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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언더프린트

언더프린트는 화폐나 우표 밑바탕에 깔리는 희미한 인쇄다. 그림과 사진을 오가며 작업하는 강홍구는 이 언더프린트에 착안한 작품을 최근 원앤제이에서 선보이고 있다. 그는 서울의 재개발 동네부터 고향인 전남 신안까지를 어슬렁거리다 밑바탕이 될 만한 담이나 길바닥을 사진으로 찍은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벽에 직접 그리는 낙서를 대신해 자신이 찍은 벽 사진 위에 낙서를 한 셈이다. 생선 꼬리가 뒹굴던 길바닥 사진 위에는 생선 머리를, 나뭇가지 그림자 사이로는 참새들을 그려 넣는다. 세월호에 대한 풍자부터 명작 패러디나 짜장면 그림까지 낙서의 종류는 꽤 다양하다. 특히 여전히 남아 있는 게 신기한 시골 마을의 방공 문구 중 ‘간첩’이라는 글자가 지워진 자리에는 연두색의 네이버 검색창을 그려 넣은 유머 감각이 일품이다.


강홍구, 손님 visitor, 2015


그에게 한국 담벼락은 뭔가 엉성하고 방치된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 엉성함이 작가에게 개입하고 싶은 욕망을 부추겼을까. 미술이라는 것 또한 알고 보면 별 볼일 없는 자기만족의 소산일 뿐이라고 말하던 작가의 태도로 미루어 한편으로 그 엉성함은 모든 창작 활동에 대한 은유로 비치기도 한다. 작업 일부에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의 그림을 포함시킨 것도 이런 힘 빼기의 연장선일 것이다. 벽에 낙서를 하는 일이야 아이들이 전문이기도 하고 인간 본연의 욕망이기도 하다. 언더프린트가 된 사진은 명료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그 위에 그려진 그림들은 결코 심각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제대로 된 사진이나 그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따지고 보면 예술이란 원시 시대 동굴의 낙서에서부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가 힘을 뺀 채 예술과 세상에 대해 던지는 냉소는 유쾌하면서도 뭔가 찔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송수정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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