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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에 해당되는 글 37건

  1. 2017.11.20 잘 지내
  2. 2017.11.13 전시인가, 과시인가
  3. 2017.11.06 터널
  4. 2017.10.30 삼대의 모국어
  5. 2017.10.16 나는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6. 2017.09.25 세상 밖이라면 어디든
  7. 2017.09.18 평범함의 격조
  8. 2017.09.11 파벨라
  9. 2017.09.08 일식
  10. 2017.08.28 낮잠
  11. 2017.08.21 지속가능성이라는 과제
  12. 2017.08.14 무릎 꿇은 남자
  13. 2017.08.11 인생을 바꿀 만한 경험
  14. 2017.07.31 너무 걱정 마
  15. 2017.07.10 예술이라는 보철기구
  16. 2017.07.10 시계를 의식하는 일
  17. 2017.07.10 그 모든 가능성의 불안함
  18. 2017.07.10 걷기
  19. 2017.07.10 기억의 잡초
  20. 2017.06.05 오래된 잠수

소피 칼, 잘 지내(Take care of yourself), 2007, 혼합재료, 가변설치


“사랑은 재앙입니다.” 서로 다른 속도로 타오르거나, 미묘한 감정의 엇박자 속에 식어 버리거나, 혹은 습관인 양 유지하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 소피 칼의 진심을 알 길은 없다. 출장길에서 남자친구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의 e메일을 받았을 때, 소피 칼은 행간에 녹아 있는 그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해달라며, 이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잘 지내기를 바란다는 문장으로 끝맺는 ‘이별 편지’가, 완전한 이별의 선언인지, 계속 만나고는 싶다는 뜻인지 파악할 수 없었던 그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여주면서 해석을 부탁했다.

 

그 이후 작가는 좀 더 많은 여성, 특히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이들의 해석을 받아보기로 한다. 그의 메일을 받아본 107명의 전문직 여성들은 그들의 언어로 편지의 의미를 해석했고, 작가는 그 내용을 사진과 영상에 담아 작업으로 완성했다. 법조인은 편지의 법적 영향력을 분석했고, 편집자는 문법과 철자의 오류를 교정했다. 범죄심리학자는 그 남성을 ‘뒤틀린 조종자’라고 평했고 무용수는 그 내용에 반응하는 춤을 선보였다.

 

소피 칼은, 이별이라는, 결코 면역이 생기지 않는 통증의 시간에서 이렇게 빠져나왔다. “이 작업을 시작한 후 한 달 정도가 흐른 뒤로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어요.” 심지어 그가 다시 만나자며 돌아올까 봐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되면, 편지 끝문장을 따서 ‘잘 지내’라고 명명한 이 작품의 의미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거리를 두고 고통을 바라보는 시간을 거쳐 그의 사랑은 이렇게 끝났고, 전 남자친구의 바람대로, 소피 칼은 잘 지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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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김홍식, 플라뇌르 인 루브르 뮤지엄, 2016~2017, 스테인리스강 위에 돋을새김, 실크스크린, 150×120㎝ ⓒ 김홍식

 

“처음 루브르박물관에 들어서던 순간을 기억한다. 에스컬레이터를 가득 메우고 내려가는 사람들의 파도. 스펙터클은 루브르가 아니라 그 군중이 이미 만들어내고 있었다. (…) 미술관의 관람객은 볼거리에 집착한다. 소비한다. 거대 미술관은 약탈한 수집품으로 가득 찼고, 그 소장품을 다시 약탈하는 군중이 가득하다. 소유하고 싶은 욕심에 약탈하는지, 너무나 사랑해서 탐하는 건지. 스냅샷을 날린다. 나는 뷰파인더를 통해 그들을 바라보는 군상을 주목한다.”

 

김홍식의 관심사는 현대 도시가 겪고 있는 변화와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탐구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도시 산책자가 되어 이곳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을 지켜보고, 그 현상들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관찰하면서 의미를 추적한다.

 

그 산책의 발길이 ‘미술관’에 닿았다. 미술관 안에서 그는 ‘미술품’과 ‘관람객’ 사이 펼쳐지는 또 하나의 풍경을 목격한다. ‘인류 문화의 보고’라는 미술관에 몸을 들인 사람들은 유명한 미술품이 놓여 있는 방을 향해 순례객처럼 행렬을 만들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카메라를 들어 올린다. 이후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이 포착한 장면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려 네트워크 안에 있는 지인들과 공유할 것이다.

 

작가는 루브르를 찾는 이들이 반드시 방문해야 한다고 믿는 ‘모나리자’ 앞에서 보고, 기록하고, 기억하고, 전달하고, 망각하는 행위들이 마치 거대한 퍼포먼스처럼 펼쳐지는 장면을 담았다. 작품과 관객과 작가의 시선이 꼬리를 물고 오고가는 ‘미술 감상’의 순간, 금빛 액자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예술’은 묻는다. “미술관에 온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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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찾아봤던 드라마 <터널>에서 터널은 ‘운명과 시간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던 형사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터널을 통해 미래로 가고, 그곳에서 과거와 미래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면서 범인을 추적하고 진실에 다가가는 내용. 진실에 닿기 위해 필요한 건 시간여행인 걸까. 시간은 종종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

 

익숙한 주변 풍경에 낯선 기운을 불어넣는 데 탁월한 피터 도이그가 화면에 담은 터널은 무지개색이었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알 수 없는 기묘한 화면의 톤 덕분에 사람들은 피터 도이그의 그림을 통해 몽환적인 상황을 만나곤 한다.

 

피터 도이그, Country-rock(wing-mirror), 1998~1999

 

토론토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이 터널에 무지개가 뜬 건 1972년의 일이다. 노르웨이 출신 베르그 욘슨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친구를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어두운 터널 입구에 무지개색을 입혔다. 모름지기 무지개란, 잠깐 떴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한시적인 판타지이건만, 소년은 시간이 흘러 페인트가 벗겨지면 다시 칠하고 또 칠하기를 반복하며 이 판타지를 붙잡았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고요한 풍경을 치고 들어온 현란한 페인트색에 거부감을 표하던 마을 사람도 언제부터인가 소년을 도와 무지개를 그렸단다.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기다가 사라진 뒤에야 황망하게 만드는 많은 것들. 소년은 훌쩍 떠난 친구와의 우정을 터널 앞 무지개로 기억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베르그 욘슨은 자신을 ‘꿈 지킴이’라고 칭하면서 이 무지개가 서로 인사도 잘 안 하고, 잘 웃지도 않는 토론토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덧붙였으니, 누군가에게 무지개 터널은 좋은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나간 것은 아름답게, 사라진 것은 애틋하게 추억의 장소에 깃들어 시간여행을 인도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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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엄마의 모국어는 아랍어다. 이후 엄마는 프랑스로 이주해 딸 지네브 세디라를 낳았다. 프랑스어를 쓰며 성장한 그는 이후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딸을 낳았다. 딸은 영어로 말한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서로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삼대’는 이렇게 탄생했다.

 

지네브 세디라, 모국어, 2002, 3채널 비디오, 5분, 테이트모던 설치장면 ⓒ지네브 세디라

 

지네브 세디라는 자신의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정체성의 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3채널 영상 작품 ‘모국어’를 완성했다. 작가와, 그의 엄마, 딸, 세 여성은 서로서로 대화를 나눈다. 처음 전시장에 들어서서 화면을 마주한 관객들은, 영상을 통해 각자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 정도만 파악할 수 있다. 모든 영상의 소리는 헤드폰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다. 소리가 없기 때문에 서로의 말에 반응하는 동작, 표정을 좀 더 유심히 보게 된다. 대화가 잘 이루어지는 것도 같고 머뭇거리는 느낌도 있다. 곧 헤드폰을 하나씩 끼고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그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비디오 속 엄마와 나는 아랍어와 프랑스어로 대화한다. 두 번째 비디오의 나와 딸은 프랑스어와 영어로 대화하며, 마지막 할머니와 손녀는 아랍어와 영어로 대화하는 중이다. 엄마와 딸은 그런대로 묻고 답하며 대화를 주고받는데, 할머니와 손녀는 불편해 보인다. 각자의 모국어로 말을 건네지만, 상대방의 이야기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쑥스럽게 미소 짓는다. 작가가 연출한 이 어색한 대화의 시간은 문화적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또 세대를 거쳐 어떻게 계승되는지 묻는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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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몬티엘 소토, 목적지 없는 히치하이킹, 2002-2009, 사운드, 포스터, 지도, 사진, 가변설치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 계획 없이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잠을 잘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 새벽 2시다. 잠이 오지는 않지만 어깨에 멘 배낭이 너무 무겁다. 이 도시는 나의 발걸음을 붙잡고, 구름 속에 나를 가둔다. 비는 쏟아지고 하루하루 날짜는 지나가고 해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아무 방향을 정하지 않은 채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들을 밟았다.”

 

사람마다 다른 인생의 버킷 리스트를 가지고 살 테지만, 꽤 많은 이들이 그 안에 ‘세계일주’나 ‘여행’을 담고 있지 않을까.

 

전세금을 빼서 몇 년간 세계 곳곳을 다녔다는 가족의 이야기나,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털어 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꾸준히 사람들의 관심과 부러움을 산다.

일상의 쳇바퀴에서 과감히 벗어나 길을 떠난다는 것은 뭔가 매력적이지만, 큰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일상을 벗어던지는 것이 두려운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쉬운 대로, 짧은 휴가 기간 선택한 여행지에서의 시간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는 작가 마르코 몬티엘 소토는 2002년 여름, 파리를 시작으로 그해 말, 바르셀로나에서 여행을 마쳤다.

 

그는 여행길에 마주한 경험의 기억을 사운드와 이미지에 담아 설치했다. 그 기억 속에는 낯선 풍경을 바라보는 낭만적 시선, 여행자의 고독감, 지루함, 방황, 불쑥 솟아오르는 삶에 대한 열정, 착각, 환각이 깃들어 있다. 전시장에 떠도는 작가의 상념은 여행에 대한 관객의 판타지와 만난다.

 

“나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다.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하는지 모른 채 맥주를 마신다. 나는 베를린을 향해 이동을 하는 중이다. 차들은 멈추지 않고 지나간다. 나를 태워주지 않는다. 나의 희망은 사라진다. 나는 사거리에 서서 베를린으로 갈지 파리로 갈지 암스테르담으로 갈지 바르셀로나로 갈지 결정을 못한다. 나는 고속도로 한복판에 서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내려놓는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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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파레노, 어디든, 세상 밖 어디든 anywhere out of the world, 2013, 팔레 드 도쿄 설치 장면


살면서,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맺어온 관계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가능할까. 사람들은 비단 인간과의 관계뿐 아니라 인공물, 자연환경 등 세상 안팎에 있는 많은 것들과 생각보다 촘촘하게 얽혀 있다. 관계 밖에서의 생존법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는 일은 ‘순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순리에 순응하며 사는 데 필요한 것은, 당연하게도 소통 능력이다.

 

1964년 알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 필립 파레노는 전시장 안에 소통을 유도하는 장치들을 풀어 놓는다. 특정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작업을 펼치는 그는 조명, 음향, 퍼포먼스, 영상, 사진,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를 동원하여 공간과 시간을 공감각적으로 구성한다. 철학자, 저술가, 아티스트 등 다른 사람들과의 협업 역시 그에게는 중요한 작업 방식이다. 자신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으로 외부와의 소통 채널을 다변화한다. 그는 전시가 작동하는 시공간 자체를 의미 있는 매체로 활용하여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작가의 의도를 전시 안에서 선명하게 규정하기보다는, 관객이 주도적으로 전시의 시공간을 만나면서 의미를 생성해나가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식의 열린 구조 안에서 탄생할 수 있는 의미는 무한대에 가깝다.

 

작가는 관객 스스로 체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감정과 관계가 예술 형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관찰한다. 이런 작업 방식을 통해 작가는 개인이 사회적 맥락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다가간다. 동시에, 관계망 안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온갖 ‘경계’를 주시하면서, 세상 밖 어딘가로 탈출하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는 관계의 굴레를 우리 앞에 던져 놓는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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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석원, 수탉, 2017, 한지에 수묵, 129×167㎝


사석원은 치바이스를 동양화의 ‘넘사벽’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시절 동양화를 막 시작했을 때 그의 화집을 본 사석원은, 따뜻한 시선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생동감을 포착한 표현력에 매료되었다고 했다. 치바이스를 마음의 스승으로 모신 그 역시 살아있는 것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시, 서, 화, 각 모두를 아우른 치바이스는 일상의 소소한 대상,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에 주목했다. 당대 문인화가들은 대상으로 삼지 않던 ‘미물’이었다. 고전과 자연을 스승 삼아 그림을 그렸던 작가에게 대지 위의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 있었으니 다른 잣대를 내세우며 소재를 고를 일이 아니었다. 세상을 대하는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선인의 틀에서 벗어난 화면을 구상하기 위해 그는 지난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먹색을 제대로 내는 데만 40년이 걸린다고 하는 수묵화의 매력을 붓질에서 찾는 사석원은 치바이스의 수탉 그림에 주목했다. 치바이스가 그린 닭 그림에서는 잘 그리고자 하는 교만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교를 떨쳐낸 그림이 주는 평화로움에 마음이 움직였다. 사물의 본질만을 묘사하면서, 내적 생명력과 유머를 함축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내공은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 무수히 묘사를 반복한 끝에 대상의 본질과 미의 질서를 굵고 단순명료한 필획으로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형상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형상을 꿰뚫고 있는 치바이스의 작업을 보며 사석원은 현대적인 추상미를 통해 수탉의 에너지를 표현해보고자 했다. 대상을 눈앞에 두고 그 순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지켜보며 마음에 새겨 놓은 모습을 화면 위로 끄집어낸다.

 

에너지를 발산하는 수탉의 몸짓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역동적인 붓질과, 그 안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눈동자에서 닭의 생명력을 대면한다. 대상을 향한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은 그렇게 세상 모든 평범한 것들이 품고 있는 생명 에너지의 찬란함을 펼쳐 보인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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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시오 곤살레스, 파벨라 시리즈, 2004~2007


유토피아는 잊어라. 미래 도시는 방대한 슬럼이다. 2050년이 되면 세계 인구의 70%가 도시에 거주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봤다. 많은 것이 도시로 집중되는 가운데, 도시 인구의 절반은 슬럼 거주자일 것이라는 예측이 덧붙었다. 전반적인 삶의 질이 향상되면 슬럼 또한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던 과거의 예언은 부의 불평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현재를 봤을 때, 안일한 믿음에 불과하다.

 

디오니시오 곤살레스는 10여년 전부터 대도시의 슬럼 지구를 살피며 도시 빈민들의 터전을 촬영했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곳곳에 퍼져 있는 빈민촌 파벨라의 건축 구조는 시선을 끌었다. 계획이라고는 전혀 없는 불규칙적이고 불안한 오두막이 산자락부터 산등성이를 타고 퍼져나가 있다. 거주지이긴 하지만, 범죄와 마약의 온상이기도 한 이곳은 폭력과 살해가 공존하는 기피 장소였고, 지역 사람들 내면에는 증오와 절망이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뾰족한 해결책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대면한 작가는 작업을 통해 갈등의 중간 위치에 서보기로 했다. 작가가 생각하는 예술가는 사회적 규범에 저항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예술가가 세상에 필요한 이유 역시 이들의 독립성과 자율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독립자인 그들은 의견을 제시할 뿐이지만, 그 의견이 경우에 따라서는 중재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개개인의 취향과 삶의 모습에 따라 다른 형태로 번식한 파벨라의 유기적 구조를 물리적인 철거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 고민해볼 수 없을지 들여다본 작가는 파벨라를 컴퓨터 합성으로 재건축하기로 한다. 그렇게 현실 이미지 위에 디지털로 조작한 가건물을 앉힌 이미지가 탄생했다. 이 가상의 이미지가 슬럼 지구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지만, 해결을 위해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갈등 사이에서 완충지가 되었다. 작품은 작가가 희망한 바로 그 정도의 존재였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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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원, 1913, 캔버스에 유채, 105×105㎝


얼마 전 미국에서는 1918년 이후 99년 만에 대륙 전체를 관통하는 개기일식이 있었다. 평생 한 번 보기 힘든 장관이라고 하여, 원정단을 꾸려 미국으로 가는 이들도 있었다.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순간, 사람들은 태양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단다.

 

지구의 생태계에 가장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태양을 연구하는 것은 천문학계의 오랜 과제이지만, 태양은 그 빛이 너무 강해 제대로 관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과학계는 태양이 가려지는 이 순간, 태양을 제대로 관측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태양의 강렬한 빛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혁명과 개혁의 시기에 살았던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1913년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의 무대장식과 의상을 맡아 흰색 배경에 검은 사각형 콘셉트의 커튼을 제작했다. 이 작업은 그가 ‘절대주의’라고 명명한, 철저하게 비재현적인 회화, ‘검은 그림’의 단초가 되었다.    

   

새로운 질서로 개편되는 세계의 흐름을 체감한 그는, 세상의 형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색과 형태에 집중하는 작업을 통해,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의 세상에 닿고자 했다. 현존하는 세계와 다른 질서를 가진 세계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간 그는 그런 생각을 검은 그림에 반영했다.

 

그는 관객이 작품 속의 서사를 따라가면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이 전하는 감정에 집중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작품에서 현실과 연관되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일이었다. 오로지 검은 색면만 있는 화면이 전하는 감정, 그 긴장감을 마주하면서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과 다른 무엇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렇게 작가는 형태를 지운 세상에서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세계의 문을 열어주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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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리석, 오후의 뜰, 1968, 캔버스에 유채, 97×145.5㎝


분주하다. 세상의 속도는 빠르고, 그 속도를 부정할 용기가 없다면 따르는 게 당연한 세상. 흐름에 발맞추지 못한다면 낙오자가 되는 건 순식간일 테니, 초조한 마음이 조급증을 부채질한다. 그래서 바빠지고, 더 바빠지고 새벽부터 밤까지 쉼 없이 몸과 마음을 움직인다. 휴식을 꿈꾸고, 일탈을 소원하는 건, 그런 바람 자체가 일상의 바퀴를 계속 돌릴 수 있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은 아닐지 모르겠다.

 

한때는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해 시원한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즐기는 일이 당연하던 시절도 있었단다. 지금도 어느 나라에서는 나른한 오후에 낮잠을 즐긴다. 낮잠 권하는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스트레스 수준과 심장질환 발병률이 낮다는 연구결과나, 매일 자는 낮잠이 마음을 깨끗하게 창의적으로 만들어준다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다만 꿈꿀 수 있을 뿐 쉽게 내 일상으로 끌어들이기 어려운 낮잠에 대한 환상을 키워준다. 혹은, 편하게 낮잠에 빠져들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실향민으로서, 망향의 정서를 화폭에 담아온 장리석은 한 소년이 평상에 누워 단잠에 빠진 풍경을 그렸다. 마당 한쪽에는 정성스럽게 가꾸었을 화단이 보이고 그 앞에는 장독이 보인다. 아파트가 표준 주택이 되어버린 오늘날에는 시골집에나 가야 볼 수 있을 마당의 풍경이다. 러닝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잠든 소년의 손에는 어디선가 꺾어왔을 열매가지가 쥐어져 있다. 소년은 친구들과 동네 곳곳을 뛰어놀다 돌아온 나른한 오후, 잠시 달콤한 낮잠에 빠졌을 것 같다. 소년의 잠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풍경은 시간마저 멈춘 것처럼 한없이 고요해 보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오후의 뜰’은 1968년 어느 여름의 한가로운 공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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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셈블, 그랜비 워크숍, 2015 @어셈블


어쩌면 과제는 ‘시작’이 아니라 시작한 일을 지속가능하도록 만드는 과정에 있다. 이 과제에는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어떻게, 왜 지속시킬 것인가 하는 질문이 따르긴 하겠지만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지역공동체의 일상에 개입하는 프로젝트인 경우 지속가능성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다. ‘그랜비 포 스트리츠’로 영국의 권위 넘치는 미술상인 터너상의 수상자가 되면서 주목받았던 건축가 디자이너 그룹 어셈블의 작업은 지역사회의 공간과 공동체를 생산적으로 연결하는 바람직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2011년 마을 주민들의 의뢰로 그랜비 프로젝트에 착수한 어셈블이 처음 가졌던 문제의식은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가’였다. 마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 그리고 프로젝트 이후에도 이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은 바로 그 지역공동체라는 정답에 도달한 이들은 주민과 상생하는 예술프로젝트를 지향했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프로젝트 전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해 외부에서 들어온 주체에게 주민이 소외당하지 않도록 했다.

 

이들이 먼저 착수한 것은 슬럼화된 공공주택단지를 쓸 만하게 재건하는 일이었지만 더 깊이 고민한 것은 프로젝트 이후에도 지역공동체가 재건한 사회기반시설을 적극 활용하면서 생산성을 가지고 유지할 수 있는 장치였다. 그 장치의 하나로 어셈블 멤버들은 주민들과 핸드메이드 생활용품을 만드는 워크숍을 운영했다. 주민들은 건축 폐기물, 공사 잔해물들을 재활용해 손잡이, 테이블, 타일 같은 수공예품을 만들었다. 이후 지역 소싱을 통해 설계·조립한 재활용 핸드메이드 생활용품을 온·오프라인으로 판매하고, 쇼룸을 운영하면서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창업의 동력을 확보했다.

 

그렇게 쇠락한 지역의 공간을 재생하는 그랜비 프로젝트는 지속가능성의 원동력은 다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례가 되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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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민, 관계의 감각 2017, 리넨에 유채, 38×46㎝


화가가 그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한 가지를 흔들리지 않고 실천할 수 있기를 오랫동안 원해왔다’고 기술한 문영민은 무릎 꿇고 엎드린 남자의 뒷모습을 그려왔다. 작가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화면에 담으며 일상에서 되풀이되는 한 부분을 회화라는 반복 행위로 옮기는 실천을 수행 중이다. 반복은 시간을 살아내는 일이자 경험을 축적하는 일, 성찰의 도구, 혹은 스스로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특정할 수 없는 어떤 공간 안에서 한 남자는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다. 남자는 절을 하는 중이다. 한국사회에서 절은 익숙한 동작이다. 제사상 앞에서, 장례식장에서 죽은 자를 애도하며, 남겨진 자를 위로하며 사람들은 몸을 숙인다. 크고 작은 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사회에서 절을 하는 행위 역시 익숙하게 일상 안에 스며들어 있다. 작가는 절하는 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몸을 낮추는 동작’에 깃들어 있는 의미를 돌이켜 보았다. 유년 시절 경험한 제사의 과정, 엄숙하게 절하는 행위에서 어떤 무거움과 염원의 마음을 보았던 작가에게 절을 하는 모습은 애도의 보편적 표현이었다.

 

작가의 질문은 한 영혼을 향해 절을 하면서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면, 절하는 사람의 마음이 영혼에게 가 닿을 것인지로 이어졌다. 작가에게 절을 한다는 일은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문득 낯설어지고, 의미를 포착할 수 없는 모호하고 불가사의한 행위로 다가왔다. 그의 작업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한 질문이 되었고, 알기 어려운 것들에 대한 작업이 되었다. 동일한 장면을 반복적으로 그리면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시간을 가진 작가는, 절하는 행위를 통해 삶과 죽음을 묵상하는 인간의 뒷모습을 타고 남은 재와도 같은 회색빛에 담았다. 흥분과 격정이 가라앉은 회색으로 죽음을 기억하는 행위는 그렇게 담담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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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여행이 아니었다, 2005, 영상, 22분 @피에르 위그


미지의 대상을 향한 동경과 호기심은 여행의 동기가 되곤 한다. 여행을 떠나는 또 다른 이유는 도시 속 일상에 정주하는 삶이 지겹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에르 위그가 남극 여행을 결심한 데는 쥘 베른의 소설 영향이 컸다. <해저 2만리>를 비롯한 과학소설은 생명체와 그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현실과 가상을 기묘하게 섞어 작업하는 위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지구온난화로 남극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지도상에 표시되지 않은 섬들이 드러났고, 섬에는 흰 동물이 살고 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작가와 동료들은 알비노 펭귄으로 추정되는 생명체를 찾아 좌표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섬을 향했다. 2005년 2월 배를 타고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한 그들은 미지의 존재와 교신하기 위한 도구도 챙겼다.

 

그의 동료가 ‘인생을 바꿀 만한 체험’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그들의 탐험은 험난했다. ‘계획’에 없던 태풍을 만나고, 빙산에 갇히는 공포를 꼼짝없이 함께한 그들은 익숙한 줄만 알았던 관계 속에서 낯선 ‘사회’를 만났다. 예측을 우습게 뒤집어버리며 죽음을 눈앞까지 데려오는 환경 앞에 그들은 예전에 알던 그들이 아니었다.

 

마침내 그들은 ‘목적지’에 도달했고, 마치 신의 은총이라도 되는 것처럼 알비노 펭귄이 눈앞에 나타났다. 귀환한 작가는 뉴욕 센트럴파크에 있는 스케이트장 울만 링크에 남극을 불러들였다. 링크에는 인공 빙산이 솟아올랐고, 그 주변에 오케스트라가 자리를 잡았다. 오케스트라는 조슈아 코디가 남극의 지형을 모티브로 작곡한 곡을 연주했다.

 

관객이 공연에 집중하고 있을 때, 펭귄의 환영이 빙산의 꼭대기에 등장했다. 관객은 앉은 자리에서 가상의 남극 혹은 그 어딘가의 풍경 속을 탐험했을 터였다.

 

작가는 이후 남극의 영상 작업과 센트럴파크 퍼포먼스 영상을 편집하여 실제와 가상이 더 복잡하게 섞여 들어간 작업 ‘그것은 여행이 아니었다’를 완성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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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자, 너무 걱정 마, 2015, 캔버스에 오일, 90.9x 72.7cm


얼마 전 암투병 끝에 75세로 별세한 정강자 작가의 생전 인터뷰에서 “작품을 하는 동안 필요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살아왔다”는 문구를 보았다. 유년기 이후 50년 넘는 세월을 예술가로 살아가면서 늘 ‘죽음’을 각오했다는 고인은 발병 이후에도 하루 12시간 작업에 매진했다고 했다.

 

한국 미술계에서 정강자의 등장은 센세이셔널했다. 1968년, 당시 청년문화의 중심지였던 무교동 세시봉에서 열린 퍼포먼스 ‘투명풍선과 누드’ 무대에 작가는 블루머와 흰 머플러만 걸친 채 등장했다. 사람들은 투명풍선을 불어 작가의 몸에 붙였고, 작가가 일어서면 관객이 달려들어 풍선을 터뜨렸다.

 

한국 최초 페미니스트 문맥의 퍼포먼스로 평가받는 이 작업은, 가부장적 사고에 둘러싸인 경직된 사회에 문화적 해방구를 여는 신호탄 같은 시도였다. 구태의연한 방법론을 강요받던 시절, 새로움을 꿈꾸었던 작가는 기존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것에서 창작의 가치를 발견했다. 20대 시절 그는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을 통해 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갔다.

 

그가 말년에 집중했던 것은 ‘반원’이다. 직선과 곡선이 공존하는 그 형태에서 작가는 한복의 선, 한옥 처마의 선, 우리 강산의 선처럼 ‘한국적인 선’의 정서를 발견했다고 했다. 직선과 곡선의 앙상블이 끌어내는 에너지를 화폭에 담으며 세상의 질서를 들여다보았다.

 

반원과 인체를 연결하는 조형적 시도가 눈에 띄는 ‘너무 걱정 마’는 일종의 자화상 같은 작업이다. 암 덩어리를 안고 있지만 담담함을 잃지 않았던 작가의 선명한 눈빛과 온화한 손짓이 화면에 고요한 동세를 만든다. 죽음을 또 다른 창작의 계기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작업에 집중한 작가는 너무 걱정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구름처럼 세상에 스며들었다. 고인의 일평생에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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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지슈토프 보디츠코, 외국인 지팡이, 1993(1994년 스톡홀름에서 작품을 시연 중인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방인의 기분을 느껴보지 않는다면, 이방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1943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크지슈토프 보디츠코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규범 사이 긴장감, 그 긴장이 창작에 미치는 영향을 경험했다.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고민하며 작업하던 그는 1977년 캐나다로 이주한 후 이방인으로 살면서 사회 안에서 상처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외국인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분위기, 이방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억압하는 현실을 본 작가는 이방인이 자유롭게 의견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는 기구를 만들어 ‘문화적 보철기구’라고 명명했다.

 

‘외국인 지팡이’는 이방인이 사용하는 일종의 합법적이고 윤리적인 의사소통 기구다. 작가는 이 지팡이 안에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물건들을 넣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 이주민들은 지팡이 속에 넣은 자신의 물건들을 매개로 자신을 소개하고 대화를 이어나간다. 보디츠코에게 말하기는 공동체 일원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지만, 이방인들은 공공의 장소에서 자신들만의 목소리나 이미지를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투표권도 가질 수 없는 이방인들은 발언권을 박탈당한 채,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지만, 침묵하기에 길들여져 있었다. ‘외국인 지팡이’는 이방인들에게 ‘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고, 그들이 침묵의 늪에서 한 발짝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독려했다. 그렇게 보디츠코의 작업은 이주민들이 그들 스스로 가장 강력한 억압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각성하고 치료할 수 있도록 돕는 문화적 보철기구가 되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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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 마클레이, 시계, 2010, 비디오 설치, 24시간 상영


“우주는 신성한 존재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시계와 비슷하다.” 르네상스 시대 천문학자이자 점성학자였던 케플러는 우주의 질서에서 시계의 시스템을 보았다. 이 시기, 시계태엽 장치와도 같은 우주에서 신은 뛰어난 시계공이 아니겠느냐는 발언도 등장했다. 해시계, 물시계처럼 기존에 시간을 알려주던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계 시계의 등장은 유럽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근대산업을 견인하는 중요한 동력으로서 과학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기계 시계가 내는 소음은 사람들이 시간을 물리적으로 인식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돈뿐만 아니라 시간도 계산하고 계량화하기 시작했다.

 

보는 것을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바탕에 두고 작업을 풀어온 크리스찬 마클레이는 인류 문명사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합리성의 개념을 개인에게 탑재하는 데 일조한 시계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멜로, 액션, 스릴러, 공상과학 영화 및 유럽 예술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망라하는 5000여편의 영화 중 시계 또는 시간을 언급하는 대화가 등장하는 클립과 컷을 찾아 24시간을 연결했다.

 

작품 ‘시계’는 실제 24시간 동안 상영하며, 장면이 지시하는 시각과 실제 관객이 만나는 시각이 일치하여 흐른다. 극장에 앉아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들은 서로 다른 서사 구조에서 역할을 수행하던 장면이 ‘시계’를 매개로 완전히 다른 맥락에 놓이면서 또 다른 흐름을 형성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시간을 편집하여 서사를 구축하는 영화가 예술가 시계공의 손을 거쳐 새로운 시계태엽 장치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동참하는 이들은 새로운 시계가 지시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를 둘러싼 물리적 시간의 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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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매퀸, 애시, 2002~2015, 투채널 비디오, 포스터, 20분31초 @스티브 매퀸


늘 당연하게 흘러갈 것이라 믿고 몸을 맡기는 일상은, 문득 당연한 듯 믿음을 배반한다.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생이 의미를 갖는다는 말은 기대를 빗나가는 삶을 납득하기 위한 주문일지도 모른다. 배신의 가능성을 품은 일상은 다른 이야기를 숨긴 채 표표히 지나간다.

 

2002년 스티브 매퀸은 카리브해 그레나다에서 비디오 작품 ‘카리브 리프’를 촬영했다. 1651년 유럽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싸우던 카리브인들이 ‘카리브 리프’라고 불리는 소튜 마을 절벽에서 몸을 던졌던 역사와 이곳의 현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10여년이 흐른 뒤 다시 그 지역을 찾은 매퀸은 당시 촬영을 위해 섭외했던 청년 애시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작업에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필름에 담은 지 두 달 뒤, 애시가 마약 문제에 연루되어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작가는 청년의 짧은 생을 애도하며 10여년간 묻어두었던 장면을 꺼내 ‘애시’를 제작했다.

 

공중에 매단 스크린 양쪽으로 서로 다른 영상을 보여주는 이 작업의 한쪽 화면에서는 건강미 넘치는 젊은이가 바다 위 보트 끝에 앉아 미소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는 장면이 흘러나온다. 카리브해의 푸른 바다와 녹색 섬, 싱그러운 청년의 미소로 가득한 이 영상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홈비디오 카메라로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더욱 그리운 공기와 노스탤지어가 가득하다. 반대편으로 돌아가면 관객은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동료들의 음성과 함께 애시의 묘비명을 새기고 무덤을 조성하는 지난한 과정을 대면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삶과 죽음의 장면은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단면을 담담하게 풀어놓으며 지금 이 순간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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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닛 카디프, 조지 뷔레스 밀러, 갈림길의 도시, 2014, 영상설치


걷기는 세계를 여행하는 방법이자 마음을 여행하는 방법이건만, 인간이 운전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걷기는 일상에서 멀어졌고, 세계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했다. 그곳에 닿고 싶다면, 자동차의 속도에서 내려와 걷기가 만들어주는 리듬에 몸을 맡길 필요가 있다. 인간 신체에 최적화된 속도로 자연과 문명을 가로지르는 걷기는 생각의 근육을 키워주는 철학이기도 했다. 재닛 카디프는 캐나다 앨버타의 밴프 센터에 머물던 1991년, 처음 걷기 작업을 시작했다. 출발은 느슨했다. 관객은 12분간 흘러나오는 작가의 내레이션에 귀를 기울인 채 숲을 거닐면 된다.

 

걷기 시리즈는 회를 거듭하면서 공간 탐색의 방법을 확장시켜 나갔다. 특히 2013년 카셀도큐멘타와 2014년 시드니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업은 아이팟을 이용하여 가상과 현실 세계를 절묘하게 혼합시켜 주목을 받았다. 시드니비엔날레 출품작이었던 ‘갈림길의 도시’는 보르헤스의 소설 <갈림길의 정원>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실시간 도시를 배경으로 카디프와 조지 뷔레스 밀러는 거리가 기록하고 있는 역사를 떠올리면서 걸었을 때 발견할 법한 가상의 사건, 공연 및 음악, 경험 등을 시나리오에 배치했다.

 

영상이 담겨 있는 아이팟과 헤드셋을 빌린 관객은 내레이션이 인도하는 동선을 따라 항구, 분주한 거리, 계단을 올라가며 외로운 골목길을 만난다. 그곳에서는 문득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하지만 그 퍼포먼스는 지금 현재 이곳 내 눈앞이 아니라, 과거 언제 이곳에서 있었던 퍼포먼스로, 화면 속에만 있다. 비디오의 가상성과 현실 세계의 구체성이라는 두 가지 현실이 혼합된 상황에서 혼돈을 느끼는 관람자는 자신이 걷고 있는 공간, 걷는 행위, 내가 머무는 시간의 의미를 돌이켜본다. 걷기가 선사하는 낯선 순간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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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 기억의 잡초, 2016, 혼합재료, 가변설치


‘기억의 궁전’은 장소에 기억을 심는 기술이었다. 사람들이 장소에 관한 특별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는 이 기억술은 책이 없던 시절, 구두로 정보를 전달해야 했던 사람들이 애용했다. 방법은 이렇다. 내가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장소와 동선을 생각한 후 동선에 따라 기억해야 할 정보를 이미지화해서 배치한다. 기억을 꺼내고 싶다면 이 궁전에 발을 들인 뒤 동선을 따라 걸으면 된다. 궁전에 들어서지 않으면 그 기억은 다시 만날 수 없다. 기억하기 위해 본인이 만든 공간 안으로 반드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 이 기억술의 치명적인 단점이긴 하지만, 기억을 오래 묶어 두기에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기 때문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들이 이 기술을 익힌단다. 클레오파트라가 즐겨 사용했고, 셜록 홈스도 기억의 궁전을 여러 채 지었다 했다.

 

기억의 주인이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궁전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공간 곳곳에 새겨 넣었어도 쓸모를 다한 기억이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공간에서 파생된 기억, 경험, 감정을 표상하는 작업에 집중해 온 홍범에게 기억은, 한때 다른 이의 인생이 흘렀을 곳, 어떤 생명이 성장하고 소멸했을 곳에서 무성하게 자라 공간을 가득 메워버리는 잡초 같다.

 

아주 선명하게 떠올릴 수는 없을지라도 특정 공간에서 시간을 담고 남아 있는 기억들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다른 이미지들과 연결되고 증식하면서 유기체처럼 자라 공간을 뒤덮는 것 같다. 홍범은 이런 가정 아래, 공간과 그것을 인식하는 관찰자 사이 어디에선가 자생하고 있을 알 수 없는 기억들을 잡초의 형태로 표현했다. 그렇게 원주인의 기억망을 벗어난 이 잡초들은 공간에 영롱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새로운 기억의 표상을 새기는 중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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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애, 오래된 잠수, 2016, 장지에 아크릴릭, 116.7×85㎝


세상에 나오면, 그 다음에는 늙어가는 일만 남는다. 어린 것과 젊은 것과 늙은 것이 공존하는 시간 속에서 세상 모든 것들은 태어난 뒤 줄곧 처음을 경험한다. 이 땅의 시간은 선형적으로 흘러간다. 여기 머물고 있는 존재라면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 유사 경험으로 미래를 예측하면서 늙고 병들고 사라진다. 두꺼비에게 헌집을 주고 새집을 받듯, 늙은 것은 새것에게 자리를 내주고 흐릿해진다.

 

박주애는 과거를 품고 있는 현재의 공간을 서성이면서 ‘폐지를 줍듯’ 늙어가는 것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관찰하는 중이다. 살펴보니, 사람이든 집이든 돌이든 바람이든 사는 것은 다 비슷한 것 같다. 관계는 관계로 이어져 있고, 이것은 저것으로 대치되며, 새것은 그을려졌다. 사라지는 것은 어쩐지 애틋했다. 그것이 나를 둘러싼 보통의 삶이었다.

작가는 추억으로 그을린 풍경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만 품고 사는 침묵하는 노인의 회색 눈빛을 보았다. 그들이 늙어가는 동안 도시에는 젊음이 늙음의 자리에 들어섰다. 할머니의 늙은 집이 어느 순간 담장만 남겨둔 채 지워졌을 때, 작가는 자신의 추억이 절단되는 기분이었다. 기억을 수채 구멍에 콸콸 버리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상실감은 흐릿해졌지만 할머니 집이 있던 동네를 지날 때면 잠겨 있던 추억이 떠올랐다.

 

작가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바다 위로 오래된 지붕을 둥실 띄웠다. 인간과 비인간, 문명과 본능의 구분에서 자유로울 것만 같은 반인반수 생명체에게 그 바다를 내주었다. 녹색 식물은 지붕만 남은 오래된 집 주변에 생명의 기운을 채워나갔고 반인반수는 오르락내리락 잠수했다. 

 

그 시간의 바다에는 아직 오래된 것들이 머물고 있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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