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어떤 연유로 신내림을 받고, 또 어쩌다 신과 소원해지는지 무당마다 다른 사연이 넘쳐나겠지만, 신기를 잃은 무당은 그간 당집에 애지중지 모셨던 ‘신상’을 내다 버린단다. 관상학에서 말하는 호상, 당대 가장 이상적인 사람의 얼굴을 담아 만들었다는 불상 등 세상의 좋다는 형상 여기저기에서 가져온 이미지를 짜깁기해 자신의 신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굿을 해 신령을 모셨을 테지만, 끝이 오면 의미와 정성, 시간을 쏟아부었던 형상들과 가차 없이 이별한다.

 

김형관, 눈부신 그늘, 2018, 혼합재료, 가변설치 경기도미술관 제공

 

그들이 버린 신의 껍데기가 현대인들의 그림자에 주목해온 작가 김형관의 손에 들어왔다. 영험함을 상실한 최영 장군, 산신, 벅수동자, 선재동자 상은 2012년 그의 개인전 전시장에 등장한 이후 창고에 잠들어 있다가 2018년 ‘경기천년 도큐페스타’의 전시, ‘경기 아카이브_지금,’에 다시 나타났다. 경기라는 이름이 탄생한 지 천년이 된 것을 기념하며 과거와 현재를 기억, 기록하고 미래 천년을 내다보는 이 행사는 경기상상캠퍼스 내 (구)임학임산학관에서 열리는 중이다.

 

참된 지혜와 깨달음을 얻은 중생이 극락정토로 가기 위해서는 반야용선을 타야 한단다. 기획자는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는 이 건물을 ‘반야용선’이라 명명하면서, 이 전시가 경기인의 꿈을 싣고 미래 천년 경기의 바다를 항해하는 하나의 용선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사물이며 공간이 의미를 입고, 버리고, 또 다른 의미를 얻는 일은 되풀이된다.

 

기획자는 작가와 협의하여 1층 입구에 설치하기로 했던 신상을 옥상 위, ‘반야용선’의 꼭대기로 올렸다. 한때 사람들의 지독한 기도를 받아야 했던 신상이라면, 여전히 ‘영물’일지도 모를 일. 공기를 떠돌던 신들이 문득 발견한 이 신상에 잠시 머물다, 기도의 목소리를 듣고, 또 홀연 떠날지 누가 알까.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려진 신의 껍데기들  (0) 2018.10.15
익숙함과 낯섦 사이  (0) 2018.10.08
초속 5센티미터  (0) 2018.10.01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  (0) 2018.09.27
다바왈라의 점심  (0) 2018.09.17
사소하게 진부하게  (0) 2018.09.10
Posted by Kh-art

안정주, T.P.A(트리거, 펄스, 앰플리피케이션), 2018, 싱글채널 비디오, 사운드 ⓒ 안정주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새롭다. 그 새롭고 낯선 것에 호기심이 발동하는 일은 순간, 곧 익숙해진다. 그러다가 이제는, 어쩌다 낯선 상황을 만난다 해도 “이 정도 낯섦쯤이야!” 하고는 과거의 경험을 응용하여 적용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에서 능숙하게 패턴을 발견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세상에 새로울 것은 별로 없다.

 

익숙해서 편안하거나 지루하거나. 그 쳇바퀴 안에서 평범한 일생은 흘러갈 것이다. 소소한 개인사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처럼 많은 이들의 삶이 얽혀 있는 영역에서도 사람들은 점차 무감각해진다. 한번 자리 잡은 ‘익숙함’을 흔드는 일은 쉽지 않다.

 

작가 안정주는 그 익숙함이라는 표피를 전혀 다른 감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해서, 또 다른 질서를 만들고, 이를 통해 현실을 재발견하는 작업에 관심이 있다. 이러했던 작가에게, 굳이 한글을 만들고 굳이 중국과 다른 음의 기준 ‘황종’을 만든 세종대왕은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안정주는 세종의 음악적 업적 안에서 음악을 통해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조선을 다스리고자 했던 한 행정가의 도전을 보았다. 작가는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에서 모티브를 얻어, 비디오 안에서 소리와 이미지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작업을 완성했다. 정간보의 소리기호를 오디오 신시사이저에 입력하면, 소리는 트리거(방아쇠)가 되어 진동을 일으키고, 증폭·변형되면서 자연발생적인 음악을 만든다. 그리고 이 음악이 또 하나의 신호가 되어 ‘트리거, 펄스, 앰플리피케이션’의 과정을 거쳐 이미지를 만든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소리와 이미지의 익숙하고도 낯선 조응과 변주가 관객을 감싼다.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역사 속 정간보가 작동하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시스템의 탄생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려진 신의 껍데기들  (0) 2018.10.15
익숙함과 낯섦 사이  (0) 2018.10.08
초속 5센티미터  (0) 2018.10.01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  (0) 2018.09.27
다바왈라의 점심  (0) 2018.09.17
사소하게 진부하게  (0) 2018.09.10
Posted by Kh-art

신카이 마코토, 초속 5센티미터, 2007, 애니메이션, 62분 ⓒ 신카이 마코토, 코믹웨이브 필름

 

빛이 1초에 30만㎞를 가고, 소리가 1초에 340m를 갈 때, 벚꽃은 5㎝를 갔다. 사실은 떨어졌다. 데뷔 초 1인 창작자로 주목받던 작가 신카이 마코토는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벚꽃잎의 ‘느린’ 속도에 기대, 사랑과 상실, 그리움, 그리고 무기력의 감정을 소환했다.

 

‘초속 5센티미터’에 등장하는, 한때 어렸던 두 주인공은 같은 학교라는 가까운 거리 안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의 속도를 높인다. 이후, 여자주인공이 1500㎞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간 뒤, 물리적 거리와 마음의 거리가 조금씩 어긋나면서 이들의 통증이 시작되었다. 여자 친구를 만나러 길을 떠난 어린 그는, 마침 쏟아져 내린 폭설 때문에 역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 정차하고 느리게 달리는 기차의 속도에 반비례하여 달아오르는 마음에 고통을 받았다.

 

서로를 향한 마음의 속도는 느림과 빠름 사이를 오가다가 서서히 멈추었다.

성장한 남자 주인공은 주변 다른 이들이 다 그렇듯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고, 생존해야 했다.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 무엇인가를 향해 남들처럼 손을 뻗고, 세상의 속도가 운행 중인 궤도 위에 발을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걷는 삶의 속도는 자꾸 어긋나, 궤도 위에 안착하지 못했다. 세상의 속도가 어지러운 그는 자꾸 머뭇거리고, 사람과의 거리, 사회와의 거리를 조절하는 데 실패한다.

 

여자 친구와 마음의 거리를 1㎝ 좁히는데 1000통의 문자와 3년의 시간을 쓴 그는 이별을 맞이했다.

 

세상의 속도에 길들여지지 못하는 이가 세상 앞으로 다가가는 속도는 여전히 중력과 바람에 휘청이는 초속 5㎝다. 그사이 세상은 저만치 멀어졌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려진 신의 껍데기들  (0) 2018.10.15
익숙함과 낯섦 사이  (0) 2018.10.08
초속 5센티미터  (0) 2018.10.01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  (0) 2018.09.27
다바왈라의 점심  (0) 2018.09.17
사소하게 진부하게  (0) 2018.09.10
Posted by Kh-art

박이소,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 퍼포먼스, 1984, 퍼포먼스, 사진 ⓒ박이소,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84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박이소(당시 이름 박모)는 교회 자선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인 가정의 추수감사절 만찬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신께 감사하며 다른 인종, 타 문화인에게까지 ‘은혜’를 베푸는 이날, 미국인들은 칠면조, 옥수수, 으깬 감자, 호박파이, 크랜베리 소스를 비롯하여 새 곡물로 만든 푸짐한 음식을 저녁식탁에 올리고, 미소로 동양인을 맞이했을 거다.

 

요새는 인간의 ‘은혜로움’이 더 멀리 뻗어나간 덕분에, ‘사면식’을 치른 칠면조는 추수감사절 식탁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대신 동물원이나 농장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다. 트럼프도 이 사면식에 동참했다 하니, 칠면조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은혜의 상징이다.

그날 이후 박모는 사흘간 밥을 굶었다. 단식은 그에게서 쓸모없는 기력을 빼앗는 대신 맑은 머리를 주지 않았을까. 단식을 마치고 그는 플라스틱으로 가마솥을 만들어 목줄에 매달아 끌면서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를 건넜다. 당시 가까이 지내던 작가 강익중이 곁에서 그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추수감사절이 나에게는 행복한 날이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나는 이상한 퍼포먼스를 해서 아방가르드 미술가가 되는 제스처를 해보고 싶었다. 나는 내가 일종의 정치적 미술가라는 걸 보이고 싶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나 핑계가 필요해서 예술을 한다던 그의 ‘터무니없는 정직함’이 아궁이에 올라가는 순간 그대로 녹아 일그러질 플라스틱 가마솥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추수감사절이 가면 블랙프라이데이가 온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익숙함과 낯섦 사이  (0) 2018.10.08
초속 5센티미터  (0) 2018.10.01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  (0) 2018.09.27
다바왈라의 점심  (0) 2018.09.17
사소하게 진부하게  (0) 2018.09.10
아모스의 세상  (0) 2018.09.03
Posted by Kh-art

다바왈라는 인도 뭄바이의 도시락 배달부다. 그들은 고객의 점심을 가정에서 받아와, 기차로, 수레로, 자전거로 오후 1시 전까지 사무실 책상에 배달한다. 고객이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빈 도시락통 ‘다바’를 가정으로 돌려보내야 비로소 일이 마무리된다. 여름에도 격식을 갖춰 하얀 긴팔 셔츠를 입는 인도 남성들에게 점심 도시락통과 함께하는 출퇴근이란 안될 말이다. 한 명의 다바왈라가 50명의 도시락을 책임지고 배달하는 시스템 덕분에 평균 2시간 안팎의 출근길이 가볍다. 다바왈라의 활약은 어느새 100년이 넘었다.

 

천경우, 다바왈라의 점심, 2017, 퍼포먼스와 50개의 인도 도시락통 ⓒ천경우

 

첨단 기술도, 전문 지식도 없이, 심지어 문맹자들까지도 능숙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인간노동력 중심’ 다바왈라 배달 시스템은 8000만건 가운데 사고는 300~400건에 머물 정도로 정확하다. 페덱스 같은 운송업체를 포함한 일류 기업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

 

천경우는 배달이 직업인 그들 손에 그들을 위한 ‘다바’를 배달해주기로 했다. 작가는 50명의 ‘다바왈라’에게 원하는 점심 메뉴를 물었다. 매일, 매 끼니, ‘뭐 먹을까?’ 이야기하는 우리에게는 새로울 것 없는 이 질문이 그들에게는 생소했다.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을 안고 사는 왈라들은 메뉴를 선택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도 먹어본 적 없다는 ‘피자’가 그나마 독특한 주문이었고 대부분은 작가가 준비하는 데 무리가 없는 인도의 평범한 식사를 이야기했다. 작가는 스태프와 함께 그들이 원하는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서 점심시간에 맞춰 그들 손에 배달했다. 새로운 ‘점심 문화’가 점점 퍼져나가는 뭄바이에서,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직업군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왈라들은, 그렇게 단 한번, 자신이 선택한 ‘점심’을 서비스받았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속 5센티미터  (0) 2018.10.01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  (0) 2018.09.27
다바왈라의 점심  (0) 2018.09.17
사소하게 진부하게  (0) 2018.09.10
아모스의 세상  (0) 2018.09.03
물렁뼈와 미끈액  (0) 2018.08.28
Posted by Kh-art

때로는 어떤 이유에서든,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지쳐버리는 경우가 있다. 피로도가 고점을 찍는 순간, 회의감, 환멸감 같은 감정에 휩싸인다. 그러다가 문득, 지난한 설득의 과정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시작된다.

 

기록매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당대의 정서와 호흡하지 못한다고, 잊을 만하면 끌려나와 사망선고를 당하는 회화는, 당위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사실은, 회화 매체로 작업하고 싶은 예술가들이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먼저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붓을 들고 싶은 자기 자신이었다.

 

빌헬름 사스날, 무제, 2010, 캔버스에 유화, 200×220㎝ ⓒ 빌헬름 사스날, 안톤 컨 갤러리

 

예술가가 되기 전 건축을 전공한 빌헬름 사스날은 사진을 찍고, 영화를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 그는 1972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소비에트가 무너지면서 불어닥친 ‘격변’의 시대에 20대를 보냈다. 황량한 세상을 목도하며, 전쟁, 선전선동, 자본주의의 폐해, 부패한 정부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드러내는 작업도 했지만, 그는 사실 회화에 ‘선전 선동’의 힘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회화가 가지고 있는 돌풍의 반경은 너무 작다. 세상 모두가 ‘큰 그릇’이 될 필요는 없으니, 마이크로 스케일은 거기에 맞는 대화법을 쓰면서 살면 된다.

 

그래서 그의 화면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흰색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맨발로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있는 남자의 모습처럼 소소하다. 그렇다고 ‘거대하고 심오한’ 이야기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엉망진창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고 싶고, 때로는 나밖에 모르는 지독한 이기심을 긍정하고 싶을 뿐이다. 사소하고 진부해져도 무엇인가는, 누군가는, 때때로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 아닌가.

 

<김지연 |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  (0) 2018.09.27
다바왈라의 점심  (0) 2018.09.17
사소하게 진부하게  (0) 2018.09.10
아모스의 세상  (0) 2018.09.03
물렁뼈와 미끈액  (0) 2018.08.28
연습을 위한 연습  (0) 2018.08.20
Posted by Kh-art

세실 에반스, 아모스의 세상:에피소드 1, 2017, 건축·비디오 설치 ⓒ세실 에반스

 

“나는 뭔가 중요한 것을 짓고 싶다. 아니,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아니, 나는 나를 표현하고 싶다.” 세실 에반스 작품에 등장하는 건축가 아모스는 뛰어나지만 악랄하고, 좌절과 분노 사이를 오가는 생활에 익숙하며, 능수능란하게 거짓을 말하는 오만함을 즐기는 백인 남성 건축가다. 그는 사회적으로 꽤 급진적인 요소들을 장착한 공동주택을 설계했다. 도시에 새로운 질서를 제안하고도 남을 이 주택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아모스는 “자본주의 시대를 위한 완벽히 개별적이면서도 함께하는 공동체 생활공간”을 꿈꾼다. 그가 꿈꾸는 생활공간을 만들기 위해 작가 에반스는 ‘이상적 공동사회로서의 집합주택’ 모델로 등장했다는 르 코르뷔지에의 마르세유 집합주택, 모듈화의 기수로 꼽힌다는 모셰 사프디의 해비타트 67, 철거 진행 중인 앨리슨·피터 스미슨 부부의 공동주택 로빈후드 가든 등을 모델로 삼았다. 새로운 기술이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작가에게 ‘공동주택’은 감정의 여러 케이스를 상상할 수 있는 효율적 장소다.

 

입주자들은 건축가의 ‘이상’을 따르지 않는다. 신중하게 설계하고 구성한다 한들, 네트워크에 균열이 생기고 인프라가 붕괴되는 일은 낯설지 않다. 건물이 거대해질수록, 개인들은 거대한 규모로 공존하고 건물의 거대한 인프라스트럭처에 결합·의존하며 생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인은 나를 통제하는 시스템에 무조건 순응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권리와 시스템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있다. 작가는 이 공동주택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상 가능한 일들을 TV 드라마처럼 펼쳐내며 개인과 공동체가 아름답게 공존하는 판타지를 섬세하게 무너뜨린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바왈라의 점심  (0) 2018.09.17
사소하게 진부하게  (0) 2018.09.10
아모스의 세상  (0) 2018.09.03
물렁뼈와 미끈액  (0) 2018.08.28
연습을 위한 연습  (0) 2018.08.20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산 이야기  (0) 2018.08.13
Posted by Kh-art

원숭이의 빨간 엉덩이가 높은 백두산에 다다르는 여정처럼, 동해 추암의 기암괴석은 해안의 절경을 낳고, 상상을 낳고, 전설을 낳고, 소원을 낳고, 믿음을 낳고 ‘촛대바위’가 되었다.

 

임영주, 밑_물렁뼈와 미끈액, 캔버스에 유화, 2017, 40×20㎝×7pcs, ⓒ임영주

 

담벼락 위의 얼룩무늬, 진흙수렁처럼 자연이 의도치 않게 연출했을 무질서한 흔적 속에서 형태를 뽑아내라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조언은 시각의 오류가 상상의 미덕에 닿는 쾌감을 제공하지만, 그런 연상의 과정은 어쩐지 전형적이고 통속적이다.

 

울릉도 저동항에 있는 촛대바위는 추운 겨울 일하러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다 돌이 되어버린 효녀라던데, 추암의 촛대바위는 본처와 소실을 거느렸던 남자란다. 두 여인의 지나친 투기에 하늘이 노해 벼락을 날려 남자만 남겨놓았다니, 에로는 호러와 닿아 있다.

 

이제는 동해의 시그니처가 되어, 해돋이 출사길에 나서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카메라로 순간포착해야 할 촛대바위는 임영주의 작업 속에서 무릎과 만난다. “뼈와 뼈가 연결된 곳에는 물렁뼈와 미끈액이 들어 있다.” 과학책에서 건져 올린 이 문장으로 작가는 촛대바위의 껍질 아래 숨겨진 생생한 물렁뼈와 미끈액을 찾았다. 견고하게 닫힌 구조 사이를 물렁물렁 미끈하게 유영한 덕분이다. 아마도 초록색 이끼로 뒤덮였을, 뻣뻣하게 말라붙은 바위 아래 매끄러운 무릎이 있고, 물렁뼈가 있고, 그 사이로 미끈액이 흘러 다닌다. 딱딱하고도 부드러운 촉감이 뼈와 뼈 사이로 파고들어 솟아오른다.

 

물렁뼈가 퇴화한 ‘늙은 관절’은 균형을 잃는다. 그의 신체는 줄어들고, 중심은 앞으로 쏠리며, 보행속도와 보폭은 감소한다. 늙은 걸음은 통증을 동반한다. 뼈와 뼈가 만나는 모든 관절에서 물렁뼈는 언제라도 소실될 수 있다. 부드러운 완충지대란 언제라도 소멸될 수 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소하게 진부하게  (0) 2018.09.10
아모스의 세상  (0) 2018.09.03
물렁뼈와 미끈액  (0) 2018.08.28
연습을 위한 연습  (0) 2018.08.20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산 이야기  (0) 2018.08.13
유토피아 스테이션  (0) 2018.08.06
Posted by Kh-art

오민, 연습무의 연습무, 2018, 6분18초, 4채널 오디오 설치 ⓒ오민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연습이 과정이라면, 그 종착점은 최고의 결과일까. 특정한 행동을 더 능률적으로 해낼 필요가 있을 때, 사람들은 그 행동을 반복하여 몸에 익히는 연습의 과정을 거친다. 연습은 몸에 습관을 입힌다. 익숙해질수록 최고의 결과를 낼 가능성은 높다. 연습에 매진하는 오늘의 땀방울은 빛나는 미래를 위한 것이다.

 

정말 그런가. 연습은 늘, 온전히 ‘다가올 미래’ ‘최종적인 결과’로 빨려 들어갈 뿐일까. 학부 시절에 피아노를 전공한 작가 오민은 쇼팽 이후 위상이 달라져버린 ‘에튀드’에 주목했다. 기계적인 연습 과정을 통하여 악기의 연주 기교와 표현 방식을 습득하여 ‘예술적인’ 다른 곡을 잘 연주할 수 있도록 돕는 에튀드, 연습곡. 쇼팽은 기술 향상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다고 여겨진 반복의 지루함을 뛰어넘는 ‘예술성’을 연습곡에 불어넣었다. 연주자들에게 ‘과정’이었던 연습곡이 ‘최종’ 무대 위에 오르면서, 연습과 최종은 흥미로운 관계망 안으로 진입했다. 결과를 위한 연습이 결과 그 자체가 되었다.

 

오민은 이제, 미래를 향해 나아가다 급기야 ‘최종’에 도달한 에튀드의 시간을 다시 뒤집어 본다. 그는 안무가 이양희의 연습 장면을 담은 작업 ‘연습무의 연습무’를 통해 ‘에튀드’가 그저 ‘연습’이었던 시간을 소환했다. 화면 안에서, 이양희는 시선, 동작, 목소리라는 세 가지 그룹으로 조직한 ‘연습무’를 창작하기 위해 연습 중이다. 오민은 그 가운데 안무가가 시선을 연습하는 장면에 집중했다. 하나의 화면은 안무가의 얼굴을, 다른 화면은 안무가의 뒷모습을 담았다. 이때 그는 숲 한가운데 서 있거나, 회색빛 담벼락을 마주한 채 앉아 있다. 안무가는 대상을 바꾸어가며 초점의 깊이를 움직이고 너비를 변주하는 연습을 했다. 관객의 시선이, 멈춰 있거나 흔들리는 이양희의 눈빛과 그 눈빛이 도달한 공간 사이를 계속 오갈 때도, 연습의 시간은 계속 흘렀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모스의 세상  (0) 2018.09.03
물렁뼈와 미끈액  (0) 2018.08.28
연습을 위한 연습  (0) 2018.08.20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산 이야기  (0) 2018.08.13
유토피아 스테이션  (0) 2018.08.06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0) 2018.07.30
Posted by Kh-art

“한번 산세에 들어서면, 지침을 따라야 한다. 줄을 서고, 버스에 오르고,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산에서 수행되는 완벽한 매일의 군무에 동참한다.” 한국과 덴마크를 오가며 활동하는 한국계 덴마크 작가 제인 진 카이센은 지난해 여름 백두산 관광길에 올랐다. 북한과 중국이 반씩 나눠 갖고, 이름도 각자 백두산·창바이산이라 달리 부르는 ‘민족의 영산’에 가기 위해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코스, 지린성 동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연길로 향했다. 연길에서 그는 여러 나라의 언어가 병기되어 있는 간판을 보았다. “중심부로부터 떨어진 세계주의는 다양한 보폭을 허용한다.”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산 이야기, 2017, 멀티미디어 설치, 2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아카이브, 사운드 설치 ⓒ 제인 진 카이센

 

 

그는 경계를 흐르며 국경을 가르는 강물을 보았다. “국가는 국경에서 자신의 힘을 가장 격렬하게 전시한다.” 남북관계에 순풍이 불면 중국과 남한 개발자들이 몰려들어 이 지역의 땅을 샀단다. 바람이 멈추면, 신도시는 황량하게 방치되었다. 작가의 발길은, 한때 불함산·단단대령·개마대산·도태산·태백산·백산이었으며, 이제 장백산·백두산이라 불리는 성스러운 산으로 향했다. 한국인에게는 환웅이 사람이 되고자 하는 호랑이와 곰을 만난 산, 만주인에게는 분화구에서 몸을 씻던 선녀가 붉은 열매를 먹고 낳은 그들의 조상 부쿠리 용손이 탄생한 산, 북한 사람들에게는 김일성이 일본에 대항해 투쟁했던 산이다. “문화에 따른 표현들은 그 산의 상상적 풍성함에 상응한다. 하나의 주제 속에 많은 이야기들이 변주되고 공명한다.”

 

작가는 고요한 천지의 성스러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자 고요를 깨뜨리며 자리다툼에 집중하는 이들의 몸짓을 보았다. 그러다 그마저도 덮는 천지의 숭고함이 불현듯 관광의 욕망을 무너뜨리는 순간을 보았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인 산 앞에 국경을 긋고, 이름을 붙이는 시간을 보았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렁뼈와 미끈액  (0) 2018.08.28
연습을 위한 연습  (0) 2018.08.20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산 이야기  (0) 2018.08.13
유토피아 스테이션  (0) 2018.08.06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0) 2018.07.30
대피소 리허설  (0) 2018.07.23
Posted by Kh-art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러브 디퍼런스, 2003

 

2003년 2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대규모 항의 시위가 열리던 주말, 뉴욕에서 만난 비평가 몰리 네스비트,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작가 리크릭 티라바니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며 하나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전쟁, 빈곤, 자연파괴, 금융위기 같은 불안감에 흔들리는 일상 속에서, 지구의 멸망을 예견하는 것이 낯설지 않은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는 뜬구름 같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 키워드는 ‘여기 아닌 어딘가’를 상상하며 ‘지금 여기’를 들여다보는 계기는 될 수 있었다.

 

기획단은 만남이 교차하는 물리적이고 개념적 장소 ‘유토피아 스테이션’을 운영하기로 했다. 이들은 작가들에게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을 담은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이 작업들을 모아 그해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에 ‘유토피아 스테이션’을 설치했다. 참여작가들 가운데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는 전시장 안에 거울로 된 대형 테이블을 설치한 ‘러브 디퍼런스’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유토피아’에 대한 질문을 건넸다.

 

유토피아 스테이션에는 유토피아를 떠나는 사람들과 돌아오는 사람들이 스쳐간다. 사람들은 이 역에 잠시 멈추어, 듣고 보고 휴식을 취하고 생각하고 대화를 나눈다. 미래 언젠가 가능할지도 모를 세계를 상상하는 이 플랫폼 안에서, 다양한 의견이 모이고 흩어졌다. 공연, 콘서트, 강의, 독서 모임, 영화상영회, 파티, 이벤트가 열리는 ‘역’은 유토피아로 가는 노정에서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장소가 되었다.

 

이후 전시, 포럼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유토피아 스테이션에는 300명 이상의 예술가들이 참여해 유토피아에 대한 그들의 ‘정의’를 찾아갔다. 웹사이트 projects.e-flux.com/utopia/에서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테마로 한 지상 포스터전이 열리고 있으며 모든 포스터는 무료로 내려받아 사용할 수 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습을 위한 연습  (0) 2018.08.20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산 이야기  (0) 2018.08.13
유토피아 스테이션  (0) 2018.08.06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0) 2018.07.30
대피소 리허설  (0) 2018.07.23
뾰족한 상대성  (0) 2018.07.09
Posted by Kh-art

데이비드 호크니, 장 피에르 곤살베스 드 리마, 7월11일, 12일, 13일, 2013, 캔버스에 아크릴릭, 121.9×91.5㎝ ⓒ 데이비드 호크니

 

평생 그림을 탐구하고 실험을 놓지 않았던 데이비드 호크니였지만, 그의 조수이자 동료인 도미니크 엘리엇이 사망한 뒤 몇 달간은 좀처럼 붓을 들 수 없었다.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처음 방문한 미국에 매료된 호크니는 LA로 이주했고 30여년의 시간을 보냈다. 2004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하늘, 숲, 나무, 꽃을 그리면서, 캘리포니아의 온화한 기후 안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계절감을 만끽한다. 그는 풍경 안에서 순환하는 계절에 따른 생명의 운동, 한계를 알 수 없는 다양성을 보았다. 그것은 어쩌면 자연 속에서 순리를 만나는 일이었다. 너무 낡은 매체이기 때문에 동시대의 감성을 담을 수 없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세월의 경험을 담을 수 있어서 나이든 사람의 예술이라고도 묘사되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는 새로움과 담을 쌓지 않았다. 오히려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꾸준히 발굴하며 늙어가는 중이었다.

 

호크니가 잠들어 있던 시간, 그의 집 한쪽에서 23세의 청춘 엘리엇은 약물과 술에 취해 독극물을 마시고 사망했다. 조수의 죽음을 계기로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된 호크니는 작업을 멈추고, 영국을 떠났다. LA에서도 고통을 동반한 침묵의 시간은 이어졌지만,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그는 다시 붓을 들었다. 그와 같이 엘리엇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조수 장 피에르 곤살베스 드 리마의 초상이 그 출발점이었다. 두 손에 머리를 파묻은 채,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서 호크니의 통증을 본다. 남겨진 자들은 고통 안에서 좀처럼 헤어나기 어렵다. 그는 이 작업을 시작으로 82명의 친구, 동료의 초상과 1점의 정물화를 완성했다. 한 작품, 한 인물을 위해 3일의 시간을 보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산 이야기  (0) 2018.08.13
유토피아 스테이션  (0) 2018.08.06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0) 2018.07.30
대피소 리허설  (0) 2018.07.23
뾰족한 상대성  (0) 2018.07.09
지지와 규탄  (0) 2018.06.29
Posted by Kh-art

박준범이 민통선 마을 대피소에서 마주한 장면은 상상과 달랐던 모양이다. 어떤 마을 대피소 안에는 감자만 가득하다던데, 그가 방문한 곳은 다양한 운동기구를 갖추고 있었다. 비상시에는 몸을 보호할 수 있도록 돕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테지만, 평상시라면 주민들의 건강 증진을 돕는 역할도 기꺼이 수용하는 다목적 공간인 셈이다.

 

북한으로부터 언제 날아들지 모를 포탄의 사정거리 안에서 사는 이들에게 위협을 가정하고 대피를 준비할 때 피어나는 ‘공포’의 무게는, 헬스장으로 변신 가능한 대피소의 무게감과 비슷해졌을지도 모른다. 불안감은 지독한 일상이 되어 불안해도 불안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박준범, 대피소 리허설, 2015, 3채널 비디오, 27분17초 ⓒ박준범

 

작가는 북한과의 경계지역에 있는 마을에 북으로부터 위협이 닥치는 긴박한 재난 상황을 가정했다. 재난 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대피소로 피하거나 대피소를 만드는 일일 터. 작가는 ‘대피소 리허설’을 기획했고, 일곱 사람이 이 과정에 참여했다. 건축가가 대피소 구조 설계에 합류했다.

 

산기슭 반지하에 위치하며, 정원 20명 규모로 가정한 이 대피소는, 실제 경기도 어딘가에 위치한 실내공간에 설치되었다. 급작스러운 재난 상황에 처한 대피소에 과밀수용은 필연적이다. 작가는 이 공간에서 50명이 30일간 외부와 격리되어 거주하는 상황을 설정했다. 대개의 경우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 없는 대피소의 구조를 고민하며 건축가와 복층 설계를 협의했고, 정원초과 상황에서도 서로가 가급적 쾌적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편의시설도 고려했다.

 

이 위기 상황에서, 참가자들이 주변에서 주워온 폐자재, 사물들이 새로운 쓰임과 역할을 부여받아 대피소의 외피와 내부를 구성했다. 완성과 동시에 해체되기 시작한 대피소는, 재난이 일상이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한시적이고 비일상적인 공간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졌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토피아 스테이션  (0) 2018.08.06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0) 2018.07.30
대피소 리허설  (0) 2018.07.23
뾰족한 상대성  (0) 2018.07.09
지지와 규탄  (0) 2018.06.29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0) 2018.06.18
Posted by Kh-art

10여년 전, 기술 덕분에 아주 빠른 속도로 정보, 지리, 경제, 문화, 정치의 벽이 무너지고 있으므로, 세계는 평평할 뿐 아니라 더욱 평평해질 거라고 한 토머스 프리드먼의 말은 여전히 유효할까.          

 

그는 평평한 세계에서 경쟁자들은 공평한 기회를 획득하고, 가치는 수평적으로 창출될 것이라고 했다. 경제 분야의 경쟁은 평등해질수록 치열해질 테니까, 개인의 경쟁력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어떤 학자들은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는 세상의 면면을 언급하면서 세계는 둥글고, 뾰족하고, 울퉁불퉁하다고 했다.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상대성, 1953, 판화, 282×294㎜

 

130여년 전, 에드윈 애벗은 2차원의 납작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플랫’한 세상 속에 사는 이들은 직선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신분이 높을수록 오각형, 육각형 등 더 많은 각을 갖고 있었고, 신분에 따른 꼼꼼한 차별이 플랫랜드 전역에 평평하게 펼쳐져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산업혁명 이후 경제적 위치는 상승해도 여전히 작동하는 경직된 계급사회의 프레임 안에서 갑갑증을 느끼던 이들은 다른 차원으로부터의 희망을 꿈꾸었다. 하지만 자신이 갇혀 있는 ‘차원’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60여년 전, 에셔는 3개의 공간 차원과 1개의 시간 차원을 가진 시공간 구조를 상상하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납작한 화면에 그려 보았다. 여러 개의 중력장이 공존하는 평면 안에서, 누군가에게는 수직이 누군가에게는 수평이 되는 장면을 프레임 밖의 이들은 조망한다. 평면 속에서 각자의 중력에 기대 살아가는 이들은 서로를 알아차릴 수 없을지 모른다.       

 

에셔의 ‘상대성’에서,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세상, 다름이 공존해야 하는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읽어내는 이들의 목소리는, 납작한 스크린들과 함께하느라 우리의 세상이 사실은 요철투성이임을 깜박 잊곤 하는 나에게 뾰족한 가르침을 준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0) 2018.07.30
대피소 리허설  (0) 2018.07.23
뾰족한 상대성  (0) 2018.07.09
지지와 규탄  (0) 2018.06.29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0) 2018.06.18
분노  (0) 2018.06.11
Posted by Kh-art

김종필 지지자들 근처를 행진하는 12·12 반란주범 규탄대회 참가단. 1987·12·12 ⓒ박용수

 

1987년 12월12일, 앰배서더 호텔과 태극당이 보이는 동국대학교 정문 앞 도로. 사람들의 행렬이 줄지어 있다.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든 사람들은 같은 무리로 보이지만, 크게 두 부류로 갈라진다. 한쪽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종필 후보를 지지하는 시민들 그리고 다른 쪽은 12·12 반란주범 규탄대회 참가자들로 김종필 후보의 유세 활동을 방해했다.

 

당시 13대 대통령 선거전 초반에 12·12 사태가 주요 쟁점으로 등장했다. 12·12 반란주범 규탄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12·12는 노태우를 비롯한 일부 정치군인들이 정권욕에 사로잡혀 일으킨 반국가적, 반민주적 행위”라고 규탄했다. 그런데 12·12의 전철은 5·16이며, 김종필은 5·16의 주역이기 때문에 규탄의 대상은 노태우와 김종필이 서로 겹쳐진다. 한 장의 사진 안에 김종필을 지지하는 이들과 그를 절대 지지할 수 없는 이들이 공존하다니 아이러니하다.

 

이처럼 한 인물을 향한 상반된 반응은, 지난 23일 김종필 별세 후 논란 중인 서훈 문제의 입장 차이를 상징하는 것 같다. 흔히 김종필에게도 분명한 공과가 있고,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부당하게 훔친 권력에 기반했다면, 공이든 과이든 장물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장물이 좋다고 해도 훈장까지 줄 수는 없다.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으로 무엇을 했는가보다 권력을 어떻게 획득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5·16과 12·12 같은 군사 쿠데타는 반복될 것이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피소 리허설  (0) 2018.07.23
뾰족한 상대성  (0) 2018.07.09
지지와 규탄  (0) 2018.06.29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0) 2018.06.18
분노  (0) 2018.06.11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0) 2018.06.04
Posted by Kh-art

먼지가 생명을 위협하는 날. 건물이 허물어지는 날. 다리가 무너지는 날. 배가 가라앉는 날. 그런 날들이 올 것을 누가 알았을까. 전조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균열은 사소하게 출발하고, 균열은 마치 처음인 양 반복되었다. 부조리를 인내하는 날들의 끝에 있는 것은 절망이었다.

 

송주원,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2017, 댄스필름

 

2016년 겨울을 광화문에서 보내며 송주원은 인간의 안일한 태도가 이 사회에 큰 사건과 상처를, 위험과 공포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아무것도 반성하지 않는 가운데,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는 시인 김수영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작가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나의 삶에서 ‘반성이라는 것’을 언제 했던가. 제대로 한 적은 있던가.

 

절망의 날들을 보내던 그해 겨울, 작가는 이 질문을 안고 작업을 시작했다. 김수영의 시 ‘절망’의 시구를 모티브로 한 여성의 하루를 풀어놓은 댄스 필름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은 위태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조망하여 일상의 반성과 절망에 대한 질문을 몸으로 표현해보는 작업이었다.

 

한없이 ‘일상적’인 하루 일과 속에, 귀신과 함께하는 판타지적인 순간들이 섞여 들어가는 가운데, 작가는 주인공이 퇴근 후 식탁에 앉아 마시는 와인병에 ‘킬러’를 써넣고, 곳곳에 노란 리본을 매달았다. TV에서는 이제 탄핵된 대통령이 좋아하는 연예인 이야기에 미소 지으며 인터뷰하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주인공은 손으로 삶은 계란을 부수며 ‘분노’를 표출했고, 주인공과 ‘동거’ 중인 귀신들은 정신없이 달력을 찢어 넘기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때만 해도, 세상이 바뀔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작가는 절망의 끝에서 ‘구원’의 순간을 만난 이들 앞에, 끝까지 반성하지 않을 이들 앞에,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현실의 절망과 희망의 역설을 내놓았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뾰족한 상대성  (0) 2018.07.09
지지와 규탄  (0) 2018.06.29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0) 2018.06.18
분노  (0) 2018.06.11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0) 2018.06.04
형세  (0) 2018.05.28
Posted by Kh-art

분노의 이유는 감정이 아니라 참여의 의지라고 했다. 분노를 단념하지 않아야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분노해야 행복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일상의실천,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2016, 파이프 설치, 1500×1500×3600㎜ ⓒ일상의실천

 

그는 아낌없이 분노했다. 운전기사, 경비원, 가사도우미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행을 쏟아내며 분노했다. ‘분노조절장애’라는 병명을 내세우니 그들의 ‘분노’에 불이 붙었다. 그는 포스터 속 여성의 눈빛에 분노했다. ‘더럽고’ ‘개시건방지고’ ‘찢어버리고 싶은’ 눈빛을 파내니 그들이 분노했다. 그는 계산하는 편의점 직원에게 분노했고, 느리게 가는 장애인에게 분노했고, 뛰어노는 어린이에게 분노했다. 단식하는 정치인에게 분노했고, 토론하는 도지사에게 분노했다. 그리고 그는 최저임금 인상에 분노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시인은 분개했다. 설렁탕집 주인에게, 야경꾼에게, 이발장이에게 분개하고 반항했다. 이내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문장으로 시를 지었다. 

 

디자이너 그룹 일상의실천은 김수영의 이 시구로 조각을 만들어 한옥 마당 한가운데에 세웠다. 시구는 식수와 오물이 동시에 관통하는 배수관으로 만들었다. 파이프를 절단하고 다시 이어 붙여 만든 시구의 미로 속으로 분노의 명분과 배설의 쾌감이 뒤엉켜 흐를 터였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조그마한 일’에 분노한다고 했다. 꼴찌가 되지 않기 위해 분노한다고 했다. 작가는 이 배수관에 부조리한 사회를 향하지 못하는 ‘외적 분노’와 ‘내적 자조’를 동시에 실어 나르고 싶었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지와 규탄  (0) 2018.06.29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0) 2018.06.18
분노  (0) 2018.06.11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0) 2018.06.04
형세  (0) 2018.05.28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못하겠다  (0) 2018.05.14
Posted by Kh-art

불법 이민자 신분으로 뉴욕에 체류하고 있었던 대만 출신 작가 테칭 시에는 집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는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살고 있던 맨해튼 아파트에 출퇴근 기록기를 설치한 뒤 매시 정각에 출근카드를 찍고, 기계 옆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잿빛 유니폼 차림이었다.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을 기록하던 이 기계는 예술가의 예술 활동을 냉정하게 관리 감시한 끝에 예술 작품이 되었다.

 

테칭 시에(Tehching Hsieh), 일 년의 퍼포먼스 1980~1981, 편지, 사진, 시계, 16㎜ 필름, 유니폼 ⓒ 테칭 시에

 

이 퍼포먼스는 1980년 4월11일을 시작으로 1년간 이어졌다. 365개의 펀치 카드, 365개의 필름 스트립이 쌓였다. 삭발한 채 시작한 이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 그의 머리는 장발이 되었다. 1년간 그는 50분 이상 아파트를 떠날 수 없었다. 50분 이상 잠들 수 없었다. 1년은 8760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133장의 순간은 기계의 오류로, 인간적인 오류로 놓쳤다. 그가 기록한 1년의 초상은 6분의 타임 랩스로 정리되었다.

 

테칭 시에는 거대한 바위를 끊임없이 굴려대던 시시포스를 언급했다. 형벌처럼 반복되는 시간의 감옥에 갇혀 출근카드를 펀칭해야 하는 다음 시간을 기다렸다. 1초의 어긋남도 없이 정해진 임무를 마친 후 곧바로 다음 시간을 준비했다. 그가 선택한 일이었지만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단조로운 노동을 반복하며 그는 철저하게 시간을 소비했다.

 

열심히 살든, 게으름을 피우든, 창의적으로 사고하든, 진부한 패턴을 반복하든 시간은 흘러갔다. 그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위에서 시간이 멈출 일은 없었다. 인생이 다 거기서 거기지 별거 없었다. “나는 예술계가 나에게 기대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출구, 이것이 나의 자유다.” 그는 이렇게 말했지만 시간을 낭비한 끝에 그는 ‘예술 작품’을 완성하고 말았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0) 2018.06.18
분노  (0) 2018.06.11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0) 2018.06.04
형세  (0) 2018.05.28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못하겠다  (0) 2018.05.14
다이얼 히스토리  (0) 2018.05.08
Posted by Kh-art

페터 피슐리·다비드 바이스(Peter Fischli and David Weiss), Der Lauf der Dinge(The way things go), 1987, 16㎜ 컬러, 필름 ⓒ이카루스 필름

 

인간계는 복잡하다. 쉬운 길을 어렵게 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어찌나 얽혀 있는지, 하나의 에피소드가 엉뚱한 곳에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미국 만화가 루브 골드버그(1883~1970)는 아주 간단한 일도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해결할 수 있는 장치를 다룬 만화로 인기를 끌었다. 생김새도, 작동원리도 한없이 복잡하고 심오해 보이지만, 결국 하는 일은 냅킨을 흔들거나, 우산을 펼치거나, 등을 긁는 정도다. 효율성 제로의 ‘골드버그 장치’를 고안해, 복잡하게 머리 굴리며 살아가는 인간 세상을 풍자한 그는 원자폭탄의 위협을 다룬 카툰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가 고안한 비효율적 기계는 “최소의 결과를 얻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는 인간”의 행동방식을 비판하면서 등장했지만, 그의 의도는 살짝 빗나가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인간들은 단순한 목적을 위해 복잡하게 움직이는 장치들을 만들었고, 골드버그 장치 구현 대회까지 열어 자신의 ‘창의력’을 과시했다.

 

골드버그 장치는 예술가에게도 작업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듀오 작가 피슐리와 바이스는 골드버그 장치처럼 작동하는 작품 ‘상황이 흐르는 방식’을 발표했다. 실을 따라 타들어가던 불꽃이 타이어를 잡고 있던 선에 닿자 그 선이 툭 끊어지며 타이어는 앞으로 굴러간다. 타이어는 드럼통을 치고, 드럼통은 초를 건드리고, 촛불이 바닥에 쏟아진 기름에 닿고, 기름의 불길이 짚단을 태운다. 무대에 오른 사물들은 마치 스스로 동력을 가진 양 구르고 뒤틀리고 넘어지고, 불타오른다. 작가는 작은 불꽃에서 출발한 일련의 연쇄 작용을 통해 시스템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에너지가 시스템을 파괴하는 상황을 풍자했다. 작가의 의도는 그랬지만, 의도가 빗나갈지도 모른다는 건 예측가능하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노  (0) 2018.06.11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0) 2018.06.04
형세  (0) 2018.05.28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못하겠다  (0) 2018.05.14
다이얼 히스토리  (0) 2018.05.08
지구는 평화  (0) 2018.04.30
Posted by Kh-art

마음이 슬프면 몸짓이 슬퍼지는 걸까, 슬픈 동작이 슬픈 마음을 가져오는 걸까. 카메라 앞에 앉은 바스 얀 아더르는 슬퍼하기 시작했다. 슬픔의 종착역은 눈물인 모양이다. 그는 울기 위해 집중했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는 눈을 감고, 입술을 오물거리고, 볼을 찌푸렸다. 손으로 머리칼을 휘젓고, 눈꺼풀을 문질렀다. 슬픈 제스처로 슬픈 감정을 끌어올리는 사이사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살짝 턱을 들어 올리고 슬그머니 눈을 뜨는 순간 그의 표정에서는 불현듯 슬픔이 사라졌다. 그는 계속 슬퍼했지만, 곧바로 충분히 슬퍼지지는 않았다. 슬픔의 동작이 커지면서, 드디어 그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성인 남성의 눈물을 볼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

 

바스 얀 아더르(Bas Jan Ader),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못하겠다(I’m too sad to tell you), 1971, 16㎜ 필름, 3분34초 ⓒ Mary Sue Ader-Andersen

 

소리 없는 흑백 영상 속에서 그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오열 사이사이 한숨을 돌렸다. 그때마다, 그를 둘러싼 슬픔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오열의 표정을 짓는 순간 다시 그는 슬퍼졌다. 슬픔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슬픔이 멈추는 순간의 공백이 차가웠다. 작가의 감정에 동화되던 관람자의 감정에 자꾸 균열이 갔다. 그는 3분34초간 슬퍼했다. ‘전달할 수 없는 감정적인 상태’를 극도의 슬픔으로 표현했다는 작품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못하겠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일의 기능을 상기시켰다. 타인의 슬픔에 닿는 일은 힘들다.

 

‘슬픔’을 작업했던 그는 그로부터 4년 후, 바다 위에서 사라졌다. 초소형 보트를 타고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도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이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김지연의 미술 소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0) 2018.06.04
형세  (0) 2018.05.28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못하겠다  (0) 2018.05.14
다이얼 히스토리  (0) 2018.05.08
지구는 평화  (0) 2018.04.30
예술가와 갈등  (0) 2018.04.23
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