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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6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샌정, 무제, 2017, 혼합매체, 가변크기(두산갤러리 제공)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억의 잔상, 평소 누적된 상념의 부스러기는 그림이 될 수 있다. 동일한 장소에서라도 사람마다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기억을 쌓을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이들의 기억 간에는 조금의 연관관계도 필요 없다. 내면세계라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도 없고, 말해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그 세계를 일단 꺼내 놓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 왜 꺼내 놓으려고 하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겠다.

 

그 세계는 말하지 못하는 것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인지, 의미를 전하는 것인지 숨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비언어적 사유의 세계다. 그곳이 바로 화가 샌정이 화폭에 담는 세계다. 형태를 그리고 지우기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통해 경험은 누적되고 감정은 감추어지고 의미는 흐려진다. 말하지 못할 무엇은 그렇게 그림 속에 자리 잡는다.

 

사적인 기록을 소재로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타며 새로운 이미지를 길어 올리는 그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 형태로 자신의 심리적 경험을 담는다. 회화는 그 모호함을 정서적으로 담아내기에 꽤 유용한 장르다. 그래서 작가는, 회화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 롤러코스터를 타든 말든 꾸준히 그림을 그려 왔다. 하지만 그 모호함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친절한 소통을 할 의지가 없다면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공동체의 건강한 삶을 꿈꾸는 날선 예술적 발언, 그 선명성이 세상을 물들인다. 그런 예술작품이나 태도에 동의하는 것과 무관하게, 샌정의 화면 앞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흐릿한 그 세계가 주는 자유로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필자는 칸딘스키를 인용하여 샌정의 태도를 옹호한다. “작가의 눈은 자기 개인의 내적 세계로 뜨여 있어야 하며, 귀는 내적 필연성에 기울이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한 작품의 기본적인 요소인 신비스러운 필연성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제목 없는 그의 세계가 울림을 갖는 이유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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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이중섭, 낙원의 가족, 1950년대, 은지에 유채, 새김, 8.3×15.4㎝, MoMA 소장


낙원을 상상하는 일은 시공을 초월한 전 인류의 유희거리였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 속에 전해오는 낙원에 대한 이야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보면 ‘아무런 괴로움이나 고통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이라는 이상세계를 꿈꾸는 일은 인간이 현생을 이어갈 수 있는 일종의 동력일 수도 있겠다.

낙원을 다룬 대표적 소설 가운데 도연명이 남긴 <도화원기>에는 전란을 피해 산속 깊이 숨어든 유민이 등장한다. 물고기를 잡으러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다 길을 잃은 어부가 흐드러지게 핀 복숭아 꽃길을 따라 정처없이 노를 젓던 중 한 마을을 만난다. 잘 가꾸어진 풍요로운 그 마을에, 혼잡한 세상을 등지고 산속 깊이 들어와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는 유민들이 있었다.

도연명은 전란과 군벌항쟁의 세파 등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되풀이되는 시대에 살았던 인물인데, 당대에는 실제로 혼란스러운 도시를 벗어나 인적 없는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새로운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유민이 많았다. 늘 전원을 꿈꾸었다고 알려져 있는 도연명에게 그들의 선택은 삶을 살아가는 일종의 대안적 방식이고 이상향이었다. 그의 이런 가치관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었다.

작품의 진위를 둘러싼 숱한 스캔들, 행려병자로 이승을 떠난 비극적 말년,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고독과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불살랐다는 예술혼 같은 수식어에 받들어져 ‘신화’의 반열에 오른 이중섭에게도 ‘낙원’은 현실의 행복을 극대화시켜주는 곳, 현실의 고통을 상쇄시켜주는 곳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모마가 소장하고 있는 ‘낙원의 가족’에는 복숭아 꽃과 열매가 탐스럽게 피어 있는 숲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다. 고통이나 갈등은 없고 평화만 가득한 <도화원기`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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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뭍에 올라온 물고기는 재물을 약탈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감시자 역할을 하느라 반닫이며 뒤주의 자물통에 새겨졌다. 불가에서 물고기는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채 나태와 방일에 빠진 수행자에게 경각심을 주는 존재다. 물고기는 목탁이 되어 구도자의 타락을 방지한다. 불가에서 물고기의 상징은 중생을 생각하는 부처의 자비, 장애가 없이 자유로운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로까지 이어진다.


심점환, 바다에 누워 2, 2016, 캔버스에 유채, 100×119.8㎝


신라 실성왕 15년 3월, 동해변에서 뿔 달린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해 5월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솟구쳤다. 이듬해 5월 왕이 죽었다. 백제 의자왕 19년 5월에는 사비하에서 길이가 30척이나 되는 큰 물고기가 죽어서 떠올랐다. 이듬해 백제는 망했다. 물고기가 죽고나면 누군가의 세상은 사라졌다.

화가 심점환은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사람으로 살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차라리 곤충이나 식물처럼 미물로 태어났다면 희망과 불안에 얽매이지 않았을 것이란다. 불안은 종종 허무를 낳는다. 생겨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이왕 생겨났으니 가능한 한 빨리 썩어서 없어지는 것이 좋겠단다. 빨리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은 그의 마음은 붉은 화면 가득 물고기를 해체하여 쌓아놓았다. 머리를 잘라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냈다. 생선찌개를 주문하면 쉽게 만날 수 있는 모양새건만, 어쩐지 입에 침이 고이지는 않는다.

생명을 잃은 물고기는 무엇인가의 밥이 될 것이고, 악취를 풍기며 썩을 것이고, 흙으로, 어쩌면 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생명이 될지 모른다. 누군가의 세상은 소멸하지만 또 누군가의 세상은 열릴지 모른다. 이것은 희망일까 불안일까. 희망이 있어서 불안한 것일까. 그때도 희망이 없을까봐 불안한 것일까. 희망이 있으니 불안하지 않은 것일까. 희망이 없으니 불안할 일 없는 것일까. 물고기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해체된 몸통 밖에서 부레만 보석처럼 빛난다.



김지연 ㅣ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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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만든 자.” 이는 ‘죄악에 물든 타락한 일상’을 무덤덤하게 살아내는 인간을 향해 악마 가득한 지옥그림을 내놓아 경종을 울린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 추정)의 별명이다.


신학철, 한국현대사 095, 콜라주, 2010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를 주제로 작업한 그는 환상적인 이미지와 기묘한 상징성이 어우러진 화풍으로 오늘날까지 주목받고 있다. 그가 묘사한 왜곡된 신체, 동물과 벌레, 인간을 혼종한 군상은 그로테스크한 정서를 견인하면서 인간세계의 죄악을 풍자하고, 세기말 특유의 염세적 세계관을 분출한다.

그의 화면은 천재지변, 전염병, 전쟁, 반란 등 역경의 14세기를 겪은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닿아 있는데, 이들에게 세상은 부도덕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섭고 추한 곳이었다. 그 시대 몇몇 사람들은 1500년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신학철이 2010년 경향갤러리에서 열린 노무현 서거 1주기 추모전 ‘노란선을 넘어서’ 출품작을 준비하면서 보스의 작품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1515-1516)를 떠올린 것은 노무현 서거 전후 그를 둘러싼 정치 사회적 지형을 지켜본 소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 작품 이미지와 노무현의 사진을 콜라주했다.

화면 중앙에 얼굴을 잔뜩 찡그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다. 원작에서는 십자가를 멘 예수가 있던 자리다. 그 주위에는 추악한 분위기를 감출 수 없는 극적인 표정의 인물이 가득하다. 보스는 이들의 거친 외양을 통해 죄악에 눈이 먼 인류의 한 극단을 표현했고, 신학철은 이 메시지를 고스란히 현재로 가져왔다. 인간의 원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자리에 세워진 노무현의 사진은 비행기 안에서 고도로 인해 귀가 먹먹해진 순간 찍힌 것이다.

그가 떠나고 7년이 흘렀다. 시간이 흘러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상황에 따라 해석과 평가가 흔들릴 뿐이다. 작가가 이 작품에 처음 붙인 제목은 ‘귀가 막혀’다.



김지연 ㅣ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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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내내 낙원동에는 ‘낙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잊지 마세요. 5월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입니다’라고 적힌 분홍색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질병으로 취급했던 동성애를 1990년 5월17일에야 비로소 질병 분류에서 삭제했고, 2004년 5월17일 미국 최초로 매사추세츠주가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 이 의미 깊은 날은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 이성애 중심 문화는 종교의 산물이라고 정의 내린 루이 조르주 탱의 제안으로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로 선포되었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즈, ‘무제(피)’, 1992, 플라스틱 비즈


쿠바 난민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한 미술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즈는 동성애자가 범죄자와 다를 바 없던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다. 연인을 에이즈로 잃고, 그 역시 에이즈 합병증으로 죽어가면서도 유색인종, 성소수자에게 쏟아지는 혐오와 차별의 시선에 매몰되지 않고 예술적 정체성을 확보했다.

그가 1992년 처음 발표한 설치 작품 ‘무제(피)’는 소수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불편함을 절묘하게 표현한 작업이다. 그는 전시장 통로에 붉은 구슬로 만든 발을 설치했다. 관람객은 이 발을 통과해야 전시장에 들어설 수 있다.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발은 성소수자를 은유한다.

그들과 접촉하는 순간, 사람들은 내가 어떤 질병에 감염되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두려워한다. 그 불쾌함과 불안감을 촉각적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이 작품은 에이즈로 공포에 떨던 시절 성소수자와의 접촉을 꺼리던 사람들의 혐오 가득한 태도에 대한 작가의 심리상태를 전한다. 이후 이 작품은 구슬의 색깔과 설치 면적을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전시됐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혐오는 성소수자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장애인 복지시설을 혐오시설이라 규정하며 설립을 반대하던 어느 지역 주민들의 단체 행동에서도 공포에 가까운 혐오의 시선을 봤다.

다양성이 공존하는 환경이 내 삶에 더 커다란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절대로 믿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토레즈의 작품은 무거운 의미로 다가온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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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노원희, 한길, 1980, 162.7×130.3㎝, 캔버스 유채


하늘을 가득 메운 것은 틀림없이 먹구름이다. 좋지 않은 징조를 비유할 때 등장하는 먹구름이 공기를 압박하면서 무겁게 땅으로 내려앉을 기세다. 그래서인지 거리는 어둡기만 하다. 구름 아래 동네에는 아이들이 모여 있다. 얼굴에 표정은 없지만 이들은 볼이 빨갛게 상기될 정도로 집중해서 뛰어노는 중이다. 저 멀리 자전거 타는 아이들이 보이고, 동생을 등에 업고 길에 나온 소녀의 모습도 보인다. 일군의 아이들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무심히 화면을 훑어내리다보면 한 인물과 눈이 마주친다. 관람자를 향해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고 서 있는 이 아이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오싹하다. 그러고 보니, 화면 속 몇몇 아이들이 총을 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누군가는 감시당하며 바닥에 엎드려 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곳곳에서 보인다. 어떤 아이는 포박당한 채 끌려간다. 아이들은 다름 아닌 전쟁놀이에 몰두하고 있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다니던 노원희는 대구 변두리에서 전쟁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전쟁놀이를 즐긴다. 그 장면을 보면서 작가는 왜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장난감 총, 칼을 가지고 골목길을 누비면서 뛰어놀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성’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성장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가 거리에서 마주한 장면은 작가에게 개인의 사적인 폭력성 차원이 아니라 사회가 품고 있는 거대한 호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작가는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은 이 장면을 담은 그림을 1979년 시작해서 80년 초에 마무리했다. 작업의 출발은 전쟁놀이지만, 거리에 짙게 깔려 있는 어두운 분위기는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암울한 근미래, 곧 들이닥칠 위기에 대한 징후처럼 보인다.

그 시절로부터 세월은 꽤 흘렀지만 오늘날 우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놀이에 몰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36년 전 노원희의 작품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고 있다.



김지연 ㅣ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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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은 어쩌면 동시대 우리의 일상에서는 멀어진 유물이다. 방에서 구들장을 들어내면서 아궁이가 사라졌고, 그 위에 자리 잡았던 가마솥도 부엌을 떠났다. 환경이 바뀌면 도구는 달라진다. 하지만 대가족의 세끼 식사를 감당해야 하는 큼직한 무쇠 가마솥이 부뚜막에 걸려 있던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직 있다.


임옥상, 가마솥은 어머니 어머니는 가마솥, 2010, 철, 70×70×120㎝


가마솥에서 구수하게 올라오는 밥 냄새를 맡으면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쉽게 뜨거워지지 않지만 한번 뜨거워지면 쉽게 식지 않는 무쇠 가마솥만이 전해줄 수 있는 음식의 풍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그런 이들에게 가마솥 밥은 그리움이다. 몇몇 식당은 여전히 커다란 가마솥을 사용해서 밥을 짓고, 탕을 끓여 사람들의 추억 여행에 동행한다.

어느 날, 임옥상은 길에서 가마솥을 주웠다. 잔뜩 녹슨 채 길가에 버려진 가마솥을 보며 가마솥 근처를 떠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는 가마솥을 보면 어머니가 떠오르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마솥이 따라온다. 어머니는 늘 가마솥 앞에서, 밥을 달라면 밥을 해주시고, 죽을 달라면 죽을 쑤어 주시고, 고구마니 옥수수, 밤, 감자도 쪄주셨다. 곰국도 끓여 주고, 떡도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가마솥으로 생명을 키우셨다. 작가는 부뚜막을 떠나온 가마솥에 어머니 이야기를 담았다. 가마솥 곁에 머물면서(사실은 엄마 곁을 좀처럼 떠나지 않은 채) 맛난 것을 해 달라 보채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적었다. 그렇게 정리한 글귀로 기둥을 짓고 그 위에 가마솥을 올렸다. 철판을 레이저로 잘라내 만든 글기둥은 마치 아궁이의 불길처럼 용도를 다한 솥을 받쳐 일으켜 세웠다. 언제 길에 버려져 있었던가 싶게, 가마솥은 그 길 위에 다시 섰다.

글의 불기둥은 나도 모르게 그만 식어가던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 불을 지핀다. 가마솥은 낡고, 혹여 사라진다 해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마음이 구시대 유물이 되지는 않을 터. 임옥상의 가마솥은 아마도,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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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전시장에 들어서면 아홉 개의 모니터에서 아홉 사람의 손이 움직인다. 양손을 꼭 쥐기도 하고, 비비기도 하고 주먹을 쥐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한다. 프랑스 작가 말릭 오하니안은 손의 동작과 연동해 그들 손이 만드는 박수 소리를 리드미컬하게 편집해 전시장을 채웠다. 경쾌한 박수 소리가 있으니 손동작이 흥겹게 보이는데, 화면에 집중하다보면 거칠고 투박한 손등이며 손가락 마디가 눈에 들어온다,


손의 주인공들은 아르메니아의 실직 노동자들이다. 1991년 독립을 선언한 이후 아르메니아는 시장경제로 전환을 시작하는데, 대량실업, 빈곤, 양극화 현상을 겪으면서도 2004년에 이르면 1990년대 수준으로 경기를 회복한다. 2002년 무렵부터는 한 해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경기가 회복되었지만, 생산 시스템이 변하고 공장이 줄어들면서 숙련된 노동자들은 실업 이후 쉽게 직장을 찾지 못했다.

말릭 오하니안은 인력시장에서 ‘취업’을 기다리는 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손을 보았다. 손은 말, 눈과 더불어 사람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손짓이 말보다, 눈빛보다 더 풍부한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


말릭 오하니안, 손, 2002, 영상, 4분20초


손에는 그 사람이 걸어온 삶의 궤적이 새겨지게 마련이다. 노동으로 굵어진 손마디, 거친 피부 등 눈에 보이는 특징도 있지만 오랜 세월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서 규칙적인 속도에 맞춰 물건을 조립해 왔던 이들의 손은 일하던 시절의 속도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는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박수의 리듬을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움직이던 속도에 맞춰 편집했다. 리듬을 타며 흥겨운 감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던 다채로운 이 손짓들이 그 리듬에 숨겨진 의미를 듣는 순간, 공장에서 업무 속도에 맞춰 자신의 일에 집중했던 노동자의 손으로 보인다. 동시에 어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일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세상으로 전하는 수신호 같기도 하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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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계절이다. 부정선거를 심판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피 흘린 4·19 혁명이 56주년을 맞이했고, 4·13 총선은 민주주의가 후퇴해가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며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 선거혁명이라고 불린다. 5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여러 차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번 선거 결과를 보니 이제 피로써 권력을 심판하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이우성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들’, 캔버스에 과슈, 259.1×569.6㎝


선거 과정에서 내가 흥미로웠던 것은 ‘시민의 눈’이라는 자발적인 시민 감시단의 활동이었다. 부정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두 눈을 부릅 뜬” 이들의 활약은 여러 면에서 자극제가 되었다. 그들이 눈을 뜨고 지켜보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시민의 눈’을 보면서 이우성의 작품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높이가 259㎝로 꽤 큰 그림이라 그 앞에 서면 군중의 기운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든다. 화면 속 사람들은 모두 정면을 응시하는데, 밝은 표정은 아니다. 군중 한가운데 서 있는 누군가는 ‘승리’라고 적은 머리띠를 둘러매고 있고, 앞열의 몇 사람은 타들어가는 불꽃을 손에 쥐고 있다. 거울을 들어 화면 앞에 서 있는 우리를 비추는 인물도 보인다. 그 거울을 통해 나도 군중 속으로 들어간다.

화면을 가득 메운 이들은 작가 또래인 20~30대 청년들로, 이들은 현재 불만을 분출 중이다. 작가는 20대 시절, 청년세대가 사회 구조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느끼는 부조리함, 사회적 약자로서 체험하는 불안, 좌절의 나날들을 화면에 담았는데, 이 그림도 그런 문제의식을 다루던 시기에 완성했다. 그는 “이 불만은 나의 얘기면서 너의 얘기이기도 해”라고 말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 고민과 불만을 품고 살지만 그 고민과 불만의 원인이 모두 개인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공유한다. 정당한 불만을 분출하는 이 시대 청년 군중의 집단 초상은 그렇게 두 눈 부릅뜨고 우리를 응시한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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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바다에서 왔다고 했다. 생명 탄생의 첫걸음이 바다에서 시작한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는 무한함을 상징한다고 했다.


류준화, 기다림-11, 2015,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콘테, 석회, 112×193.9㎝


그리고 인간은 무한하다 싶은 것 속에 있다고 느낄 때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고 했다. 그래서 바다를 항해하는 배야말로 인간의 대담함과 지혜로움의 증거라고 했다.

생명의 요람 바다에는 생명이 버려지기도 했다. 아비 목숨을 살릴 생명수를 구해 온 바리데기도 애초에는 부모가 바다에 버렸다. 오매불망 아들을 기다리던 부부 사이에서 일곱 번째로 태어난 딸이었기 때문인데, 부모는 그가 꼭 죽기를 바란 건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 좋은 사람이 구해서 키워주어도 좋겠다 싶었단다. 운좋게 노부부가 구해주어 잘 자란 바리데기는, 제 목숨 살리자고 그제서야 버린 딸을 찾아나선 아비를 위해 생명수를 구하러 지옥길을 떠났다.

지난한 고행의 시간과, 아이를 일곱명 낳아 기를 만큼의 기다림 끝에 저승의 약수를 손에 넣은 바리데기는 그 물로 관에 누워 뼈만 남은 아비를 살렸다. 그 후 바리데기는 사령을 통제하고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 훗날 연구자들은 바리데기 신화에서 부계 질서의 모순을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염원과 그 원동력을 발견하기도 했다.

류준화에게 바리데기 이야기는 여성, 더 나아가 이 땅의 소수자들이 처한 현실이면서 동시에 희망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바리데기들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흘러갔다. 강물이 바다로 모이는 것이 순리이듯, 강 위의 바리데기들이 이제 바다에서 만났다. 바다를 바라보는 바리데기들의 머리며 어깨 위에는 꽃이 피어 있다. 못다핀 생명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양 화사하기만 하다. 손을 잡고, 시선을 주고받는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안다. 먹먹한 바다 앞에 서 있는 이들의 손에 저승의 약수가 들려 있다면 좋으련만. 그 요원한 꿈은 마음 깊이 접어둔 채, 잊지 않겠다고 되뇌며 기다림을 멈추지 못한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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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농부의 아들이다.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에서 태어나 성장한 화가 이종구에게 농촌과 고향은 작업의 핵심이다. 그에게 고향의 농부들은 우리나라 농경문화 전통의 마지막 세대일 것만 같다. 그들은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었고, 세계화, 자유무역협정(FTA)의 벽 앞에 무력했다. 시간은 흐르고 권력은 야멸차게 농부의 권리를 앗아가지만 그들은 농촌에서 농부로 산다. 다만 새로운 농부 세대의 등장이 요원할 뿐이다.

‘오지리에서’ 연작은 대선 포스터 앞에 앉은 농부들의 표정을 쌀부대 위에 그린 작품이다. 첫 작품은 1987년 대통령 선거 이후 농부들의 모습이고, 두 번째는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앞에 그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세 번째 그림은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때의 풍경이다. 이종구는 같은 농부들을 20년간 화폭에 담았다. 그사이 농부들은 늙고, 병들고, 작고했다. 포스터 속 대권 주자들은 생기 있는 표정에 세련된 복장을 하고 희망 넘치는 공약을 유권자들에게 투척하지만, 화가가 그려넣은 농부들의 표정은 시큰둥할 뿐이다. 그들이 들었던 약속의 말은 농촌을 약속의 땅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이종구 ‘다시 오지리에서’ 2003년 종이에 아크릴릭, 인쇄물, 215×195㎝

20년 세월 따라 쌀부대는 정부양곡에서 일반미로, 급기야 미국 수입쌀 칼로스 부대로 변했다. 수입개방으로 농촌은 피폐함을 넘어 붕괴됐으나, 정치인에게 농촌은 ‘표밭’일 뿐, 우리 생명의 뿌리가 아닌 모양이다. 농촌에서 바른 먹거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농부 백남기는 권력의 물대포를 맞아야 했고, 여전히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맨다. 권력은 사과하지 않으니, 농촌도 혼수상태다. 그런데 또 유혹의 ‘시즌’이 왔다. 물광 피부의 권력자들은 농부의 거친 손을 잡으며 달달한 공약을 뿌리고 있을 게다.

이제 오지리의 두 농부는 더 늙고 병들어 동네 보건소 다니는 일이 일상이 되었단다. 대선 때마다 거짓 구호에 속는 농부들의 삶을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이 연작은 세 분 모두 작고하시면 끝을 맺는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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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은 외향성을 나타내는 빨강과 그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파랑이 혼합된 색이다.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의 이질성이 절묘하게 공존해 조화를 이끌어내는 만큼, 보라색은 혼재하는 감정에 대한 심리를 담는다. 심신이 피로할 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보라색을 찾는다는데 균형을 추구하는 성질이 우리를 치유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균형을 찾는다는 말에는 그것이 결여돼 있다는 고백이 담겨 있으니, 현재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래서 보라색은 우울함, 불행, 죽음, 억압된 감정, 깊은 상처를 뜻한다. 한편 과거에는 안료를 구하기 어려워 특정 신분의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색이었기 때문에 고귀함과 우아함, 권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박영균, 그 총알들 어디로 갔을까, 130×325㎝,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5


박영균은 제주 4·3항쟁 때 최후의 인민유격대가 주둔했고, 유격대장 이덕구가 사살된 이덕구산전 가는 길에서 만난 사려니 숲길에 귀하면서도 애매모호한 보라색을 입혔다. 사려니 숲은 2002년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면서 이와 조화를 이루는 발전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생물권보전지역에 포함되었는데, 다양한 수종이 서식하는 청정 숲길로 제주도의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다. 동료 작가들과 제주 답사길에 올랐던 박영균은 이 숲길을 걸으며 좌익과 우익의 갈등, 대립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아픈 역사를 떠올렸다.


그는 숲에 울려퍼지는 메아리처럼, 혹은 반공포스터의 문구처럼, 숲의 풍경 안에 고은의 시 ‘추억 하나’에서 발췌한 구절 ‘허공에 날아간 총알은 어디로 갔을까’를 그렸다. 좌우가 서로를 향해 겨냥한 총구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화가는 노시인의 시를 들여다보며 생각해보고 싶었다. 제주도에 스며들어 있는 광복 이후의 혼란상은 여전히 제대로 치유받지 못한 채 잊혀지고 있다. 화가는 생명의 기운이 넘치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숲을 치유의 색 보랏빛으로 물들이며, 여전히 갈등에 휩싸인 채 불안하지만 균형과 조화를 소망하는 우리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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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당신은 무엇이 보이나요?’ ‘○○○로 보는 당신의 성격 유형은?’이라는 질문이 붙은 테스트 코너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미지를 들여다보는 나의 시선이 나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심리상태, 성향, 사고 유형을 알려준다고 하니, 점집을 찾는 마음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며 테스트에 몰입할 수밖에. 주재환의 이 그림도 일종의 테스트지 같다. 검은색, 흰색, 노란색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화면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 주재환, 종이에 채색판화, 61×42㎝, 1983


화면을 사선으로 가르는 하얀 부분은 계단이다. 계단 위에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검은 사람을, 어떤 이는 노란 사람을 알아차릴 것이다. 검은 사람에 초점을 두고 보면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이미지가 보인다.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의 연속 동작을 한 화면에 기록하듯 그렸다. 이때 그는 인체를 기계처럼 묘사했는데, 1912년 당시 사람들에게 기계와 결합한 듯한 인체 이미지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던져주었다. 뒤샹은 그렇게 미술의 역사를 전복시키며 새 역사를 써내려갔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이루었다는 성과가 대체 나의 삶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노란 형상은 허리를 살짝 숙인 채 계단 위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이다. 계단 아래 서 있는 사람의 머리 위로 오줌발이 쏟아진다. 오줌발은 계단 아래로 내려갈수록 굵어져, 끝에는 그 형태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어이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하나 보다. 부조리와 불합리가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계단과 오줌발은 계급사회에 대한 은유이면서 동시에 서양의 명작이 누리는 명예를 향한 작가의 반항심이기도 하다. 미술사 이야기는 차치하고라도, 노란 오줌발에서 봄날의 신호탄인 개나리 같은 희망을 읽고 싶은 심리는 계단 아래 살고 있는 내가 버티기 위해 필요한 희망 고문이 작동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작품 제목은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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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얼마 동안은 빛이 우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디자이너 그룹 ‘일상의 실천’이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열렸던 ‘난민’에 대한 프로젝트 <난센 여권>에 참여하면서 난민의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문장이다. ‘난센 여권’은 난민을 위한 신분증으로, 탐험가이자 해양학자이면서 난민 구제 활동에 힘쓴 프리드쇼프 난센이 국제연맹에 발의해 1922년 도입되었다. 1942년에는 52개국 정부가 난센 여권을 승인해, 국적 없이 떠돌던 난민들이 난센 여권을 들고 원하는 나라로 이주할 수 있었다.


Nansen Passport, 일상의 실천, 2016


한국 사회에도 난민이 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난센 여권>은 사회의 약자인 난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예술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난민들은 자신의 삶을 대변할 수 있는 색을 선택하고, 그 색을 매개로 자신의 개인사를 꺼내 놓았다. ‘일상의 실천’은 이렇게 전개된 컬러 워크숍의 내용을 바탕으로 일반 대중과의 접점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색의 총합은 빛이 된다는 점을 실마리로 삼아, 개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색과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뜻하는 ‘빛’을 연결시켜 메시지를 전달하는 포스터를 디자인했고, 빛의 스펙트럼을 담은 난센 여권도 제작했다.

전시장 방문객은 난민이 되어 테이크아웃드로잉 1층 난센 여권과에서 자신을 의미하는 색깔을 선택하고 이 색깔을 부착한 난센 여권을 발급받았다. 이 여권 소지자는 국내에서 난민 관련 활동을 하는 14개 단체를 방문할 수 있었는데, 관람자들은 각 기관에 방문해 난민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일상의 실천’은 난민이 재난을 피해 모국을 떠난 사람을 일컫는 단어지만, 한 사회의 주류가 아닌 약자, 이방인 모두를 포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난센 여권은 사회의 소수자가 마주하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인식하고 문제점을 공유하며 사회 구성원이 함께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가능성을 함께 고민해보는 매개가 되었다. 예술가의 작업은 그렇게 사회와 공존한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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