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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인생


성희진, 비지키드, 스피치, 2012



체르니 30번 이상 연주 가능, 영어 회화 및 독해 중급 이상의 실력은 기본이다. 여기에 플루트나 바이올린을 취미로 하고 발레나 탱고, 수영도 수준급이다. 88만원 세대의 스펙이 아니다.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의 화려한 성적표다. 하나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알고,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며, 여행을 즐길 줄 알아야 중산층으로 통한다는 유럽식 기준으로 보자면,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꾸려갈 삶은 훨씬 풍요로워 보인다. 다만 이런 능력들이 엄청난 사교육비를 통해 압축적으로 길러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주춤거리게 될 뿐이다.

사진가 성희진이 류가헌 갤러리에서 선보이는 ‘비지키드’ 속에는 정말 바쁜 아이들이 등장한다. 아이들은 스키장이나 영어학원은 물론이고 승마장이나 요트장, 아이스하키 링크에서 노련하고 당당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성희진의 사진은 어떤 동정론도 펼치지 않은 채 어린이에 대한 기존의 상투적인 이미지를 배반한다. 아이들은 책가방을 메고 해맑게 교정을 나서거나 보살핌을 필요로 하듯 어두운 거리를 배회하지 않는다. 소설 <아홉살 인생>의 여민도,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도 기대해서는 안된다. 도리어 성희진의 작업은 이제 아이들이 또래나 마을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통해 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접근한 이 아이들의 모습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