 말보다, 눈빛보다 더 풍부한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


말릭 오하니안, 손, 2002, 영상, 4분20초


손에는 그 사람이 걸어온 삶의 궤적이 새겨지게 마련이다. 노동으로 굵어진 손마디, 거친 피부 등 눈에 보이는 특징도 있지만 오랜 세월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서 규칙적인 속도에 맞춰 물건을 조립해 왔던 이들의 손은 일하던 시절의 속도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는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박수의 리듬을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움직이던 속도에 맞춰 편집했다. 리듬을 타며 흥겨운 감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던 다채로운 이 손짓들이 그 리듬에 숨겨진 의미를 듣는 순간, 공장에서 업무 속도에 맞춰 자신의 일에 집중했던 노동자의 손으로 보인다. 동시에 어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일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세상으로 전하는 수신호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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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계절이다. 부정선거를 심판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피 흘린 4·19 혁명이 56주년을 맞이했고, 4·13 총선은 민주주의가 후퇴해가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며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 선거혁명이라고 불린다. 5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여러 차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번 선거 결과를 보니 이제 피로써 권력을 심판하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이우성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들’, 캔버스에 과슈, 259.1×569.6㎝


선거 과정에서 내가 흥미로웠던 것은 ‘시민의 눈’이라는 자발적인 시민 감시단의 활동이었다. 부정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두 눈을 부릅 뜬” 이들의 활약은 여러 면에서 자극제가 되었다. 그들이 눈을 뜨고 지켜보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시민의 눈’을 보면서 이우성의 작품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높이가 259㎝로 꽤 큰 그림이라 그 앞에 서면 군중의 기운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든다. 화면 속 사람들은 모두 정면을 응시하는데, 밝은 표정은 아니다. 군중 한가운데 서 있는 누군가는 ‘승리’라고 적은 머리띠를 둘러매고 있고, 앞열의 몇 사람은 타들어가는 불꽃을 손에 쥐고 있다. 거울을 들어 화면 앞에 서 있는 우리를 비추는 인물도 보인다. 그 거울을 통해 나도 군중 속으로 들어간다.

화면을 가득 메운 이들은 작가 또래인 20~30대 청년들로, 이들은 현재 불만을 분출 중이다. 작가는 20대 시절, 청년세대가 사회 구조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느끼는 부조리함, 사회적 약자로서 체험하는 불안, 좌절의 나날들을 화면에 담았는데, 이 그림도 그런 문제의식을 다루던 시기에 완성했다. 그는 “이 불만은 나의 얘기면서 너의 얘기이기도 해”라고 말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 고민과 불만을 품고 살지만 그 고민과 불만의 원인이 모두 개인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공유한다. 정당한 불만을 분출하는 이 시대 청년 군중의 집단 초상은 그렇게 두 눈 부릅뜨고 우리를 응시한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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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바다에서 왔다고 했다. 생명 탄생의 첫걸음이 바다에서 시작한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는 무한함을 상징한다고 했다.


류준화, 기다림-11, 2015,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콘테, 석회, 112×193.9㎝


그리고 인간은 무한하다 싶은 것 속에 있다고 느낄 때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고 했다. 그래서 바다를 항해하는 배야말로 인간의 대담함과 지혜로움의 증거라고 했다.

생명의 요람 바다에는 생명이 버려지기도 했다. 아비 목숨을 살릴 생명수를 구해 온 바리데기도 애초에는 부모가 바다에 버렸다. 오매불망 아들을 기다리던 부부 사이에서 일곱 번째로 태어난 딸이었기 때문인데, 부모는 그가 꼭 죽기를 바란 건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 좋은 사람이 구해서 키워주어도 좋겠다 싶었단다. 운좋게 노부부가 구해주어 잘 자란 바리데기는, 제 목숨 살리자고 그제서야 버린 딸을 찾아나선 아비를 위해 생명수를 구하러 지옥길을 떠났다.

지난한 고행의 시간과, 아이를 일곱명 낳아 기를 만큼의 기다림 끝에 저승의 약수를 손에 넣은 바리데기는 그 물로 관에 누워 뼈만 남은 아비를 살렸다. 그 후 바리데기는 사령을 통제하고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 훗날 연구자들은 바리데기 신화에서 부계 질서의 모순을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염원과 그 원동력을 발견하기도 했다.

류준화에게 바리데기 이야기는 여성, 더 나아가 이 땅의 소수자들이 처한 현실이면서 동시에 희망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바리데기들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흘러갔다. 강물이 바다로 모이는 것이 순리이듯, 강 위의 바리데기들이 이제 바다에서 만났다. 바다를 바라보는 바리데기들의 머리며 어깨 위에는 꽃이 피어 있다. 못다핀 생명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양 화사하기만 하다. 손을 잡고, 시선을 주고받는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안다. 먹먹한 바다 앞에 서 있는 이들의 손에 저승의 약수가 들려 있다면 좋으련만. 그 요원한 꿈은 마음 깊이 접어둔 채, 잊지 않겠다고 되뇌며 기다림을 멈추지 못한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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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농부의 아들이다.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에서 태어나 성장한 화가 이종구에게 농촌과 고향은 작업의 핵심이다. 그에게 고향의 농부들은 우리나라 농경문화 전통의 마지막 세대일 것만 같다. 그들은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었고, 세계화, 자유무역협정(FTA)의 벽 앞에 무력했다. 시간은 흐르고 권력은 야멸차게 농부의 권리를 앗아가지만 그들은 농촌에서 농부로 산다. 다만 새로운 농부 세대의 등장이 요원할 뿐이다.

‘오지리에서’ 연작은 대선 포스터 앞에 앉은 농부들의 표정을 쌀부대 위에 그린 작품이다. 첫 작품은 1987년 대통령 선거 이후 농부들의 모습이고, 두 번째는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앞에 그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세 번째 그림은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때의 풍경이다. 이종구는 같은 농부들을 20년간 화폭에 담았다. 그사이 농부들은 늙고, 병들고, 작고했다. 포스터 속 대권 주자들은 생기 있는 표정에 세련된 복장을 하고 희망 넘치는 공약을 유권자들에게 투척하지만, 화가가 그려넣은 농부들의 표정은 시큰둥할 뿐이다. 그들이 들었던 약속의 말은 농촌을 약속의 땅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이종구 ‘다시 오지리에서’ 2003년 종이에 아크릴릭, 인쇄물, 215×195㎝

20년 세월 따라 쌀부대는 정부양곡에서 일반미로, 급기야 미국 수입쌀 칼로스 부대로 변했다. 수입개방으로 농촌은 피폐함을 넘어 붕괴됐으나, 정치인에게 농촌은 ‘표밭’일 뿐, 우리 생명의 뿌리가 아닌 모양이다. 농촌에서 바른 먹거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농부 백남기는 권력의 물대포를 맞아야 했고, 여전히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맨다. 권력은 사과하지 않으니, 농촌도 혼수상태다. 그런데 또 유혹의 ‘시즌’이 왔다. 물광 피부의 권력자들은 농부의 거친 손을 잡으며 달달한 공약을 뿌리고 있을 게다.

이제 오지리의 두 농부는 더 늙고 병들어 동네 보건소 다니는 일이 일상이 되었단다. 대선 때마다 거짓 구호에 속는 농부들의 삶을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이 연작은 세 분 모두 작고하시면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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