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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에 해당되는 글 82건

  1. 2018.12.10 뮤트
  2. 2018.12.03 타협하지 않는 자
  3. 2018.11.26 여섯 개의 기도문
  4. 2018.11.19 지금
  5. 2018.11.16 .jpg
  6. 2018.11.12 원 모어 타임
  7. 2018.11.05 시간을 지배하는 자
  8. 2018.10.30 16만3000광년
  9. 2018.10.15 버려진 신의 껍데기들
  10. 2018.10.08 익숙함과 낯섦 사이
  11. 2018.10.01 초속 5센티미터
  12. 2018.09.27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
  13. 2018.09.17 다바왈라의 점심
  14. 2018.09.10 사소하게 진부하게
  15. 2018.09.03 아모스의 세상
  16. 2018.08.28 물렁뼈와 미끈액
  17. 2018.08.20 연습을 위한 연습
  18. 2018.08.13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산 이야기
  19. 2018.08.06 유토피아 스테이션
  20. 2018.07.30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삼손영, 소리죽인 상황 #22: 소리죽인 차이콥스키의 5번, 2018, 12채널 사운드 설치, 단채널 비디오 ⓒ삼손영

 

“이 작품은 실패다.” 차이콥스키는 1888년 5번 교향곡의 초연을 마친 후, 자신의 음악에 대해 스스로 혹평을 던졌다. 그 자신도 느낀 것처럼, 이 곡은 “조악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그는 “지독한 피비린내가 나며,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다”는 평론가들의 비판에 시달렸다. 그러나 대중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는 이 곡을 사랑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대포의 포격이 이어지는 가운데에도 연주를 멈추지 않아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들을 위로한 곡으로 더 유명해졌다.

 

홍콩 출신으로,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작가 삼손영은 독일 쾰른의 플로라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 전곡 연주를 요청했다. 이때 그가 덧붙인 하나의 조건은 연주는 하되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연주자들은 바이올린의 활을 켜고, 클라리넷을 불지만 ‘선율’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악보를 넘기는 소리, 현을 긁는 소리, 연주자의 숨소리만이 12채널의 스피커를 통해 공간을 가득 채울 뿐이다.

 

그렇게 오케스트라는 ‘영혼을 담아서’ 연주를 시작해 ‘노래하듯 자유롭게’, ‘달콤하고 그리운 느낌’으로 전개하다가 왈츠를 연주한다. 이어서 팀파니와 현악기, 금관악기가 강렬하게 질주하며 알레그로로 장엄하고 위풍당당하게 마무리한다. 하지만 그 휘몰아치는 연주 안에 ‘음’은 없다. 숨죽인 상황 안에서 관객들은 문득, 정말 억압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음악의 화려함이 은폐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떠올린다. 그래서 삼손영의 ‘음악없음’은 역설적으로 그 ‘음악’의 감정에 더 집중시킨다. 청각을 다시 상상하고 구성하는 이 시간 속에서 ‘소리없음’은 ‘침묵’일 수 없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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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2003년 어느 날, 함부르크시 관계자가 함부르크 하펜시티의 오래된 코코아 보관 창고 사진을 들고 스위스의 건축가 듀오 헤르조그와 드 뫼롱을 찾았다.

 

사진 속 벽돌 건물을 들여다보던 그들은 이내 건물 위에 파도처럼 바람처럼 일렁이는 드로잉을 하나 얹었다. 그 드로잉은 14년 후에 함부르크의 랜드마크 엘브필하모니로 탄생한다.

 

헤르조그와 드 뫼롱, 엘브필하모니 드로잉, 2003 ⓒ헤르조그와 드 뫼롱

 

새로운 랜드마크의 등장은 순조롭지 않았다. 2010년으로 약속한 개관은 2017년에야 이루어졌고, 1억8600만유로로 책정했던 건축비는 7억8900만유로까지 늘어났다. 공사가 중단되고, 책임자가 교체되고, 공사기간이 늘어지고, 예산이 증가할 때마다 정치적 공방이 줄을 이었고, 시민사회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콘서트홀은 그저 “상류계층의 퇴폐적 기념비” 아니냐는 비판, 다른 프로젝트들이 예산 절감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엘브필하모니 프로젝트만이 끝없이 예산을 지출하는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용인하기 어렵다는 의견들이 사회 안에서 갈등과 분노를 키워나갔다.

 

그 사이 건축가들은 그들이 디자인한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실현하기 위해 비용과 시간을 쓰고 있었다.

 

흡족한 빛의 굴절률을 가진 전구를 발견하지 못한 그들은 전 세계를 뒤져 찾아낸 유리공방에서 홀 천장용 전구 1000개를 수작업으로 완성했다. 완벽한 소리를 위해서 이미 시공을 마친 1만개의 음향 패널 틈새를 모두 메웠다.

 

엘브필하모니를 통해 이곳이 그저 유서 깊은 도시가 아니라 새로운 도시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 그들은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건축물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자 했다. “이 건물이 우리의 모든 경력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가 디자인으로 사람들을 현혹했으니 이 총체적 난국을 책임져야 했다.” 책임을 지기 위해 그들은 거의 아무것도 타협하지 않았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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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알버스, 여섯 개의 기도문, 1966~1967, The Jewish Museum, New York, Gift of the Albert A. List Family, JM, 테이트 모던 제공

 

세상은 조금씩 살기 좋아지고 있는 걸까. 지금 여기에서 그 믿음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을 ‘조금 앞서’ 기념하면서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애니 알버스(1899~1994)의 개인전을 열었다. 직물을 ‘공예’에서 ‘예술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그는, 바우하우스의 학생이자 선생이었다.

 

공식적인 교육제도 안에서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여성들의 입학을 허용한 바우하우스는 진보적 교육기관이었다. 공예와 순수예술 간에는 경계가 없고, 성차별도 없다고 강조하며 자유와 혁신을 이야기하던 바우하우스였지만, 여성이 남성의 영역으로 접근하는 것은 교묘한 명분을 들어 완곡하게 막았다. 이곳을 졸업한 후 ‘전문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었던 대다수의 여학생들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라고 언급되는 ‘직조 공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애니 알버스 역시 바라던 회화 대신 직조를 전공한다. 그는 평면회화와 직조를 연결시킨 ‘회화적 직조’라는 개념을 내세우면서 직조를 사용해 짜임새 있는 딱딱한 패턴의 시각적 어휘를 개발하여 독자적인 기하추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회화’를 놓지 않기 위한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

 

‘회화적 직조’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여섯 개의 기도문’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내용을 담아 베이지색, 검은색, 흰색, 은색의 수직 태피스트리 6점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수직과 수평으로 중첩되는 선들은 그 무엇도 선명하게 발언하지 않지만, 작가는 그 선들의 매듭과 엉킴 사이사이에 언어로 표현하기에 부족한, 언어가 쉽게 왜곡할 수 있는 감정들을 직조해 나갔다. 그 사이에는 여성의 ‘창의성’을 외면하던 바우하우스를 향한 ‘어떤’ 감정의 실타래도 꼬여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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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언제인가. ‘당신이 가진 것은 시간뿐’이라고 말했던 작가 샹탈 애커만은 ‘지금’의 이름으로 사막의 풍경을 소환한다. 허공에 V자 형태로 매달린 다섯 개의 스크린에서는 마치 달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처럼, 각각 다른 속도와 시점으로 덜컹거리는 사막이 흘러가는 중이다. 그 안에서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전시장은 간간이 암전에 가까운 어둠에 휩싸였다가, 곧이어 붉은 모래, 바위 절벽이 펼쳐지는 예의 그 사막 풍경을 거칠게 흘려 보낸다.

 

샹탈 애커만, 지금, 2015, 멀티플 채널 HD 비디오 설치, ⓒ샹탈 애커만

 

다섯 개의 스크린 사이로 시선이 겹치고 흔들리는 가운데, 문득 파란 하늘이 화면을 채울 때면, 사막의 바위와 모래는 더 건조하고 거칠게만 보인다. 텅 빈 사막에 시선을 준 사이, 전시장 안에는 두려움 가득한 울부짖음, 엔진 소음, 동물의 괴성이 만드는 불협화음이 차오른다. 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영상 사이를 뚫고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총성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전쟁과 죽음의 장면이 떠오른다. 애커만은 하늘과 모래가 끝없이 출렁이는 빈 사막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우리가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은 늘, 야만과 유혈의 신호다”라는 말을 보탰다.

 

“영상 앞에서 관객은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또한 시간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내 영화를 보며 관객들이 저항감을 느끼는 이유다.” 그는 관객이 그의 영상 앞에서 온몸으로 흘러가는 매 시간을 알아차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오롯이 마주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공허한 사막에서 샹탈 애커만이 보았을 ‘지금’은 반성 없는 인류의 과거가 무한 반복되는 ‘지금’일까, 그 결과 어쩌면 땅 위의 생명이 소멸한 ‘지금’은 아닐까. 스치는 풍경들의 스산함이 암시하는 ‘지금’은 어둡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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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영화 <서치>는 실종된 딸의 행적을 추적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줄거리만 들어도 몇몇 영화들이 떠오를 만큼 익숙한 장면이 예상된다. 그러나 영화는 신선한 형식과 참신한 화면 구성으로 스토리 라인을 풀어낸다.

 

영화 <서치>의 한 장면.

 

영화 내내 전지적 시점으로, 장면을 직접 보여주는 경우가 없다. 모든 장면이 액자 구성처럼 PC 모니터와 모바일 액정, CCTV 등의 또 다른 화면을 통해 펼쳐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진과 동영상은 구글부터 인스타그램, 텀블러, 라이브 방송 등 다양한 인터넷 플랫폼을 활용해 생산되고 재생된다. 가족사진 또한 카메라로 촬영되지 않고 모니터 캠을 통해 캡처된다. 그리고 인화해 가족앨범에 보관하지 않고, 컴퓨터 바탕화면이 되거나 폴더에 저장된다. 보기 힘든 망자의 사진은 검색 제한을 걸거나 온라인 메모리얼 사이트에 업로드한다. 이처럼 영화는 윈도 XP 화면으로 시작해 시종일관 우리를 둘러싼 이미지 환경을 현실감 있게 제시한다.

 

특히, 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얻은 단서들이 쌓여가는 바탕화면이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사진은 다른 문서들(PDF, HTML, RTF)과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전송되거나 삭제될 수 있는 파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찍히기보다 캡처되고, 간직하기보다 전송되며, 기념하기보다 인증되는 하나의 데이터. 예기치 않게 영화에서 지금 여기, 사진의 정체성을 실감하게 된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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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면 무엇이 시간을 가릴 수 있을까?” 코넬리아 파커는 런던의 세인트 판크라스 기차역을 운영하는 회사 HS1과 로열 아카데미가 협력·기획한 아트프로젝트 ‘테라스 와이어즈’ 시리즈 출품 제안을 받고, 처음에는 거절했다. 주최 측이 유로스타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기차역의 철제 천장을 올려다볼 수 있는 작품을 부탁했지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유로스타를 타고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던 그는 역의 벽시계가 다른 작업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장면을 목격한다.

 

코넬리아 파커, 원 모어 타임, 2015,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기차역 설치, 지름 5.44m ⓒ코넬리아 파커, RA

 

기차 출발 시간에 맞추기 위해 조바심 내며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 찬 기차역에서 시계가 사라지는 순간은 작가에게 시간의 의미를 환기시켰다. 그는 기차역의 ‘세속적’인 시간으로부터 초연한 시간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이 아이디어는 시계로 시계를 가린다는 구상으로 이어진다. 그는 기존 벽에 걸려 있던 하얀 벽시계의 도플갱어 같은 시계를 제작해 천장에 설치했다. 크기도 모양도 같지만 색깔만 다른 검은 시계였다.

 

직경 5.44m에 무게 1.6t의 이 시계는, 기존 벽시계에서 약 16m 떨어진 천장, 역내를 걷는 사람들 머리 위에 매달렸다. 두 시계는 마치 시간의 빛과 어둠처럼 시각을 지시했다. 관객이 어느 위치에서 두 시계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둘은 30초 정도의 시간차를 보이기도 했고, 흰 시계가 검은 시계에 완전히 가려져 사라지기도 했다. 작가는 검은 시계를 런던 표준시보다 1시간 앞선 프랑스 시간에 맞추고 싶었지만, 승객을 혼란에 빠뜨릴 것 같아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시간의 지배를 받으며 위험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너무 큰 혼란에 빠뜨리지는 않겠다는 작가의 작은 ‘배려’였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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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식물학자이자, 예술가인 루스 이언은, 캠든아트센터 안으로 360개의 나무, 풀, 물건들을 들여놓았다. 양상추, 장바구니, 물뿌리개, 왁스, 꿀, 전나무, 수은, 도끼는 각자 자리를 잡았다. 30개씩 열두 그룹으로 배치된 이 사물들은 각자 특정 날짜를 지시하며 그대로 ‘달력’이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군들이 만든 새로운 달력 ‘공화력’이었다. 혁명군에는 바스티유 감옥뿐 아니라 종교, 정치, 경제,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권력인 그레고리력 역시 변혁의 대상이었다.

 

루스 이언, 백투더필드(Back to the Field), 2015, 캠든아트센터 설치장면 ⓒ 루스 이언 (사진촬영:Hydar Dwach)

 

1주일을 10일, 1개월을 30일, 1년을 360일로 정하고, 1년에서 부족한 5일이나 6일은 선행의날, 재능의날, 노동의날, 이성의날, 보상의날, 혁명의날로 명명하여 축제일로 삼았다. 이 달력에서 기존에 있던 종교 축제의날과 성인의날은 삭제되었다. 10일마다 1일씩 쉬자, ‘안식일’은 줄어들고 노동시간이 늘어났다. 프랑스를 생산성이 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었던 혁명군은 달력 안에 직업윤리를 강조하는 새로운 질서를 담았다.

 

이들은 예술가, 시인, 원예사와 협력하여 날짜의 이름을 새롭게 정리했다. 그 이름들은 자연의 변화, 농경의 규칙을 담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5일째에는 말, 소 같은 가축의 이름이 등장하고, 10일째에는 술통, 와인 압착기, 도끼, 칼 같은 도구의 이름이 등장한다. 달력을 따르자면, 사람들은 열흘에 한 번 마을에 모여 나라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법규를 소리 내어 읽으며 함께 식사를 한다. 그리고 곡괭이 사용법을 배운다.

 

혼란에 빠진 국가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겠다는 혁명군의 의지를 담은 ‘혁명력’은 브뤼메르(안개달) 18일 쿠데타로 혁명을 종결시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명령에 따라, 1806년 1월1일 이후 사라졌다. 탄생 후 12년 만의 일이었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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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말라붙는 건기를 지나 우기에 접어들면, 우유니 소금사막은 지평선을 지우고 하늘과 땅이 하나인 양 우주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 된다. 어떤 국가의 소유물도 아닌 공기 안에서, 바람과 태양열만을 이용하여 비행하는 삶을 꿈꾸는 작가 토마스 사라세노는 2016년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을 찾았다.

 

그는 물이 차오른 사막 위를 걸으면서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별빛이 물에 반사되는 밤풍경 안에서는, 마치 별들 사이를 걷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 안에 우유니 사막은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자리 잡았다.

 

토마스 사라세노, 16만3000광년, 2016, 디지털 비디오, 컬러, ⓒ 토마스 사라세노 스튜디오

 

“지구인의 눈에 세상 모든 풍경은 과거의 것이다.” 우주 성운 사이를 누비는 기분에 취한 그는 우유니의 대기 안에서 16만3000년 전 대마젤란운에서 방출한 빛을 보는 중이었다. 우주가 태어났을 때 이미 존재했던 시간 안에서 지구인은 공존하고 있으며 그때의 사건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시간의 밀도가 높은 이 우주 속에서, 모든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외면하며 사는 것은 어려웠다.

 

“현실은 무엇일까”라고 묻는 사라세노에게 그의 지인이자 감독인 알렉산더 클루게는 이렇게 말했다. “인류는 현실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 본질의 한 부분이다. 인간은 철저히 현실의 반대쪽에 존재하는 것에 욕망을 품는다. 인간은 욕망으로부터 단절되느니 차라리 거짓을 선호한다.”

 

클루게의 답변을 뒤로하고, 사라세노는 16만3000년의 시간을 품은 우유니 소금사막에 플라스틱 비닐 구름, 화석연료가 만든 유독성 구름을 띄워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지구인에게, 우리를 증명하는 방법은 과연 ‘오염’의 발자국밖에 없는지 묻기 시작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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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어떤 연유로 신내림을 받고, 또 어쩌다 신과 소원해지는지 무당마다 다른 사연이 넘쳐나겠지만, 신기를 잃은 무당은 그간 당집에 애지중지 모셨던 ‘신상’을 내다 버린단다. 관상학에서 말하는 호상, 당대 가장 이상적인 사람의 얼굴을 담아 만들었다는 불상 등 세상의 좋다는 형상 여기저기에서 가져온 이미지를 짜깁기해 자신의 신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굿을 해 신령을 모셨을 테지만, 끝이 오면 의미와 정성, 시간을 쏟아부었던 형상들과 가차 없이 이별한다.

 

김형관, 눈부신 그늘, 2018, 혼합재료, 가변설치 경기도미술관 제공

 

그들이 버린 신의 껍데기가 현대인들의 그림자에 주목해온 작가 김형관의 손에 들어왔다. 영험함을 상실한 최영 장군, 산신, 벅수동자, 선재동자 상은 2012년 그의 개인전 전시장에 등장한 이후 창고에 잠들어 있다가 2018년 ‘경기천년 도큐페스타’의 전시, ‘경기 아카이브_지금,’에 다시 나타났다. 경기라는 이름이 탄생한 지 천년이 된 것을 기념하며 과거와 현재를 기억, 기록하고 미래 천년을 내다보는 이 행사는 경기상상캠퍼스 내 (구)임학임산학관에서 열리는 중이다.

 

참된 지혜와 깨달음을 얻은 중생이 극락정토로 가기 위해서는 반야용선을 타야 한단다. 기획자는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는 이 건물을 ‘반야용선’이라 명명하면서, 이 전시가 경기인의 꿈을 싣고 미래 천년 경기의 바다를 항해하는 하나의 용선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사물이며 공간이 의미를 입고, 버리고, 또 다른 의미를 얻는 일은 되풀이된다.

 

기획자는 작가와 협의하여 1층 입구에 설치하기로 했던 신상을 옥상 위, ‘반야용선’의 꼭대기로 올렸다. 한때 사람들의 지독한 기도를 받아야 했던 신상이라면, 여전히 ‘영물’일지도 모를 일. 공기를 떠돌던 신들이 문득 발견한 이 신상에 잠시 머물다, 기도의 목소리를 듣고, 또 홀연 떠날지 누가 알까.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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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주, T.P.A(트리거, 펄스, 앰플리피케이션), 2018, 싱글채널 비디오, 사운드 ⓒ 안정주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새롭다. 그 새롭고 낯선 것에 호기심이 발동하는 일은 순간, 곧 익숙해진다. 그러다가 이제는, 어쩌다 낯선 상황을 만난다 해도 “이 정도 낯섦쯤이야!” 하고는 과거의 경험을 응용하여 적용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에서 능숙하게 패턴을 발견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세상에 새로울 것은 별로 없다.

 

익숙해서 편안하거나 지루하거나. 그 쳇바퀴 안에서 평범한 일생은 흘러갈 것이다. 소소한 개인사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처럼 많은 이들의 삶이 얽혀 있는 영역에서도 사람들은 점차 무감각해진다. 한번 자리 잡은 ‘익숙함’을 흔드는 일은 쉽지 않다.

 

작가 안정주는 그 익숙함이라는 표피를 전혀 다른 감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해서, 또 다른 질서를 만들고, 이를 통해 현실을 재발견하는 작업에 관심이 있다. 이러했던 작가에게, 굳이 한글을 만들고 굳이 중국과 다른 음의 기준 ‘황종’을 만든 세종대왕은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안정주는 세종의 음악적 업적 안에서 음악을 통해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조선을 다스리고자 했던 한 행정가의 도전을 보았다. 작가는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에서 모티브를 얻어, 비디오 안에서 소리와 이미지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작업을 완성했다. 정간보의 소리기호를 오디오 신시사이저에 입력하면, 소리는 트리거(방아쇠)가 되어 진동을 일으키고, 증폭·변형되면서 자연발생적인 음악을 만든다. 그리고 이 음악이 또 하나의 신호가 되어 ‘트리거, 펄스, 앰플리피케이션’의 과정을 거쳐 이미지를 만든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소리와 이미지의 익숙하고도 낯선 조응과 변주가 관객을 감싼다.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역사 속 정간보가 작동하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시스템의 탄생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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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 초속 5센티미터, 2007, 애니메이션, 62분 ⓒ 신카이 마코토, 코믹웨이브 필름

 

빛이 1초에 30만㎞를 가고, 소리가 1초에 340m를 갈 때, 벚꽃은 5㎝를 갔다. 사실은 떨어졌다. 데뷔 초 1인 창작자로 주목받던 작가 신카이 마코토는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벚꽃잎의 ‘느린’ 속도에 기대, 사랑과 상실, 그리움, 그리고 무기력의 감정을 소환했다.

 

‘초속 5센티미터’에 등장하는, 한때 어렸던 두 주인공은 같은 학교라는 가까운 거리 안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의 속도를 높인다. 이후, 여자주인공이 1500㎞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간 뒤, 물리적 거리와 마음의 거리가 조금씩 어긋나면서 이들의 통증이 시작되었다. 여자 친구를 만나러 길을 떠난 어린 그는, 마침 쏟아져 내린 폭설 때문에 역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 정차하고 느리게 달리는 기차의 속도에 반비례하여 달아오르는 마음에 고통을 받았다.

 

서로를 향한 마음의 속도는 느림과 빠름 사이를 오가다가 서서히 멈추었다.

성장한 남자 주인공은 주변 다른 이들이 다 그렇듯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고, 생존해야 했다.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 무엇인가를 향해 남들처럼 손을 뻗고, 세상의 속도가 운행 중인 궤도 위에 발을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걷는 삶의 속도는 자꾸 어긋나, 궤도 위에 안착하지 못했다. 세상의 속도가 어지러운 그는 자꾸 머뭇거리고, 사람과의 거리, 사회와의 거리를 조절하는 데 실패한다.

 

여자 친구와 마음의 거리를 1㎝ 좁히는데 1000통의 문자와 3년의 시간을 쓴 그는 이별을 맞이했다.

 

세상의 속도에 길들여지지 못하는 이가 세상 앞으로 다가가는 속도는 여전히 중력과 바람에 휘청이는 초속 5㎝다. 그사이 세상은 저만치 멀어졌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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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 퍼포먼스, 1984, 퍼포먼스, 사진 ⓒ박이소,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84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박이소(당시 이름 박모)는 교회 자선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인 가정의 추수감사절 만찬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신께 감사하며 다른 인종, 타 문화인에게까지 ‘은혜’를 베푸는 이날, 미국인들은 칠면조, 옥수수, 으깬 감자, 호박파이, 크랜베리 소스를 비롯하여 새 곡물로 만든 푸짐한 음식을 저녁식탁에 올리고, 미소로 동양인을 맞이했을 거다.

 

요새는 인간의 ‘은혜로움’이 더 멀리 뻗어나간 덕분에, ‘사면식’을 치른 칠면조는 추수감사절 식탁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대신 동물원이나 농장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다. 트럼프도 이 사면식에 동참했다 하니, 칠면조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은혜의 상징이다.

그날 이후 박모는 사흘간 밥을 굶었다. 단식은 그에게서 쓸모없는 기력을 빼앗는 대신 맑은 머리를 주지 않았을까. 단식을 마치고 그는 플라스틱으로 가마솥을 만들어 목줄에 매달아 끌면서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를 건넜다. 당시 가까이 지내던 작가 강익중이 곁에서 그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추수감사절이 나에게는 행복한 날이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나는 이상한 퍼포먼스를 해서 아방가르드 미술가가 되는 제스처를 해보고 싶었다. 나는 내가 일종의 정치적 미술가라는 걸 보이고 싶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나 핑계가 필요해서 예술을 한다던 그의 ‘터무니없는 정직함’이 아궁이에 올라가는 순간 그대로 녹아 일그러질 플라스틱 가마솥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추수감사절이 가면 블랙프라이데이가 온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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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바왈라는 인도 뭄바이의 도시락 배달부다. 그들은 고객의 점심을 가정에서 받아와, 기차로, 수레로, 자전거로 오후 1시 전까지 사무실 책상에 배달한다. 고객이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빈 도시락통 ‘다바’를 가정으로 돌려보내야 비로소 일이 마무리된다. 여름에도 격식을 갖춰 하얀 긴팔 셔츠를 입는 인도 남성들에게 점심 도시락통과 함께하는 출퇴근이란 안될 말이다. 한 명의 다바왈라가 50명의 도시락을 책임지고 배달하는 시스템 덕분에 평균 2시간 안팎의 출근길이 가볍다. 다바왈라의 활약은 어느새 100년이 넘었다.

 

천경우, 다바왈라의 점심, 2017, 퍼포먼스와 50개의 인도 도시락통 ⓒ천경우

 

첨단 기술도, 전문 지식도 없이, 심지어 문맹자들까지도 능숙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인간노동력 중심’ 다바왈라 배달 시스템은 8000만건 가운데 사고는 300~400건에 머물 정도로 정확하다. 페덱스 같은 운송업체를 포함한 일류 기업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

 

천경우는 배달이 직업인 그들 손에 그들을 위한 ‘다바’를 배달해주기로 했다. 작가는 50명의 ‘다바왈라’에게 원하는 점심 메뉴를 물었다. 매일, 매 끼니, ‘뭐 먹을까?’ 이야기하는 우리에게는 새로울 것 없는 이 질문이 그들에게는 생소했다.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을 안고 사는 왈라들은 메뉴를 선택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도 먹어본 적 없다는 ‘피자’가 그나마 독특한 주문이었고 대부분은 작가가 준비하는 데 무리가 없는 인도의 평범한 식사를 이야기했다. 작가는 스태프와 함께 그들이 원하는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서 점심시간에 맞춰 그들 손에 배달했다. 새로운 ‘점심 문화’가 점점 퍼져나가는 뭄바이에서,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직업군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왈라들은, 그렇게 단 한번, 자신이 선택한 ‘점심’을 서비스받았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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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어떤 이유에서든,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지쳐버리는 경우가 있다. 피로도가 고점을 찍는 순간, 회의감, 환멸감 같은 감정에 휩싸인다. 그러다가 문득, 지난한 설득의 과정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시작된다.

 

기록매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당대의 정서와 호흡하지 못한다고, 잊을 만하면 끌려나와 사망선고를 당하는 회화는, 당위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사실은, 회화 매체로 작업하고 싶은 예술가들이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먼저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붓을 들고 싶은 자기 자신이었다.

 

빌헬름 사스날, 무제, 2010, 캔버스에 유화, 200×220㎝ ⓒ 빌헬름 사스날, 안톤 컨 갤러리

 

예술가가 되기 전 건축을 전공한 빌헬름 사스날은 사진을 찍고, 영화를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 그는 1972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소비에트가 무너지면서 불어닥친 ‘격변’의 시대에 20대를 보냈다. 황량한 세상을 목도하며, 전쟁, 선전선동, 자본주의의 폐해, 부패한 정부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드러내는 작업도 했지만, 그는 사실 회화에 ‘선전 선동’의 힘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회화가 가지고 있는 돌풍의 반경은 너무 작다. 세상 모두가 ‘큰 그릇’이 될 필요는 없으니, 마이크로 스케일은 거기에 맞는 대화법을 쓰면서 살면 된다.

 

그래서 그의 화면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흰색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맨발로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있는 남자의 모습처럼 소소하다. 그렇다고 ‘거대하고 심오한’ 이야기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엉망진창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고 싶고, 때로는 나밖에 모르는 지독한 이기심을 긍정하고 싶을 뿐이다. 사소하고 진부해져도 무엇인가는, 누군가는, 때때로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 아닌가.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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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에반스, 아모스의 세상:에피소드 1, 2017, 건축·비디오 설치 ⓒ세실 에반스

 

“나는 뭔가 중요한 것을 짓고 싶다. 아니,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아니, 나는 나를 표현하고 싶다.” 세실 에반스 작품에 등장하는 건축가 아모스는 뛰어나지만 악랄하고, 좌절과 분노 사이를 오가는 생활에 익숙하며, 능수능란하게 거짓을 말하는 오만함을 즐기는 백인 남성 건축가다. 그는 사회적으로 꽤 급진적인 요소들을 장착한 공동주택을 설계했다. 도시에 새로운 질서를 제안하고도 남을 이 주택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아모스는 “자본주의 시대를 위한 완벽히 개별적이면서도 함께하는 공동체 생활공간”을 꿈꾼다. 그가 꿈꾸는 생활공간을 만들기 위해 작가 에반스는 ‘이상적 공동사회로서의 집합주택’ 모델로 등장했다는 르 코르뷔지에의 마르세유 집합주택, 모듈화의 기수로 꼽힌다는 모셰 사프디의 해비타트 67, 철거 진행 중인 앨리슨·피터 스미슨 부부의 공동주택 로빈후드 가든 등을 모델로 삼았다. 새로운 기술이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작가에게 ‘공동주택’은 감정의 여러 케이스를 상상할 수 있는 효율적 장소다.

 

입주자들은 건축가의 ‘이상’을 따르지 않는다. 신중하게 설계하고 구성한다 한들, 네트워크에 균열이 생기고 인프라가 붕괴되는 일은 낯설지 않다. 건물이 거대해질수록, 개인들은 거대한 규모로 공존하고 건물의 거대한 인프라스트럭처에 결합·의존하며 생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인은 나를 통제하는 시스템에 무조건 순응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권리와 시스템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있다. 작가는 이 공동주택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상 가능한 일들을 TV 드라마처럼 펼쳐내며 개인과 공동체가 아름답게 공존하는 판타지를 섬세하게 무너뜨린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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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의 빨간 엉덩이가 높은 백두산에 다다르는 여정처럼, 동해 추암의 기암괴석은 해안의 절경을 낳고, 상상을 낳고, 전설을 낳고, 소원을 낳고, 믿음을 낳고 ‘촛대바위’가 되었다.

 

임영주, 밑_물렁뼈와 미끈액, 캔버스에 유화, 2017, 40×20㎝×7pcs, ⓒ임영주

 

담벼락 위의 얼룩무늬, 진흙수렁처럼 자연이 의도치 않게 연출했을 무질서한 흔적 속에서 형태를 뽑아내라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조언은 시각의 오류가 상상의 미덕에 닿는 쾌감을 제공하지만, 그런 연상의 과정은 어쩐지 전형적이고 통속적이다.

 

울릉도 저동항에 있는 촛대바위는 추운 겨울 일하러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다 돌이 되어버린 효녀라던데, 추암의 촛대바위는 본처와 소실을 거느렸던 남자란다. 두 여인의 지나친 투기에 하늘이 노해 벼락을 날려 남자만 남겨놓았다니, 에로는 호러와 닿아 있다.

 

이제는 동해의 시그니처가 되어, 해돋이 출사길에 나서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카메라로 순간포착해야 할 촛대바위는 임영주의 작업 속에서 무릎과 만난다. “뼈와 뼈가 연결된 곳에는 물렁뼈와 미끈액이 들어 있다.” 과학책에서 건져 올린 이 문장으로 작가는 촛대바위의 껍질 아래 숨겨진 생생한 물렁뼈와 미끈액을 찾았다. 견고하게 닫힌 구조 사이를 물렁물렁 미끈하게 유영한 덕분이다. 아마도 초록색 이끼로 뒤덮였을, 뻣뻣하게 말라붙은 바위 아래 매끄러운 무릎이 있고, 물렁뼈가 있고, 그 사이로 미끈액이 흘러 다닌다. 딱딱하고도 부드러운 촉감이 뼈와 뼈 사이로 파고들어 솟아오른다.

 

물렁뼈가 퇴화한 ‘늙은 관절’은 균형을 잃는다. 그의 신체는 줄어들고, 중심은 앞으로 쏠리며, 보행속도와 보폭은 감소한다. 늙은 걸음은 통증을 동반한다. 뼈와 뼈가 만나는 모든 관절에서 물렁뼈는 언제라도 소실될 수 있다. 부드러운 완충지대란 언제라도 소멸될 수 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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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 연습무의 연습무, 2018, 6분18초, 4채널 오디오 설치 ⓒ오민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연습이 과정이라면, 그 종착점은 최고의 결과일까. 특정한 행동을 더 능률적으로 해낼 필요가 있을 때, 사람들은 그 행동을 반복하여 몸에 익히는 연습의 과정을 거친다. 연습은 몸에 습관을 입힌다. 익숙해질수록 최고의 결과를 낼 가능성은 높다. 연습에 매진하는 오늘의 땀방울은 빛나는 미래를 위한 것이다.

 

정말 그런가. 연습은 늘, 온전히 ‘다가올 미래’ ‘최종적인 결과’로 빨려 들어갈 뿐일까. 학부 시절에 피아노를 전공한 작가 오민은 쇼팽 이후 위상이 달라져버린 ‘에튀드’에 주목했다. 기계적인 연습 과정을 통하여 악기의 연주 기교와 표현 방식을 습득하여 ‘예술적인’ 다른 곡을 잘 연주할 수 있도록 돕는 에튀드, 연습곡. 쇼팽은 기술 향상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다고 여겨진 반복의 지루함을 뛰어넘는 ‘예술성’을 연습곡에 불어넣었다. 연주자들에게 ‘과정’이었던 연습곡이 ‘최종’ 무대 위에 오르면서, 연습과 최종은 흥미로운 관계망 안으로 진입했다. 결과를 위한 연습이 결과 그 자체가 되었다.

 

오민은 이제, 미래를 향해 나아가다 급기야 ‘최종’에 도달한 에튀드의 시간을 다시 뒤집어 본다. 그는 안무가 이양희의 연습 장면을 담은 작업 ‘연습무의 연습무’를 통해 ‘에튀드’가 그저 ‘연습’이었던 시간을 소환했다. 화면 안에서, 이양희는 시선, 동작, 목소리라는 세 가지 그룹으로 조직한 ‘연습무’를 창작하기 위해 연습 중이다. 오민은 그 가운데 안무가가 시선을 연습하는 장면에 집중했다. 하나의 화면은 안무가의 얼굴을, 다른 화면은 안무가의 뒷모습을 담았다. 이때 그는 숲 한가운데 서 있거나, 회색빛 담벼락을 마주한 채 앉아 있다. 안무가는 대상을 바꾸어가며 초점의 깊이를 움직이고 너비를 변주하는 연습을 했다. 관객의 시선이, 멈춰 있거나 흔들리는 이양희의 눈빛과 그 눈빛이 도달한 공간 사이를 계속 오갈 때도, 연습의 시간은 계속 흘렀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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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산세에 들어서면, 지침을 따라야 한다. 줄을 서고, 버스에 오르고,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산에서 수행되는 완벽한 매일의 군무에 동참한다.” 한국과 덴마크를 오가며 활동하는 한국계 덴마크 작가 제인 진 카이센은 지난해 여름 백두산 관광길에 올랐다. 북한과 중국이 반씩 나눠 갖고, 이름도 각자 백두산·창바이산이라 달리 부르는 ‘민족의 영산’에 가기 위해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코스, 지린성 동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연길로 향했다. 연길에서 그는 여러 나라의 언어가 병기되어 있는 간판을 보았다. “중심부로부터 떨어진 세계주의는 다양한 보폭을 허용한다.”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산 이야기, 2017, 멀티미디어 설치, 2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아카이브, 사운드 설치 ⓒ 제인 진 카이센

 

 

그는 경계를 흐르며 국경을 가르는 강물을 보았다. “국가는 국경에서 자신의 힘을 가장 격렬하게 전시한다.” 남북관계에 순풍이 불면 중국과 남한 개발자들이 몰려들어 이 지역의 땅을 샀단다. 바람이 멈추면, 신도시는 황량하게 방치되었다. 작가의 발길은, 한때 불함산·단단대령·개마대산·도태산·태백산·백산이었으며, 이제 장백산·백두산이라 불리는 성스러운 산으로 향했다. 한국인에게는 환웅이 사람이 되고자 하는 호랑이와 곰을 만난 산, 만주인에게는 분화구에서 몸을 씻던 선녀가 붉은 열매를 먹고 낳은 그들의 조상 부쿠리 용손이 탄생한 산, 북한 사람들에게는 김일성이 일본에 대항해 투쟁했던 산이다. “문화에 따른 표현들은 그 산의 상상적 풍성함에 상응한다. 하나의 주제 속에 많은 이야기들이 변주되고 공명한다.”

 

작가는 고요한 천지의 성스러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자 고요를 깨뜨리며 자리다툼에 집중하는 이들의 몸짓을 보았다. 그러다 그마저도 덮는 천지의 숭고함이 불현듯 관광의 욕망을 무너뜨리는 순간을 보았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인 산 앞에 국경을 긋고, 이름을 붙이는 시간을 보았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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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러브 디퍼런스, 2003

 

2003년 2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대규모 항의 시위가 열리던 주말, 뉴욕에서 만난 비평가 몰리 네스비트,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작가 리크릭 티라바니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며 하나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전쟁, 빈곤, 자연파괴, 금융위기 같은 불안감에 흔들리는 일상 속에서, 지구의 멸망을 예견하는 것이 낯설지 않은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는 뜬구름 같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 키워드는 ‘여기 아닌 어딘가’를 상상하며 ‘지금 여기’를 들여다보는 계기는 될 수 있었다.

 

기획단은 만남이 교차하는 물리적이고 개념적 장소 ‘유토피아 스테이션’을 운영하기로 했다. 이들은 작가들에게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을 담은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이 작업들을 모아 그해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에 ‘유토피아 스테이션’을 설치했다. 참여작가들 가운데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는 전시장 안에 거울로 된 대형 테이블을 설치한 ‘러브 디퍼런스’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유토피아’에 대한 질문을 건넸다.

 

유토피아 스테이션에는 유토피아를 떠나는 사람들과 돌아오는 사람들이 스쳐간다. 사람들은 이 역에 잠시 멈추어, 듣고 보고 휴식을 취하고 생각하고 대화를 나눈다. 미래 언젠가 가능할지도 모를 세계를 상상하는 이 플랫폼 안에서, 다양한 의견이 모이고 흩어졌다. 공연, 콘서트, 강의, 독서 모임, 영화상영회, 파티, 이벤트가 열리는 ‘역’은 유토피아로 가는 노정에서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장소가 되었다.

 

이후 전시, 포럼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유토피아 스테이션에는 300명 이상의 예술가들이 참여해 유토피아에 대한 그들의 ‘정의’를 찾아갔다. 웹사이트 projects.e-flux.com/utopia/에서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테마로 한 지상 포스터전이 열리고 있으며 모든 포스터는 무료로 내려받아 사용할 수 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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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데이비드 호크니, 장 피에르 곤살베스 드 리마, 7월11일, 12일, 13일, 2013, 캔버스에 아크릴릭, 121.9×91.5㎝ ⓒ 데이비드 호크니

 

평생 그림을 탐구하고 실험을 놓지 않았던 데이비드 호크니였지만, 그의 조수이자 동료인 도미니크 엘리엇이 사망한 뒤 몇 달간은 좀처럼 붓을 들 수 없었다.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처음 방문한 미국에 매료된 호크니는 LA로 이주했고 30여년의 시간을 보냈다. 2004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하늘, 숲, 나무, 꽃을 그리면서, 캘리포니아의 온화한 기후 안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계절감을 만끽한다. 그는 풍경 안에서 순환하는 계절에 따른 생명의 운동, 한계를 알 수 없는 다양성을 보았다. 그것은 어쩌면 자연 속에서 순리를 만나는 일이었다. 너무 낡은 매체이기 때문에 동시대의 감성을 담을 수 없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세월의 경험을 담을 수 있어서 나이든 사람의 예술이라고도 묘사되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는 새로움과 담을 쌓지 않았다. 오히려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꾸준히 발굴하며 늙어가는 중이었다.

 

호크니가 잠들어 있던 시간, 그의 집 한쪽에서 23세의 청춘 엘리엇은 약물과 술에 취해 독극물을 마시고 사망했다. 조수의 죽음을 계기로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된 호크니는 작업을 멈추고, 영국을 떠났다. LA에서도 고통을 동반한 침묵의 시간은 이어졌지만,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그는 다시 붓을 들었다. 그와 같이 엘리엇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조수 장 피에르 곤살베스 드 리마의 초상이 그 출발점이었다. 두 손에 머리를 파묻은 채,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서 호크니의 통증을 본다. 남겨진 자들은 고통 안에서 좀처럼 헤어나기 어렵다. 그는 이 작업을 시작으로 82명의 친구, 동료의 초상과 1점의 정물화를 완성했다. 한 작품, 한 인물을 위해 3일의 시간을 보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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