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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대화의 기술 1200년대의 스페인 마요르카는 그리스도인, 무슬림,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공존하던 지역이다. 종교갈등이 빚어내는 충돌은 빈번했지만, 문화교류에 기반한 공생 관계는 유지하던 이곳에서 태어난 라이문두스 룰루스는 정복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아버지 덕에 유복한 환경을 누리며, 음유시인이 되어 유유자적한 삶을 즐겼다. “부유했고, 방종했으며, 세속적”이었던 그의 삶을 바꾼 것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환상이었다. 같은 환상을 다섯 차례 경험한 뒤, 그는 이를 신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성직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이교도’를 만나 개종을 권유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자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믿음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었다. 신의 속성을 덕, 완전성, 품위, 위대함 등의 개념으로 규정한 그는 신의 존재.. 더보기
블랙아웃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작품 ‘검은 사각형’에는 두 개의 그림층이 숨어 있다. 가장 아래에는 입체 미래주의 화풍의 그림이, 그 위로는 회화의 의미를 고민하던 그가 새로운 형식을 실험한 흔적이 있다. 물질이 지배하는 현실세계를 재현하는 역할로부터 회화를 독립시키고 싶었던 그는 고민이 축적된 캔버스를 검은색으로 덮은 작품 ‘검은 사각형’을 발표하면서 재현을 벗어난 순수표현을 주창하는 ‘절대주의’를 탄생시켰다. 철저한 무에서 시작할 때 비로소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 말레비치의 도전은 예술의 낡은 병폐를 묵인하고 추종하는 태도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이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검은 사각형’의 의미를 확장시키며 자신의 예술관을 설파했다. ‘검은 사각형’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15년, 연구자들.. 더보기
인간 없는 생태계 다들, 이런 세상이 올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다만 그 시점이 이렇게 빠를 줄 몰랐을 뿐. 그렇다면, 온난화로 지구의 육지 태반이 물에 잠긴다는 날 역시 오긴 하겠다. 그날은 우리의 예상보다 가까운 미래일 수 있다. 다양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미래를 예측할 테지만, 다양한 정보값이, 다양한 변수와 엮여 계산하는 미래의 사건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불확실하다. 그 불확실성에 기대 설마 그날이 올 리 없다는 믿음은 성장하고,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지금껏 해왔던 방식 그대로 지키려는 용기 내지는 만용을 뒷받침해준다. 하지만 이런 ‘신념’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우리는 생태계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없더라도 생태계는 작동하죠.” 미술과 인지과학을 .. 더보기
방문자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저 방문객일까. 타인의 삶에 잠시 동행하다가 다시 자기의 길 위로 돌아와 홀로 걷는, 결국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고독자일까. 아이슬란드 작가 라그나르 카르탄슨은 아내와 헤어진 후 그가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만나면 헤어지고, 시작하면 끝나는 삶의 질서는 여기저기서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뉴욕에 머물던 그는 지인의 소개로 뉴욕시 북쪽 허드슨 밸리에 있는 오래된 맨션을 만났다. 2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 맨션에는 43개의 방이 있었지만, 아무도 살지 않았다. 집주인의 가족, 지인들이 종종 들러 쉬었다 가는 은신처로 운영 중이었다. 카르탄슨은 이곳에서 보헤미안의 향기를 느꼈다. 친구들과 함께 어딘가에 얽매일 필요 없는 이 느슨한 공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 더보기
샤우팅 힐 시린 눈밭에 서서, 병풍처럼 펼쳐진 겨울산을 향해, 이제는 세상을 떠난 연인에게 안부를 묻는 외침이 쓸쓸했던 영화가 떠오른다. 카메라가 포착한 장면도 애틋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던 감각이야말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결정적인 요소였다. 공기를 진동시키며 귀를 건드리기 때문일까. 사람이 외부세계와 접촉할 때 사용하는 감각의 비율 가운데 10% 안팎을 차지한다는 청각은 꽤 촉각적이다. 그 접촉이 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더 깊이 흔드는 것 같다. “너는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란다. 내 영혼과 피보다 더 사랑하는 너를 신이 지켜줄 거야.” “목소리를 들으니 좋아요.” 해발 1000m의 골란고원에 올라선 이들은, 일년 중 단 하루, ‘어머니의날’에만.. 더보기
줄타기 “왜 그 일을 했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예술적인 범죄’를 저지른 뒤 곧바로 체포된 퍼포머 필리프 프티는 한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다다를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를 발견하고는, 멈출 수가 없었을 뿐이에요.” 24세의 프랑스 곡예사 프티는 1974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뉴욕 쌍둥이빌딩 양쪽 꼭대기에 케이블을 걸치고는 그 줄 위를 걸었다. 417m 건물 아래로는 어떤 안전장치도 없었다. 그가 손에 쥔 평행봉만이 그의 걸음을 도왔다. 난간 너머의 줄 위에 한 발을 올린 그는, 건물 위에 무겁게 남겨진 나머지 발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그의 무게중심을 줄 위의 왼발로 옮기자, 미지의 것으로 가득하지만 사실은 텅 비어 있는 그 구름 속으로 그의 몸이 움직였다. 약 .. 더보기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 “당신이 두려워하는 미래를 보라.” ‘우리가 미래에 관해 기대하고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영국 드라마 의 등장인물 베서니는 몸을 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육체를 벗어나고 싶은 그는 부모에게, 뇌를 다운로드해 클라우드에 보내는 시스템을 설명했다. 그것이 자살을 뜻하는 게 아닌지 묻는 부모에게 “다시 돌아가지. 흙으로”라고 답변한 베서니는 데이터가 되어 삶과 죽음이 없는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고 했다. 부모는 그녀의 인터넷 사용을 금지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작가 카럴 판 라러가 퍼포머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선택한 것은 베서니가 벗어버리고 싶었던, 일종의 비어버린 육체였다. 무대 위에 함께 올라선 최면술사가 카럴의 의식 스위치를 꺼버리면, 최면에 빠진 그의 몸은 4명의 무용수에게 주어.. 더보기
지금 여기 고백건대, 관객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이기는 늘 어려웠다. 관객을 모시기 위해 온라인 플랫폼에 온갖 콘텐츠를 끊임없이 올려야 했다. 전시 자체의 기획보다 전시로부터 파생되는 프로그램 기획이 중요했고, 온라인에 노출할 수 있는 콘텐츠를 가공하는 일이 중요했다. 조명발 좋은 전시장은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스튜디오가 되었다. 오프라인은 마치 온라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도대체 전시장에서 전시를 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고민했다. 그럼에도 오프라인의 경험은 대체 불가능하다는 신앙 같은 믿음으로 전시장을 꾸리는 데 에너지를 쏟았다. 그때도 온라인의 힘이 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인터넷이 오프라인을, 보완이 아니라 대체하려는 모양을 보니, 이 상황이 장기화되더라도 인류의 삶은 약간의.. 더보기
바닷가의 두 여인 에드바르 뭉크의 개인사는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우울하고 불안한 정서의 중요한 근거로 언급된다. 그가 5세였을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14세였을 때 누나 역시 같은 병으로 사망하고, 여동생은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였지만 가족을 살리지 못했다는 절망감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던 아버지도 뭉크가 26세 되던 해 사망했다. 6년 뒤 남동생이 3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이제 그의 가족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해 태어난 여동생뿐이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광기의 씨앗을 물려받았다. 나의 요람을 지켜보고 있던 것은 병과 광기와 죽음의 검은 천사들의 무리였다. 그들은 그 후에도 줄곧 나의 생활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류머티즘, 불면증으로 고통받았던 그는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리.. 더보기
연결 1975년 베트남에서 태어난 얀 보의 개인사는 극적이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통일정부가 들어선 후 불어닥친 격랑을 피해 그의 가족은 작은 배를 타고 베트남을 탈출했다. 1979년의 일이다. 덴마크 선박이 거대한 바다에 떠 있던 이 보트피플을 구해준 덕분에 얀 보의 가족은 덴마크에 정착했다. 북유럽에 자리 잡은 동남아시아인들이 동서양의 문화 차이를 경험하며 놀라고 좌절했을 세월은 상상 가능하다. 그러나 그 무엇도 당연하지 않은 상황,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돌아봐야 하는 일상 안에서 성장한 덕분에 얀 보는 세상을 바라보는 예민한 눈과 감각을 키울 수 있었다. 부서진 오래된 조각상, 굴러다니는 돌멩이, 낡은 상자. 그의 눈은 세상을 두리번거리며 사물을 발견한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장.. 더보기
동백 제주 4·3이 70주기 되던 2018년, 4·3을 기억하고 알리기 위해, 전보다 더 많은 프로그램이, 전보다 더 많은 곳에서, 전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열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이효리가 추념식에 참석해 시를 낭송했고,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열었다. 동백은 지고, 벚꽃이 흐드러지는 계절에 광화문 앞에서는 연일 행사가 열렸다. 사람들은 박경훈 작가가 그린 그림으로 제작한 동백꽃 배지를 가슴에 달고, 4·3을 만났다. 긴 세월, 제주 4·3의 진실을 전하는 작품활동을 이어온 작가가 동백꽃잎을 모티브로 4·3 기억 배지를 처음 디자인한 것은 60주기 되던 2008년이었다. 당시에는 몇몇 활동가들만이 가슴에 달고 다녔던 배지가 10년이 더 흐.. 더보기
회귀 딱히 돌아가고 싶은 시점이 있는 건 아니다. 아니다. 이 시큰둥한 마음은 어쩌면, 과거의 결정적인 순간 모두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이 역설적으로 튀어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험을 보기 전. 면접에 들어가기 전. 탈락하기 전. 집값이 오르기 전. 주식이 폭등하기 전. 휴대전화가 나오기 전.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건물이 무너지기 전.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 전쟁이 나기 전.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 웹소설 한쪽을 점령하고 있는 ‘회귀물’을 뒤적이다보면,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 있는 자들의 아쉬움, 미련, 후회, 욕망이 눈에 들어온다. 한번 살아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인생살이에 대한 노하우와 미래에 대한 정보로 무장한 ‘젊은’ 회귀자는 과거의 나와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존재감을 발휘하며 그의 인.. 더보기
격리 예술계 정보를 전하는 웹사이트 이플럭스를 열었더니, 헬멧을 쓰고 앉아 있는 휴고 건즈백의 이미지가 걸려 있다. 그 아래로 인류가 처한 오늘의 상황과 연결하여 함께 생각해볼 만한 키워드, 읽어볼 만한 글을 공유하자는 메시지가 이어진다. 에디터는 그 첫번째 키워드로 ‘전염’을 제시했다. “과학소설은 과학적 사실과 예언적 비전이 뒤섞인 멋진 로맨스”라고 정의한 휴고 건즈백은 발명가이자, 저술가, 잡지 발행인으로 살면서 기발한 발명품을 발표하고, 과학소설 잡지를 창간하는 등 현대 기술을 예견하고 과학소설의 미래를 개척한 인물로 꼽힌다. 여기 소개하는 그의 발명품 ‘아이솔레이터’는 소음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시야를 한정시키는 도구다. 나무로 제작한 헬멧에 산소통을 연결할 수 있어 착용해도 호흡엔 지장이 없다. 사.. 더보기
간호사 예술가들이 즐겨 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질문하는 사람들이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몫이다.” 해결책 없는 문제제기나 질문은 염증을 일으키지만, 탁월한 질문은 그 자체로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참여하지도 않은 전시에 참여했다는 거짓말을 한 뒤 ‘거짓말이 나의 출품작이었다’고 한다거나,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사진을 재촬영하여 제작한 ‘새로운 초상화’ 시리즈를 완판시키며 예술의 창작과 모방, 복제 논란에 또다시 불을 붙였던 리처드 프린스는 늘 광적으로 이것저것을 수집하고 들여다본다. 그는 전유와 도용, 모방으로 미국의 대중문화와 유머를 미술 안에 끌고 들어와 일상의 맥락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질문을 던지는 데 능숙하다. 그는 사스로 인해 전 세계가 히스테리의 최정점에 도달한 2002년 당시.. 더보기
민주주의의 위선 이란에서 태어난 화가 알리 바니사드르에게 ‘소리’는 작업을 풀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다. 탁월한 공감각 능력을 타고난 그는 소리가 전해주는 이미지를 그 영감과 연동하는 붓질로 화면에 펼친다. 구상과 추상의 결을 오가며 화면을 빼곡하게 채우는 작가는 우리의 언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성찰, 언어 사이로 빠져나가는 사유를 포착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자신의 공감각적 재능을 알아차린 건, 그의 어린 시절을 온통 지배했던 전쟁의 소리 덕분이다. 그의 가족은 이란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에 자리 잡았지만, 이란·이라크 전쟁의 포화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일상을 지배하는 전쟁 소리를 피할 수 없었던 그의 내면엔 파괴의 소리가 각성시키는 이미지가 차올랐다. 전쟁의 혼돈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작업은 페.. 더보기
진실을 찾아서 소년이 말한다. “진실은 축구다.” 여성이 말한다. “진실은 내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가 걱정된다는 것이다.” 남성은 말한다. “진실은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그룹 ‘원인 콜렉티브’가 제작한 거대한 이동식 말풍선 스튜디오 ‘진실의 부스’는 ‘진실은’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았다. 만화의 말풍선을 닮은 이 하얀 부스 안에는 작은 촬영 스튜디오가 있다. 사람들은 이 안에서 약 2분간 발언할 수 있다. 2011년 아일랜드를 시작으로 아프가니스탄, 멕시코, 남아프리카, 미국을 여행하고 있는 ‘말풍선’에 참여한 이들이 말하는 진실은 사랑, 예술, 기술, 연대, 가치, 폭력, 가족, 정치, 불신 등 세상의 온갖 주제를 아우른다. 누구도 명쾌하게 정의 내리기 어려운 진실에.. 더보기
게잠트쿤스트벨크 그것은 ‘잔치’였다. 좋아하는 이들과 한자리에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고, 대화하는 시간. 안무가 이양희의 오래된 지인들이 보태니컬 아티스트로, 의상디자이너로, 푸드스타일리스트로, 퍼포머로, 스태프로 협력하여 잔치의 톤과 매너, 캐릭터를 만든다. 무대와 객석을 특정할 수 없는 공간 안에서 퍼포머는 손님을 맞이하고, 서로를 소개하고, 음식을 서빙한다. 탱고를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와 시간을 일컫는 ‘밀롱가’의 콘셉트를 적용한 이 공간에 들어선 이들은, 탱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거닐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시공간이 찰나의 정적을 스치기가 무섭게 이곳을 다른 빛과 리듬이 채우는 순간, 퍼포머들은 달라진 빛과 리듬에 기댄 움직임으로 공간을 환기시키며 그때 그곳에 있는 이.. 더보기
절개 “그 문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말은 그가 이미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 자신이 특권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그들’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며 정치적 공격성을 드러내던 베를린 다다의 유일한 여성 작가 한나 회흐를 동료 남성 예술가들은 ‘다다의 잠자는 공주’라고 불렀다. 여성해방을 지지하며 남녀평등권, 기회 균등을 향해 정치적으로 옹호하던 그들이었지만, 소시민의 위선, 부조리한 세태를 고발하기 위해 매춘부, 여성의 나체를 폭력적으로 전시하는 방법을 거리낌 없이 선택하는 남성 동료 작가들 안에서 그는 편안할 수 없었다. “나는 자기 확신에 찬 우리가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 둘레에 쳐 놓는 경계를 희미하게.. 더보기
바리케이드로 오픈 마인드 쿠바 작가 요안 카포테는 지하의 미로 공원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뇌 구조처럼 설계한 ‘신경세포’의 미로 안에서, 사람들이 걷고 머물면서 명상하고 교감하기를 바랐다. 미로 한쪽에 쿠바 지도를 넣어, 미국의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쿠바에 대한 정책이 바뀌고, 그때마다 그 상황이 강제하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쿠바인들의 스트레스를 강조했다. 미로가 제시하는 삶에 대한 다양한 함의와, 명상의 필요성을 접목한 이 작업으로 그는 대다수 현대인이 살고 있는 도시환경을 되돌아본다. 시스템이 집적되어 유기적인 것 같지만, 구성원이 합의하거나 냉소하지 않으면 통제될 수 없는 도시의 불온한 현실 앞에서, 도시 생활에 중독된 인간은 그들의 사고방식을 돌아봐야 했다. 작업 구상 후 10여년이 흐른 뒤에야 그는 이 프.. 더보기
플로라 제임스 로드가 쓴 자코메티 평전에 실린 한 장의 흑백사진은 작가 듀오 테레사 허버트와 알렉산더 버츨러의 호기심을 제대로 건드렸다. 좌측에 앉은 젊은 자코메티는 카메라를 향해 있고, 우측의 여인은 그를 향해 앉았다. 둘 사이에는 이 여인, 플로라 마이요가 만든 자코메티의 두상이 있다. 사진이 포착한 특별한 분위기, 그리고 플로라에 대한 로드의 매력적인 묘사에 매료된 두 사람은 플로라를 찾아나선다. 미술사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미국 덴버 출신의 이 작가는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단호히 정리한 뒤 조각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역시 파리로 유학 온 자코메티를 만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플로라가 자코메티의 두상을 만든 것처럼 자코메티 역시 그녀의 두상을 만들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