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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가족과 함께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60대 중반의 네덜란드 작가 한스 아이켈붐. 그는 한때 오후 세 시경, 무작정 가정집의 초인종을 누르곤 했다. 그 시간대에는 남편이나 아빠는 일터로 나가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집에 남겨진 나머지 식구들에게 부탁해 그 집 거실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셀프 타이머를 이용한 그 촬영에서 아빠의 자리는 한스 자신이 차지했다. 설명 없이 본다면 단란하기 그지없는 이 가족사진은 여러 장을 함께 늘어놓고 볼 때에야 비로소 동일한 등장인물이 있음을 가까스로 눈치챌 수 있을 정도다.

Hans Eijkelboom, With Family, 1973


이 연작의 제목은 ‘가족과 함께’. 소유격이 생략된 이 제목은 사진의 눈속임에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작가는 결코 자신의 가족인지, 친구네 가족인지 정체를 말해준 적이 없기에, 우리들의 길들여진 선입견이 진짜 가족 관계일 것이라고 착각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작가의 장난기와 재기발랄함에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완벽한 가족’이라는 환상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가라는 질문과 맞닿는다. 애초 일회용 가장이 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려 했던 작가의 의도는 아빠, 엄마, 가족 등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그가 작업을 촬영했던 시기는 1973년. 그러나 사진 속 반전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신선함을 잃지 않는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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