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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도

 

임수식, 책가도 048, 2013



책은 그냥 사물이 아니다. 글쓴이의 목소리가 종이에 스며든 살아있는 유기체다. 시간이 지날수록 종이가 누렇게 바스러지고, 군데군데 너덜거리면서 나이든 티를 드러내는 꼴도 영락없이 늙어가는 사람 몸 같다. 이러한 책의 운명은 누구를 임자로 만나 어떤 책과 무리를 짓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정작 책을 한자리에 모은 건 사람이지만, 이렇게 모인 책들의 묶음은 거꾸로 책 주인의 얼굴이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서가를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품은 세계와 만난다는 뜻이다.

 

서가와 문방사우 등을 그린 조선시대 그림에서 착안한 임수식의 ‘책가도’ 연작은 평범한 이들은 물론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책장까지를 아우른다. 그러나 작품은 책장 임자의 이름을 결코 알려주지 않는다. 책의 제목, 책이 꽂히고 포개진 모양새, 그 위 아래로 놓인 소품을 단서 삼아 책장 주인이 하는 일과 취향을 추적해내는 일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이런 재미에 한눈이 팔리다가 어느 시점에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은 책장이 완전한 평면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바닥부터 위까지 책장의 수직과 수평이 뒤틀리지 않도록 원근감은 모두 왜곡되었다.

 

작가는 시각의 굴절을 없애기 위해 책장의 부분 부분을 찍어 한지로 프린트한 뒤 일일이 꿰매어 이어붙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종이책의 물성이 책장에서 빛을 발하듯, 그가 장인처럼 기워낸 사진들은 책들의 또 다른 집처럼 보인다. 그럼 그의 작품 또한 직접 눈으로 봐야 더 매력적이다. 임수식은 이런 방식으로 누군가의 서재를 합법적이고도 독창적으로 훔쳐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