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10년 만에 헬싱키를 찾았다. 이 도시가 야심 차게 추진하는 도시디자인 전략을 알아보는 공식적인 일 외에, 나는 핀란디아 홀 바로 옆에 최근 새로 지은 ‘뮤직센터’라는 콘서트 홀을 보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 1971년에 개관한 핀란디아 홀은 작곡가 시벨리우스를 기념하여 이 나라가 자랑하는 건축가 알바 알토가 지은 걸작이다.
그런데 아무리 잘산다고 해도 인구 60만명에 불과한 도시에 또 새로운 음악당이라니…. 이 의문은 현지의 설명을 듣고 풀렸으나,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핀란디아 홀은 핀란드의 토속적 아름다움을 건축의 형태와 공간으로 치환하여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일컫는 현대건축의 보물이다. 근데 이 아름다운 건축이 음향에서 문제가 줄곧 제기되었다. 내부의 천장 형태가 건축가 고유의 디자인 패턴 때문에 흡음 위주로 되어 적정 잔향시간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천장 디자인을 다소 바꿔서 보강할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변경이 알바 알토의 허락을 받을 수 없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결론지었으며, 이 건축의 원형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에 일치를 본다. 대신, 완벽한 음향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음악당을 바로 옆에 짓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알토의 홀은 음향 조건에 문제없는 전자음악 등 가벼운 음악을 위한 공연장으로 쓰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라면? 천장이 아니라 건물도 고치고 말았을 게다.
건너편 나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는 스웨덴이 자랑하는 건축가 군라드 아스플룬드(그는 1940년 55세에 운명했다.)가 설계한 시립도서관이 있다. 책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홀 가운데 서게 되면 마치 지혜 속에 파묻힌 듯, 책의 공간을 조우하는 감격에 싸이게 된다. 인간과 책을 만나게 하는 곳이 도서관의 본질이라는 그의 주장이 정확히 건축화된 것이다. 1928년 개관 때 20만권의 책을 소장하도록 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증축해야 할 필요가 꾸준히 대두되었고 마침내 이를 위한 국제설계공모 절차까지 최근에 거쳤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 건축가의 작품이 훼손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시민들의 간청으로 이 증축 계획은 결국 취소되고 만다.
이번에 연이어 알게 된 이 두 가지 사실이 나에겐 자괴가 되어 여행 내내 내 몸을 감싸고 죄었다. 우리의 초라한 문화풍경이 그 사실에 오버랩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자랑스러운 건축가들이 있었다. 김중업과 김수근. 암울한 시대 불모의 땅에서 세계와 겨루며 한국의 건축을 알렸던 거장이었고 시대의 선각자였다. 특히 나의 스승 김수근 선생은 건축에서만이 아니라 전쟁과 빈곤으로 빈사 상태에 있던 한국문화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척박한 문화환경 속에서 문화예술지를 표방한 잡지 ‘공간’을 창간하여 수많은 문화적 성취와 담론을 만들었으며, 최순우 백남준 같은 시대를 풍미하던 문사들을 모아 한국의 시대와 문화를 논했다. 조그만 공간사옥 내에 소극장을 만들어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최초로 소개했고, ‘병신춤’을 추던 지방의 예인 공옥진을 중앙무대에 서게 하는 등 사라져가던 한국의 전통문화를 적극적으로 발굴하며 지평을 넓혀나갔다. 1975년 10월 공간지 100호 발행을 자축하기 위해 사재로 명동극장의 무대에 홍신자 황병기를 올려 ‘미궁(迷宮)’을 공연했을 때, 모두들 한국 현대문화의 발아라고 말했다. 그런 그를 1977년 미국의 ‘타임’은 ‘한국의 로렌초’라고 부르며 한국문화의 중흥을 이끄는 강력한 후원자로 전 세계에 알린 바 있다.
그러나 1986년 6월14일 그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계적 걸작을 남긴 건축가들이 기록하는 생애가 보통 90세 이상인 것을 상기하면 요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가 건축가로서 활동한 25년 동안 이룬 업적은 마치 100세를 산 듯 엄청난 것이었다.
그의 공간사옥은 어떤 조사를 해도 최고의 한국 현대건축 리스트에서 선두의 위치를 놓친 적이 없어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가 불과 35세에 설계한 KIST 본관은 1966년 당시 해외 선진도시에 지어졌던 어떤 건축보다도 선진적이며, 비슷한 시기에 미완의 설계로 지어진 세운상가는 그 당시 세계 유수의 건축가들이 실현을 열망했지만 거의 유일하게 서울에서만 완성된 메가스트럭처(Mega Structure)였다. 지금도 이를 목격하는 외국 건축가들은 열광하며 이 건축들이 해외에 왜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아해한다. 마산성당과 경동교회, 청주박물관 그리고 주옥같은 주택들,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한국의 현대건축에 남긴 보석이었고 모더니즘의 족적이 희미한 우리가 반드시 보존해야 할 현대의 유적이 되었다.
믿기로는, 한국문화의 토양 형성에 대한 김수근의 공헌은 이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너무 쉽게 잊었다.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은 분탕질과 서툰 변형으로 건축의 진정성을 잃게 했고 우석대학병원은 아예 없애버렸다. 별빛 내리던 경동교회의 옥상은 덮었으며, 청주박물관은 몰지각한 증축으로 공간을 변질시켰다. 그리고는 그의 분신이며 한국현대문화 발아의 현장이던 공간사옥은 상업화랑에 팔아넘기고 만다.
공개매각이 유찰된 종로구 원서동 '공간' 사옥 모습. 한편 문화재청은 대지면적 1천18㎡, 건물면적 1천577㎡의 공간사옥 중 고 김수근 선생이 1971년 설계한 옛사옥(224.56㎡)에 대한 문화재 등록을 검토 중이다. _ 연합뉴스
김수근이 병환으로 세상을 뜨며 남긴 30억원의 빚, 우리 고유의 가치를 찾자며 외치던 ‘한국학파’의 완성을 위해 그 암울한 시대와 거친 땅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사랑하고 사랑한 대가였다. 그러나, 그에게 측량할 수 없이 많은 문화의 빚을 진 한국사회는 그를 위해 어떤 무엇도 하지 않았다. 후배들이 푼돈을 모아 만든 가난한 문화재단 하나가 겨우 김수근 건축상의 행사로 그를 기억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난달, 강남의 라마다 르네상스호텔을 헐고 그 자리에 더욱 큰 호텔과 상업시설이 들어서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신문에 보도된 새로 들어설 건물은 3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던 건축을 깡그리 지우는 깡패 같은 모습이었다. 말이 거친가?
그 르네상스호텔은 바로 김수근이 병상에서 그렸던 그의 마지막 유작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반문화적이며 이 시대가 이렇게까지 몰염치한가?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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