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역사에서 주거의 변천양식을 일반 건축처럼 구분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옛날이나 요즘이나 집은 마찬가지라는 것인데, 냉난방이나 자동화 시스템 등 현대기술의 덕택으로 주택의 편리함이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고 해도 건축의 본질인 공간의 구조에는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다. 특히 지역의 특수한 조건을 받아들여 지을 수밖에 없는 민간주택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예컨대 대략 9000년 전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있었던 차탈휘위크의 집단 취락지 풍경은 지금의 터키 민간주거와도 비슷한 모습인 데다가, 놀랍게도 중국 허난지방에도 그 비슷한 형태의 주거가 있어 건강한 삶을 지금도 산다. 또한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도시 우르에서는 부자와 빈자가 서로 섞여 산 것이 분명하다. 큰 집과 작은 집들이 흙벽들을 공유하며 치밀하게 조직된 모습은, 요즘의 사회과제 중의 하나인 소셜믹스가 이미 실현된 풍경이다. 심지어 로마시대에 지은 군인아파트는 현대의 연립주택이나 원룸아파트 평면형식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이렇듯 주거형식은 왜 시대를 초월해 존재할까? 아마도 우리 삶이 보수적일 수밖에 없어 그럴 게다. 가족이라는 기초적 공동체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자야 하는 하루 24시간의 생활패턴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삶을 담는 주택 또한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땅의 주거도 마찬가지였다. 온돌을 사용하는 북방식과 마루생활을 즐기는 남방식 등 지역의 기후와 습관에 따른 공간들로 구성된 우리들 고유의 집들은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수천년의 역사를 거듭해 내려온 양식이다. 서양미학의 양식적 구분에 의하면 기와집과 초가집밖에 없으니 우리의 전통가옥을 고전, 고딕, 바로크 같은 큰 건축양식으로 구분하지 못한다. 더구나 우리 선조들에게 건축은 윤리적 사유의 결과물이지 미학적 대상이 아니었다. 자연과 인간, 나와 가족, 가족과 이웃 사이에서 취하는 태도에 따른 공간의 구성과 연결이 주된 과제였으며, 집의 모양이나 장식은 늘 부차적이었던 까닭에 시각적으로 주택의 양식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장구한 세월 동안 유지해온 우리의 이 주거형태가 혁명적으로 변한 때가 있었으니 바로 1960년대 말이었다. 양옥이라는 형식의 주택이 생기면서 종래의 주택을 한옥이라고 뭉뚱그려 분류하며 나타난 것이다. 혁명의 시작은 공간개념의 완벽한 변환이었다.
치악산 아래의 원주 황골. 1974년 황량했던 밭에는 번듯한 양옥집들이 들어섰고 자갈길은 신작로로 변했다. (출처 : 경향DB)
우선 우리 고유한 한옥에서는 방의 이름을 위치에 따라 불렀음을 상기하시라. 안에 있다고 안방, 건너편에 있으므로 건넛방이요, 문간에는 문간방이다. 심지어 화장실도 뒤에 있어 뒷간으로 불렀다. 그러나 양옥에서는 목적에 따라 방의 이름이 정해진다. 거실, 침실, 식당, 화장실 등이 그러한데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방에는 소파나 침대, 식탁 등이 늘 그 공간들을 채우고 있다. 거주인은 정해진 목적에 따라 거실에서는 소파에 앉고 침실에서는 잠을 자며 식당에서는 식사를 한다. 목적을 가진 방이 우리 삶의 형태를 미리 규정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한옥의 방들은 위치에 따른 이름일 뿐 목적이 없으니 방안에 가구가 있지 않다. 그저 밥을 먹고 싶으면 밥상을 가져와 식당으로 쓰면 되고, 탁자를 놓으면 공부방이 되며 요를 깔면 침실이요, 담요를 깔면 화투방으로 변한다. 거주인이 원하는 대로 방은 그 목적을 달리하도록 평상시에는 비어져 있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마당이다. 중정이나 마당을 가진 주택이 세계 곳곳에 있지만 우리의 마당은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같은 아시아라고 해도 일본의 마당은 쳐다보기만을 위한 것이며 중국 사합원의 마당은 위계적 질서를 강조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당에서는 어린이들이 놀면 놀이터요, 노동을 하면 일터며, 제사와 축제를 행해도 그 목적이 충실히 수행되는 공간으로 완벽히 변한다. 그리고 그 일들이 끝나면 고요로 돌아와 거주인을 사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신비한 공간이며 바로 비움의 실체였다. 비움. 이를 이루도록 마사토만 깔린 이 공간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는다. 그러니 예쁜 풍경도, 질서도 없는 이 모호한 공간이 양옥에서 용납되지 않을 게 당연하다.
집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이어야 했다. 1970년대 남진이 부른 이 노래, 경제개발의 기적을 믿으며 땀 흘리는 서민들에게 인생의 목표가 된 듯,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거리에 흘러나왔다. 이발소 달력 그림에서 보았을까, ‘불란서 미니 2층집’이라는, 프랑스에는 있지도 않은 전대미문의 집이 방방곡곡에 지어졌다. 각도가 다른 박공의 지붕을 전면에 놓고 지면에 떠서 발코니와 테라스를 가진 이 집은 당연히 침실, 거실 등 목적적 방들을 가졌다. 초원을 만들기 위해 집 앞은 푸른 잔디로 덮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평생 살고 싶어” 담장을 높이 둘러 그 위에는 병조각과 쇳조각을 박았다. 그 결과 동네의 풍경은 더 이상 모여 사는 모습이 아니라 붙어 살 뿐인 주택단지로 변하여 전통적 공동체가 붕괴되고 만 것이다. 물론 마당은 목적이 없으니 사라지거나 그 위를 덮어 실내로 만들어 고깃집의 홀로 변해야 했다. 비어진 공간은 있는 공간이 아닌 까닭이었다.
개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 속에 투영된 시대적 모순과 우울을 그린 김원일의 자전적 소설 <마당 깊은 집>은 이렇게 쓰여지면서 끝을 맺는다. “……4월 하순 어느 날, 나는 마당 깊은 집의 그 깊은 안마당을 화물 트럭에 싣고 온 새 흙으로 채우는 공사 현장을 목격했다. 내 대구생활의 첫 일년이 저렇게 묻히고 마는구나 하고 나는 슬픔 가득 찬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굶주림과 설움이 그렇게 묻혀 내 눈에 자취를 남기지 않게 된 게 달가웠으나, 곧 이층 양옥집이 초라한 내 생활의 발자취를 딛듯 그 땅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그 이층 양옥집이 바로 ‘불란서 미니 2층집’인 바, 이 정체불명의 주거양식이 우리의 오랜 기억을 지우고 아름다운 풍경을 무너뜨린 주범이었다. 그로써 윤리는 버려지고 미학의 시대가 도래하여 작금, 물신의 망령이 우리 사회 곳곳을 배회하며 극단의 갈등을 양산하고 있는 것일 게다. 비움을 버린 톡톡한 대가다.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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