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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골목, 기억의 목소리

이곳에는 혁명가 체 게바라를 기념할 줄 아는 이가 거쳐 갔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혁명의 기운이 골목 가득 풍기지는 않는다. 점처럼 박힌 채 노란 칠마저 뒤집어쓴 그의 얼굴은 변혁을 꿈꾸는 이들의 슬픈 최후 같기도 하다. 그 옆으로는 투박한 얼굴이 마냥 싱글벙글 웃고 있다. 조롱인지 희망인지 모르겠는 두 얼굴의 묘한 동거. 조만간 이 두 얼굴의 운명은 누군가에 의해 또다시 바뀔지도 모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외진 길목의 시간을 멈추지 않으려는 듯 들꽃은 이제 늙어 홀씨를 퍼뜨리려 한다.



이렇듯 무심해 보이는 골목을 문선희는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80곳이나 기록했다. 그리고 그 골목에서 유년을 보냈던 80명의 이들과 인터뷰도 했다. 이제 모두 40대가 된 그들은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일 무렵 5·18을 겪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들이 중년에 이르러 꺼내놓는 그날의 기억은 성글고 뒤죽박죽이다. 시민군들이 차에서 던져줬던 빵의 달콤함, 총알이 날아올까 봐 두려워 이불을 뒤집어쓰던 불안함, 처음 맞닥뜨린 수레 위 시신의 생경함 등이 뒤엉켜 그것은 해방구의 축제이자 전쟁의 폭력성을 같이 드러낸다. 그 부조리의 시간 동안 그들은 골목에서 놀다가 혼이 났고, 때로는 골목 밖으로 뛰쳐나가 사건 깊숙이 다가가곤 했다. 골목이 주요 사건의 현장이 아니듯 그들이 육성으로 들려주는 경험담은 지극히 파편적이다. 그럼에도 그날을 기억하는 목소리와 골목이 만나자 훨씬 더 정직한 목격담이 완성되었다. 덕분에 흩어진 기억들은 골목에 다시 모여, 님을 위한 행진곡의 멈춘 선율을 다시 부른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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