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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다' 열풍이 가요계를 넘어 다른 분야에까지 확산되고 있는 모양이다. 신문 잡지에 배우, 소설가, 발명가에 이르기까지 '나는 -다'란 제목으로 실린 가상 오디션 기사가 심심찮게 눈에 띠는거 보면. '나가수'를 모르면 대화에 끼기 어렵다 싶을 정도다.

신인급도 아니고 기성 가수의 노래에 순위를 매길 수 있느냐는 의문부터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의 문화버전이라는 질타까지 비판도 많았다. 이 지적들이 틀린 건 아니지만, 적어도 가수라는 직업의 본령에 주목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 기능이 있다. 그러니까 노래부르는 사람을 '가수'라고 부르고 그 능력과 정체성을 한번 되짚어보자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 않느냐는 거다. 

'나가수'는 언제부터인가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 듯한 '한 길을 파는 전문인'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이것저것 다하는 '만능 예능인'이 아니라 '가수'에 대해 묻는다. 가수는 노래부르는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짚어줌으로써 "그럼, 노래를 잘부른다는 건 뭐지?'란 질문을 새삼 던지게 만든다. 노래 좀 부른다는 쟁쟁한 가수들이 종종 나가수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하거나 나가수를 언급하는데서 그 파급효과를 알만 하다. 물론 '노래 잘 부른다'는 것을 '고음으로 내지르는 것'과 동일시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은 듯하지만 적어도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과 못해서 안하는 것의 차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다. 



'나가수'의 미술 버전을 만든다면 뭐가 좋을까? 모델을 세워놓고 단시간에 똑같이 그리게 하는 거? 미대 입시도 아니고 너무 단순하고 재미없다 싶긴 하다. 물론 '똑같이 그리는 것'에 대한 로망과 경탄은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있었기에 인기는 끌지 않을까 싶지만. 뒤러나 다 빈치의 정밀 소묘가 다다른 경지를 보면 정말 감탄이 나오지 않는가. 그리고 생각보다, '똑같이 잘 그리는 것'은 미술가의 중요한 능력 중 하나다. 고음으로 못올라가는 것과 안올라가는 것의 차이가 있듯이, 묘사 능력도 있으며서 안하는 것과 없어서 못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똑같이 그리는 것'은 단순 테크닉이 아니라 두뇌와 손의 협업이 잘된다는 증거이며 미술가의 창의력과 무관하지 않다.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거다. 

딴 소리 같지만 미술가들이 명사수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사격 역시 두뇌와 손의 협업 능력을 보여주는 분야다. (필자가 아는 모 작가는 어두운 전시장에서 삼각대도 없이 전혀 흔들리지 않은 사진을 찍는 재주가 있는데, 왈, 군대에서 사격왕이었다는 거다. 또 한 작가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찾곤 했던 실탄사격장에서 사격 종결자였다고...)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대로 그리기는 재미가 없다. 그렇다면 "거장의 옛 그림에 대한 창의적 재해석"이란 미션은 어떨까? 남이 작곡한 노래를 자기 것으로 발표하면 표절이지만 레전드 음악가들에게 바치는 노래를 잘 만들면 창의적 재해석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보여주지 않았는가? 창의력은 생각보다 과거와 대화를 잘한다. 이 주제를 놓고 미술가들의 '가상' 콘테스트를 지어낼 필요도 없는게, 이미 많은 미술가들이 이런 작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럼 몇몇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관건은, 과거의 작품들을 얼마나 똑같이 재현했는가가 아니라 옛 작품의 맥락을 이어받으면서도 얼마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라는 글  제목이 이제야 나온다. 고야의 이 유명한 에칭 작품은 몇 세기에 걸쳐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797년작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로스 카프리초스(Los Caprichos)>라는 고야의 판화 시리즈 중의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계몽주의에 의해 억압된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려는 낭만주의적 세계관의 표현으로, 또는 스페인을 침공한 나폴레옹 군대의 학살행위를 비판한 정치적 의미를 담은 작품으로 다양하게 해석된 바 있다. 역사적 무게가 가볍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 강렬한 비주얼이 선뜻 이 작품을 차용해서 작업하길 망설이게 만든다. 1988년 미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Bill Viola)가 이 어려운 과제에 도전했다. 



제목부터 <이성의 잠(Sleep of Reasn)>인 비올라의 작품에서 관객이 먼저 만나는 것은 빈 방처럼 꾸며진 전시장이다. 꽃병과 스탠드가 놓인 갈색 나무 테이블 위에 작은 흑백 모니터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잠자는 중년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소음이 들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단순하다. 이게 다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조명이 꺼지면서 전시장이 암흑으로 변한다. 소음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테이블을 둘러싼 삼면 벽에 수수께끼같은 이미지들이 나타난다. 불타는 건물, 울부짖는 개, 밀려드는 파도, 커다랗게 날개짓하는 올빼미의 영상 등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조명이 다시 켜진다. 고야의 작품이 보여준 정지된 악몽의 이미지들이 여기서는 점멸하는 시간적 차이와 공간적 경험, 사운드의 효과 속에서 입체적으로 펼처진다. 스케일이 켜졌지만 요란한 화려함보다는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효과가 돋보인다. 거장의 작품에 도전할 만한 솜씨다.


http://www.sfmoma.org/media/features/viola/BV03.html
(비디오 클립을 감상할 수 있는 사이트)



다음으로 나이지리아 출신 영국 작가 잉카 쇼니바레(Yinka Shoibare)의 2008년 작품을 보자. 이 작가는 입체 작업을 주로 하는데 이번엔 사진이다. 고야의 원작을 거의 똑같이 재현한 눈썰미와 솜씨가 놀랍긴 하지만 오히려 너무 똑같아서 재미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원작의 주제를 이어 받으면서 자기 식으로 변형한 부분은 눈여겨 봐야한다. 고야의 원작과의 차이는 중앙에 앉아서 자는 사람의 화려한 복장과 흑인과 백인 한 쌍으로 구성한 세팅 방식이다. 한 쌍을 이루는 두 작품의 제목은 각각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아프리카)>와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유럽)>이다.

쇼니바레는 아프리카 출신 미술가로서 서구 제국주의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비틀고 비판하는 작품을 주로 해왔다. 하지만 단지 일방향적인 비판만은 아니다. 피식민지인이 식민지 서구 문화를 모방해온 방식 역시 그의 비틀기 대상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위의 작품처럼 종종 옛 서구 거장들의 작품을 패러디하는데,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에 전통 아프리카 문양을 넣어서 비슷하면서도 생경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가 사용하는, Dutch Wax라고 불리는 이 직물 자체가 서구 제국주의와 아프리카 문화의 혼성이 낳은 산물이다)

서구문화의 도상들에 강렬한 색채와 문양이 들어간 아프리카 문화를 충돌시키는 쇼니바레의 작품은 생생한 꿈처럼 기묘한 현실성과 환상성을 함께 지니면서 문화란 것 자체의 근본적인 '뿌리없음'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쇼니바레의 작품 역시 만만치 않아 보인다. 고야의 원작이 갖는 정치적 뉘앙스를 다른 방식으로 잘 살려내었기 때문이다.


(번외로 게스트 작품 한 점을 더 소개한다. 로리 립튼(Laurie Lipton)의 드로잉 작품이다.) 

 


다음으로는 이른바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의 작가로 불리는 19세기 영국 작가 존 에버릿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어>(1852)에 도전한 선수를 보자. 미국 작가 그레고리 크루드슨(Gregory Crewdson)이 다음 도전자이다.


우선 원작을 살펴보자. 밀레이의 <오필리어>는 화사한 색채와 정교한 묘사, 아름답고 낭만적인 분위기로 일반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그림이다. 라파엘 전파는 이름 그대로 '라파엘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내세운 일군의 젊은 영국 작가들의 움직임이었다. 이들은 중세 초기의 밝은 색채와 섬세한 세부묘사를 이상으로 삼은 이른바 복고풍 작품을 그리고자 했는데 묘한 것은 결과물이 중세풍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19세기 사실주의와 중세지향이 믹스된 신상품이 되었고 그 독특한 분위기가 20세기에 와서 새삼 주목받게 되었다.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도전작 역시 사진이라는 매체를 이용했다. 
<무제(석양의 오필리아)(Untitled (Ophelia from Twilight)>(2001)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구도는 원작과 거의 같지만 내용과 분위기는 상당히 다르다. 아름다운 여인의 낭만적인 죽음이 꽃과 이파리들이 우거진 연못의 환상
적인 풍경과 어울렸던 원작과 달리, 크루드슨의 사진 작품은 헐리웃에서 만든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자세히
보면 이상할 것이 없는, 동시대 서구 중산층 가정의 거실이다. 그러나 거실엔 물이 가득 차 있고 속옷만 입은 젊은 여자의 시체가 떠 있어서 마치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이 집을 휩쓸고 간 듯한 그로테스크함이 느껴진다.



어떤 면에서 크루드슨의 이 작품이 밀레이의 작품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크루드슨은 밀레이나 라파엘 전파 자체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헐리웃 영화, 드라마 등 미국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도상들을 빌려와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러나 기괴하고 생경한 장면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 하나가 꼼꼼하게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묘한 느낌이 드는 세부묘사만큼은 밀레이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어쨌거나 여인의 죽음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가지고 다른 문화 코드 속에서 다르게 변주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다음 미션은 '미스터 빈' 영화에 나와서 유명해진 19세기 미국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McNeill Whistler)의 <회색과 검정의 배열 : 화가의 어머니의 초상>(1871)에 대한 재해석이다. 화가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그린 작품으로, 미국 최초의 어머니날 기념 우표에 실리기도 했다. 그만큼 이 그림 속의 어머니는 미국의 '국민 어머니' 급으로 대접받아왔다.  


하지만 이 작품의 제목은 '어머니의 초상'이기 이전에 '회색과 검정의 배열'이다.  회색-검정-흰색으로 이어지는 무채색의 색채와 단순한 모양이 이 작품의 간결함과 소박함을 구성하는 정체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어떤 작품을 성격을 결정짓는 것은 모델이기 이전에 구성과 색채 그 자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성지연 작가의 사진 작품 <뜨개질 하는 여인>(2006)은 구도와 모델을 바꾸었지만 작품의 핵심 성격을 따온 경우이다. 뜨개질하다 말고 어딘가 다른 곳을 쳐다보는 젊은 여자의 모습은 휘슬러의 어머니와는 다른 인물이고 여자의 치마에 수놓인 꽃무늬가 작은 변화를 주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작과 똑같은 태도를 갖고 있다. 그것은 불필요한 치장은 모두 없애고 미술작품의 본질을 이루는 것들만 남겨놓겠다는 작가의 담담하면서도 강한 태도이다. 깊이가 없는 듯한 추상적 공간이 지극히 사실적인 소재를 묘하게 초현실적인 느낌으로 바꾸는 것도 비슷하다.  


그 다음으로는 도전작 역시 원작 못지 않은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경우를 하나 보자.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Le Bar aux Folies-Bergere)>(1981-2)을 재해석한 캐나다 작가 제프 월(Jeff Wall)의 <여성을 위한 사진(Picture for Woman)>(1979)이다. 

      



19세기말의 파리. 공연과 술, 사교의 장소였던 캬바레 겸 카페 '폴리 베르제르'의 실내를 소재로 그린 마네의 그림에서 중앙의 여자는 이 술집의 여급이다. 유니폼을 입고 스탠드 뒤에 서 있는 이 여급 앞뒤로는 샹들리에와 조명등, 공연을 보면서 담소를 나누는 세련된 옷의 사람들, 술과 과일, 유리잔이 뒤섞이는 화려하면서도 시끌벅적한 술집 실내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여급의 모습과 그 뒤의 실내 광경은 모두 거울에 비친 광경이다. 여급 오른쪽에 그녀의 등과 어떤 신사의 모습이 비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원근법의 각도상 이런 식으로 여자의 등이 보일 수는 없으며 더욱이 신사의 실재 모습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네가 포착한 것은 실상과 허상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을 정도로 술과 분위기에 취한 파리 밤문화의 한 단면이며 시대의 풍속도이다. 여급의 지치고 공허한 표정에서 그녀는 이 장면에서 소외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마네가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 그점은 아니었다.  


제프 월은 마네의 이 그림만이 아니라 들라크루아나 세잔느 같은 옛 거장들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차용해서 작업을 많이 한 작가로 유명하다. <여성을 위한 사진>은 마네가 잠시 뉘앙스만 풍기고 넘어 갔던 젠더 정치학(gender politics)을 작품의 주된 테마로 삼았다. 다시 말해, 사진찍히는 수동적 대상으로서의 여성과 사진찍는 능동적 주체로서의 남성이라는 권력구도를 거울을 이용한 교묘한 구도를 통해 역전시켰다. 마네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지친 표정의 여급을 그린 장소에 월은 거울 속에 비친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능동적인 여성 모델을 배치했다. 카메라와 연결된 셔터 줄을 잡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남성 작가는 오히려 왜소하고 수동적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런 구도가 만들어진 것은 현대에 와서 남성 작가의 위치가 카메라로 대표되는 기계에 의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월의 작품은 이런 내용만이 아니라 마네의 시대와 현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사진이라는 매체, 광고판 형식으로 작품을 전시하는 방식)의 관계, 독창성과 모방성의 관계를 재검토하는 일종의 기호학적 유희이다. 외형적으로는 원작과 크게 비슷하지 않고 핵심 주제로 다르지만, 원작이 갖고 있는 작은 부분을 확대시켜 자기 작업에 적용시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 작가 안정주의 도전을 살펴보자. 지금까지의 도전작들이 대체로 사진이라는 매체를 사용한 것들이 많았던 데 비해, 이번에는 영상이다. 안정주 작가가 도전 대상으로 삼은 원작 역시 특이하다. 미국의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의 <4' 43''>(1952)이 그것인데, 이 작품은 '미술'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케이지의 이 작품은 4분 33초 동안 연주자가 아무 것도 안하고 악기 앞에 앉아있는 것으로 구성된다. 피아니스트 데이빗 튜더(David Tudor)에 의해 이 곡이 초연되었을 때 청중들은 수근수근대었으며 일부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케이지에 따르면 청중들의 이런 반응도 곡의 일부이다.이 곡은 '소음과 침묵조차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케이지의 주장을 실현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도전하는 안정주의 작품 <4' 33''>(2006)은 4분 33초 짜리 싱글채널 영상이다. 작품은 단순하다. 둥근 시계가 하나 보이며, 분침과 초침이 4분 33초 동안 움직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이다. 케이지 작품의 아우라에 도전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고?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케이지의 원작 역시 극도로 단순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다. 안정주의 작품은 시간의 경험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질문을 순하지만 위트있게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시계바늘의 움직임이 약간 점프하는 지점이 있다. 영상의 시간 자체는 4분 33초이지만 그 시간 속에서 시계바늘은 불연속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상을 보는 사람은 그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다. 그냥 시간이 가는구나, 하고 느낄 뿐이다. 시간을 보는 것은 시간을 느끼는 것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이 간격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각일까 믿음일까? 




http://dl.dropbox.com/u/2538340/home/html/video_433.html
(비디오 클립을 볼 수 있는 곳. 작가 홈페이지 http://www.anjungju.com/의 일부)


이상과 같이 도전자들의 작품을 살펴봤다. 누가 우승자이고 누가 탈락자일까가?
글머리에서 말했듯이, 사실 무한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가치는 예술이나 문화와 맞지 않다. 그래서, 순위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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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가 발생한지 80일째. 한동안 방사능 비를 피해야 하니 일본 농수산물을 먹으면 안되니 하더니 언제냐 싶게 비도 맞고 생선도 사먹는다. 플루토늄이 흘러나오고 멜트다운이 일어나도 해는 뜨고 삶은 계속된다. 일본인들의 놀라운 침착함 뒤에 의도적인 침묵과 희생을 강요하는 일본 정부와 일본 문화가 있다는걸 알고 내뱉었던 아연실색의 소감도 이제 점차 무디어진다.

하지만 그건 딴 나라 사람인 우리 이야기고 당사자들에겐 시간이 흘러도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엄청난 트라우마가 생겼을 것이다. 바다 건너의 시청자에 불과한 내가 텔레비전의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외상후 스트레스 중후군에 육박하는 충격을 받았는데 직접 당한 사람들은 어떨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일본인들에겐 말 꺼내기도 미안한 일이지만 한동안 극심한 충격과 우울에 시달렸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무의미하고 부질없어질 정도로. 원전 사태가 심각해진다는 뉴스가 연달아 나올 때는 이대로 지구가 멸망하는게 아닌가 싶었다(멸망까지는 아니겠지만 지금도 사태가 심각한건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아이티에서도 스촨성에서도 큰 지진이 일어났었는데 유독 이번 지진이 이렇게까지 큰 충격을 준 건 왜일까. 물론 원전 사태라는 가공할 재앙과 역사상 4번째의 지진이라는 엄청난 강도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충격은 방사능 누출 소식 이전부터 생겼던 걸 보면 플러스 요인이 분명 있다. 아마도 일본의 발달한 매스미디어가 그 요인이 아니었을까? 지진과 쓰나미의 생방송이라는 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피해 지역을 찍은 놀랍도록 신속한 보도 사진들이 눈을 의심케 하고 현실감각을 마비시켰다.


시커먼 파도가 제방을 넘어 집과 자동차를 쓸어버리는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본다는건 예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다. 레고블럭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는 듯한데 알고보니 흙 속에 쳐박힌 컨테이너들이다. 비행기들이 어린아이가 갖고 놀다 버린 장난감인 양 폐허가 된 활주로를 제멋대로 굴러다닌다. 원폭을 맞으면 이렇게 될까 싶게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전무한 마을 사진도 보았다. 이 장면들에 비하면 영화의 상상력은 얼마나 초라한가. 현실은 그 모든 상상력의 산물을 압도하고 모든 코멘트를 앗아가버린다.


(다시 보고싶지 않은 이미지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올렸다)

이 영상과 사진들의 힘을 이미지의 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 이미지는 허구가 아니라 현실에 속한다. 매스 미디어의 이미지들이 실재를 대체해버린 허구라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은 이 압도적인 현실감앞에서 힘을 잃는다.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보드리야르의 명제는 이 앞에서 지탱되기 어려운 한가한 가설로 변한다.


이 영상과 사진들은 우리를 허구의 그물망 안에서 유희하도록 붙잡아두는 게 아니라 그 그물망을 찢고 더 이상 어떤 도피처도 없는 심연과 직접 맞닥뜨리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 이미지들은 파국의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의 파국을 보여주는 반(anti) 이미지이다. 이런 종류의 이미지를 전에도 본 기억이 있다. 10년전, CNN에서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부딪혀 불타는 여객기를 보았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큰 재난이 일어났어도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쇼크 불면증 우울증 같은 증세가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지의 힘이란 그만큼 강렬하다. 한 장의 사진이 열 마디의 말보다 오래 남는다.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의 시신 사진을 공개하지 않기로 한 것도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이 공개된다면 그 처참한 모습에 미군의 잔인함에 대한 규탄과 빈 라덴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수도 있을테니까.

이미지의 힘은 정서적 충격을 주는 힘이다. 그렇다면 그 힘을 치유에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이미지를 직접 만드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표현하고 그래서 마음 속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료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한국의 한 미술치료사가 일본 미술치료사들과 함께 동일본 지진 재해 지역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들을 위한 미술치료 활동을 하고있다. 정은혜씨가 그 분이다. 이분은 페이스북에 compassion art project Japan이라는 그룹을 개설해 미술계 사람들에게 갖고있는 미술재료들을 기부해달라고 했다. 필자는 갖고있는 미술재료가 없어서 크레파스 붓 등을 사서 보내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서 재료가 꽤 모였다. 이 재료들은 일본의 Japan Creative Arts Therapy Center (J-CAT-C) 소속 미술치료사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들은 복잡한 철차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공식 구호품 수송루트를 타지 않고 직접 재해 지역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보내온 미술재료로 그림을 그리는 후쿠시마현의 어린이들.

얼마전 내한하여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던 도쿄 거주 미술가 나카무라 마사토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 갤러리 3331(
http://3331.jp)의 장기 프로젝트 '동일본대지진 부흥지원 arts action 3331'(http://action.3331.jp)에 참가한 미술가들의 활동을 소개했다.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전시를 열어 수익금을 재해 지역에 기부하는 것과 재해민들을 치유하는 이미지를 함께 만드는 작업이 그것이다.

후자의 사례를 몇 개 들어보자. 이이지와 코스케의 '벛꽃net 도호쿠'는 재해 지역의 사람들이 벛꽃 사진을 찍어 보내주면 작가가 프린트해서 전시하는 프로젝트이다.(http://exuok.exblog.jp/) 히비노 가츠히코의 'heart mark veiwing'(
http://heartmarkviewing.jp/)은 재해민들과 하트 모양의 장식물을 함께 만들어 건물을 장식하는 활동이다. 무라야마 슈지로의 'green line project'는 사라져버린 도호쿠 지방의 녹색 산과 들을 실제 식물에서 추출한 재료로 그리는 벽화 작업이다.(http://plantart.exblog.jp/14658647/)(http://action.3331.jp/000006.html)


'아트 치요다 3331'에서 운영하는 '동일본대지진부흥지원 arts action 3331' 프로젝트의 사이트 메인 사진. 

이런 프로젝트들은, 공공미술과 민중미술의 선례가 보여주었듯이, 나이브한 활동이 아닌가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예술성'의 차원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 예술가들은 예술성 이전에 이미지의 정서적 힘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한다. 정신적인 상처는 어떤 의미에서는 물질적인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가지만, 잘 눈에 띠지 않고 그래서 자칫 가장 덜 돌보게 되는 부분이다. 이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 부분을 돌보기 위해 나서는 사람들은 이미지의 정서적 충격과 또 그 힘에 대해 느끼고 있는 사람들일 수 밖에 없다. 한 장의 사진이 위안이 될 수 있고 한 가닥의 선이 마음에 힘을 줄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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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7. 인상파 이전의 인상주의자, 화상 폴 뒤랑 뤼엘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근대산업사회로 발걸음을 옮겨가고 있던 19세기 중반 프랑스 화단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서사적인 고전주의나 목가적인 자연주의나 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오늘날 근대적인 조형의식과 색채와 미학의 총체라 인식되는 인상주의는 적어도 당시로서는 설 자리도 전시할 장소도 얻기 어려운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은 파리 교외를 전전하며 그림을 그렸고 파리 시내에 자리를 잡는다면 사창가나 다름없는 허름한 몽마르트의 피갈(Pigalle)거리였다. 이즈음 누구하나 눈길조차 주지 않던 인상주의자들의 혁명적인 그림을 혁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이가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폴 뒤랑 뤼엘(Paul Durand-Ruel, 1831~1922)이다. 


르느와르가 그린 폴 뒤랑 뤼엘의초상화(1910)


1830년 처음 미술품 재료상으로 출발한 그의 아버지 장 뒤랑 뤼엘(Jean Durand-Ruel)의 화랑은 화가들에게 물감이나 종이, 기름, 수채화물감, 이젤 등을 주고 그림을 받는 화방을 겸하고 있었다. 늘어나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을 보면서 장은 그들을 그림을 사는 고객으로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테오도르 제리코(Jean Louis André Théodore Géricault, 1791~1824)나 들라클로와(Eugene Delacroix, 1798~1863) 같은 이미 아카데믹한 부분에서 검증을 받은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취급하면서 그림을 대여하기도 하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화상으로 활동했다. 1833년 보다 많은 고객들이 사는 쁘띠 상스(Petits Champs)로 이전했다 

                                들라크루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유화, 260*325cm)


다시 1846년 보다 번화한 슈아젤가(Rue de Choiseul)로 사업을 확장해서 이전한다. 이때 그의 아들이며 19세기 최고의 화상이 된 폴 뒤랑 뤼엘이 합세한다. 하지만 1848년 2월 22일 발발한 프랑스의 2월 혁명으로 인해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1855년 파리 세계박람회 기간 중에 개최한 들라클로와의 전시회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화랑은 더욱 번창해 1856년 드디어 오페라좌와 아름다운 파리의 중심 뱅돔광장(Vendôme)이 있는 페가(Rue de la Paix)에 보다 큰 화랑을 구해 이사하는 중에도 그의 성공의 밑거름이 된 화가들과의 긴밀한 관계는 꾸준하게 유지한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일을 배우면서 프랑스는 물론 유럽전역을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혔고 그림을 사고팔고 발견하는 안목을 갖추었다. 
 

르느와르 <찰스 & 죠지 뒤랑 뤼엘의 초상>(1882, 유화, 65*81cm)


그리고 1862년 그는 에바 라퐁(Eva Lafon)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후 슬하에 다섯 아이를 두었다. 이후 나폴레옹 3세의 명에 따라 낙선자전시회가 마련되면서 인상주의자들의 존재도 세상에 조금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32세가 되던 그해 뒤랑 뤼엘은 처음으로 경매에 참여하면서 경매사로서의 꿈을 키우기도 한다.   


1860년대부터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그림을 주로 취급하면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나름 안정적인 위치를 점하기 시작한 아버지의 화랑에 1865년부터 본격적으로 뒤랑 뤼엘은 화랑의 모든 일들을 주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코로(Corot)와 바르비종(Barbizon school)파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루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을 만나면서 이들 그룹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즈음 그는 화상으로서 “참된 화상은 또한, 필요하다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않는 이해심 깊은 애호가여야 한다.” 고 말하며 어떤 것으로부터도 예술을 방어하며, 화가의 작품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며, 개인전을 통해 작가와 컬렉터들을 이어주고, 화랑 간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강화하며, 자신의 갤러리와 자신의 집을 무료로 개방하여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며, 언론을 통해 화가들의 작품을 최대한 홍보하는 동시에 금융권과 미술계를 접목시킨다는 나름의 근대적인 화랑으로서의 철학과 원칙을 세운다. 


그는 일반적으로 그림을 화가들로부터 위탁판매하거나 미술품을 구입한 후 일정한 이문을 붙여 파는 일반적인 화상들과는 달리 자신이 관심 있는 화가들에게 일정하게 매월 또는 매주 급료를 지불하는 소위 전속계약이라는 제도를 통해 화가들을 후원하고 전적으로 화랑이 지원해서 개인전을 열어주는 공격적이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화랑을 경영했다. 집중적으로 특정작가의 작품을 매집하고 때로는 앞으로 그릴 그림까지 선점하는 공격적인 방식을 택했다. 이는 금융권을 미술시장에 끌어들인 탁월한 그의 능력덕분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1866년 테오도르 루소(Théodore Rousseau, 1812~1867)의 작품 70여점을 구입한 후 루소의 회고전을 열고 언론과 관객들을 동원하여 커다란 이익을 얻었고 이듬해 루소가 사망하고 열린 경매에서 또 다시 그의 작품을 수집하는 등의 수완을 발휘한다.   

 
그는 이렇게 ‘인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 전부터 인상주의를 지원하고 후원한 화상이 되었다. ‘탕기아저씨’가 단지 마음씨 좋은 후원자였다면 뒤랑 뤼엘은 후견인을 자처하고도 남을 상재와 경영능력을 갖추었던 이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진보적인 성향과 전통적인 미학에 대항하는 새로운 조형의지가 만나 최대의 시너지효과를 거둔 것이 인상주의라 할 것이다.        


그는 1867년 파리의 라파예르 거리로 화랑을 이전하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재료와 화구, 가구와 고미술품까지 잡다한 화랑의 취급품목을 그림과 판화만으로 한정해서 집중한다. 그리고 이미 컬렉터로 활동하던 귀족이나 부호들이 아니라 양적으로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 계급들을 새로운 미술품 구매층으로 확대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1870년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71) 즉 보불전쟁이라 불리는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는 피난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피난 중에 런던의 본드가 168에 새롭게 화랑을 열고 화상으로서의 업무를 재개하는데 이때 그는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그림을 다루는 전문 화랑으로 자리 잡았다. 1970년 12월 그는 찰스 데샹(Charles Deschamps)과 함께 투자하고 판매하는 공동 마케팅으로 제 10회 프랑스 예술가 협회전을 개최해서 미술시장의 기린아로 등장한다. 그는 이때 영국으로 피난 와 있던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Charles François Daubigny,1817~78)의 소개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를 알게 되고, 모네는 다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18 30~1903)를 소개해 주어 이들과 교유하면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도비니 <발몽도와 근처 와즈 강에서 빨래하는 여인>(1865)

도비니 <와즈강변의 보트들>(1865)


당시 모네와 피사로는 바르비종파 스타일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지닌 작가였다. 뒤랑 뤼엘은 이들 두 화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구입했다. 그는 아직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두 사람의 작품을 구입한 후 런던에서 개인전을 열어 성공을 거둔다. 이렇게 그는 아직 인정받지 못하는 ‘잠재력 있는’ 작가들을 주목했으며 이런 그의 화상으로서의 방식은 매우 유효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그림을 고객들에게 대여해 주고 다시 이 작품을 판매하거나 클럽이나 고객들과 접하기 쉬운 공간에 작품을 걸어 놓는 등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화상으로서 승승장구한다. 


전쟁이 끝난 1871년 다시 파리로 돌아 온 그는 모네와 피사로를 그의 파리 고객들에게 소개한다. 그들은 시간이 흘러 파리 컬렉터들에게도 인지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이미 그의 수중에 있었다. 1872년 런던의 뒤랑 뤼엘 화랑에서 아직 결성되기전 인 인상주의 화가들 즉 카페 게르보아에 모이던 일군의 젊은 작가 즉 바티뇰 그룹과 바르비종파를 모은 전시를 개최한다. 이렇게 그는 유명작가와 신진작가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것을 하나의 전략으로 삼았는데 꽤나 효과적이었다.


이때 미국 화가로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던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도 함께 참여한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 <Nocturne in Black and Gold-The Falling Rocket>(1875 유화 60.3 x 46.6 cm)
 
 
휘슬러는 이때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구입하여 뉴욕으로 가져갔는데 이를 계기로 미국에도 인상주의 바람이 부는 계기가 된다. 이때 마네의 작품 23점을 한꺼번에 구입하면서 한때 재정적 위기에 처할 만큼 미술품을 확보하는데 무모한 일면도 지녔던 그는 성공의 배경이 되어 줄 탄탄한 고객이자 인상주의의 옹호자였던 컬렉터들이 함께 있어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바리톤 오페라 가수로 우리에게 더 알려진 장 밥티스트 포레(Jean-Baptiste Faure,1830 ~1914)는 모네의 후원자이자 뒤랑 뤼엘의 고객인 동시에 인상주의의 후견인이었다. 그는 마네의 대표작인 <풀밭 위의 식사>나 <피리 부는 소년> 등 대표작을 포함해 67점을 그리고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다리>를 비롯한 62점의 작품을 소장한 대 수장가였다. 여기에 드가, 시슬리, 피사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 ~1867), 피에르-폴 프뤼동(Pierre Prud'hon, 1758~1823)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마네 <풀밭 위의 식사>


부유한 사업가이자 루브르 백화점 주인이기도 했던 에르네 호슈데(Ernest Hoschede, 1837 ~1891)도 그의 고객이었다. 그 또한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후원자였다. 그는모네에게 자신의 집 장식을 의뢰할 정도로 좋아했지만 그의 아내가 마네의 두 번째 부인으로 동거를 시작하면서 인간적인 갈등에 싸이기도 한다. 1877년 그는 파산하고 그의 소장품은 경매에 붙여져 흩어지고 말았고 그의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보내져 모네의 슬하에서 자랐다. 1891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네는 호슈데의 아내였던 엘리스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이외에도 인상주의를 후원했던 이들로는 비평가이자 문필가였던 테오도르 뒤레(Théodore Duret,1838~1927), 은행가 샤를 에프뤼시(Charles Ephrussi,1849~1905), 루마니아 출신의 의사로 인상파화가들의 주치의나 다름없었던 조르주 드 벨리오 (Georges de Bellio, 1835~1894)등이 있다. 그는 1874년 제 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모네 그림을 소장했으며 1878년에는 <인상-해돋이>를 단돈 20프랑에 소장했다.



    모네  <해돋이 인상>


1894년 조르주가 사망하자 그의 딸 빅토린(Mademoiselle Victorine de Bellio)은 아버지가 소장했던 150여 점의 그림을 1957년 일명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Musée Marmottan Monet)이라 불리는 마르모탕미술관(Museum Marmottan)에 기증했다. 젊은 인상파 화가들을 당시 최고의 화가였던 들라클로와 동등하게 보았던 그는 인상파의 철저한 지지자였던 퇴직 세관원 빅터 쇼케 (Victor Chocquet,1821~91)의 존재도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의 명성과 달리 인상파화가들의 삶은 처절했다. 집시나 보헤미안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의 생활고를 해결해 줄 생각으로 1874년 3월 24일, 뒤랑 뤼엘이 경매인으로 나서 드루오(Drouot) 경매장에서 르누아르, 모리소, 시슬레,  모네의 작품 163점을 경매에 붙였다. 하지만 이들의 그림은 통렬한 야유 속에 형편없는 가격에 낙찰되어 수중에 별로 남는 것도 없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해 4월 카퓌신가(Boulevard des Capucines) 나다르 사진관에서 처음으로 인상파전시를 개최했다. 당시 이들 전시의 명칭은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예술가들의 유한협동조합’이었다. 모네와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1841~1870)의 생각은 피사로의 강력한 지지를 얻으며 마침내 전시로 드러났다. 29명의 젊은 화가들의 165점이 전시된 이 전시는 한 달간 3,500명의 관람객이 방문할 정도의 참패로 끝났다. 여기에 ‘인상파’라는 비아냥조의 이름을 루이 르루아(Louis Leroy)로부터 얻었다. 

바지유 <바지유의 콩다뱅가의 화실>(1870, 90×128.5cm, 파리 오르세이)
 
세상이 ‘정신 나간 화상’이라고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뒤랑 뤼엘은 1876년 3월 30일부터 4월 30일까지 그의 화랑에서 두 번째 전시를 열었다. 20명의 252점이 출품된 이 전시회도 역시 “여자까지 하나 낀 대여섯 명의 미치광이 집단”들의 전시라는 악의에 찬 평가를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일부 언론과 특히 시인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 1842~1898)의 글은 그들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렇게 두 번째 전시부터 어느 정도 세상이 인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참여했던 화가들의 생활은 궁핍하다 못 해 처절한 것이었다.  

1877년 3회 전시는 인상주의의 가장 중요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18명의 230여점이 전시된 3회전은 관람객도 늘었고 비평의 강도도 약해졌다. 이후 분열을 거듭하며 6회까지 지속되지만 인상주의자들 간의 입장과 이해 때문에 그 결속력은 극도로 떨어졌다.   


##비평의 등장 
 
 이 시기 미술계는 커다란 변화를 만나게 된다. 이제 더 이상 화가와 컬렉터 또는 소장가들의 관계가 아닌 화가와 비평가 그리고 시장과 컬렉터의 구조로 바꾸어 나간다. 특히 비평의 힘은 새로운 매체로 자리 잡았던 신문이나 잡지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근대화와 산업혁명으로 새롭게 등장한 도시노동자층과 중산층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기능을 수행했던 매체의 미술비평은 화가들을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런 미술비평과 매체의 중요성을 인식한 뒤랑 뤼엘은 보불전쟁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온 1890년『두개의 예술』(L'Art dans les deux mondes)을 창간하나 다음 해에 폐간하고 만다. 하지만 이 잡지를 통해 그는 르느와르와 피사로 등을 소개했다. 그리고 1899년 다시 『예술과 호기심의 국제저널』(La Ravue internationale de l'art et de la curiosité)을 라아무도 모르게 자금을 지원해서 창간하여 화실에서 작가와의 인터뷰를 싣고, 비평가들에게 평론을 의뢰해서 실었으며 화집을 발행해서 작가들을 홍보하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뒤랑 뤼엘은 많은 인상파화가들의 작품을 수장하고 있었지만 일부 컬렉터를 제외하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절,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1870년대 중반과 1880년대 초 두 번이나 결정적으로 그를 재정적인 위기를 맞는다. 1970년대 중반 불어 닥친 경제위기는 그의 화가들에게 월정 급료를 지불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움을 맞았지만 곧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어떤 화가의 작품가격이 급속하게 상승하면 이익을 얻었다가 후원자가 파산하거나 전력을 다해 구입한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파산지경이 이르는 재정적 기복이 심했지만 크게 게의치 않을 만큼 매우 통이 큰 사람으로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거나 전망이 밝다고 판단되면 그 작가의 작품 전체를 사들이기도 했다. 1873년 그는 마네의 화실에서 본 23점을 3만 5천 프랑에 사들였다. 그는 후에 이 작품들을 각각 4,000프랑에서 2만 프랑 또는 그이상의 가격으로 팔아 막대한 이익을 올리기도 했다. 1881년 1월에는 피사로가 보여주는 작품 모두를 구입하고 앞으로 그릴 작품도 모두 구입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외젠 부댕(Eugène Louis Boudin, 1824~1898)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다. 이후 미국의 백만장자들이 인상파 그림을 사기위해 몰려들자 프랑스 소장가들에게 팔았던 작품을 되 사들여 한 점당 10만 프랑이라는 어머 어마한 금액으로 되팔아 큰 이익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1882년 들어 자금을 지원해 주던 뤼니옹 제네랄 은행(Le Union Générale bank)이 1882년 파산하면서 뒤랑 뤼엘은 다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1870~80년 경 많은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사망하면서 그들의 작품이 대량으로 시장에 몰려나오면서 경제적 위기는 더욱 더해졌다. 하지만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화가들과 신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미래는 너무도 암울해 보입니다. 회의에 사로잡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는 1882년 9월 18일, 모네가 보낸 편지에 그는 언제나처럼 관대하게 돈과 풍부한 충고로 성실하게 답했다.

그리고 그의 집을 장식하는 일을 모네에게 맡겼고 그런 중에도 뒤랑 뤼엘은 런던과 베를린에서 모네의 전시를 개최하고 10월에는 노르망디에서 그린 20점의 작품을 구매했다. 하지만 위기는 역시 기회였다. 

 
1883년 마네가 사망하고 그의 유작들이 경매를 통해 호평리에 팔려나가고 공립미술관 등지에 소장되면서 바로 회고전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어느 정도 경제적 위기에서 숨통은 튀였으나 뒤랑 뤼엘의 화가들은 다시 살롱전에 참여하거나 새로운 화상들을 찾아나서야 했다.  

 
그의 이런 재정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다름 아닌 미국출신의 여성화가  메리 스티븐슨 카사트(Mary Stevenson Cassatt,1844~1926)였다. 주식중개로 돈을 벌어 부동산 업자가 된 아버지와 은행가의 상속자인 어머니 사이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화가가 되기로 하고 파리에 정착해서 인상파의 대열에 합류한다.

 

 

[##_'2C|cfile10.uf@130C7D474DB124721B4D9A.jpg|width="370"_##](1879, 종이에 파스텔)|cfile5.uf@150C7D474DB124731CED74.jpg|width="370" height="493" alt=""|메리 스티븐슨 카사트 <아이 돌보기>(유화)'>

그녀는 1979년 인상주의 전시에 참가한 이후 뒤랑 뤼엘의 재정적 위기 때 많은 도움을 준다. 미국 펜실바니아 철도회사 사장이었던 오빠 알렉산더 카사트(Alexander Cassatt, 1839~1906)도 큰 고객이 되어주었다. 설탕업자 해리 하버마이어(Henry Osborne Havemeyer, 1847~1 907)와 1883년 결혼한 그녀의 친구 루이진 엘더(Luisine Elder)도 매리 카사트의 조언으로 인상파 작품을 대량으로 수장하여 뒤랑 뤼엘을 도왔다. 현재 이들 소장품 대부분은 현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되어 전시중이다. 이외에도 카사트는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비롯한 유수의 미술관에서 인상주의 작품을 소장하도록 설득해서 뒤랑 뤼엘이 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890년대 초 르느와르와 피사로의 전시가 호평을 받으며 파리화랑도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런 호전된 상황에 고무된 뒤랑 뤼엘은 독일의 10개 도시를 순회하는 인상주의 전을 시작으로 독일에 인상주의 컬렉터들을 양성하고자했고 이와 함께 세계로 인상주의를 수출하고자 노력했다. 소위 국제화를 시도한 셈이다.      
 

1885년 뒤랑뤼엘은 미국미술협회(American Art Association) 회장 제임스 수톤(James F. Sutton, 1843~1915)의 인상파 최전성기작품을 모은 전시회로 모든 경비는 미국 측이 지불하고 작품이 팔리면 일정부분 커미션을 주는 조건의 제안을 해왔다. 그는 이 제안을 수용했다. 자신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비평가 반응은 좋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뒤랑 뤼엘은 이듬해인 1886년 뉴욕에 지점을 열어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미국의 컬렉터들에게 소개한다. 이로 인해 인상파 화가들 그림이 미국에서 고가에 팔리는 전환기를 맞는다. 이 전시회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1886년 4월 뉴욕에 뒤랑 뤼엘 화랑 분점을 열고 약 300여점의 작품을 가지고 <제1회 파리 인상파 화가전>을 열었다. 

 
그는 이미 몇몇 파리의 화상들과 함께 1883년 보스턴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열린 해외작가전을 개최한 바 있다. 이때가 그의 첫 미국방문이었다. 1884년 프랑스는 미국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여신상은 제작되어 미국에 도착했지만 좌대가 없는 채 였다. 좌대제작경비를 마련하기위해 195점의 프랑스 공예품과 미술품으로 구성된 전시를 국립디자인미술학교(National Academy of Design)에서 열었다. 하지만 미술품은 미국 소장가들이 출품한 3점의 마네와 1점의 드가작품 그리고 3명의 미국화가들의 작품이 전부였다. 

 
이어 1866년 4월 뉴욕에서 대규모의 인상파전을 개최하면서 미국에 인상주의를 본격적으로 상륙시켰다. <파리 인상주의들의 유호와 파스텔화>라는 제목으로 열린 전시는 뒤랑 뤼엘이 지니고 있던 289점의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전시가 끝난 5월에는 미국의 일부 인상주의를 신봉했던 컬렉터들의 작품을 추가해서 국립디자인미술학교로 순회하였다. 당시 전시를『더 스튜디오』(The Studio)지는 “뒤랑 뤼엘과 몇몇 소장가들은 우리에게 더 할 나위없는 선물을 주었다.”고 할 정도로 매우 호의적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1887년 그는 장애에 부딪혔다. 1886년 개최한 인상파전의 통관 및 관세문제를 제기한 뉴욕일부화랑들의 제소로 판매했던 그림을 파리로 반출했다 다시 뉴욕으로 반입하면서 관세를 납부하는 뻔 한 절차를 거쳐야했던 것이다.  
 
1890년 화랑을 하버마이어가 소유한 건물로 이전한 후 많은 소장가들과 연을 맺고 인상파 화가들을 소개해 나갔고 당시 미국으로 유입된 작품들 대부분은 오늘날 미국 주요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남아있다. 1905년에는 약 300점에 이르는 인상파 작품을 가지고 런던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 전시회는 인상파 최고의 전시로 평가된다.

1910년에 다시 런던의 그라프톤 화랑(Grafton Galleries)에서 대규모 인상파화가들의 전시를 개최하는데 이 전시회는 <마네와 후기인상주의자들>(Manet and the Post-Impressionists) 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 폴 고갱과 고흐 그리고 세잔을 주목한 영국의 형식주의 미술평론가 로저 프라이(Roger Eliot Fry, 1866 ~1934)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까지 인상주의의 영역을 확대시켜 정의했다.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를 오늘의 위치에 올려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뒤랑 뤼엘은 1922년 2월 5일 눈을 감았다. 1891년부터 1922년까지 31년간 그가 구입한 작품은 약 12,000점에 달했다고 한다. 약 1,000 이상의 모네, 1500점이 넘는 르느와르, 400여점이 넘는 드가와 시슬리, 800여점의 피사로, 약 200여점 가까운 마네의 그림 그리고 400여점의 메리 카사트의 작품 등이 대부분이었다. 

 
당대 사람들이나 후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던 간에 그는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의 가장 성공한 화상이자 경제적인 지원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런 그의 유럽과 미국을 아우르는 화상으로서의 성공은 에드가 드가(Edgar Degas),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여성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95),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오귀스트 르느와르(Pierre Auguste Renoir),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 등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막심 드토마 (Maxime Pierre Dethomas, 1867~1929)나. 위그 메를(Hugues Merle, 1823~81) 등 여러 작가들까지 챙겼다. 그는 1880년대 들어서서 두 아들 요셉(Joseph)과 조지(George)를 전면에 내세웠고 이들은 파리와 뉴욕을 번갈아가면서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그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뒤랑 뤼엘 화랑은 인상주의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성장했지만 파리의 화랑은 1975년, 뉴욕화랑은 1950년 문을 닫았다.

 
인류의 근대미술발전에 기여했지만 그가 죽기 2년 전 프랑스 최고의 훈장이라고 수여 받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의 수여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국제교역에 공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근대미술의 발전에 공로를 세운 것이 아니라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화상들을 평가하는 척도는 결국 ‘돈’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러한 천하의 뒤랑 뤼엘에게도 라이벌이 있었는데 그보다 무려 25살이나 어린 파리의 또 다른 화상 조르주 쁘띠(Georges Petit, 1856~1920)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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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어찌나 모든 것이 아름다운 지, 갈대마저도 비단같아보였습니다.


4월부터 지역 생협에 가입해서 그곳에서 장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 주변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 생산자가 명시된 과일과 육류, 유해 성분이 가급적 들어가지 않은 가공식품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집을 찾아옵니다. 가격도 크게 부담 없고 믿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 같아 장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지난번에 감자를 1킬로그램 주문했는데, 생각보다 알이 작고 흠도 있지만 가격이 비싸서 고민했었답니다. 생산자를 찾아보니 제주도 대정읍 상모리 농가의 주소가 적혀 있습니다. 맛있다는 제주 햇감자로구나, 생각한 것과 동시에 상모리라는 지명에서 다른 기억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상모리는 작년 2월 매서운 바람을 해치며 다녀온 제주 근대문화유산 답사의 주 무대였습니다.

              뒷편 평평한 들판이 알뜨르 비행장 활주로입니다. 들어가지 말라고 해서 멀리서 보았습니다.쩝.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가 보이나요? 감자밭에는 둥그런 콘크리트 더미가 19개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흔적이지요.



책에 들어갈 마지막 원고의 퇴고를 마치고 약간의 휴식을 누리기 위해 떠난 제주 여행. 하지만 옛 흔적을 찾아 다니던 일년간의 습관을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검고 아름다운 비자나무 숲의 풍경과 섭지코지의 거친 바다에 감탄하면서도 남쪽과 서쪽 곳곳에 남아있는 근대문화유산을 찾아 자동차를 몰아대곤 했지요. 답사 후에 작은 지면으로나마 책의 말미에 제주의 흔적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 그곳의 근대의 흔적은,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전쟁, 그것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두려움과 막막함을 느꼈습니다.


근대문화유산을 찾아보기 전, 제주도는 이국적인 풍경, 신기한 문화, 싱싱한 자연의 현장으로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제주의 역사를 다시 더듬어보았던 그 날 이후 제주도는 이전의 제주도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섬, 2차대전의 말기 패망 위기의 일본 본토를 수호하기 위해 최후의 방어선으로 제공된 섬, 깊은 땅굴과 매끈한 절벽을 쑹쑹 뚫어놓은 동굴처럼 전쟁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섬.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지만 만약 조금만 전쟁이 길어졌다면 우리나라 국토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는 섬나라는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 내리게 됩니다.
 

제주의 동백. 저는 동백이 제주를 상징하는 꽃인 것만 같습니다. 피처럼 붉고 자존심강한 사람들처럼 고고한 꽃.

 


아름다운 것 뒤에는 왜 이렇듯 큰 상처가 숨겨져 있을까요?


역설적인 상황으로 인해 역사의 비극성은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숲, 그 바다, 그 바람은 수많은 피와 눈물과 땀, 그리고 죽음을 담보로 하여 그토록 아름답게 승화한 것일까요?


제주는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한 병참기지의 주요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전투기들이 중국의 상하이와 난징을 향해 최단거리로 날아갈 수 있도록 해군과 육군의 비행장 시설이 형성되었습니다. 제주도에는 일제강점기에 모두 네 개의 비행장이 건설되었습니다. 관광객이 오가는 비행장이 아니라 모두 군사용 비행장입니다.


알뜨르, 정뜨르, 진뜨르라는 향토적인 이름의 비행장이 있었고 1945년 전쟁 말기에 교래리라는 지역에 비밀 비행장이 세워졌습니다.
정뜨르 비행장은 현재 제주국제공항으로 확장되었고, 진뜨르는 활주로를 건설하던 중 연합군에 알려지자 건설을 중단한 후 지금은 밭으로 변했습니다. 교래리 비행장은 현재 비행훈련원이 들어와있습니다.


비행장뿐입니까? 제주 오름의 지하 곳곳에는 개미굴처럼 구불구불한 땅굴이 지금도 가득합니다. 이들 장소는 일제의 참호와 동굴진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찾을수록 계속 발견된다는 동굴진지들은 700여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가장 긴 것은 1킬로미터가 넘으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수많은 시설물들이 땅속에 오롯이 숨겨 놓았습니다.

셋알오름 동굴진지, 일출봉 해안 동굴진지, 가마오름 동굴진지, 서우봉 동굴진지, 어승생악 동굴진지, 사라봉 동굴진지를 비롯해서 알뜨르 비행장 지하벙커, 송악산 해안 동굴진지 등 20개 이상의 일제 시대 군사시설이 당시를 증언하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송악산 해안 절벽에는 높이가 2~3미터에 달하는 동굴이 열 다섯개가 뚫려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자살폭격 어뢰정을 숨겨두던 곳이라고 합니다.
감탄할 만한 절경 앞에서도 전쟁의 상흔이 느껴지는, 그래서 생명 하나하나가 더 소중한 곳이 바로 제주도랍니다.

 


또한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일제가 미군으로부터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홋카이도와 제주도를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전투력을 총 결집하는 결호 작전을 수행하게 되는데, 이때는 7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제주 전역에 집결하였고 앞서 설명한 수많은 전쟁시설물들이 미친듯이 세워졌습니다.
다행히, 제주도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고 일제는 패망했습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하기에 우리는 그 다음에 벌어진 동족상잔의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한국전쟁과 제주에서 벌어진 4,3사건, 그리고 수많은 아픔의 역사들……..


잔인한 시기는 지금 우리의 삶과는 비껴갔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서 과거의 역사와 만나게 됩니다. 그 시기를 온몸으로 부딪힌 사람들에게 우리는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후손에게 역사를 제대로 알려줄 의무가 있는 것이지요.


                   제주도 남동쪽 해안가에 밀집되어 있는 일제강점기의 전쟁 유적들.

 


우리가 찾아가 볼 곳은 알뜨르 비행장입니다. 알뜨르는 ‘아랫쪽에 있는 너른 뜰’이라는 뜻입니다. 알뜨르 비행장이 있는 대정읍 상모리 부근 지역은 일본의 후쿠오카와 중국 난징이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있습니다. 일제는 제주도민을 총동원하여 1926년부터 비행장 건설에 들어가 10년만에 20만 평 규모의 알뜨르 비행장을 완공합니다. 그리하여 알뜨르 비행장에는 지하 군사 벙커를 비롯, 의료시설, 탄약고, 연료고, 정비공장, 어뢰 조정고, 통신실, 발전소 등의 시설이 들어서 전쟁에 대비하게 됩니다.


일본 나가사키에 주둔하던 오오무라 해군 항공 기지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이 중국을 공격하고 일본으로 귀환할 때 중간 기착점으로 알뜨르 비행장을 활용했습니다. 상하이를 점령한 후에는 그곳에 비행장을 확보했고 알뜨르에는 연습항공대가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지하벙커와 활주로, 비행기 격납고가 남아있습니다.
 

                   비행기 격납고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 3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이 부근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활주로가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넓은 벌판에는 ‘공군에서 보유한 군사지역이므로 출입을 금한다’라는 푯말만 세워져 있습니다. 구글 어스로 이 일대를 찾아보는 순간,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이 활주로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길게 불어오는 평평한 땅, 거칠 것 없는 넓은 터. 폭격을 받으면 복구가 어려운 콘크리트는 생략한 활주로에 푸릇푸릇 풀들이 한 가득 돋아나있었습니다. 알뜨르 비행장은 지금까지 활주로가 그대로 남아있는 비행장이었습니다.
 

                   구글 어스로 찾아보니 활주로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보이시는지?

좀더 가까이 가볼까요? 경지 구획이 되지 않은 활주로 터는 국방부에서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알뜨르 활주로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왕 구글 어스를 실행시킨 김에 하나더! 후쿠오카와 난징을 연결하는 직선을 그어보았습니다. 정말이지 알뜨르 비행장을 지나가는군요.

 


활주로 주변에는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만든 비행기 격납고가 군데군데 들어와있습니다. 모두 20개의 격납고가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19개. 널찍한 밭두렁 사이에 둥근 봉분처럼 불쑥불쑥 솟아나 있습니다. 격납고를 처음 보았을 때, 당혹스런 감정이 들었습니다.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지어진 격납고는 정면의 길이가 20미터, 높이는 4미터, 내부는 10,5미터 정도의 규모입니다.

         

             너른 밭에 툭툭 떨어진 듯한 격납고들. 카메라 앵글에 모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형태와 규모를 자세히 살펴보자면 이렇습니다.

                    내부로 좀더 들어가보았습니다. 아직도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지요.

              내부에 들어와서 바깥 풍경을 보았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하니 햇빛을 피하기에 좋을 듯합니다.



대형 여객기를 생각했다면 턱없이 자그마한 격납고에 실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보관되었던-혹은 숨겨두었던- 비행기는 아카톰보(빨간잠자리, 고추잠자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일본해군의 중급 비행 훈련기였습니다. 아카톰보가 대체 어떤 비행기인가 궁금하여 찾아보니, 정식 명칭은 Yokosuka K5Y이며 1939년부터 45년까지 생산되었다는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자료사진은 흑백이기 때문에 컬러감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주황빛과 빨강이 섞인 몸체와 날개를 가진 이 비행기가 파란 하늘을 날면 빨간 잠자리처럼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알뜨르의 활주로를 따라 아카톰보가 날아갔겠지요.

                            요것이 아카톰보(빨간잠자리, 고추잠자리)라 불렸던 연습비행기랍니다.

                    격납고에는 요렇게 들어갔답니다. 이 자료 이미지는 뉴스 기사에서 캡쳐했습니다.

 


비행기가 사라진 격납고에는 농사꾼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농기구도 보관하고 수확물도 쌓아두는 그런 곳으로 말입니다. 때로 지친 농사꾼이 해를 피해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비를 피해 잠시 숨는 곳으로 말이지요.

 
지금 알뜨르에는 감자 수확이 한창입니다. 지금 내 손에 들려진 감자는 그날 가슴을 쓸쓸하게 만들던 알뜨르의 바람 속에서 자란 것일까요? 감자를 갈아서 감자전을 부치면서 잠자리 비행기 격납고가 옆에 있건 말건 땅 고르기에 여념이 없던 농사꾼의 둥그런 등을 떠올렸습니다. 격납고의 둥근 지붕 모양처럼 그들의 등도 땅과 가깝게 둥글게 숙여져 있었습니다.

 

다음은 제주 대정읍 언저리에서 찾아낸 근대건축물들입니다. 제주에는 이런 건물들도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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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X 매거진 팀과 함께 한 김제, 정읍 근대문화유산답사기입니다. 오랜만에 일행이 많아서 즐거웠습니다.



전북의 평야를 무조건 호남평야라고 하는 줄 알았더니 평야에도 이름이 다 붙어있습니다. 동진강 하류에 있는 넓은 평야가 김제평야이며 만경강 하루에 있는 것이 만경평야라고 합니다. 이 둘을 합쳐서 김만경평야, 혹은 호남평야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이며, 가장 중요한 곡창지대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 오사카의 상인집단들이 바로 이 곡창지대에 눈독을 들여 땅을 매입하고 소작을 부치고 대농장을 일궜으며 그곳에서 나온 미곡들을 바리바리 일본으로 챙겨갔다는 것이지요.

 
정읍시 신태인읍 신태인 도정공장 창고

신태인 도정 공장은 2007년 갑작스럽게 철거되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도정 공장 창고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창고 건물 답게 견고할 뿐더러 그 규모에 압도당할 만 합니다. 지금도 상업물품들의 창고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창이 많지 않지만 통풍을 위해 환기창이 있습니다. 지붕 중앙에도 환기구가 만들어져있습니다.

                         건물의 모양새가 비례감이 좋습니다. 잘 만들어진 건물입니다.


 정읍시 신태인읍에는 거대한 도정공장 창고가 남아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부지의 도정공장은 몇 해전인 2007년 무슨 이유에서인지 헐리고 그 빈터만 허허롭게 남아있습니다. 빈터만 봐도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지요. 창고는 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붉은 벽돌로 단단하게 지어진 건물 안에 얼마나 많은 곡식들이 채워진 것인지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신태인이라는 소읍은 마을이 생기기도 전에 철도역부터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쌀 도정과 쌀 운반 때문에 생겨난 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화호리 일대의 너른 평야에서 수확한 쌀은 이곳에서 모두 도정했고 기차를 타고 군산으로 가서 다시 함선으로 옮겨져 일본으로 건너갔지요.



김제 죽산면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김제시 죽산면에 있는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을 찾아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김제로 갑니다. 이 마을 역시 쌀농사를 주로 하는 곳인데 화호리나 다른 마을들과 확연히 분위기가 다릅니다. 상가 건물이 지어졌고 도로가 널찍한 것이 꽤나 번창했던 마을인가 봅니다. 마을 초입에 하시모토라는 대농장주가 운영하던 농장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시모토 농장사무실이 재미있는 이유는 유럽식 건축 스타일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간 둘러본 농장 사무실은 일본식 가옥이거나 양옥으로 개량한 일식 주택의 형태, 혹은 창고 등의 형태였는데, 하시모토의 경우는 프랑스식 망사르드 지붕(Mansard)을 얹고 벽면에 석재로 장식한 전형적인 유럽식 건축 형태입니다. 하시모토는 자신의 남다른 취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시모토라는 대농장주의 사무실로 사용된 건물입니다.
 

                         망사르드 지붕을 구경해보세요. 이중경사지붕의 의미를 아시겠지요?

                   아무리 예쁘게 찍으려고 해도 사진빨 안받습니다. 건물의 특징만 보고 지나갈까 합니다.


 
건물은 약간 높은 지대에 있는 데다 보통의 건물보다 층고가 높다보니 멀리서도 잘 보입니다. 당시에도 마을의 랜드마크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망사르드 지붕(맨사드 지붕이라고도 하지요.)’이란 이중경사지붕을 말하는데요. 아랫쪽 지붕은 경사가 급하고 윗쪽 지붕은 경사가 완만하게 연결되어 두 개 층의 지붕으로 이루어진 형태입니다. 프랑스 파리 중심가의 건물들을 보면 죄다 망사르드 지붕을 취하고 있는데요. 고전주의 건축가인 프랑수아 망사르(Francois Mansard)가 발전시킨 양식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망사르드 지붕을 하시모토 농장사무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요.


독특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소위 ‘사진빨’이 잘 받지 않아 건물의 특징을 잡아내기 어려운 건물입니다. 건물 몸체의 둔중한 비례감과 현관의 장식이 하다만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요. 뭔가 근사한 것을 만들어보려다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건축주와 건축가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상상을 해봅니다.

            농장 사무실 옆에 목조가옥도 한채 남아있습니다. 창고 겸 관리자의 숙소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이전 답사 때는 낡은 건물이었는데 일년 사이에 손을 봐서 깨끗해졌네요.


하시모토는 죽산면 일대의 황무지와 갯벌을 개간하여 농토를 넓혔던 인물입니다. 1906년 군산에 발을 디딘 하시모토는 동진강 일대를 개간하면서 농장을 경영하다가 1916년 죽산으로 입성하여 죽산면의 땅을 절반 이상이나 차지하게 됩니다. 1931년에는 법인주식회사 하시모토 농장을 설립하는데, 당시 농장은 350정보의 논과 90정보의 밭을 소유하고 있었고 550여명의 소작인을 두었다고 합니다. 농장 사무실은 1926년에 지어졌으니 법인을 설립하기 전부터 하시모토의 농장경영은 이미 가속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제시 백구면 백구금융조합


백구금융조합을 보려면 다시 북쪽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합니다. 처음 백구금융조합을 찾아 나섰을 때 다른 근대도시에서 보았던 은행 건물을 기대했었습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은 자꾸 시골길로 향하고 있었고 온통 논과 밭으로 가득한 소읍의 좁을 도로를 겨우겨우 찾아들어가자 아담한 양식 건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런 동네에 금융조합이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만큼 김제군에 두루 펼쳐진 평야에서 거두어들인 미곡이 어마어마했었다는 뜻이겠지요. 미곡은 곧 돈이었으니 당시 금융조합은 힘깨나 썼던 조직이었을 겁니다. 금융조합은 쌀 수탈에 용이하도록 일제가 만든 기구인데, 농민들에게 돈을 융통해주던 곳이라고 합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는 뜻이겠지요.

 

                   한겨울이라 담쟁이 잎사귀가 몽땅 말라버린 바람에 건물의 윤곽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천장에도 벽에도 온통 낡은 바람이 스멀스멀 흐르고 있습니다.

                      건물 안은 참으로 고요합니다. 저녁무렵의 햇살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재촉하는군요.

         안쪽으로 공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다른쪽 벽에는 철재 금고도 부서지긴 했지만 형태가 남아있어요.



만물이 무르익은 가을녘에는 찾아왔을 때 이 건물은 온통 푸르른 담쟁이로 둘러싸여 마치 자연에 송두리째 먹혀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겨울에 찾아오니 잎사귀가 몽땅 말라버리고 떨어져 버렸기에 오히려 건물의 형태가 더욱 잘 보였습니다. 건물은 건재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존재의 이유를 망각한 채 계절에 따라 모습을 감췄다가 드러내길 반복하겠지요.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이.


내부로 들어가보았습니다. 담쟁이는 지독한 생명력을 보이며 벽과 천장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부는 넓고 깊고 높습니다. 육중한 철문으로 된 금고와 창문 틈 사이로 오래된 바람이 냄새가 흘러나옵니다.


백구금융조합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2005년의 일입니다. 6년이 흘렀지만 건물은 허허벌판에 방치되고 있습니다. 입구를 채워둔 자물쇠조차 없이 자칫 범죄의 현장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도시인다운 발상인가요?


모든 근대건축물을 깨끗하게 관리하고 아름답게 활용할 수는 없습니다. 백구금융조합처럼 조용히 세월의 흐름대로 바스러지는 것도 건물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김제시 백구면 월봉도정공장

                         도정공장의 내부입니다. 아마도 앞쪽에 또다른 공간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2000년대까지 공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백구금융조합 바로 맞은 편에도 심상치 않은 건물이 있습니다. 거대한 창고처럼 보이는 이 건물은 도정공장이었다고 합니다. 규모로 보건대 이곳을 오고가던 쌀의 규모가 어마어마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월봉도정공장(오오쓰미 도정공장이라고도 합니다.)은 연간 7만 가마의 쌀을 도정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건물 내부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것을 보면 관리가 잘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건물로 오고간 발걸음은 하얀 눈밭에 남은 들짐승의 것뿐이군요. 벌써 날이 저물어가니 가로등 하나 없는 건물들이 더욱 말이 없어집니다.



호남선 부용역


                         폐역이 된 부용역. 열차는 그냥 지치나고 화물차만 하루에 두번정도 선다고 합니다.

                         고즈넉한 마을에 부용, 연꽃 바람이 붑니다.


김제 근대문화유산 기행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는데 저편에 부용역이 보입니다. 부용(芙蓉). 연꽃이라는 뜻이군요. 이름이 예쁘죠? 월봉도정공장의 쌀들이 군산으로 가기 위해 거쳤던 곳이 부용역입니다. 익산역과 김제역 중간에 위치한 부용역은 1914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일제강점기는 쌀의 이동을 위해 철도가 놓이고 역이 번창하던 시절이었나 봅니다.

번영하던 시절을 기억이나 하는지 지금 부용역은 2008년부터 역무원도 없이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폐역이 되었습니다. 부용역 주변도 조용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그저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아가는 소읍의 풍경이 펼쳐질 뿐입니다.
어둠이 내리는 마을에 연꽃 같은 잔잔한 향기가 감돕니다.


more information>>----------------------------------------------------------------------

1. 신태인 도정공장 창고 (등록문화재 제175호)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신태인리 230-1 번지

2.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등록문화재 제61호)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죽산리 570-6

3. 백구 금융 조합(등록문화재 제186호)
주소-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월봉리 624-2

4. 월봉도정공장
주소-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월봉리 백구 금융 조합 맞은편

5. 부용역
주소-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부용리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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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계급의 등장과 미술의 변화 

미술이라는 장르가 시민들의 품으로 다가온 것은 산업혁명(18C말~19C전반)의 과실을 손에 쥔 도시 중산층들 즉 ‘부르주아’들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이들은 생산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닦으면서 신분과 문벌을 넘어 세상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시대(1837~1901), 프랑스에서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 Ier, 1773~1850)의 7월 왕정이후인 1830년대부터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 시기에 들면 도시가 확대되면서 농촌인구가 유입되어 인구는 늘고 철도가 발달하고 대중적인 신문이 발행되면서 시민계급이 확실하게 권력의 주체가 되어갔다.


 이들은 경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취미의 전통이나 문화적 교양이 부족해서 스스로 열등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교양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거실에 걸어들 ‘걸작’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이들은 작품보다 화가의 지명도나 위치가 중요했으며 그것이 작품의 가치를 재는 척도이기도 했다. 물론 이 시대 모든 부르주아 계급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현재 오르세미술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화가이자 컬렉터인 동시에 미술사학자이기도 했던 에티엔 모로 넬라톤(Adolphe Étienne Auguste Moreau-Nélaton, 1859~ 1927) 같은 이의 경우 대단한 안목을 지녔던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렇게 사회중심을 이루는 세력의 교체가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미술은 궁전이나 교회를 떠나 가정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시민계급이 등장하면서 화가들도 변화한 환경에 적응해야 했는데 우선 가장 큰 변화는 작품의 크기이다. 일반 시민들의 거실에 100호(162x131cm)이상의 대작을 걸어두는 것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성공했다하더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미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작품의 크기가 그림이 걸릴 실내를 감안해서 작아진다. 그리고 또 다른 변화는 신화, 역사, 종교를 주제로 했던 그림들이 쉽고 친근한 주제로 바뀌어 가족의 초상이나 풍경으로 옮아가며 사실적인 화풍이 주를 이루게 된다.


앵그르 <나폴레옹의 초상>(유화,1804)

윌리엄 브로그 <돌아온 봄>(유화,1886)



 특히 초상화의 경우 프랑스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 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841년 약 2,000점의 출품작 중 약 25%에 이르는 500점 정도가 다시 1884년에는 673점의 초상화가  출품될 정도로 시민사회의 기호와 취미에 따른 그림들로 대체된다. 



#풍경화와 정물화의 유행

 여기에 풍경화도 시민들의 공감을 얻기 시작한다. 17세기 이미 장르화로 자리 잡은 풍경화지만 산업혁명과 함께 영국 풍경화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그리고 바르비종파(École de Barbizond)로 이어지면서 현격한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고 이는 인상주의로 이어진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빙해-좌초된 희망>(유화, 1823~4, 96.7×126.9cm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윌리엄 터너 <비, 증기, 속도와 대 서부철도>(유화, 91x122cm, 1844 런던 내셔널 갤러리)


컨스터블 <브라이톤 해변가를 항해하는 배>(유화, 149×248cm, 1824, 런던 V&A 미술관)



 17세기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이나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 1682)류의 풍경화가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이탈리아 풍경이었던 데 반해 19세기의 풍경화는 일상의 주변풍경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풍경화의 변화는 살롱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1835년 살롱에 출품된 460여점의 풍경화중 고전적인 이탈리아 풍경은 전체의 10%에 불과한 46점이었고 전에 볼 수 없었던 프랑스 픙경화가 336점이나 되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물론 이런 변화를 살롱은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1817년부터 풍경화를 살롱에 반영했는데 다만 그 권위를 지킬 속셈으로 일반분야인 ‘역사화’는 매년 공모한데 반해 4년에 한번씩 ‘역사적 풍경화’부문을 공모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와 함께 시민들과 친근해진 장르는 정물화이다. ‘교양’이나 ‘취미’등 인문학적 취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가치관은 대단히 현실적이었다. 따라서 익숙하고 친근한 인물이나 자연, 사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들에게 ‘진짜와 똑 같아 보이는’것은 그림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따라서 신화나 역사와 성서의 내용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 환영을 받았다. 일상적인 초상, 풍경, 정물화의 다른 편 즉 살롱에서는 역사화와 우의화가 인기였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이는 사실적인 그림이 시민들의 취향에는 맞지만 전통이 없다는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역사나 우의를 다룬 사실 풍을 선호한 것이다. 이들은 비너스를 빌어 관능적으로 그린 누드를 선호했고, 예술이라는 이름의 ‘우의’를 통해 자신들의 세속적 고상함(?)을 위장(Camouflage)한 것이다. 



여기에 그림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으로 보았던 사진술이 등장하면서 화가들은 위기의식을 느꼈지만 이내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진과 이내 친하게  되면서 이런 우려는 사라졌고 그림은 더욱 풍성해졌다. 하지만 사진의 발달은 그림의 보도, 기록, 기념, 교육 등의 기능을 가져갔다.  


 이렇게 시민계급이 미술에 그림을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산층으로서의 경제적 여유와 교양인을 선망하는 태도 같은 것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19세기 중엽이 되면서 미술관이 일상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미술관이 오늘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1787~ 1799)이후의 일이다. 혁명정부는 1793년 미흡하나마 국민들에게 루브르 궁문을 활짝 열어 미술관으로 개방했다. 그 후 혁명기간 중에도 화가인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 1733 ~1808)에 의해 루브르 본전시관 전시계획안이 발표되었지만 구체화하지 못하다  나폴레옹 (Napoléon Bonaparte,1769~1821)에 의해 오늘날의 미술관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는 물론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근동지방에 이르는 작품들을 모았다. 그는 전쟁으로 정복한 나라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조건으로 배상금대신 미술품을 요구했으며 이때 많은 미술품과 유적지 주요작품들을 조직적으로 파리로 옮겨와 결국 1802년 미술관의 이름조차 ‘나폴레옹미술관’으로 바꾸었지만 결국 이 미술관은 ‘루브르미술관’으로 오늘의 이름을 찾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 나폴레옹은 ‘전쟁미술관’을 만들었고 지방의 주요도시에도 미술관을 개설했다. 1795년부터 1805년까지 10년 동안 파리에 4개의 미술관, 지방에 22개소의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이는 나폴레옹1세가 대제국을 구축한 제 1제정시대(1804~1814) 이후 즉 왕정복고시대인 루이 18세 시대에도 뤽상부르미술관을 현대미술관으로 운영토록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파리국립근대미술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의 효시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까지 유효하지는 않지만 중앙집권제도와 예술을 애호하는 정신이 결합한 성공적인 사례이다. 프랑스의 이러한 선도적인 미술관 건립은 다른 유럽 국가들을 자극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1800년 개관),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1809년개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1819년 개관), 런던의 대영박물관(1823년 개관), 독일의 프로이센미술관(현 베를린국립미술관, 1830년 개관) 등이다. 


 미술관의 등장으로 이제 더 이상 교회와 황제의 미술이 아닌  순수한 ‘예술’로서 , 오늘 날에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미적 감수성을 위한 예술의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에밀졸라(Émile François Zola, 1840~1902)의『목로주점』에서 주인공 제르베즈가 자신의 결혼식 날 오후에 하객들과 함께 루브르를 가는 것처럼 일상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술이 대중화함으로서 크게 발전한 것은 판화이다. 르네상스 이래 미술품 보급의 가장 쉽고 값싼 수단이었던 판화는 18세기말 석판화(Lithograph)기법이 등장해서 일반화되면서 미술품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의 욕망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방편이 되었다. 당시 미술품 수집은 신분이나 수입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의 열망의 대상으로 소장가들의 숫자가 급증했다. 



1830년대 이런 현상을 프랑스의 한 저널리스트는 “유화로 그린 초상화를 가진 시민은 수채화 초상 밖에 갖지 못 한 시민을 경멸하고 석판화 초상을 가진 사람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을 정도로 이제 미술품 소장정도와 내용이 신분의 고하를 결정짓는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서 정교한 복제판화가 등장하면서 대중화가 이루어지자 이제 전문으로 판화만 제작하는 작가들이 등장했다. 석판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1808~79),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 동판화의 메리옹(Charles Meryon, 1821~68)이나 르돌프 브레댕(Rodolphe Bresdin, 1822~85), 석판과 목판을 자유스럽게 구사했던 뭉크(Edvard Munch, 1863~1944), 그리고 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과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 등은 유화작품에도 남다른 성과를 남겼지만 판화에 더욱 더 열중했다. 

도미에 <트랑스노냉 거리, 1834.4.15>(석판화, 1834)

브레뎅 <죽음의 코메디>(석판화,1854)


르동 <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안개를 보았다>(동판화, 1880년대)

메리옹 <뱀파이어>(동판화, 1853)

뭉크 <절규>(판화, 1895)



 이와 함께 캐리커처 즉 삽화와 포스터도 등장했다. 시각매체로서 삽화와 포스터는 보도나 기록, 선전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새롭게 등장한 화보 중심의 일간 또는 주간신문의 중요 언어가 되었다. 또 풍자와 익살, 조롱을 담은 캐리커처는 정치적 입장이나 주장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사회를 비판하는 방편으로 활용되었고 만화로까지 진화했다. 윌리암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나 18~19세기 스페인의 격동기를 스페인의 궁정화가로 살았던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의 <카프리초스>(Los caprichos)나 <전쟁의 참화>같은 판화는 예리한 풍자와 날카로운 비판은 판화나 캐리커처의 가치를 심화시킨 역작이다. 
 

고야 <카프리초>(동판화, 1797-98)

보나르 <목욕탕> (석판화,1800년대)



 또한 소비를 전제로 하는 산업혁명은 많은 선전수단을 필요로 했는데 당시 판화는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가장 중요한 광고수단 중 하나였다. 이런 광고용 판화 즉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이끈 사람은 로트렉이다.

로트렉 <물랑 루즈, 먹보>(1891, 석판화)

로트렉 <아리스타드 브뤼앙>(1892,석판화)



 그는 1891년 몽마르트의 카바레 ‘물랑루즈’를 위해 대형 다색판 포스터를 석판화 기법으로 제작했는데 파리 시민들을 열광시켰고 이후 아리스타드 브뤼앙(Aristide Bruant,1851~1925) 이나 메이 밀튼(May Milton), 잔 아브릴(Jane Avril, 1868~1943) 같은 연예인들을 위한 포스터를 만들어 사람들을 유혹했다. 이렇게 미술은 이즈음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시민들의, 중산층의 손으로 들어와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함께 열어갔고 이와 함께 미술시장의 문도 훨씬 넓어졌다.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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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림, 세속으로 내려오다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왕권이 강화되던 시기에 등장한 게 바로크(Baroque, 17세기)이다. 이 시기는 교황과 가톨릭 교회가 종교개혁운동으로 인해 그 영향력이 현저하게 약화된 시기이자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커지기시작한 때이다. 이 때 자신의 권위와 우아함을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왕과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미술품의 주문자인 동시에 소비자였다. 따라서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화가나 조각가들은 기사작위를 얻는 등 신분상승과 함께 황실과 가톨릭 교회로부터 주문이 쇄도하면서 유례없는 호황을 만나게 된다. 


14세기 이전 실질적으로 유럽을 지배한 것은 교황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부유한 상공인 시민계급이 등장하고,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는 몰락하고 점차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서는 왕권이 강화되면서 일일이 로마와 대립하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교황의 허락 없이 프랑스 내 교회에 임시세를 부과하면서 교황과 왕의 대립은 한층 격렬해 졌다. 프랑스가 교황의 고향 아나니에 머무는 교황을 습격하는 아나니 사건(Anagni Incident, 1303년)이 일어나고 이후 프랑스인이 교황으로 임명되자 곧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곳에 새로운 고딕풍의 궁전과 교회를 짓고 약 70여 년 간 교황들은 프랑스왕의 수중에 있었던 셈이다. ‘바빌론 유수’ 또는 ‘아비뇽의 유수’(Avignonese Captivity, 1309~1377)라고 기록되는 사건이 그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편지를 썼던 시에나의 성 카트린느(Catharina de Siena, 1347~80)의 노력 덕에 다시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왔다.    




#교황의 궁전 건축과 면죄부 판매 


현재 교황청으로 쓰이는 오늘날의 라테란 궁전


 
로마로 돌아 온 교황의 궁전인 라테란(Lateran Palace)은 이미 낡고 파 헤쳐져 당장 거처할 곳조차 없었다. 그래서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에 임시로 자리를 잡아야 했는데 지금까지 이곳에 거처하고 있다. 당시 교황이던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 1397~1455)는 낡고 황폐회한 교회를 할고 새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교회는 새로운 교회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죄를 지어도 돈만 내면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율리우스 2세와 미켈란젤로와의 갈등도 결국 성당의 신축 또는 개축, 증축자금 즉 돈이 문제였던 때문에 교회는 온갖 이유를 동원해서 면죄부 판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546)는 95가지의 이유를 들어 면죄부 판매를 반박했고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의 신앙고백 이후 결국 교회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즉 신교로 나뉘게 되었다. 

 신교도들은 교회가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교회를 장식하고 치장 하는 일은 최소화하는 청빈과 검소를 기본으로 했다. 이런 신교도들의 주장에도 일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교황 파울루스 3세(Paulus Ⅲ)는 트렌트 공회의(Tridentine Council)를 소집하여 종교 개혁 후 등장한 신교에 대응하여, 교리의 확인과 교회 내부의 쇄신을 위해 3회에 걸쳐 개최하면서 반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된다.

이 회의는 성모숭배와 비적(Sacrament) 신앙을 확인하는 동시에 1563년 말 공포된 교령의 의거 신교의 성상파기 또는 성상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성상과 성 유물의 보호를 결정함으로서 바로크 미술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도상(iconography)에 관해 엄격하게 규정하였으며 그림을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들에게도 교리와 복음을 전파 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성 그레고리우스 1세의 말처럼 미술은 선교의 수단으로 ‘문맹의 성서’가 되었다. 이런 가톨릭교회의 미술에 대한 인식은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1455년 선종 당시에 남겼다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교양이 부족한 대중의 정신에 견고하고 안정된 신념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시각에 호소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한다. 교리에만 의존하는 대중의 신앙은 미약하고 동요될 수밖에  없다.....인상적인 비례를 갖추고, 기품과 미가 조합된 훌륭한 건축물은 교황의 권위를 고양시키는 데, 막대한 기여를 할 것이다.”


교회는 신이나 교황을 위한 수단인 동시에 민중을 교화할 목적으로 활용하기로 하면서, 공의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성당은 더욱 화려하고 호화로워졌다. 하지만 그림은 여전히 알기 쉬운 내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정서적인 호소력이 강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신앙에 봉사하기위한 그림이어야 했다. 


 새로운 일감으로 사기가 충만해진 당시의 예술가들을 더욱 고무시킨 것은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 1491~1556)였다. 군인이었던 그는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고 병상에서 하느님을 만나 누구 못지않은 신앙심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는 결국 예수회를 조직하여 신의 병사가 되었다. 그는 비록 가난할 지라도 교회에 갈 때는 교황의 친인척에 버금갈 만큼 화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에도 대리석과 금장식, 그림과 조각, 천정화와 화려한 치장벽토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또 예수회 회원들은 교회가 신의 거주지인 동시에 신도들이 자유롭게 쉬었다 갈 수 있는 휴게실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수회는 적극적으로 속세에 파고들어 일반 신도들을 구원하고자 했다. 이들은 학교와 병원을 지어 현실적인 수단을 통해 신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당시 제작된 조각이나 그림은 영혼과 육체가 일체를 이루어 ‘법열’의 상태에 이른 극적인 표현들이 많았다. 이런 법열의 상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로마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 있는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의 <성녀 테레사의 법열> (The Ecstasy of St. Teresa, 1646~52, 대리석 높이 350cm,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로마) 이 있다.


             Gian Lorenzo Bernini, <성녀 테레사의 법열> 1646~52, 로마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하지만 이 작품의 극적인 상황과 묘사 때문에 성스러움과 에로틱의 경계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고위 성직자들의 선교수단으로서의 미술에 대한 분명한 인식으로 인해 확실한 후원자로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베르니니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제대를 가려주는 발다키노(천개天蓋)>(1624-33)



하지만 이런
종교에 봉사하는 바로크에 대한 반발로 영국에서 고딕스타일이 등장하였고 이는 점차 유럽일대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교회와 신도들의 지갑이 화가 등 예술가들을 향해 열려있던 시절 가장 많은 돈과 높은 명예를 누렸던 이는 이미 31세에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던 베르니니이다. 그는 천재적인 재주와 함께 남다른 전략과 반종교개혁운동 정신에 입각해서 은총과 용서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그는 <추기경 보르게세의 흉상>(Cardinal Borghese, 1632, 대리석, 높이 78cm, 보르게세미술관, 로마)을 만들어 그의 눈에 들면서 추기경의 사금고에 들어가는 돈보다 베르니니의 금고에 쌓이는 돈이 더 많을 정도로 성공을 거둔다. 


베르니니, <보르게세 흉상>( 1632, 대리석, 높이 78cm, 보르게세미술관 로마)



하지만 동시대에 베르니니의 라이벌로 돈보다는 예술가로서 세상의 잡다한 일보다는 자신의 예술에 매달렸던 사람이 있다.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가 바로 그사람이다. 베르니니와 보로미니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다. 하지만 한 사람은 세속적인 성공을 생전에 이루었고, 그에 반해 보로미니는 예술가로서 자존심은 세웠지만 결국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결국 68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보로미니<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폰타네의 돔>(1634-1641, 로마)



교회의 재건과 부흥 특히 예수회의 회화관은 많은 화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고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게 해 주었고 신을 대신해서 인간을 통치한 속세의 왕들은 자신의 권위를 위해 화가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예의를 갖추었지만 이는 일부 잘나가는 화가들의 몫이었고 여전히 무명의 화가들은 춥고 배고픈 처지였다. 그리고 여전히 미술품의 소비처는 교회와 왕 그리고 제후 등 지배계급에 국한되었다. 어찌보면 부유한 시민계급이 주 고객이었던 르네상스시대의 피렌체 보다 더 퇴보한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표방하면서 태양왕 루이 14세(Louis XIV of France, 1638~1715)에 이르러서는 화가 등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던 미술아카데미까지 국가행정조직에 편입시켜 여러 가지 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공적인 미술품 주문은 이곳 아카데미 회원들에 한해서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단 아카데미회원은 개별적으로 그림을 주문받거나 팔수 없다는 전제아래.     



 하지만 여전히 미술은 하느님의 것이거나 제후들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북부, 혹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의 예외는 있었다 할지라도 진정한 근대시민사회가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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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마모토 화호 농장 미곡창고. 세월에 몸을 맡긴 채 숨을 거둘 날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만나다>라는 책을 펴낸 후, 근대문화유산 기행은 우리 부부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가본 곳도 있고 새로이 가보게 된 곳도 여럿 있었어요. 그 중에서 화호리는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첫손에 꼽히던 곳입니다.

화호리라는 지명을 들어보셨나요? 전라북도 여러 소읍 중 하나인 이곳은 번듯한 건물도 화려한 거리도 없는 고요한 마을입니다. 사전 정보 없이 문화재청에 소개된 일제강점기 가옥의 주소만 달랑 들고 찾아갔던 화호리. 이곳에 도착했을 때, 묘한 예감을 솔솔 밀려오더군요. 문화재로 등록된 것도 아니고 귀에 익숙한 지명도 아니지만 마을 입구에 서있는 거대한 건물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창고 건물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어떤 사연이 있길래, 콘크리트도 튼튼하게 지어진 창고가, 그것도 이렇게 큰 창고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 지역의 너른 평야를 보면 쌀가마니를 쟁여두던 창고였겠지만, 부서진 출입구하며 잡초가 가득한 주변을 보면 오랫동안 방치된 듯한 모습이었지요.

전북에 펼쳐진 거대한 황금 들녘에 적잖이 감동을 받고 올라온 후 자료를 찾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봤더니 화호리는 일제강점기 전북 지역에 대농장을 일구던 구마모토 리헤이의 소유지였으며 농장의 흔적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는 지역이었던 것이지요. 구마모토의 농장은 군산을 중심으로 개정면 일대 외에도 화호리 역시 그의 농장이 거대 화호 농장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우리가 호기심을 갖고 보았던 거대한 창고는 구마모토 농장에서 수확한 엄청난 미곡을 보관하던 미곡창고이자 농장사무실이었던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들여다보았을 텐데, 놓치고 온 것들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오랜만에 답사 동행자가 생겼습니다. 잡지사 취재팀과 함께 답사를 떠났습니다.


2011년 1월 중순, KTX 매거진 촬영팀과 함께 근대건축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매거진 팀에서 살펴보고자 했던 장소가 때마침 김제와 정읍 일대였습니다. 큰 눈과 추위에 구제역까지 발생하여 쉬운 답사가 될 리 만무했지만 이때다 싶어서 화호리를 첫 답사지로 추천했지요. 화호리에 비중을 두고 살펴보면서 신태인읍 도정공장 창고, 하시모토 농장사무소, 백구금융조합, 부용역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때 다녀온 답사지를 두번으로 나누어 소개할까 합니다. 김제, 정읍이라고 해도 군산과 맞닿아있는데다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지역이라 하나로 묶어서 답사 여행을 계획해도 좋겠습니다. 아침 일찍 서두른다면 하루에 모두 다 볼 수 있답니다.

군산 일대를 여행하다 보면 구마모토 리헤이에 대해 자주 듣게 됩니다. 그는 군산, 김제, 정읍 일대의 3,200정보의 토지를 소유하여 ‘전북 지주왕’으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1정보는 1천 평을 말하는데, 일제강점기 말엽에 그가 소유한 토지는 여의도의 10배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는 만경강, 동진강 일대의 비옥한 땅을 소유하고 너른 평야를 샘솟는 곡식들을 모두 일본으로 반출하여 갑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지요.

일제 강점기 초기 군산 일대에서 농장경영을 하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농장 경영의 선구자로 꼽히는 미야자키 가타로가 있고, 2,300정보의 농장을 세운 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토지를 판 오쿠라 이하치로, 오사카 출신의 미곡상 후지이 간타로가 세운 후지모토 합자회사(이후 불이흥업주식회사로 개칭합니다), 미쓰비시 재벌의 이와사키 히사야, 그리고 종교를 통해 지주로서 탄탄하게 자리잡은 마스토미 야스자에몬 등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전북에 진출한 지주들은 오사카 출신이 많으며(오사카는 예부터 상업이 발달했지요. 돈의 흐름을 아는 사람들이 많았던가 봅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세력이 약화된 지역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일본 내에서 얻을 수 없는 부귀를 위해 조선땅으로 건너온 것이지요.

구마모토 리헤이는 일본에서 건너온 정치인, 경제인들과 비교하면 크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만, 전북 지역에는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젊은 시절, 조선으로 눈을 돌린 구마모토는 청일 전쟁 이후 조선을 시찰한 후 전북의 땅을 낙점했습니다. 그 후 오사카 유지들을 독려해서 투자를 받아 전라북도의 땅을 사들이고 이 땅을 관리하며 조선과 일본을 오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일본 내 경제가 악화되면서 투자자들이 헐값에 조선의 토지를 내놓게 되는데, 구마모토는 이때 이 토지들을 사들여 거대지주로 등극합니다. 시대가 그의 편이었나 봅니다.

농장은 중간 관리자인 마름을 두어 조선인 소작농을 부렸는데, 구마모토 농장의 소작료는 다른 곳보다 높았습니다. 개량 농법을 사용하여 생산량이 높았기 때문이지요. 높은 소작료를 내지 못하면 소작인을 내쫓고 땅을 몰수했지요. 이렇게 구마모토 농장은 땅과 부를 축적해갑니다.

다시 찾아온 화호리. 황금들녘 대신 흰 눈이 덮인 들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번 방문과 마찬가지로 햇살이 짱짱하군요. 화호리 마을 초입에 세워진 거대한 신전을 다시 찾아갑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부서져 있고 문도 막혀있지만 계단 아래로 내부로 들어가보았습니다. 아!

          오늘 답사자들은 허허벌판 폐허에 탐닉하는 존재들입니다. 미곡창고의 내부를 들여다볼까요?


1,2층을 나눴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어요. 한문만 보면 까막눈이 되네요. 블라블라... 글자도 쓰여져있고.
 

          문 안에 작은 공간 안에는 우물이 있습니다.


만국기가 펼럭이고 고장난 앰프도 널브러져 있지만 내부를 더듬어볼 만한 구조물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목조 트러스와 견고한 콘크리트로 마감한 벽체, 그리고 문과 창문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보입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2층으로 사용된 건물인데, 1,2층이 언제부터 이렇게 뚫려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꽤 오래 된 것 같습니다. 외부에서 느껴지듯 창고 안은 거대했습니다.

동네 할머니께 여쭤보니 5년 전쯤 약장수가 와서 마을 어르신들을 모셔놓고 창고 안에서 시끌벅적 요란을 피웠던가 봅니다. 휘날리는 만국기와 앰프는 그날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이 창고보다는 좀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창고가 네 개가 더 있었다는 말씀도 해주셨어요. 화호 농장의 쌀가마니가 창고에 모여있다가 신태인으로 집결한 후 군산으로 옮겨졌고 이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만국기와 앰프까지.... 스토리가 많은 건물이군요.

 

                                  미곡창고는 광복 후 화호중앙병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입구가 위풍당당하군요. 펄럭이는 적십자기하며.


                                  잠시 화호여고로 사용되었다고 해요.


화호 미곡 창고는 광복 후 마을의 건강을 책임지는 중앙병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정부의 농촌 지원이 끊어지자 병원은 운영이 어려워져 1972년 문을 닫았습니다. 그 후 잠시 화호 여고 교사로 이용되기도 했지요. 미곡창고는 참 다양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동안 없던 창문이 생겼다가 다시 막혔고 정문이 생겼다가 막혔으며 2층 계단이 놓였다가 무너졌지요. 세월이 길었던 탓일까요? 마을 사람들은 건물에 대한 어떤 애증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우에 가족이 살았던 가옥 겸 사무실. 한때 화호우체국으로 사용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

 
화호리는 구마모토 농장도 있었지만 다우에 타로, 오사와 신조와 같은 일본인들이 토지를 보유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살면서 농장을 원격조종했던 구마모토와 달리 이들은 화호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이지요. 화호는 일본인 거류지로서 일본 어린이를 위한 학교와 상점, 여관 등이 길을 따라 밀집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인촌과 학교는 일본인촌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다우에 가족이 살았던 목조 가옥은 형체만 겨우 남아 세월의 흐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복 후 우체국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전력에 비하면 참 초라한 모습입니다. 지붕이 내려앉았고, 집을 이루던 기와며 흙과 나무가 모두 지난 세월처럼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좁은 복도를 중앙에 두고 양쪽으로 방이 놓여있고 안쪽에 큰 규모의 부엌이 있습니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널찍한 방이 나옵니다. 동쪽과 남쪽을 향한 창이 많아 바깥의 바람과 햇살이 그대로 들어옵니다. 좀 일찍 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와중에 튼튼하게 남아있는 지붕지지 장치.


          다우에 가옥의 측면 2층. 창문 안은 작은 방이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계단을 올라 2층 방을 구경합니다. 마을 아이들의 낙서가 가득합니다.


일본인들이 묵었던 여관 건물도 그 모습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여관은 광복 후 양조장 주인의 살림집으로 바뀌어 따뜻한 보금자리로 오랫동안 구실을 다해왔고 양조장으로 쓰였던 외부 건물은 농사도구를 쟁여두는 창고로 바뀌었습니다. 사람의 온기가 집을 살린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이 머물던 옛 여관은 마을 사람들의 살림집이 되었습니다. 살림살이에 맞게 많이 개조했지만 어렴풋이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화호 농장의 병원으로 사용되었던 일본식 목조가옥. 역시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지요.


                                  위 가옥의 옛 모습입니다. 의사들이 환자를 돌보던 농장 부설 병원이었지요.


화호 마을에는 옛 가옥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마을 주민들의 살림집으로 바뀌면서 보통의 농촌가옥인지 옛 건물인지 구분이 모호하게 보입니다. 소개해드린 건물 외에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농촌가옥도 있고 화호 농장의 진료소로 사용했던 일본식 가옥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요한 소읍의 건물들은 그저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지금껏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담으며 남아있습니다. 이런 건물들을 일제강점기의 분노 혹은 치욕이라는 이름으로 단죄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마을 사람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맡기는 그저 착한 집들이며 세월의 흐름에 조용히 숨을 거둘 시간을 기다리는 순응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르고 풍요로운 평야의 움트는 생명력에 비하면 인간이 지은 건물이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요.

 
* 자료사진은 <20세기 화호리의 경관과 기억>에서 재촬영한 것입니다.

 

more infromation>>---------------------------------------------------------------

구마모토 화호 농장 미곡 창고

- 주소가 나와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화호리 마을 초입에 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다우에 농장 사무실 겸 살림집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화호리 335번지

화호 농장 진료소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화호리 766-9번지

소화여관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화호리 454-1번지

더 읽어볼 책----











20세기 화호리의 경관과 기억
(20세기 민중생활사 연구단/ 눈빛)

화호리 마을 역사를 주민들의 구술을 통해 살펴본 자료입니다. 꼼꼼한 사진자료와 주민들이 갖고 있던 옛 자료를 보는 재미도 있지요. 이런 책이 많이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다카사키 소지/ 역사비평사)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조선을 찾아왔을까요? 그들은 이땅을 어떻게 생각했고 이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그게 궁금해서 찾아보니 이런 책이 있더군요.











식민지 조선과 일본, 일본인 (이규수/ 다할미디어)

위 책의 역자가 호남지역의 주요 일본인들 및 사건을 추려서 정리한 책입니다. 구마모토 리헤이에 대한 내용은 단 한줄 뿐이더군요.구마모토 외에도 더 무시무시한 농장주들이 많았다는 뜻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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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6년 고흐가 파리로 나왔을 무렵, 파리는 온통 일본문화(Japonism)에 열광하던 시기이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일본문화를 접한 유럽인들에게는 경이의 그것이었다. 전에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과 입체적인 화법을 무시한 평면적인 회화, 단순한 면과 밝고 맑고 그러면서도 화려한 채색 등은 1870년대 파리의 문화계와 사교계를 강타했다.

 하지만 일본 미술의 영향과 일본적 취향 그리고 일본풍을 즐기고 선호하는 화가들은 이미 한 둘이 아니었다. 마네, 모네, 로트렉, 보나르(Pierre Bonnard, 1867~ 1947)등의 화가뿐만 아니라 귀족과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포니즘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일본열풍을 뒤늦게 접한 고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문화의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감각은 정신적 환희를 느낄 만큼 즐겁고 기쁜 것이었다.

 특히 당시 인상주의자들이 발전시켰던 과학적인 색채론을 공부하고 있었던 고흐는 동생 테오 덕에 알게 된 화방 주인 탕기 아저씨에게서 건네받은 일본 목판화의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었다. 고향 네덜란드의 준데르트(Zundert)나 런던과 헤이그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그림이었다. 캔버스나 서양의 두툼한 화지(Carton)와는 다른 얇은 일본종이(和紙)에 인쇄된 다색목판화인 우키요에의 대담한 구도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는 어둡고 칙칙한 사실주의 풍의 그림을 그리고 있던 고흐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고흐의 그림은 밝고 격정적인 색채로, 필촉은 더욱더 감각적으로 움직였고 전체적인 느낌은 경쾌해졌다.


 그 중에서도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 1797~1858)의 <가메이도의 매화가 있는 찻집(龜戶梅屋鋪)>은 고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고목이 된 매화나무가지에 봄바람이 불어오자 성기게 매화가 피어난 그 사이로 사람들이 봄나들이를 나와 매화 향에 취해 있는 모습이다.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파리에서도 기후 때문에 볼 수 없는 이런 풍경은 그를 매료시켰고 그래서 그는 이 우키요에를 당장 그려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전 다른 종이에 가로 17줄 세로 27줄의 모눈종이를 만들어 그 안에 원화를 조금도 틀리지 않게 옮겨 그려본 다음 이를 다시 캔버스에 옮겼다. 그런데 캔버스의 비례와 원화의 비례가 맞지 않아 좌우측에 여백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좌우 여백을 주황으로 칠하고 그 위에 한자로 된, 뜻도 모르는, 심지어 틀린 글자지만 정성껏 써 넣은 것이 아니라 그려 넣었다. 이것이 <꽃 핀 자두나무>(The Flowering Plumtree, 1887, 유화, 73X54cm, 반 고흐미술관)이다.



 고흐의 우키요에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지나칠 정도였다. 그는 자신에게 유키요에의 남다른 아름다움과 신선함을 알려준 탕기아저씨의 초상화 3점 중 2점의 배경에는 우키요예로 가득 채웠다.

고흐가 그린 <탕기아저씨의 초상>(Le Pére Tanguy, 유화, 92×75㎝, 1887, 니아르코스 컬렉션, 로댕미술관, 파리)에는 밀짚모자를 쓴 탕기아저씨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그림의 배경은 후지산과 벚꽃나무와 일본 기녀의 모습 등 다양한 소재의 우키요에 4점이 배경의 중심을 이룬다.


여기에 그려진 우키요에는 당대 최대의 문중을 이끌었던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1797~1858)가 그린 <후지36경 사가미강,富士三十六景さがみ川>, <53차명소회석약사,五十三次名所会石薬師>,<삼포옥의 다카오, 三浦屋の高尾> 등 3점과 케이사이 에이센(渓斉英泉, 1790~1848)이 그린 <기녀,花魁>이다. 


 


이 초상화에는 고흐가 관심을 보인 비대칭의 테두리, 그림자나 원근법을 무시하고 양식화한 인물, 단색의 배경은 일본 판화의 특징과 일치한다. 그리고 배경의 노랑, 초록, 빨강과 탕기의 푸른색 재킷은 원색을 강하게 대비시키며 강한 화면의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고흐는 이 작품에서 자연 그대로의 색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원색을 대담하게 사용함으로서 대상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수단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속에 있는 색을 선호하는 표현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화려한 우키요에를 뒤로 하고 있는 탕기아저씨의 모습은 소박하고 선량한 인품과 사람 됨됨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 보다 조금 크기가 작은 다른 한 점의 <탕기아저씨 초상>(Portrait of Pere Tanguy, 1887~88, 유화, 65x51 cm. 개인소장, L.A. 미국)에도 거의 같은 우키요에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아마도 탕기아저씨네 화랑에서 판매를 위해 걸려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또 하나의 탕기아저씨는 <탕기아저씨의 초상>(Portrait of Père Tanguy, 유화, 47x38.5cm, 1886~87 겨울, 니 칼스베르크 미술관, 코펜하겐) 2점의 초상화와는 다른 형식인 정통적인 초상화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역시 이해심 많고 인정 있는 아저씨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리고 또 한 점의 드로잉이 있는데 이 초상의 배경에도 역시 <후지36경 사가미강>이 자리하고 있다. 



 테오와 함께 지내던 고흐는 탕기아저씨의 소개로 새로 문을 연 카페 탕부랭(Café du Tambourin)을 알 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네 번째 연인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 카페의 주인이자 화가 코로(Jean Baptiste Camille Corot, 1796~1875), 제롬(Jean-Léon Gérôme 1824~1904), 마네(Manet),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모델이기도 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세가토리(Agostina Segatori)이다. 독특하고 이국적인 옷차림과 미모를 지녔던 그녀는 단숨에 고흐의 넋을 뺏고 만다. 여기에 그녀 또한 고흐의 정물화를 갖고 싶다고 하며 관심을 보이자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887년 초 파리에 온 지 불과 1년 남짓 한 기간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1760~1849)의 책과 에도시대(江戸時代) 우키요에 최대문중이었던 우타가와파(歌川派)의 작품 등 우키요에를 수집했다. 그는 이 우키요에 소장품을 가지고 그녀의 카페 탕부랭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곳에서 전시되었던 우키요에들은 암스텔담의 국립고흐미술관에 소장된 430여점의 판화 중 대부분 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전시기간동안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초상화>(Agostina Segatori Sitting in the Café du Tambourin, 1887, 유화, 55.5x46.5cm)에도 우키요에를 배경으로 원탁에 앉아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후에도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꾸준히 나타나는 우키요에를 발견할 수 있는데 1888년 12월 23일 아를에서 화가공동체를 꿈꾸며 고갱과의 공동생활을 하다 끝내 자신의 귀를 자르는 자학적인 행동이후 그린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 유화, 60.5x50cm, 코털드 인스티튜드, 런던)에도 화면의 배경 오른 편에 후지산을 배경으로 기모노 입은 여인을 그린 우끼요에가 걸려있는 모습을 그렸다. 

                                              고 흐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1898

                                       고흐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의 세부. 뒷편에 우키요에 이미지가 보인다. 


 이렇게 고흐의 화가로서 인간으로서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탕기아저씨는 고흐가 세상을 떠난 4년 후 눈을 감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화방에는 오늘날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된 고흐는 물론 세잔, 베르나르, 고갱, 피사로 등등의 그림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탕기아저씨의 화방에서 발견된 세잔, 베르나르, 로트렉 등의 작품. 이들은 서양근대미술사를 다시 썼다.  

결국 그가 사랑하고 후원했던 화가들이 빈손으로 세상을 떠났듯 그 또한 그림을 가졌을 뿐 팔지 못하는 비록 상재 면에서는 부족했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눈이 밝은’화상이었다. 그가 남긴 그림들은 미르보의 소개로 그를 이어 인상파 화가들의 또 다른 후원자가 된 볼라르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근대미술의 여명을 여는 중요한 화상으로 등극한다.

사실 오늘날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하찮게 여기고 외면했던 시절 그들의 그림을 일찍이 밝은 눈과 애정으로 바라보고 이들을 지원하며 작품을 보관했던 탕기아저씨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점에서 탕기아저씨는 당시의 화가들에게도 ‘아저씨’ 노릇을 톡톡히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감동적인 그림들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아저씨’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는 셈이다.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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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아이패드를 샀다. 기본적으로 작고 가벼운 컴퓨터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 피씨에 없는 여러가지 기능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앱이다. 여러가지 앱 찾아보고 다운받는 재미가 쏠쏠한데, 그 중 꽤 유용한 것이 여행정보나 지도 관련 앱이다.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만 심각한 방향치인 필자에게는 꽤 도움이 된다.


아이패드나 각동 스마트폰 지도앱들의 특징은 실시간 인터랙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중 어떤 앱은 단순히 작동시키기만 해도 현재 위치를 자동적으로 알려준다. 세상 참 좋아졌다는 할머니 같은 소리가 나올법한 기능들이다.


GPS 기능이 있는 이런 지도를 쓰면서 필자는 종종 이것은 우리 시대의 독특한 풍경화라는 생각을 한다. 18세기의 네덜란드 풍경화와 19세기 영국 풍경화가 그 시대 문화의 하나의 아이콘이었듯이, GPS적 풍경화는 현대의 아이콘인 것이다.


그런데 GPS 적 풍경화는 전통적인 풍경화와는 전혀 다른 것을 보여준다.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풍경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풍경의 일부이다.


풍경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가 풍경의 일부인 이런 상황은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전통적인 것과 구별되는 현대 특유의 것이라고 말한 지각방식과 통한다.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에서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시가 군중을 묘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그의 시는 대도시의 군중에 대한 것이라고 썼다. 보들레르 자신이 이미 대도시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군중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들레르가 살았던 19세기 중엽의 파리는 현대 도시문화가 자리잡아가는 곳이었다. 유리와 철골로 만든 아케이드 상점가, 그곳을 어슬렁거리는 산책자들, 거리에 물결치는 광고간판, 신호등과 자동차의 불빛들은 벤야민의 표현대로 인간의 지각방식을 '충격'으로 재구성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충격으로서의 지각은 시각적이기보다는 촉각적이다.
그것은 어떤 고정점에 머물면서 대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면서 대상의 내부를 '스캔하는' 지각방식이다.


벤야민은 20세기 초에 활동한 이론가이지만 그의 글은 예언적인 것이어서 21세기인 오늘날 오히려 더 잘 이해되는 면이 있다. 동시대의 미술작품 속에서 종종 이와 관련된 관점을 읽어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성수의 <메탈리카> 시리즈도 그 중 하나다. 화려한 형광색 선과 빛의추상화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한편으로는 추상화가 아니다. 자세히 보면 대각선으로 뻗은 선들이 한 곳으로 수렴되면서 삼차원의 깊이가 있는 공간의 느낌이 만들어진다.





환각적인 공간감은 철골과 유리로 된 도시의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보여준다. 아니 보여준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볼거리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화면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선들이 수렴되는 가상의 소실점이 그 맞은편에 있을 우리 자신의 위치를 알려줄 뿐이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빛의 궤적들은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선 같은 역할을 한다.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시에 대해 말한 것처럼, 여기서 우리는 풍경 '속에'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작가 김성수는 루브르 미술관의 유리 파사드가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도시의 화려함이 유럽보다 더 번쩍거리게 된 것을 것을 목격한 이후 이 모티브는 연작으로 발전했다. 그의 <메탈리카> 시리즈는 도시 안에서 볼 수 있는 무엇에 대한 작품이라기보다는 도시 안에서의 뱡향찾기 혹은 방향상실에 대해 말해주는 작품이다.


김성수의 작품이 보여주듯이, 현대 도시의 풍경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네온사인이나 서치라이트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빛 그 자체를 이용해서 실제 삼차원의 공간 속에 구현되는 작품을 하나 감상해보자. 멕시코 출신 작가 라파엘-로자노 해머(Rafael-Lozano Hemmer)의 <vertical elevation>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2000년 멕시코시티의 조칼로 광장을 시작으로 더블린 등 다른 몇 도시에서 실현되었다.





여기에도 전통적인 의미의 '볼거리'는 없다. 단지 밤하늘을 수놓으며 여러 각도로 교차하면서 변화하는 수십개의 서치라이트 불빛들이 있을 뿐이다. 이 불빛을 디자인한 것은 작가 자신이 아니라 작가가 개설한 웹사이트를 방문한 수많은 일반인들이다. 방문자들이 웹사이트에 서치라이트의 각도와 시간 등을 입력하면 그 결과가 실제로 반영되는 것이다.


일반인이 웹사이트를 통해 작품에 참여한다는 컨셉 자체는 흔한 것이지만, 그것을 '광장'에서 구현되는 일종의 공공미술로 만들었다는 점이 이 작품의 포인트이다. 밤하늘을 캔버스 삼아 실제의 공간이 하나의 풍경가 된다. 이 풍경화는 서치라이트 불빛이 가로지르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만들어지는 것인 동시에 웹사이트를 통한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풍경화 역시 우리 앞에 놓인 이미지는 아니다.


독일 작가 디륵 플리이쉬만(Dirk Fleischmann)의 <My Empire> 역시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공간을 풍경화로 변형시키는 작품이다. 관객이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갤러리의 한 벽면을 꽉 채우며 거의 실제 크기로 투사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다.



얼핏 사진이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이 풍경은 사실 한 건물 옥상에 작가가 설치한 웹캠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이는 실제 독일의 도시풍경(프랑크푸르트)이다. 거의 움직임이 없는 듯 하지만, 그 앞에 오래 서 있으면 바람소리도 들리고 구름이 흘러가는 것도 보인다.


관객은 허구의 이미지가 아닌 실제 공간을 앞에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곳은 웹캠이라는 장비를 통해 가상의 공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곳이다. 인터넷이 없었더라면 수만 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진 곳의 풍경을 실시간으로 볼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이 점이 이 작품의 공간을 기묘한 것으로 만든다.


이 작품은 필자가 2005-6년에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기획한 한 전시에 소개되었다. 한국과 독일 사이의 8시간의 시차 때문에, 오전에 전시장을 찾은 관객은 밤의 도시를 보게 된다. 오후에 전시장을 찾은 관객은 일출과 아침노을을 목격하게 된다. 겨울이었기 때문에, 눈 내리는 것을 볼 수도 있었다. 아마도 프랑크푸르트에 살고있는 사람이 깨닫기도 전에 그 도시에 눈이 내리는 것을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작가가 '나의 제국' 이라고 일컬은 것은 지금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실제하는 곳이지만 또 어디에도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 작품 속에서 전통적인 '이미지로서의 풍경'은 사라디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전체와 바꿔치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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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군산해관. 군산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입니다.

 

 
1920년대의 군산 내항과 그 주변 풍경. 빼곡히 들어찬 가옥과 건물들이 지금보다 더 활기차보입니다



근대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후 우리나라 곳곳의 크고 작은 도시들
, 소읍을 찾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한번도 발걸음 하지 않았던 도시들도 찾아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 도시만의 독특한 풍경을 발견하고 감탄한 적도 많았습니다. 군산도 그런 곳이었습니다.

 

군산은 볼거리가 참 많은 곳입니다. 사대천왕이 있다 할 정도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맛있는 짬뽕집이 많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 있다고도 합니다. 설경이 지나치게 아름다운 거대한 호수도 있고요. 그리고 구도심의 오래된 가옥들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입니다. 소위 일제시대의 가옥들이 즐비한 신흥동, 월명동의 거리는 말 그대로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분위기를 풍기죠. 목조가옥, 독특한 지붕과 창문, 한옥도 양옥도 아닌 건물이 주는 독특한 느낌들. 아스라한 옛 풍경처럼 향수 어린 느낌과 알 수 없는 이질감이 한데 섞여 여행 온 자들의 마음에 야릇한 바람을 불어넣는 그런 곳입니다.


짬뽕도 유명하지만 일해옥 콩나물 국밥도 군산별미라지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단팥빵, 야채빵이 끝내줍니다.


작정하고 군산을 방문한 것은 2009년 1월 1 아침이었습니다. 그날도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도시는 외지인에게 무심한 찬바람을 뿜고 있었습니다. 도시는 고요했고 우리는 그 고요함을 뚫고 옛 항구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갈 것도 없이 도로를 따라 쭉 들어오다 보면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이곳이 그곳이구나. 그 때 찬 눈발 사이에 반듯하게 서있는 붉은 벽돌 건물들이 얼마나 무심하게 반짝이던지.

옛 군산해관은 흰 눈 속에서 진홍빛 존재감을 드러내며 기묘한 아름다움을 풍겼고 허물어질 듯 서있는 옛 조선은행은 그 규모만으로도 어찌나 육중한 지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죠
. 드문드문 서 있는 오래된 건물 뒤로는 바닷물이 미동도 없이 스며들었습니다. 파도도 없이 고요한 바다는 마치 호수 같았지요. 이곳을 내항이라고 부릅니다. 항구의 기능은 모두 신항만에 내어준 채 오래된 건물들과 함께 고요히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듯했어요.


2011 1 1에도 우리 부부는 군산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해맞이 지역과 리조트를 피해 한적한 곳을 찾다 보니 또 군산입니다. 며칠간 내린 눈이 얼음이 되어버린 군산을 거닐었습니다.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어느새 눅눅해진 운동화를 끌고서 군산의 내항을 자박자박 걸어보았습니다. "이런 날 누가 군산 내항에 구경을 오겠어?" 라고 자문하면서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카메라 들고 내항을 기웃거리는 청년들이 몇몇 보이더군요. 대단들하십니다.

 


군산 내항 부잔교. 모두 네 개가 설치되었는데, 지금은 세 개만 남아있습니다.

멀리 조선은행이 보이네요.


군산은 개화기 일본인들이 이주해오면서 발전한 도시입니다. 일본은 넓은 평야와 인접한 군산을 개항하도록 계속 요구했고 바야흐로 1899년에 군산항이 외국인에게 문을 열었습니다. 군산은 외국인이 눈치 보지 않고 자리잡고 먹고 살 수 있는 조계지가 형성되었고 행정기관들이 등장하여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갔지요. 군산 구도심의 격자형 구조가 이 시기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이곳에 본정통, 전주통, 대화정, 욱정, 명치정 등의 이름을 붙였지요.

1911년 각국조계지도. 옛날 지도 보자니 난감하지요? 격자형으로 구획된 것만 확인하고 넘어갑시다.


1905년부터 1925년까지는 바닷가에 항구를 만드는 공사가 시작되었고, 철도와 도로가 건설되면서 군산 시가지가 점차 정돈되고 확장되었지요.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항만공사는 계속 확장되었고 부잔교(뜬다리 부두)가 지어지면서 거대한 항구로 변모해갑니다. 군산은 썰물 때에도 2천 톤급 기선 3척이 댈 수 있는 항만시설이 완료되었고 25만개의 쌀가마니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세워졌습니다. 철도선도 늘어나 하루 150량의 화차가 군산을 드나들게 되었지요.



1920년대의 본정통. 소실점 근처 왼편에 뾰족한 지붕 보이는 건물이 조선은행이야요.



1923년 군산지도. 철도와 도로가 확장되었다는 것만 알면 되겠죠?



1936년에 군산은 부산 다음으로 일본에 쌀을 많이 실어 보내는 제2의 미곡수출항이 되었습니다. 군산항에서 출항하는 쌀가마니의 양은 전국 수출량의 25%나 되었다고 합니다. 전북의 드넓은 평원에서 수확한 누런 곡식들이 이곳에 군산항에 모여들었지요. 항구의 넓은 터에 쌀가마니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산처럼 쌓인 쌀가마니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구경해보려면 군산해관에 가보면 됩니다. 군산항을 드나들던 배는 무조건 거쳐야 하는 군산해관(해관은 세관의 옛 이름입니다.). '호남세관자료관'이라는 이름을 조촐하게 내걸고 손님맞이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군산항의 모습을 자료사진으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참 예쁜 벽돌건물이죠? 옛 군산해관입니다.


군산해관은
1908년에 지어졌습니다. '꽃처럼 빨간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만든' 이 건물은 뾰족한 지붕이 무척 이국적입니다. 러시아 미녀처럼 고전적이고 날카로운 매력이 있는 이 건물은 지금도 예쁘게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군산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이지요.

옛날에는 왼편에 있는 현관으로 들어왔겠지만 지금은 뒷문으로 출입합니다.


층고가 높은 중앙홀. 햇살이 차분하게 들어옵니다.


볕이 잘 들어오는 현관 홀 안쪽에 층고가 높은 실내 홀이 펼쳐집니다. 양쪽으로 복도가 이어지고 복도는 방으로 연결되지요. 실내 홀은 항구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대기하면서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던 곳이겠지요. 지금은 자료사진들이 쭉 전시되어 있을 뿐 앉을 만한 좌석은 없습니다. 옛 군산항 풍경이 이랬구나, 진짜 쌀가마니가 쌓였었구나. 싶습니다. 어리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쌀가마니를 바라보는 사진도 있습니다.


 

군산 내항의 축항공사 모습


군함이 정박할 정도로 큰 항구가 되었지요.



쌀가마니가 쌓여있는 창고. 쌀가마니가 조그만 주먹밥처럼 보이네요.


그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알기가 어렵습니다. 쌀이 가마니째 실려나가는 것을 수십 년간 보아온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항구는 시끌벅적했을 겁니다. 뿌우, 뿌우, 큰 배가 내뿜는 우렁찬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면 짐을 실어 나르는 일꾼들이 발걸음이 다급해졌겠지요. 농장주들은 쌀과 돈을 맞바꾸며 흐뭇하게 미소를 흘렸을 테지요. 그리고 그들은 은행에서 돈놀이를 하거나 미두취인소에 들러 잠시 노름을 즐겼을 테지요.


그들의 돈주머니를 챙겨주었던 은행들이며 무늬만 선물거래소지 노름터나 다름 없었던 미두취인소도 내항과 바짝 붙어있습니다. 조금 건너에 조선은행이 보입니다
.
복원공사를 하느라 온통 비계로 가려놓았군요. 건물의 규모가 거대합니다. 마치 노쇠한 장군을 보는 것처럼 허허로운 느낌이 듭니다. 한때 위용이 대단했던 조선은행은 100여 년의 시간을 건너오면서 뱃속을 모두 털어내고 허허롭게 서있습니다. 어떻게 복원할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원래는 단층건물이었다죠. 층고가 높고 단단하며 위용이 대단한 건물입니다.


한창 잘나가던 시기의 조선은행. 출입구가 독특합니다.
앞에 서있는 사람과 비교하면 건물 높이를 대략 짐작할 수 있지요.


1920년대말의 군산내항 풍경. 조선은행이 떡하니 있지요.


이 건물을 수리하면서 상량문 현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1920 12월경에 공사를 시작하며 당시 은행의 지점장은 니시야마 기쿠헤이, 시공자는 시미즈 구미, 공사감독은 미우라 기치, 설계자는 나카무라 요시헤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나카무라는 조선은행 본점(현 한국은행 본점-서울)과 부산지점을 설계했던 인물이지요. 한국전쟁 후 한국상공은행(한일은행)에서 인수하여 은행으로 사용하다가 1981년에 개인 소유로 바뀌어 예식장, 나이트클럽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1990년에 화재가 난 후 보수하지 않고 그대로 20여 년을 방치되어 있었던 뼈아픈 기억도 있지요. 2008년에 군산시가 매입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했습니다.

나이트클럽의 이름이 플레이보이였던 것인가요
? 창문에는 못다 지운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원래 단층 건물이었다가 예식장이 되면서 1,2층으로 나뉘고 계단도 생겨났던 것이지요. 조선은행 중 경성을 제외하고 가장 규모가 큰 곳이 바로 이곳이었답니다.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의 옛 모습.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었던 일본제18은행은 건물만 남아있을 뿐, 내부는 벽장 몰딩 외에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속건물이 옛날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빈집은 비바람, 눈바람에 시달린 듯 점점 폐허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번 방문에는 살짝 열린 대문으로 슬쩍 들어가보았습니다. 두 개의 건물은 사무실 겸 주택과 창고로 사용되었습니다. 창고에는 커다란 금고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고 사무실 내부는 뭐가 뭔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황폐합니다.

외관은 손본 흔적이 역력하죠.

 

내부 몰딩장식.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 등이 남아있습니다만, 원형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은행 건물 뒤에 부속건물이 좀더 일본식 가옥 느낌이 들죠.


내부는 폐허더미가 되었습니다. 창고 건물 벽을 보는데 이렇게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떠군요.
벽돌 위에 덧바르고 덧입힌 것들.


내항의 동 이름은 장미동입니다. 꽃처럼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라, 쌀을 쌓아둔다는 의미랍니다. 장미동 군산내항에서 느낀 오롯한 무상감은 김제, 정읍의 널따란 평야를 보면서 점점 비장해졌습니다. 다음 번에는 보수공사를 끝내고 개방한 히로쓰 저택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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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군산해관

전북 군산시 장미동 49-38번지
전북기념물 제 87호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전북 군산시 장미동 23-1, 12 번지
등록문화재 제374호
 

옛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

전북 군산시 장미동 32번지
등록문화재 제372호 

 

 

좀더 읽어볼 책
 

채만식 / 탁류

단편적으로 흩어진 역사의 장면장면과 도저히 이어 붙이기 힘든 감성적 부분을 결합하는 것은 문학의 역할이 아닐런지요. 그래서 역사를 담고 있는 문학 작품에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채만식의 <탁류>는 1930년대의 군산을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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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상파와 후기인상파를 알아 본 최초의 화상 ‘탕기 아저씨’ 줄리앙 탕기(TANGUY Julien, 1825~1894)와 고흐의 만남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화랑이 본격적으로 오늘날의 시스템을 갖춘 것은 이미 18세기 중반의 일이지만 여전히 이 시스템에 적용되는 그림들은 귀족들의 호사취미에 봉사하거나 장식적인 그림에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화풍의 그림, 특히 오늘날에는 고전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실험적인 미술이나 그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자신의 창작의 자유와 소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자초한 어려운 길을 감내해야만 했다.


 특히 이 시기, 즉 산업사회로 이동하고 쁘띠 부르주아(Petit Bourgeois) 계급들이 등장하던 시절의 화가들에게 그림시장이란 그림의 떡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미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특히 불우한 화가들이 많았던 시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보편적으로 인류의 삶의 질이 한 단계 격상하던 이 시기와 일치한다. 이는 아마도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경제적인 부였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취미나 기호보다는 오직 일에 올 인하던 시절,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이솝 우화 속 ‘베짱이’취급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하게 즐기기 위해 노래했던 베짱이가 아니라 ‘생각하는 손’을 통해 인류의 또 다른 가치를 찾고 이를 실천했던 이들이다. 그래서 젊었을 적 어려운 가운데도 열정하나만으로 버티며 그림을 그리다 세상을 떠난 화가들의 가슴 짠한 이야기들의 이면에는 항상 두 어 명의 천사 같은 사람들이 존재해서 우리들의 심사를 흩뜨려놓기 일수이다.

우리들에게 늘 마음 저리도록 처절한 삶을 살았고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최대의 영광을 누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화가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있다. 그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 시절에 인상파에 적을 두거나 적어도 후기인상주의화가라고 지칭되던 화가들 중 대부분은 세상이 아직 그들을 ‘베짱이’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들의 새로운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 때문에 어렵고 힘든 생활을 감내해야했다. 물론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이나 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 1901) 처럼 원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화가들 몇몇을 빼고는 말이다. 하지만 이들도 당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의 길을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또는 무절제한 생활 때문에 늘 곤궁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간신히 끼니를 때우고, 카페에서 한 잔의 차를 마실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도구 즉 물감이나 캔버스 그리고 붓 같은 재료를 살 처지가 못 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이때마다 이런 가난한 화가들에게 물감 등 재료를 외상으로 주고, 때로는 돈도 빌려주면서 생활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탕기 아저씨’(Pere Tanguy)로 불리는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Julien Francois Tanguy, 1825∼1894)이다.

                                         고흐 <탕기 아저씨의 초상> (드로잉, 1887)


 1867년에 몽마르트르(Montmartre)의 클로젤(Clauzel)거리에 물감가게 즉 화방 문을 연 탕기아저씨는 당시 몽마르트르에 몰려 살았던 많은 화가들과 교류했고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를 자처했던 많은 당시의 화가들이 그를 ‘탕기아저씨’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매우 좋아했다.

  그는 때로는 화가 친구들을 위해 화구들을 챙겨가지고 파리에서 무려 70Km나 떨어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가 살았던 ‘만종’의 고향 바르비종(Barbison)이나 근처 모레 쉬르 르왕(Moret sur loing),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 등 인상주의 화가들이 몰려 살면서 그림을 그렸던 아르장퇴유(Argenteuil) 때로는 인상파의 장로라 불리는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가 있던 퐁투와즈(Pontoise)까지 돌아다니며 화구를 방문 판매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당시의 화가들과 교우의 폭을 넓혔다.



                 <탕기 아저씨가 화구를 팔러다니던 지역을 지방으로 그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

               
                                             마네, <아르장퇴유 자기 집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1883 

                                                           바르비종에 자리한 밀레의 아틀리에

 

                  
                                                         시슬리, <아르장퇴유의 다리>, 1872                    

                              피사로, <퐁투와즈의 얄라이스 언덕>, 1867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이렇게 화가들을 격의 없이 대하며 외상으로 화구를 공급해주거나 때로는 그림을 받고 물감을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화가들에게 팔리지도 않는 그림에 기꺼이 선불을 치르기도 했다. 사실 그 당시에 어느 누구도 그 화가들의 그림이 후대에 어마어마한 가치의 작품으로 평가받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할 적에 말이다.


 이렇게 한 3년을 지내다 보니 그의 화방 뒤 창고는 언제부터 인가 그림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래서 1870년 그는 드디어 창고에 남아있는 그림들을 정기적으로 팔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고흐의 그림을 비롯해서 모네, 시슬레, 세잔느,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1903)같은 화가들의 그림 중 하나도 팔지 못했다. 그러나 살롱전에 대해 꾸준히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낙담하지 않고 꾸준하게 신선한 화풍의 이들을 도왔다.


 이렇게 그는 화상이라기보다는 화가들을 도와주고자 한 마음씨 좋은 정말 ‘아저씨’같은 사람이었다. 인상주의를 세상에 알린 성공한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1868~1939)가 1895년 세잔느의 생전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어 줄 수 있었던 것도 ‘탕기 아저씨’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파리에서 세잔느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곳은 탕기아저씨네 화방 쇼 윈도우가 유일했다.


 탕기는 1877년부터 1893년까지 근 15년 동안 틈틈이 세잔의 그림을 자신의 화방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세잔을 처음 본 볼라르가 전격적으로 세잔의 전시를 열어주게 된 것은 1895년의 일이고 보면 그는 비록 그림을 잘 팔지는 못했지만 잘 팔 수 있는 화상과 연결시켜주는 남다른 안목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도 항상 겸손한 자세로 화가들을 대했고 그들의 조형적 태도와 미학에 동의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변 화가들의 노력을 지지했고 그들이 비록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하더라도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술비평가로 소설가, 극작가로 활동하면서 풍자잡지『그리마스』(Les grimaces)를 창간했던 옥타브 미르보 (Octave-Henri-Marie Mirbeau,1850~1917)에 의하면 탕기아저씨의 가게에는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세잔, 고흐, 고갱, 베르나르(Emile Bernard,1868 ~ 1941)의 그림들이 소장가를 찾기 위해 걸려있었다고 전한다.


 사회주의자로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인 파리코뮌에도 참가한 바 있는 탕기아저씨는 화가들을 자신의 이상향을 지키는 영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꺼이 화가들을 도왔고 이런 과정에서 모인 그림들을 팔기위해 화랑 진열장을 오늘날의 윈도우 갤러리로 사용했고 화랑 모퉁이 방을 화랑으로 운영했다.


 특히 탕기아저씨의 고흐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대단했는데 그는 파리를 떠나기 전까지 3점의 탕기초상화를 그릴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고흐 <탕기 아저씨의 초상> (유화, 47*38.5cm, 1886-7)


                              고흐 <탕기 아저씨의 초상화> 1887@로댕미술관.
               (초상화 뒤로 당시 파리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유행이었던 일본의 판화 우키요에 이미지가보인다)


고흐가 빈센트가 탕기아저씨를 만나게 된 것은 동생 테오(Theo van Gogh, 1857~1891)를 통해서 였다. 이후 탕기는 이내 고흐에게 관심을 보였고 종종 점심식사에 초대하는 등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고흐가 세상을 떠나는 그날 까지 그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첫 만남 이후 반 고흐는 탕기아저씨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왕성하게 그림을 그리던 시기는 물론 1889년 1월, 정신 질환에 시달리던 고흐가 아를(Arles)을 떠나 1889년 5월 8일, 생 레미(Saint Rémy)에 있는 생 폴 드 무솔요양원(The mental hospital of Saint Paul de Mausole)에 입원 중 일 때도 탕기아저씨는 고흐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를 돕고자 노력했다. 고흐도 이에 화답이나 하듯 병원에 있던 53주 동안 143점의 유화와 100점의 드로잉, 그리고 수많은 스케치를 그렸다. 이때 그린 고흐의 그림을 자신의 화방 모퉁이 작은 화랑공간에 전시를 하기도 했다. 이즈음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냈던 편지에 의하면 당시 고흐가 얼마나 탕기아저씨에게 의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어제 탕기 아저씨를 만났어. 그는 내가 막 완성한 그림을 가게 진열장에 걸었어. 네가 떠난 후, 그림 네 점을 완성했고 지금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야. 이 길고 큰 그림들을 팔기는 어렵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나중에는 사람들도 그 안에서 야외의 신선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야.”

 약 1년 동안 병세가 호전되는 듯 했던 고흐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자 고흐는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테오는 한 걸음에 달려와 피사로가 소개해 준 오베르 쉬 즈와르(Auvers sur Oise)의 가쉐(Paul Ferdinand Gachet, 1828~1909) 박사를 주치의로 정하고 오늘 날 고흐의 마을로 알려진 이곳으로 옮겨와 라보(Arthur Gustave Ravoux)의 여관에 숙소를 정한다. 1890년 5월 20일의 일이다. 이후 심신이 피로하고 허약했지만 고흐는 이곳에서 머무르던 70일 동안 80점의 유화와 64점의 드로잉을 제작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슴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심장에 총알이 박힌 채 숙소인 라부(Ravoux)의 집으로 내려온 그는 자살을 시도한지 이틀이 지난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천재예술가였으며 평생을 고독한 영혼으로 살아온 그가 쓸쓸한 방랑객으로 눈을 감았다.


                                             오베르 쉬르와즈에 있는 빈센트 고흐(왼쪽)와 동생 테오의 무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한 것도 탕기아저씨다. 그가 눈을 감은 다음날 급히 파리에서 내려온 탕기와 동생 테오, 베르나르 그리고 가쉐 박사가 오베르의 공동묘지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다음해 그의 동생 테오도 형의 옆에 눕고 만다.

 단 한번, 알베르 오리에(Albert Aurier, 1865~1892)가 쓴 비평문이 유일할 정도로 화가로서 불우하고 외로웠던 고흐지만 그에게 있어서 탕기아저씨는 천군만마보다 더 큰 힘이 되어 주었으며 그의 가게에서 처음 본 우키요에(浮世繪)를 통해 새로운 회화로 한 발 더 성큼 다가섰던 그는 3점의 탕기아저씨 초상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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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로코코시대의 두 거장, 화가 와토와 화상 제르생

글/정준모(국민대 초빙교수, 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Rigaud Hyacinthe <Portrait of of Louis XIV of France, 루이 14세의 초상> 1701년 


절대왕정을 완성시킨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완성시킴으로서 프랑스의 영광을 실현시킨 그 시기부터 섭정시대까지 활동했던 와토는 이런 시대적인 상황과 그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지방에 있던 유럽미술의 중심축을 프랑스로 옮겨왔다.

특히 루이 14세가 1715년 사망하자 프랑스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무려 72년이라는 재임기간 동안 소모적 전쟁과 사치로 엄청난 국가 부채에다 과다한 세금으로 허덕이던 프랑스는 어린 루이 15세를 대신해 오를레앙의 필립 공작(Philippe d‘Orl?ans, 1674~1723)이 통치하는 ‘레장스’(R?gence; 섭정)를 맞게 되었다.



                     루이15세를 대신해  섭정을 했던 오를레앙 필립공.


당시의 문인이자 계몽 사상가였던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섭정시기 8년(1715~1723)을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프랑스인 본연의 민족성을 되찾은 시기”였다고 말 할 만큼 획기적인 시기였다. 

                     
                                            Houdon의  볼테르 좌상



감시와 통제를 위해 루이 14세에 의해 강제이주 하다시피 했던 귀족들은 감옥처럼 지긋지긋한 했던 베르사이유를 떠나 파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리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새로 집을 짓거나 저택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집안을 화려하고 섬세하게 하지만 때로는 조악할 만큼 장식을 과도하게 했는데 이 시기 이런 양식을 로코코(Rococo)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 화려하고 장식적인 화풍으로 로코코(Rococo)시대를 대표했던 장 앙투안 와토 (Watteau, Jean-Antoine, 1684~1721)는 이미 당대에 명성과 부를 이룬 화가였다. 단지 후세사람들이나 당사자 모두에게 아쉬운 것은 그가 불과 37살이 되던 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데 있다. 
그의 화풍은 로코코 회화의 창시자이자 대가답게 경쾌하고 뛰어난 붓놀림으로 마치 속사를 하듯 그림을 그려냈으며 당시 풍속이나 패션, 연극, 소풍장면 등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여 오늘날 사회사나 복식사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화려하고 온화한 자신만의 색채와 분위기를 완성시켜 독특한 자신의 화풍을 구사했는데 그의 동료들이었던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이 ‘사랑의 향연’이라고 부를 만큼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당시 귀족들의 전원 속의 삶을 그렸다.


그의 화풍은 당시 베르사유궁전을 중심으로 한 화려한 왕조문화의 궁전풍속을 비롯하여 주로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던, 밝고 우아하며 어딘지 모르게 관능적인 매력을 풍기는 풍속이나 취미에 적합한 화풍이었고 로코코회화 특유의 테마와 정서를 반영하는 그림이었다. 


자연을 충실하게 관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풍을 이은 다른 로코코화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풍요로움이 있었는데 이런 그의 화풍을 당대 사람들은 ‘아연(雅宴: 페트 갈랑트 fete galante)’이라고 규정했다. 프랑스 미술이 로코코 풍을 완성시키면서 이탈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전 유럽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그 중심에는 와토와 부셰(Francois Boucher, 1703~1770), 샤르댕(Jean-Baptiste-Sim?on Chardin, 1699~1779)  같은 이 들이 있다. 


그리고 새롭게 파리가 귀족들의 삶의 본거지가 되고, 집안을 새롭게 장식하고 꾸미는 동안 급격히 커진 프랑스 특히 파리의 미술시장은 플랑드르지방의 새로운 시스템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북 유럽 일부를 제외한 유럽에서는 여전히 그림을 사고팔기 보다는 주문 제작이 중심을 이루었고 이런 구조는 약 3~4백년이나 주목할 만한 변화 없이 지속되어 새로운 미술이 등장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고 따라서 화가들도 고객들의 눈높이에 봉사하는 미술로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의 뛰어난 상재는 미술시장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고 상업을 통해 급성장한 중산층들의 그림수요가 폭증하면서 미술시장도 급등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가들도 어느 정도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파리에서도 미술시장의 수요가 확대되면서 이런 선진적인 화랑시스템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의 화상과 같은 미술 중개인, 대리인, 그리고 갤러리는 시간상으로 고작 400여년에 불과한 1600년 경 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100여년이 지나 견고한 중앙집권제를 통해 절대왕정을 이룩한 1700년대이며, 루이 14세 이후의 프랑스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오늘날 대도시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강력한 갤러리 시스템을 완성했는데 그 중심에는 위치했던 인물 중 하나가 에듬 프랑소와 게르생(Edme-Fran?ois Gersaint, 1694~1750)이다. 


당시 게르생은 브루군디 지방에서 파리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상인집안 출신으로 주식과 무역을 통해 번 돈으로 처음에는 그림을 수집하기 위해 세느강의 쁘띠 퐁트(Petit Pont)변에 화가이자 화상이었던 안토니 듀오(Antoine Dieu, 1662~1727)가 1699년 설립해서 1714년까지 운영했던 화랑을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1718년 이 화랑을 인수해서 태양왕의 천사라는 뜻의 <오 그랑 모나르크> (Au Grand Monarque)라는 이름의 화랑을 시작했다.  

최근 미술사학자 기욤 글로리유(Guillaume Glorieux,1971~ )는 게르생의 1725년과 1750년의 창고물품목록을 발견했는데 여기에 의하면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이국적인 진귀한 물건, 열대바다에서 나오는 조개껍질, 일본의 칠기와 중국의 도자기, 차와 커피, 동양의 칠기와 도자기, 차, 커피 마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품을 다루었으며 그림과 함께 깨끗하고 멋진 액자와 거울 등 당시 파리가 문명의 중심이 되고자 필요했던 거의 모든 것을 거의 수십 년 동안 취급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우리는 초기 화랑의 형태가 어떠했던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당시 미술품을 다루는 상인 즉 화상들의 주요 임무는 자신들이 취급하는 화려하고 귀한 품목들로 귀족들의 저택 실내를 장식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귀족들의 저택 내부를 꾸미는데 필요한 가구와 집기 및 동양 도자기와 같은 이국적인 풍물이나 공예품을 컨설팅하고 판매하는 역할을 겸하고 있었는데 게르생 역시 초기에는 회화 작품에 주력하다가 점차 거래 품목을 온갖 종류의 값비싼 물품들과 희귀품목(nouvelles curiosit?s)으로 확대해나갔으며 당시 이런 상인들을 ‘마르샹-메시에’(marchand-mercier)라고 불렀다. 따라서 이들이 취급하는 미술품 특히 그림도 실내 장식의 한 기능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게르생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시대 그리고 섭정 시대와 루이 15세의 시대를 통해 발달한 로코코 양식이 지배했던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한 화상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호화롭고 화려했던 시대의 미술 시장과 호화사치품, 골동품 이국적인 풍물에 이르기까지 화랑에서 취급하는 품목을 넓히는데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에 그림을 팔기위해 작가와 주제, 크기, 제목, 매체 및 가격별로 분류하고 나열한 카탈로그를 만들어 그림을 팔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정도로 상재를 지닌 인물이었다. 


와토는 프랑스 파리로 나와 당시 오페라극장의 장식 화가였던 질로(Claude Gillot 1673.~ 1722)를 사사한 후 뤽상부르 궁전의 장식가인 오드랑(Claude Audran, 1657~1734)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특히 그는 초기에 희극배우들을 비롯한 인물을 주로 스케치했는데 오드랑과 함께 궁전에 들어가 바로크 회화의 거장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 1640)의 작품을 접하고 감화를 받는다. 


육체적으로 연약했던 와토는 일찍부터 폐병을 앓아 1720년 요양 차 런던에 갔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파리로 되돌아왔다. 그런 와중에 친구 제르생이 화상을 시작하면서 간판그림을 부탁했고, 그 부탁을 들어 제작한 것이 <제르생의 간판>(Gersaint’s Shopsign, 1721년, 유화, 163x308 cm,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소장, 베를린)이다. 그는 이 그림을 완성하고 몇 주 뒤 세상을 떠났으나, 18세기 전 유럽의 미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와토 <제르생의 간판>



이 작품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간판이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시기적으로 레장스 시기 초기 로코코 양식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와토의 정신과 양식에 대한 상징적인 요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모두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있다는 점에서 간판이라기보다는 와토의 대표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간판’에는 와토의 전형적인 특색인 가볍고 밝게 빛나는 양식 안에 매우 사실적이며 심지어 지루하기까지 한 주제를 통해 희비가 엇갈리는 아이러니를 전달하는 와토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역사와 예술의 시대적 변화에 대한 나름의 상징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회화적 규범 그리고 상류 부르주아계급까지 확대된 미술시장의 규모와 당시 유행했던 화풍이나 거래방법, 화랑들이 취급했던 물목 등을 그대로 보여주는 생생하고 약동적인 이미지 등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당시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초 프랑스의 미술가, 미술상인, 수집가에 관한 단상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림으로서 시대의 변화와 당시의 시대상을 담아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게 지키고 있다.


제르생의 화랑은 노르르담 다리 위에 위치한 입구는 좁고 안으로 들어 갈수록 깊어지는 구조를 지닌 수많은 상점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와토가 그린 이 작품에서, 게르셍의 화랑은 도로변에 접한 면이 문이나 벽도 없이 개방된 구조로 안쪽에는 화려한 살림집이 딸린 구조로 그려져 있다. 

벽에 가득 걸려 있는 그림들은 평소 와토가 존경했던 플랑드르 지방의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나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 그리고 이탈리아의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90경~1576)와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1588)과 같은 작품들이다. 이곳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인물의 됨됨이는 그림 속 그림이지만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와토의 기호와 취미 그리고 동시에 당시 프랑스 컬렉터들의 취향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게르생이 제 아무리 컬렉터로서 경험과 안목을 가지고 미술시장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화랑 문을 연 지 1~2년에 불과한 게르생에게 이런 인기 있는 바로크 풍을 대표하는 작품을 다루는 데는 역 부족이었을 수도 있다. 아마도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새로 화랑을 개업하는 친구 게르생의 화상으로서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사실 이 그림은 제르생의 화랑을 실제로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예술이 중심이 되었던  시대의 파리를 그리고 미술 시장의 중요한 동력이 되어주었던 아주 우아하고 높은 안목을 지녔던 고객과 성숙한 무역업자가 등장한다. 3미터가 넘는 대작인 이 작품은 크기 때문에 두 폭으로 나누어 그렸다. 하지만 이 작품이 간판으로 유효했던 것은 불과 몇 주에 불과했다. 어떤 손님이 간판을 사겠다고 나섰고 그래서 몇 주 후에 판매되고 말았다. 그 후 이 작품은 일부가 유실되었는데 캔버스를 다시 팽팽하게 매는 과정에서 몇 인치정도가 날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속에는 당시 화랑의 풍경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영국의 풍속화가 겸 풍자화가인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를 인도한 셈이다.
                                           William Hogarth <The Marriage Contract, 결혼 계약> 1743


사실 그림 속 인물에 대해서는 그 설이 분분하지만 그 중 하나를 빌어 그림을 살펴보면 왼쪽에는 점원이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 1659~1743)풍의 루이 14세 초상화 한 점을 나무 상자 안에 담는 중이다. 이것은 바로 루이의 시대가 갔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프랑스 역사의 전환점이자 미술에 대한 취향과 인식의 변화를 상징한다. 오른쪽으로는 자신들의 저택을 장식할 그림과 소품을 고르는 세련된 귀족, 혹은 부유한 시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또 그림의 상태를 살펴보려는 듯 무릎을 꿇고 있는 한 명은 서서 오페라 안경으로, 또 한사람 금발의 점원은 작품을 돋보기로 열심히 감정하고 있다. 이들이 보고있는 그림은 벌거벗은 님프가 목욕을 하고 있는 로코코시대의 전형적인 페트 갈랑트(우아한 연회)의 전형적인 예이다. 감정하는 점원의 대각선 즉 타원형 그림 뒤에 서서 그림을 설명하는 이는 제르생이다. 

<제르생의 간판> 세부1. 원형의 그림 앞에서 설명하는 이가 제르생이다.


그림의 뒤 배경에 걸려있는 그림들 중 하나는 사티로스가 갈대 숲 속에서 님프를 쫒아가는 관능적인 신화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속 그림들은 풍경, 신화, 그리고 누드의 여신상들로 18세기 초 프랑스 회화를 풍미하던 소재와 형식을 가벼운 터치와 창백한 색채로 모사하고 있다. 또 어둡고 근엄한 17세기 풍의 초상화나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회화를 연상시키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나 기도하는 수사 등을 그림 그림이 있지만 이 그림들은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 화랑 귀퉁이에 걸려있다. 


 화면의 중심에 서있는 사람은 와토로 추정되는데 그는 정중하게 분홍 비단옷을 입은 한 숙녀를 화랑 안으로 이끌고 있다. 그녀는 화랑 안으로 들어서다 그림을 포장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여기에 카운터에 기대어 게르생의 부인이 열심히 작은 소품을 보여주며 그림을 설명하지만 그것을 듣는 귀족들의 태도는 심드렁하다. 이 작품은 장르화의 하나지만 원근법을 살려 화면에 깊이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장르화 와는 다른 특징을 갖는다. 



이 그림에 의하면 압제와 공포의 루이 14세 시대는 가고 이제 귀족들이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온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런 분위기는 섭정을 맡았던 오를레앙 공작이 죽고 1723년 왕위에 오른 루이 15세 시대에 와서 맞게 되면서 로코코 양식은 전성기를 맞는다.  

이 시기 문화와 예술은 주로 살롱(Salon)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대개 부인들이 특정 한 날 자기 집에 문화예술계 명사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함께하며, 문학이나 도덕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과 작품 낭독 및 비평의 자리를 마련하는 풍습이 있었다. 

부쉐, <마담 드 퐁파두르> 1756


이 시기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드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1721~1764)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녀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궁정의 극장을 관리했고, 지식인들과 왕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으며 화가나 조각가와의 연계를 통해 18세기 문화와 예술 발전에 공헌했다. 

여기에 볼테르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지지하고 보수적인 가톨릭과 왕당파들이 금서로 규정한 백과전서를 출판할 수 있도록 도운 여걸이었다. 루이15세의 총애를 바탕으로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녀가 죽은 후 “20년에 걸친 우리 관계는 특별한 교제와 우정”이라고 술회할 만큼 역사적으로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로코코 회화의 완성과 절정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귀족들의 권위를 되찾아 주었다는 평가와 함께 여성들의 인권과 권리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시대가 바뀔 즈음엔 언제나 사회, 정치, 문화, 예술분야에서 나름의 역할을 할 사람들이 같이 호흡할 동지들이 있을 때 가능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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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군산해관. 군산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입니다.


 

1920년대의 군산 내항과 그 주변 풍경. 빼곡히 들어찬 가옥과 건물들이 지금보다 더 활기차보입니다.





근대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후 우리나라 곳곳의 크고 작은 도시들
, 소읍을 찾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한번도 발걸음 하지 않았던 도시들도 찾아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 도시만의 독특한 풍경을 발견하고 감탄한 적도 많았습니다. 군산도 그런 곳이었습니다.

 

군산은 볼거리가 참 많은 곳입니다. 사대천왕이 있다 할 정도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맛있는 짬뽕집이 많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 있다고도 합니다. 설경이 지나치게 아름다운 거대한 호수도 있고요. 그리고 구도심의 오래된 가옥들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입니다. 소위 일제시대의 가옥들이 즐비한 신흥동, 월명동의 거리는 말 그대로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분위기를 풍기죠. 목조가옥, 독특한 지붕과 창문, 한옥도 양옥도 아닌 건물이 주는 독특한 느낌들. 아스라한 옛 풍경처럼 향수 어린 느낌과 알 수 없는 이질감이 한데 섞여 여행 온 자들의 마음에 야릇한 바람을 불어넣는 그런 곳입니다.


짬뽕도 유명하지만 일해옥 콩나물 국밥도 군산별미라지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단팥빵, 야채빵이 끝내줍니다.



 

작정하고 군산을 방문한 것은 2009년 1월 1 아침이었습니다. 그날도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도시는 외지인에게 무심한 찬바람을 뿜고 있었습니다. 도시는 고요했고 우리는 그 고요함을 뚫고 옛 항구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갈 것도 없이 도로를 따라 쭉 들어오다 보면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이곳이 그곳이구나. 그 때 찬 눈발 사이에 반듯하게 서있는 붉은 벽돌 건물들이 얼마나 무심하게 반짝이던지.

 


옛 군산해관은 흰 눈 속에서 진홍빛 존재감을 드러내며 기묘한 아름다움을 풍겼고 허물어질 듯 서있는 옛 조선은행은 그 규모만으로도 어찌나 육중한 지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죠
. 드문드문 서 있는 오래된 건물 뒤로는 바닷물이 미동도 없이 스며들었습니다. 파도도 없이 고요한 바다는 마치 호수 같았지요. 이곳을 내항이라고 부릅니다. 항구의 기능은 모두 신항만에 내어준 채 오래된 건물들과 함께 고요히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듯했어요.


 

2011 1 1에도 우리 부부는 군산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해맞이 지역과 리조트를 피해 한적한 곳을 찾다 보니 또 군산입니다. 며칠간 내린 눈이 얼음이 되어버린 군산을 거닐었습니다.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어느새 눅눅해진 운동화를 끌고서 군산의 내항을 자박자박 걸어보았습니다. "이런 날 누가 군산 내항에 구경을 오겠어?" 라고 자문하면서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카메라 들고 내항을 기웃거리는 청년들이 몇몇 보이더군요. 대단들하십니다.

 


군산 내항 부잔교. 모두 네 개가 설치되었는데, 지금은 세 개만 남아있습니다.



멀리 조선은행이 보이네요.






군산은 개화기 일본인들이 이주해오면서 발전한 도시입니다. 일본은 넓은 평야와 인접한 군산을 개항하도록 계속 요구했고 바야흐로 1899년에 군산항이 외국인에게 문을 열었습니다. 군산은 외국인이 눈치 보지 않고 자리잡고 먹고 살 수 있는 조계지가 형성되었고 행정기관들이 등장하여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갔지요. 군산 구도심의 격자형 구조가 이 시기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이곳에 본정통, 전주통, 대화정, 욱정, 명치정 등의 이름을 붙였지요.


1911년 각국조계지도. 옛날 지도 보자니 난감하지요? 격자형으로 구획된 것만 확인하고 넘어갑시다.





1905
년부터 1925년까지는 바닷가에 항구를 만드는 공사가 시작되었고, 철도와 도로가 건설되면서 군산 시가지가 점차 정돈되고 확장되었지요.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항만공사는 계속 확장되었고 부잔교(뜬다리 부두)가 지어지면서 거대한 항구로 변모해갑니다. 군산은 썰물 때에도 2천 톤급 기선 3척이 댈 수 있는 항만시설이 완료되었고 25만개의 쌀가마니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세워졌습니다. 철도선도 늘어나 하루 150량의 화차가 군산을 드나들게 되었지요.



1920년대의 본정통. 소실점 근처 왼편에 뾰족한 지붕 보이는 건물이 조선은행이야요.



1923년 군산지도. 철도와 도로가 확장되었다는 것만 알면 되겠죠?




1936년에 군산은 부산 다음으로 일본에 쌀을 많이 실어 보내는 제2의 미곡수출항이 되었습니다. 군산항에서 출항하는 쌀가마니의 양은 전국 수출량의 25%나 되었다고 합니다. 전북의 드넓은 평원에서 수확한 누런 곡식들이 이곳에 군산항에 모여들었지요. 항구의 넓은 터에 쌀가마니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산처럼 쌓인 쌀가마니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구경해보려면 군산해관에 가보면 됩니다. 군산항을 드나들던 배는 무조건 거쳐야 하는 군산해관(해관은 세관의 옛 이름입니다.). '호남세관자료관'이라는 이름을 조촐하게 내걸고 손님맞이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군산항의 모습을 자료사진으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참 예쁜 벽돌건물이죠? 옛 군산해관입니다.



군산해관은
1908년에 지어졌습니다. '꽃처럼 빨간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만든' 이 건물은 뾰족한 지붕이 무척 이국적입니다. 러시아 미녀처럼 고전적이고 날카로운 매력이 있는 이 건물은 지금도 예쁘게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군산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이지요.



옛날에는 왼편에 있는 현관으로 들어왔겠지만 지금은 뒷문으로 출입합니다.


층고가 높은 중앙홀. 햇살이 차분하게 들어옵니다.



볕이 잘 들어오는 현관 홀 안쪽에 층고가 높은 실내 홀이 펼쳐집니다. 양쪽으로 복도가 이어지고 복도는 방으로 연결되지요. 실내 홀은 항구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대기하면서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던 곳이겠지요. 지금은 자료사진들이 쭉 전시되어 있을 뿐 앉을 만한 좌석은 없습니다. 옛 군산항 풍경이 이랬구나, 진짜 쌀가마니가 쌓였었구나. 싶습니다. 어리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쌀가마니를 바라보는 사진도 있습니다.


 

군산 내항의 축항공사 모습



군함이 정박할 정도로 큰 항구가 되었지요.




쌀가마니가 쌓여있는 창고. 쌀가마니가 조그만 주먹밥처럼 보이네요.



그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알기가 어렵습니다. 쌀이 가마니째 실려나가는 것을 수십 년간 보아온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항구는 시끌벅적했을 겁니다. 뿌우, 뿌우, 큰 배가 내뿜는 우렁찬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면 짐을 실어 나르는 일꾼들이 발걸음이 다급해졌겠지요. 농장주들은 쌀과 돈을 맞바꾸며 흐뭇하게 미소를 흘렸을 테지요. 그리고 그들은 은행에서 돈놀이를 하거나 미두취인소에 들러 잠시 노름을 즐겼을 테지요.



그들의 돈주머니를 챙겨주었던 은행들이며 무늬만 선물거래소지 노름터나 다름 없었던 미두취인소도 내항과 바짝 붙어있습니다. 조금 건너에 조선은행이 보입니다
.
복원공사를 하느라 온통 비계로 가려놓았군요. 건물의 규모가 거대합니다. 마치 노쇠한 장군을 보는 것처럼 허허로운 느낌이 듭니다. 한때 위용이 대단했던 조선은행은 100여 년의 시간을 건너오면서 뱃속을 모두 털어내고 허허롭게 서있습니다. 어떻게 복원할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원래는 단층건물이었다죠. 층고가 높고 단단하며 위용이 대단한 건물입니다.



한창 잘나가던 시기의 조선은행. 출입구가 독특합니다. 앞에 서있는 사람과 비교하면 건물 높이를 대략 짐작할 수 있지요.


1920년대말의 군산내항 풍경. 조선은행이 떡하니 있지요.



이 건물을 수리하면서 상량문 현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1920 12월경에 공사를 시작하며 당시 은행의 지점장은 니시야마 기쿠헤이, 시공자는 시미즈 구미, 공사감독은 미우라 기치, 설계자는 나카무라 요시헤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나카무라는 조선은행 본점(현 한국은행 본점-서울)과 부산지점을 설계했던 인물이지요. 한국전쟁 후 한국상공은행(한일은행)에서 인수하여 은행으로 사용하다가 1981년에 개인 소유로 바뀌어 예식장, 나이트클럽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1990년에 화재가 난 후 보수하지 않고 그대로 20여 년을 방치되어 있었던 뼈아픈 기억도 있지요. 2008년에 군산시가 매입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했습니다.
나이트클럽의 이름이 플레이보이였던 것인가요? 창문에는 못다 지운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원래 단층 건물이었다가 예식장이 되면서 1,2층으로 나뉘고 계단도 생겨났던 것이지요. 조선은행 중 경성을 제외하고 가장 규모가 큰 곳이 바로 이곳이었답니다.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의 옛 모습.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었던 일본제18은행은 건물만 남아있을 뿐, 내부는 벽장 몰딩 외에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속건물이 옛날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빈집은 비바람, 눈바람에 시달린 듯 점점 폐허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번 방문에는 살짝 열린 대문으로 슬쩍 들어가보았습니다. 두 개의 건물은 사무실 겸 주택과 창고로 사용되었습니다. 창고에는 커다란 금고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고 사무실 내부는 뭐가 뭔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황폐합니다.

외관은 손본 흔적이 역력하죠.

 

내부 몰딩장식.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 등이 남아있습니다만, 원형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은행 건물 뒤에 부속건물이 좀더 일본식 가옥 느낌이 들죠.


내부는 폐허더미가 되었습니다. 창고 건물 벽을 보는데 이렇게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떠군요. 벽돌 위에 덧바르고 덧입힌 것들.




내항의 동 이름은 장미동입니다. 꽃처럼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라, 쌀을 쌓아둔다는 의미랍니다. 장미동 군산내항에서 느낀 오롯한 무상감은 김제, 정읍의 널따란 평야를 보면서 점점 비장해졌습니다. 다음 번에는 보수공사를 끝내고 개방한 히로쓰 저택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More information>>-------------------------------------------------------------------------


옛 군산해관

전북 군산시 장미동 49-38번지
전북기념물 제 87호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전북 군산시 장미동 23-1, 12 번지
등록문화재 제374호
 

옛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

전북 군산시 장미동 32번지
등록문화재 제372호 

 

 

좀더 읽어볼 책


 

채만식 / 탁류

단편적으로 흩어진 역사의 장면장면과 도저히 이어 붙이기 힘든 감성적 부분을 결합하는 것은 문학의 역할이 아닐런지요. 그래서 역사를 담고 있는 문학 작품에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채만식의 <탁류>는 1930년대의 군산을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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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화제가 된 영화 중에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가 있었다. 필자는 전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열혈팬이었지만 비위가 약해서 폭력이 난무한다는 이 영화를 끝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 잡지들에 실린 논쟁은 열심히 들여다봤는데 찬반 양론이 격심했던 걸로 기억한다. 실제로 영화를 안봤으니 어느 쪽이건 편을 들 수는 없었지만, 영화가 폭력적이고 잔인하다는 비판에는 수긍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현실이 영화보다 더 끔찍하기 때문에" 폭력 묘사가 정당화된다는 시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옹호론은 사실 자승자박이다. 이 말은 영화가, 아니 예술이 현실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폭력이 아무리 끔찍해도 영화는 가짜고 현실은 진짜다. 가짜가 진짜를 이길 수는 없다. "현실의 폭력이 영화보다 더 끔찍하다면 왜 구태여 영화를 통해 폭력을 경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왔을 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것은 영화가 폭력적이어는 안된다는 말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영화가, 예를 들어, 폭력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현실과 대결한다면, 미술은 어떤 지점에서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영국 작가들로 구성된 그룹 블래스트 티오리(Blast Theory)의 <율리케와 이아몬의 순응(Ulrike and Eamon Complaint)>(2009)을 예로 들어보자.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이 작품은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것도 아니고 무대에서 공연되는 것도 아니다. 관객이 직접 참여해야만 완성되는 '라이브' 작품이다.   



관객이 누군가의 인터뷰 영상이 상영되는 방 안에 들어서면 방 안에 핸드폰과 선글러스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핸드폰을 집어들고 버튼을 누르면 '작품'이 시작된다. 핸드폰 속의 목소리가 선글라스를 끼라고 지시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이아몬 콜린스(1999년 살해된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멤버)와 율리케 마인호프(테러조직 적군파[REF]의 멤버였던 독일 저널리스트) 중 누가 되고 싶냐고 물어본다. 관객이 선택하면 목소리는 관객을 방 밖으로 이끌어낸다.      


Ulrike and Eamon Compliant from Blast Theory on Vimeo.


관객은 목소리가 지시하는대로 움직이며 거리를 걸어다니다 어떤 교회의 방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율리케 혹은 이아몬으로서 인터뷰 대상이 되는데, "당신은 무엇을 위해 싸웁니까?"라는 질문이 처음 주어진다. 이어서 "누군가 당신 영역으로 들어와서 당신의 친구와 이웃들을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등의 질문이 이어진다. 관객이 이 인터뷰를 끝내고 나면, 처음 출발점에서 보았던 인터뷰 영상이 이 장소를 촬영한 것임을 알게 된다. 다음 인터뷰이가 들어오면 그의 인터뷰 모습을 지켜보게 되며 그후 교회 밖으로 나가면 '작품'이 끝난다.



필자는 처음에는 이 작품이 꽤 흥미로웠는데 어떤 작가가 "무한도전 같았어요"라고 이야기하는 걸 듣고는 갑자기 팍 식어버렸다. 무한도전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무한도전 꽤 즐겨본다), 듣고 보니 과연 그랬기 때문이다. ㅋ 요컨대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진다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미로 따지자면 무한도전이 몇 수 위 아닌가! 현실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의 주인공 역할을 하면서 거리를 걸어다니고 인터뷰를 하는 것이 현실과 미술의 긴장관계를 드러내는 데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이런 작품은 현실의 강렬함을 따라가지 못하는 어설픈 역할극에 불과한 걸까 아니면 전위적 실험인일까?   


평가를 미룬다 하더라도, 이 작품이 강한 인상으로 남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작품의 컨셉 그 자체가 아니라 작품의 어떤 한 순간 때문이다. 몇 개의 다리를 건너서 인터뷰 장소인 교회로 들어가기 이전, 핸드폰 속의 목소리는 참여자를 벤치에 앉히고 묻는다. 지금 그만두고 싶다면 전화를 끊고, 계속 하고 싶다면 들고 있으라고. 목소리가 현실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참여자가 계속 하기를 선택했을 때, 그는 진정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 된다. 


필자는 이아몬 콜린스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적군파와 율리케 마인호프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적군파를 모르고 그에 대해 아무런 정서적 감흥도 없는 사람들이 이 작품에 참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그 내용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작품을 스스로 계속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결정을 내리는 그 순간에 있었다. 왜냐하면 이 순간에 현실과 예술 사이의 틈이 벌어지고, 그 틈 사이로 어떤 스파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은, 블래스트 티오리 같은 작업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작가 앨런 캐프로(Allan Kaprow)의 1969년 작품 <Pose>를 재연한 아래 동영상에도 있다. 캐프로는 자신이 '해프닝'이라고 불렀던 퍼포먼스 작업을 통해 갤러리 공간에서 벗어나 '예술과 일상의 통합'을 꾀했던 아티스트였다. 로스 엔젤레스에 있는 현대미술관(LA MoCA)은 2008년 봄에 캐프로의 회고전을 열면서 당시의 해프닝을 재연했는데, 다음의 동영상은 그 재연 장면 중 하나이다(캐프로는 해프닝을 거의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영상물은 남아있지 않다). 해프닝은 역시 관객 참여로 실현된다. 처음에 간단한 디렉션이 주어지고, 관객은 그 내용을 지키는 한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그 내용을 실현한다.



http://www.moca.org/kaprow/
(전시 사이트)

필자는 지난 학기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같이 이 동영상을 보았는데, 어떤 학생이 "저 해프닝은 경찰의 허락을 받고 했을까요?"라고 물었다. 영상을 끝까지 보지 않은 상태에서 수업에 가져온 필자는 "그러게요, 나도 궁금하네"하면서 같이 봤다. 영상의 3분의 2 정도 지난 부분(4분 57초부터)에 보면 그 답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필자가 장영혜 중공업의 <삼성>을 떠올린 것은 우연일까. 플래시로 구성된 간결하면서도 파워풀한 웹 작업으로 미술에 큰 관심없는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장영혜 중공업은 삼성(그 삼성 기업 맞다)에 유난히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작가로 유명하다(?). 물론 삼성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아이콘으로서의 삼성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자본과 권력의 아이콘을 난데없이 에로틱하고 염세적인 뉘앙스로 녹여내는 장영혜중공업의 작업은 '삼성'이라는 너무나 평범한 단어가 예술작품 속에 등장했을 때 얼마나 생경한 효과를 만들어내는지를 시니컬하게 보여준다(장영혜중공업은 예전에 삼성 사옥 옥상에 몰래 올라가 설치작업을 하고 내려오는 작품을 한 적도 있었다). 

http://www.yhchang.com/SAMSUNG_KO.html
(<삼성>)



예술이 현실과 경쟁하는 헛수고를 하지 않으려면 현실에 이미 있는 것을 가져와서는 안된다. 현실에 없는 것, 현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을 가져와야 한다. 현실이 망각하고 있는 것, 그것은, 예술은 현실과 통합될 수 없으며 다만 현실과 부딪힐 수 있을 뿐이라는 진실이다. 그런 점에서 <삼성>은 성공적이다.  





왼쪽: 블래스트 티오리 ( 이 그룹의 홈페이지에도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많다.)
오른쪽:  1961년 한 갤러리의 뒷마당을 낡은 타이어로 가득 채우고 있는 앨런 캐프로. 작품 제목은 <Yar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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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초보자는 낯선 곳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여행 고수는 낯선 곳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여행자는 낯익은 곳에서도 낯설음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진정한 낯설음’을 체험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 여행정보를 얻으려고 인터넷에 들어가면 너무 많은 자료가 쏟아진다. 물론 여행 자료와 실제 여행은 다른 것이니 자료가 많다는 게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나 많은 자료들, 특히 사진들이 상상의 여지를 축소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장소라서 첫 만남이 중요한 경우에는 더 그렇다.



그래서 필자의 한 친구는 "사진도 스포일러"라면서 인터넷 검색할 때 사진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사진만 빼놓고 검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뿐인가. 텔레비전을 틀면 수많은 여행 프로그램들이 도처에 출몰해서 한번도 못 가본 곳이 마치 많이 가본 곳인 양 느껴지게 만든다. 바야흐로 더 이상 새로운 장소, 새로운 경험이 사라진 듯한 시대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새로움의 소멸”이라는 이런 현상이 현대 문화 특유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텔레비전이나 놀이동산 등으로 대표되는,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가상인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체해서 이제 더 이상 실재와 가상의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실재와 가상만이 아니라 참과 거짓, 내부와 외부, 과거와 미래도 구별불가능해졌다. 과거와 미래가 구별불가능하기 때문에 시간이나 역사라는 것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새로운 출발'이라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현대인이 느끼는 무기력함의 이면에는 이런 사정이 깔려 있다.

그래서 현대인은 여행에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할인 항공권을 구해보려고 검색을 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여행만 하고 사나 싶을 정도로 티켓이 귀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여행은 출발의 시뮬라크르일 뿐 진정한 출발이 아니다. 현대의 새로운 유행인 '여행'은 출발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에 출발의 제스처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시뮬라크르로서의 여행은 '관광'이란 이름을 갖는다. 이 장르는 19세기에 와서 생겼다. 그 이전에 여행은 귀족들의 교양수업의 일환이었을 뿐 관광의 개념은 아니었다. 관광으로서의 여행은 출발이 불가능한 시대의 여행 방식이다.

 
예술가들은 대체로 여행을 좋아한다. 자기의 집에서도 낯설음을 느끼는 것이 여행자의 조건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가 역시 그렇다. 평생을 떠돌아다니며 산 랭보, 북아프리카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던 플로베르, 알제리의 태양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낭만주의의 자양분을 발견했던 들라크루아나 남태평양의 섬에서 여생을 마친 고갱의 행로는 그들의 인생만이 아니라 작품의 방향을 결정했다.


고갱의 시대까지만 해도 '출발'에 대한 환상이 가능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그 환상이 깨졌더라도 적어도 출발할 때는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 건너편의 일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글로벌리제이션의 시대에 여전히 여행에 대한 환상이 가능할까? 혹은 관광이 아닌 여행이 가능할까?

이런 질문에 대해 어떤 작가들은 여행이 관광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역이용하고, 어떤 작가들은 여행의 불가능함이라는 명제 그 자체로 맞선다.


한국과 영국 작가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리슨투더시티(Listen to the City)의 서울 투어스(2010)는 전자의 경우이다. 서울투어스 프로젝트는 "서울 사람도 잘 모르는 서울"을 슬로건으로 내거는 도시 리서치 작업이다. 인터넷으로 '관광단'을 모집해서 서울을 구경다니고 그 과정을 아카이브(사진, 영상, 텍스트, 지도 등) 구성한다.
 

코스를 선택하는 기준은 서울의 예전 모습이 남아있는 동네와 개발논리에 휩쓸린 동네를 함께 묶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앙시장-황학동 벼룩시장-황학동 롯데 캐슬 아파트(청계천 개발때 황학시장 일부와 노점상을 철거하고 지은 아파트)의 코스, 인왕산-영천시장-교남동 뉴타운 예정지로 짜여진 코스 등이다.


'관광객'들은 시장에서 기념품도 사고 맛집에서 점심도 먹으면서 이 코스를 걸어서 둘러보는데, 반드시 각 장소 앞에서 전형적인 관광 기념사진 풍으로 사진을 찍는다.




이 프로젝트는 일상의 공간을 낯설게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상의 공간 속에 숨은 정치적 의미를 드러낸다. 노점상을 철거하고 지은 명품 아파트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는 이 상투적인 제스처는 거꾸로 일상에서 우리가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얼마나 상투적인가를  드러낸다. 보통 관광할 만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짐짓 관광사진을 찍는다. 이 행동은 일종의 연극이지만, 또 아니기도 하다. ‘투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이 여행에서 참여자들이 어떤 의미를 얻어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민경, 장윤주의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정물>(2009)도 여행이 관광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역이용한다. 이들이 '여행'한 곳은 인천 차이나타운이다. 이들이 이 곳에 간 것은  한국의 화교들이 받아온 차별 문제와 다문화 사회의 이슈들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 문제를 목소리 높여서 주장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화교들의 삶을 모르지만 우리는 안다”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대신 이들은 “우리 역시 어차피 그들을 모른다” 라는 시각을 갖는다. 아무리 이해하다고 해봤자 자신들 역시 타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행객의 위치를 자처하면서 풍경을 '수집'한다.



이 수집품들은 차이나타운을 거닐면서 찍은 사진들과 길거리에서 주워온 사소한 물건들이다. 낡은 장갑, 시계, 과자상자, 빈 캔 병 등을 주워와서 '정물’을 구성한 다음,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린다. 말 그대로 ‘정물화’를 만드는 것이다. 정물화는 여행객의 시선과 닮았다. 원래 그 장소에 있던 물건들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구성된 풍경이기 때문이다.



정물화의 대상이 된 물건들은 딱히 ‘중국적인’ 느낌이 나는 것들도 아니다. 슬라이드 사진에 담긴 풍경도 마찬가지이다. 간간히 보이는 중국어와 붉은 색 등을 제외하면, 평범한 뒷골목과 가게들이다. 보는 사람이 이 정물화와 풍경을 이국적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차이나타운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이국성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이 작품의 주제는 차이나타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곳을 보는 여행자의 시선이다. 이곳을 ‘이국적으로’ 만든 것은, 그리고 타자화해온 것은 우리 자신인 것이다.   


후자, 즉 여행의 불가능함이라는 명제를 던지는 사례 중 하나는 40여 년 전 만들어진 작품이다. 미국의 대지미술 작가 로버트 스미드슨<나선형 방파제(Spiral Jetty)>(1971)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갤러리 공간이 아니라 실제 자연 공간 속에 설치된 작품이다. 유타 주 솔트 레이크의 로젤 포인트라는, 찾아가기  힘든 후미진 곳이다. 1971년, 스미드슨은 주변의 돌과 흙6천5백여톤을 이용해 이곳에 지름 15피트의 소용돌이 모양의 방파제를 만들었다. 트럭 두 대, 트랙터 한 대, 로더 한 대가 동원되어 6일이 걸린 큰 공사였다.

이 작품은 호수의 수위 상승 때문에 30년 동안 물에 잠겼다가 1993년 다시 떠오른 후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 작품을 보러가는 것 자체가 여행이다. 하지만 이 여행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여행이다. 가는 길이 험하다는 의미에서는 아니다. 여정은 힘들기는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불가능한 것은 이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는 것이다.
 
방파제가 물에 잠겨 있었을 때는 물론 작품을 볼 수가 없었다. 물 위로 솟아오른 이후에도, 이 곳을 찾은 방문객들은 육안으로 전체 모양을 식별할 수가 없다. 방파제의 소용돌이 형태는 비행기의 시점에서만 온전히 보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물 위로 얕게 솟아있는 불규칙한 돌멩이들과 거기에 끼여 있는 소금 결정체들(솔트 레이크는 담수와 해수가 섞이는 곳이라 염분의 농도가 높다)로 만들어진 구부러진 길 뿐이다. 방문객들은 이 길 위를 걸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난관 역시 비행기를 탈 수 있다면 해결된다. 항공사진을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전체를 볼 수 있다. 진정으로 ‘불가능’한 것은 이 작품에 포함된 시간을 온전히 체험하는 것이다.


스미드슨은 이 작품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지게끔 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지질학적 풍화작용 속에서 몇 만 년의 시간이 흐르면 방파제는 물론 호수도 소멸할 것이고, 작가가 염두에 둔 것은 그런 광대한 시간 그 자체이다.


‘소멸’이 가능하다면, ‘시간’도 가능할 것이다. 이 작품은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간의 불가능성’을 색다른 방식으로 반박한다. 시간은 가능하다. 하지만 단지 소멸 속에서만, 경험의 한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이 역설 속에서, 여행의 ‘불가능성’은 ‘가능성’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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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 홀은 높은 천장에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어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고급 상점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집니다. 짙은 목재 바닥과 어울리게 전시대도 유리와 목재로 꾸몄습니다. 붉은 커튼이 내려져 있어 내부는 어둡지만 전시대에는 스팟 조명이 있어 관람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전시물은 인천이 개항한 시기인 1883년 인천을 통해 처음 소개된 근대 문물들을 보여줍니다.
 


두 개의 이미지가 겹쳐져 입체적으로 보이는 사진기랍니다 



전신 업무를 볼 때 사용한 기구들이지요.
 


전보에 썼던 내용입니다.

 


경인선 기관차와 기차표

갑문식 도크에 대한 영상이 흘러나옵니다. 인천바다는 수심이 얕고 뻘이 많아 큰 배가 드나들지 못했지요. 일제강점기에 갑문식 도크를 세워 물을 가둬서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만든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천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것 중 하나가 철도입니다. 1897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제물포와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이 완성됩니다. 1900년에 한강철교가 세워진 후에야 서울 시내에서 인천까지 철도로 연결되게 되지요.




우편엽서. 손바닥만한 엽서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중앙홀에서 가장 흥미로운 전시물은 우표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들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표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지요. 근대우편업무를 도입하여 우정총국이 문을 연 것은 1884년입니다. 우정총국은 5문, 10문, 50문, 100문짜리 등 네 종류의 우표를 만들었는데, 총 250만 장의 우표는 모두 일본에서 인쇄했습니다. 우정총국이 문을 열 당시에는 5문짜리와 10문짜리 2만장만 들어왔고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들어올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정총국이 문을 연지 20일 만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우정총국이 폐쇄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근대 우편업무는 중단되고 10년 후에야 우편업무가 정상적으로 제개되지요.


남은 우표들은 서너달 후 서울에 도착했지만 모두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인쇄대금을 달라고 보챕니다. 이것을 중간에서 해결한 것이 독일계 무역회사인 세창양행이었습니다. 세창양행은 우표를 잘 포장해서 동양의 풍물에 관심이 많은 유럽 사람들에게 기념품으로 팔았습니다. 덕분에(?) 지금도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들을 어렵지 않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를 비롯해서 1900년대에 등장한 다양한 우표들과 이른바 독수리우표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독수리 무늬가 그려진 독수리 우표는 프랑스에서 인쇄했는데, 문의우표와 비교해보면 인쇄나 디자인이 더 섬세합니다. 짙은 파랑색으로 인쇄된 우편엽서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예스러운 글자가 박힌 우표직인이 섬세하기 짝이 없습니다.

요즘은 편지도 거의 보내지 않을뿐더러 우체국에서 우편업무를 본다고 해도 찌지직하고 인쇄된 우편용 스티커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지요
. 우표는 철 지난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진짜 옛날 우표에는 뭔가 고급스럽고 조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우표 스스로가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우표 하나만 붙이면 바다 건너 외국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도 소식을 전할 수 있으니 얼마나 사연이 많겠습니까?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의 모형입니다.

옛 금고는 시커먼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고로 들어가면 널찍하고 높은 전시장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인천에서 제작된 동전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무늬가 선연한 동전들입니다. 오얏꽃 무늬는 자주 벚꽃와 혼동되곤 합니다만, 화폐에서 일본을 상징하는 무늬로는 오동나무꽃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사용된 화폐에는 오얏꽃 무늬가 등장한 적도 있고 오동나무꽃 무늬가 등장한 적도 있습니다.

 화폐는 자주 바뀌었고 돈의 가치도 무척 오락가락했습니다. 그 틈에서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킬 방법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은행이 번 돈은 모두 이 땅의 사람들이 잃은 돈이었을 겁니다. 돈은 보여지는 그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제게도 일제 강점기 직후에 발행된 지폐가 몇 장 있습니다
. 시골에서 농부의 아내로 살던 외할머니가 꽁꽁 숨겨두셨던 것들입니다. 당시에는 꽤 가치가 높았겠지요. 지폐 몇 장은 60여 년이 지난 후 나달나달한 채로 제게 전해졌습니다. 그 낡은 지폐 속에 할머니의 삶이 있겠지요. 그 당시의 풍경이 담겨있고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흐르고 있겠지요.

 

인천 개항 박물관에서 본 것 중 가장 인상적인 것들은 우표와 동전입니다. 자세히 보려면 돋보기를 들이대야 하는 이 작은 물건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온 세상, 그리고 수대를 걸친 역사입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숨가쁜 여행을 한 것처럼 흥미진진했습니다. 그 흥분이 좀 오래갈 것 같습니다.


존스턴 별장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전시되어 있어요.


More information

인천 개항 박물관
(옛 일본제일은행 인천지점)

주소-인천시 중구 중앙동 1가 9-2번지
문의- 032-760-7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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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가기 전에 내셔널 트러스트의 후원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한 달에 만원씩 후원합니다. 큰 돈도 아닌데, 여태 망설이고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이런 단체의 중요성이야 두 말할 것도 없고, 그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행동이 생각을 따라가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자연과 문화를 지켜나가고자 하는 단체입니다
. 훼손 위기에 있는 자연물이나 문화 현장을 회원들이 후원금으로 매입하여 자산으로 만들고 그것을 직접 관리하는 단체입니다. 올 봄에 근대 건축 기행에 대한 책을 쓰면서 내셔널 트러스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내친 김에 책 수익금의 일부를 근대문화재를 지키는 일에 써달라고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부하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12월이 되자, 불현듯, 내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지만 지속적인 관심.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죠.

 
올해 한 해를 돌아보니
, 무척 고단하고 속상한 일들이 많았고 뒤늦은 시행착오를 수습하느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습니다. 그 뿐인가요? 실업 불안, 교육 불안, 먹거리 불안, 건강 불안, 사회 불안, 정치 불안, 안보 불안으로 사회가 뒤숭숭하여 그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지요. 많은 사람들에게 올해는 잊어버리고 싶은 한 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불안하고 피로한
2010. 그냥 보내기가 안타깝더군요. 착한 일 한가지는 해야 나의 2010년이 떳떳하지 않을까? 그래서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기금에 후원하기로 한 것입니다. 쇼핑하는 것보다 기분이 더 좋아지더군요. 조금씩 모여서 큰 힘이 되는 것을 보는 것,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연결되는 것. 그런 일들을 참 잊고 살았던 듯해요. 사람들이 물심양면 서로 도우며 진심에서 우러난 웃음을 보는 것, 참 훈훈하지요. 그런 웃음 찾기가 참 어려웠던 2010, 지금이라도 훈훈하게 웃어보려고 합니다.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입니다. 흰색부분은 후에 덧붙여진 부속건물입니다.


지난 번에 다녀온 개항 박물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개항 박물관은 인천 개항장 근대 건축 전시관에서 길 하나 건너면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이라는 문화재 건물을 활용했습니다. 이 은행 건물은 1900년대 초에 지어졌고 일제 강점기의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으로도 오랫동안 사용되었습니다. 지금도 정문 위에 朝鮮銀行이라는 글자를 발견할 수 있지요.


박물관은 오픈한지 채 석달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장소입니다
. 건물은 복원 공사가 끝나고도 전시물이 채워지지 않아 오랫동안 문이 닫혀있었습니다. 외관에서부터 오래된 역사가 느껴지는 건물을 보면서 도대체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게 여겼을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 건물 내부 구경도 하고 전시물도 찬찬히 보면서 인천의 옛 풍경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유물은 많지 않고 전시물이 일관성 없이 나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역사의 파편을 통해서 조금씩 그 시대의 흔적을 읽어보고 더듬어볼 수는 있습니다. 1은행이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쿵쿵거립니다. 부족한 것들은 지속적으로 채우면 되고 필요한 것들은 추가로 설치하면 되지요. 문을 여는 게 중요합니다.

 

일제 강점기의 은행 모습입니다. 부속건물은 아직 없을 때네요.


개항 박물관에서 개항의 흔적만 살펴본다면 많은 것을 놓치는 셈입니다
. 먼저 이 건물의 역사를 살펴볼까 합니다. 일본제1은행은 우리나라에 근대 금융의 시작을 알린 은행입니다. 1873년 부산에 가장 먼저 상륙해서 금융에 눈이 어두웠던 조선인들을 현혹했지요. 인천이 개항하자마자 지점을 설치해서 영업에 들어갔고 1899년에 본정통 2정목이었던 현재 자리에 신사옥을 짓고 황금어장을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천은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드는 국제도시였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물품들
, 외국으로 나가는 물품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돈과 쌀과 금이 쌓여갔지요. 그 중심에 서 있던 은행이 바로 일본제1은행입니다. 일본제1은행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으로 승격되어 화폐를 생산하는 기관이 됩니다. 쭉 은행으로 사용된 건물은 광복 후에 조달청 청사가 되었다가 임대건물이 되었다가 합니다
 


조선은행이라는 글씨가 선명합니다.

 

건물은 화강석으로 육중하게 지어졌습니다. 검푸른 돔이 올려진 석조건물 뒤에는 돈과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던 금고 건물이 따로 붙어있습니다. 이 건물은 일본인 건축가인 니이노미 다카마사가 설계하고 역시 일본 회사가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모래, 자갈 등을 제외한 모든 재료들, 즉 벽돌, 목재, 석재 등을 모두 일본에서 가져와 지었습니다. 오리지널리 메이드 인 재팬인 셈이죠.


은행 건물은 규모가 크고 워낙 튼튼하게 지어서인지
, 백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 중에도 은행이 꽤 있습니다. 어떤 은행이 있냐 하면,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서울, 인천, 군산) 조선식산은행 (대구, 강경), 일본제18은행(인천, 군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호남은행, 호서은행, 한일은행 등 지방은행들도 몇몇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금고는 2층 높이로 지어졌습니다. 전시실은 윗층이고 아랫층은 공개되지 않는 곳입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수장고쯤 되려나요.


은행은 건물도 단단하게 지었지만 내부에 철옹성 같은 금고가 남아있어 더 흥미롭지요
. 금고는 건물의 안쪽에 깊고 높게 지었습니다. 두꺼운 검은 철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을 것처럼 육중합니다. 포격에도 끄덕 없을 만큼 보완성을 자랑하지요. 건물 옆에는 흰색으로 덧칠한 2층짜리 부속 건물이 있습니다. 지금은 부속건물과 뒤쪽 금고까지 길을 연결하여 전시장으로 꾸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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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년에 세워진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 나가사키에 근거를 둔 은행이지요.
 


인천이 개항할 무렵, 이곳에 있었던 독특한 건축물들을 모형과 자료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18은행까지 가면 이 여행의 절반은 둘러본 셈이 되지요. 18은행은 인천개항장 건축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인천이 개항하던 시절, 청국인, 일본인, 서양인이 한 군데서 각각의 터를 잡고 살던 모습이나, 당시에 지어진 건축물을 모형과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죠.

지금 남아있는 건물 중에서 눈 여겨 볼 것은
, 제물포 구락부, 일본 제일은행 인천지점, 인천 답동 성당, 인천우체국 등입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축물도 있어요. 그래서 인천 중구를 거닐면 백 년 전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지요. 전시장을 둘러보면 자료가 풍부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 지 좀 감이 옵니다. 자그마한 단층 건물을 잘 다듬어서 특징 있는 전시물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건물은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 아닐까요?


 

홍예문. 남아있습니다. 자동차 한대 겨우 통과하는 언덕길이죠. 한번 지나가 보세요.
 


제임스 존스턴이라는 재벌의 별장이지요. 일제 강점기에 인천각이라는 요정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만국공원(자유공원)의 랜드마크였죠.

 


인천해관입니다. 모형으로 보니 색다른 모양새가 더 잘 느껴지네요.
 


영국공사관입니다. 사라지고 없지요. 

 


18은행 옆에 서있던 제58은행의 모형입니다. 에쁜 건물이지요.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제18은행에서 도로 하나 건너편에 있는 일본 제1은행. 잘 생긴 건물입니다.


전시물을 보다 보면, 무척 독특한 건물들도 만나게 됩니다.
응봉산 산자락에 떡 하니 세워진 두 채의 대저택이 눈에 띕니다. 존스턴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별장과 세창양행에서 소유했던 저택입니다. 지금은 사라졌으니 괜히 응봉산을 올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존스턴 별장을 보면 스위스 어디쯤 있어야 할 건물 같습니다
. 영국인 제임스 존스턴은 상하이에서 무역업으로 큰 돈을 벌어들인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상하이에도 규모가 큰 별장을 지어 부를 과시했지요. 그는 미지의 금광 같았던 조선으로 눈을 돌렸지요. 존스턴은 상하이처럼 인천에도 큰 별장을 세웠습니다.

인천 별장을 보세요. 화려합니다. 게다가 응봉산 꼭대기, 지금의 한미수교100주년 기념탑이 서있는 자리에 대규모 저택이 있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겠지요.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건물을 랜드마크라 부르는데, 이 건물이 그 시절에는 딱 그랬습니다.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유명한 인천상륙작전 때 이 건물이 목표가 되었다고 합니다. 포탄으로 너덜너덜해진 별장은 앙상하게 뼈대만 남아있다가 곧 사라졌습니다.


존스턴 별장이 꼭대기에 있네요. 독일인 건축가 로트케젤이 설계했어요.


존스턴 별장. 1905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좀 자세히 볼까요?
탑신이 있고 세밀한 조각상에, 유리 온실까지 있었던 고급 저택이에요.


1951년의 모습입니다. 배가 뻥 뚫렸네요.그래도 형태는 남아있습니다.


1950년대 모습. 귀신 나오는 집이라 불리기도 했다는군요. 많이 허물어진 존스턴 별장.


청나라 역관이었던 오례당이 살았던 오례당 주택은 서양 중세의 성처럼 원뿔형태의 지붕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전쟁 때도 살아남았지만 후에 철거되고 다세대 주택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중요한 인물인 호레이스 앨런의 별장도 인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앨런의 별장은 서양인들이 모여 살던 조계지가 아니라, 배다리라는 지역에 있었습니다. 배다리 지역은 인천 개항장과는 또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동네이므로 다음에 둘러보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 모양새와 취향이 제각각이듯, 살던 집도 국적에 따라 취향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전 그것이 재미있습니다. 집이 남들과 똑같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건축 활동이 훨씬 자유롭고 취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즘이 과연 건축의 형태에 얼마만큼 관대한지 모르겠습니다. 2010년 주거형태로 가장 선호하는 것이 아파트니까요. 그것도 초고층 대단지 말입니다. 똑같은 그릇에 담긴 삶이 어찌 서로 다를 수가 있을까요? 상상력을 펼치기에 우리 사는 모습이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요? 그런 생각을 또 해봅니다.

 

중국인 역관 오례당이 짓고 살던 집.
오례당은 스페인 출신 아내 아말리아와의 행복을 꿈꾸며 이 집을 지었지만 몇 해 살지 못하고 사망했어요.


둥근 철모 모양이 유난히 눈에 띄는 건물이죠.

남아있냐고요?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닥친 전쟁의 소용돌이, 그리고 개발시대를 맞아서 오래된 것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정부 소유 건물이거나 종교시설물, 학교 건물 등 이권이 개입될 여지가 적은 것들이지요.


그러하기에 건축전시관과 같은 장소도 생겨나는 것이겠지요
. 옛 모습을 기억하고 현재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로서 말이죠. 참, 전시장 안쪽에 있는 엽서 전시장을 꼭 돌아보세요. 옛날 엽서 사본을 전시하고 있는데, 전시자료보다 더 흥미로운 장면이 많습니다. 인천의 풍경을 찍은 엽서들이라고 해도 인천의 모습만은 아니겠지요. 그 시절, 부산, 대전, 목포, 평양, 원산 등지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왜 이 엽서들을 기념품으로 팔지 않는 지 저는 그게 궁금합니다. 독일 뮌헨을 여행할 때 이차대전 후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 풍경도 기념엽서로 팔길래 몇 장 사온 적이 있거든요. 뮌헨 뿐입니까? 파리, 베를린, 로마...다른 유명짜한 관광 도시들도 옛 풍경을 팔아서 먹고 살잖아요. 엽서 기념품. 내년에는 기대해보겠습니다.

짬뽕 한 그릇(탕수육 포함)과 시간을 거스르는 오래된 풍경
. 그리고 그 속에 잠시 어슬렁거리는 우리들.

오늘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 얼마 전에 출간된 책에 따르면 짬뽕도 재미있는 역사를 담고 있더군요. 인천처럼 중국인들이 살던 개항도시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음식이라나요.



다음 번에는 최근에 문을 연 인천개항박물관으로 가보겠습니다
.

 

 

More information

인천 개항장 근대건축 전시장(옛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
위치-인천시 중구 중앙동 2가 24-1번지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0호


 

더 읽어볼 책

 

만국공원의 기억/ 인천문화재단

인천 자유공원과 개항장의 역사를 보여주는 책. 자료사진이 많아서 쉽게 접근할 수 있어요.

         



차폰 잔폰 짬뽕/ 주영하 지음/ 사계절
우리가 좋아하는 짬뽕에도 역사와 문화가 있다. 알고 먹으면 더 좋을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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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기분이 울적해서 짬뽕이나 먹어볼까 하여 차를 움직였습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꽤나 맛있는 짜장면집이 있지만 사람이란 자고로 가던 곳만 꼭 고집하는 버릇이 있기 마련이라
, 늘 가던 향원으로 향했지요. 향원은 차이나타운과는 조금 떨어진 신포시장 입구에 있습니다.

일요일 오후
, 신포동에는 거대한 나이트클럽이 어젯밤 과음을 호소하는 듯 거무스레한 몸집을 뒤틀고 있더군요. 거긴 늘 그렇지요. 항구 근처의 어수선한 분위기, 뱃사람들이나 뱃사람의 후예들이 하룻밤 놀다 갈 목적으로 들어가는 대형 클럽, 그리고 낡아서 손만 대면 먼지가 주룩 흐를 것 같은 오래된 건물들.


 


1924년에 지어진 인천우체국입니다. 이제 이런 건물을 보는 게 새롭게 느껴지는 거죠.


짬뽕과 탕수육을 기다리며 창 밖을 보니 오, 인천우체국이 보입니다. 인천이 본격적으로 항구로 개발되던 1920년대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우체국은 배에서 내린 물건이나 배로 떠날 물건들이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항구와 맞닿은 도로에 세워졌어요. 그리고 그 옆에는 인천세관과 해운상사들과 상업은행들이 군데군데 자리잡았었지요.

세관은 당시에는 '해관'으로 불렸어요. 인천해관은 검은 나무 격자와 뾰족한 탑 모양의 지붕을 가진 서양식 건물이었어요. 마치 독일이나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분위기의 건물이 세워졌던 거지요. 9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독일풍 인천세관이나 은행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우체국은 그때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있습니다
 


인천세관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가 아니라 독일 어디쯤인 것 같기도 하고요.

 


뒤쪽엔 인천해관이 앞에는 오사카 상선회사가 있어요.
인천 우체국은 항구에 면해 있고 주변에 세관, 상선회사, 해운창고가 즐비한 곳이었죠.


걸쭉한 짬뽕 국물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체국이 더 진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이곳에 자주 올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된 건물을 보러, 오래된 국물 맛을 보러, 오래된 이야기를 들으러, 오래된 길을 걸으러, 오래된 마음을 곱씹으러요.

거리에 온통 묻어있는 알쏭달쏭한 노스탤지어
. 이건 뭘까요? 인천은 그런 빛깔입니다.

 

 

잔뜩 부푼 위장을 쉬게 할 요량으로 차이나타운까지 어슬렁거려봅니다. 곧 눈발이 날릴 것 같은 흐린 날씨지만 다행히 찬 바람이 없어 걸을 만했지요.
길도 걷고 카메라로 툭툭 사진도 찍으면서
예전에 본 1930년대 지도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잘 다듬어진 격자 무늬의 거리가 개항장을 잘 나누고 있고, 해안에는 이미 항구시설이 다 정비가 되어 있었지요. 인천은 수심이 얕아서 큰 배가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었지요. 이곳에 갑문식 도크를 세워 물을 채운 후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뱃길을 만든 것이지요. 해안길에는 큼직큼직한 창고들이 가득합니다
.

 


갑문식 도크가 세워진 인천 항의 모습

 


지겟군이 거대한 상선을 바라보고 있군요.


 


해안동 일대의 모습입니다. 이런 목조 건물 뿐만 아니라, 콘크리트와 벽돌로 지어진 창고들도 많았죠.


인천 개항장 풍경. 집과 사람들로 바글바글합니다.


이 거리는 지금도 예전과 변함이 없습니다. 옛날 길 모양 그대로 지번이 형성되었고 해안로 창고 건물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많아요. 낡고 우중충한 창고 건물은 나이트클럽이나 정비시설로 바뀌긴 했지만 그 분위기가 여전합니다.

눈에 띄는 대로 몇 컷 찍어보았습니다. 오래된 동네라는 느낌이 옵니다.


중구청을 향해 가는 길은 인천이 개항한 이래 일본인을 위한 구역이었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한 이후에는 본정통으로 개발한 곳입니다. 본정(혼마치)는 일제강점기에 성장한 도시라면 한번씩 등장하는 도심의 이름이지요. 본정의 대부분이 중앙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꼬불거림 없이 쭉쭉 뻗는 길 양쪽으로 묵은 흔적이 역력한 건물들이 줄을 잇습니다
. 안쪽 골목은 주택가와 상가, 해안과 가까운 쪽은 대형 창고들이 있죠
.


인천항 부근을 지도로 본다면 이랬어요.1930년대가 아닐까 싶은데요.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옛 본정통, 일본인들이 목조주택을 짓고 살았던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봅니다. 중구청 근처까지 가면 백 년 된 은행건물들이 여전한 자태를 보여줍니다. 일본 제1은행, 일본 제18은행, 일본 제58은행으로 불렸던 건물 세 채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서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은행 인가 번호가 바로 그 은행의 이름이 되곤 했는데, 1은행은 일본 중앙은행이며, 18은행은 나가사키 은행, 58은행은 오사카은행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인천에 세워진 은행 건물들입니다. 중앙에 세워진 것은 일본제일은행, 왼쪽에 단층건물이 일본 제18은행,
그 왼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2층 건물이 제58은행입니다. 이 세 채의 은행은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요.

 

개항장 풍경. 멀리 산 등성이에 있는 건물이 존스턴 별장입니다. 눈에 딱 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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