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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세련된 사람

20년은 묵은 앨범에서 나온 듯한 뿌연 색의 이 사진. 에이라인 스커트에 꽃무늬 스카프, 실내에서도 착실히 고수한 선글라스까지 나름 멋을 부린 흔적이 역력하다. 작품 앞에서 기념으로 취한 포즈까지를 포함해 한때 우리는 이런 사진을 얻기 위해 꽤나 노력했다. 한껏 챙겨 입고 나서는 미술관 나들이는 얼마나 모던한 도시의 일상인가. 이런 날 똑딱이 카메라로 사진 한 방은 남겨야 도시인의 도리를 지키는 법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진에 찍힌 날짜가 최근이다. 유통 기한이 한참 지난 것만 같은 이 사진은 사실 최근에 생산되었다. 예전에는 날짜가 찍히는 사진기야말로 신식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촌스럽다는 인상을 풍긴다.




발품을 팔아 구한 옛날 옷들로 치장한 채 스스로가 사진 속 모델이 된 전은정은 일부러 구형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과거 세련된 사람들의 생활법을 흉내낸다. 촌스럽기는 해도 동화되고 싶지는 않은 사진 분위기로 보아 이 작업이 요즘의 복고 열풍과 같은 부류는 아닌 것 같다. 그는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정확하게 오늘 앞에 불러옴으로써 시간대를 충돌시킨다. 현대인이라면 당연히 스마트폰을 쓰고, 작가라면 당연히 최신 장비를 탐해야 할 것 같은 취향의 강박에 그는 구식의 방법으로 맞선다. 덕분에 유행이란 특정 시대의 욕망이 만들어낸 소비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다소 뻔한 문제의식이 오히려 신선함을 유지한다. 세련된 작업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통념 같아서 두통을 앓던 이 젊은 사진가는 과거를 통째로 옮겨와 자신을 방어해 줄 아지트로 삼는다. 피곤한 시대를 거스르는 나름의 영리한 방법이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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