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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뉴욕에서 출장 온 친구를 만나러 시내에 나갔다마침 세일기간이라 백화점 주변 도로는 말 그대로 주차장이다. 참고로 친구는 뉴욕 코리아소사이어티라는 곳에서 다양한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www.koreasociety.org) 보통은 전시 준비 차 1년에 한번 정도 혼자 한국을 방문하곤 하는데, 이번엔 다른 직원과 함께였다.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는 젊은 직원은 이번이 첫 한국방문이라고. 건축 학도답게 한옥을 보고싶어 해서 아쉬운 대로 한옥으로 된 식당에 가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사 후 행선지는 인사동. 이젠 고궁이 아니고서야 제대로 된 한옥 구경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더구나 인사동 역시 '전통문화의 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온갖 종류의 짝퉁이 넘쳐나는 지라 보여줄 것이 별로 없다.

그러고 보면, 서울은 추억이 머물기에 적당한 도시가 아닌 듯하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은 모두 부지부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그 속에 켜켜이 쌓여있는 추억들도 속절없이 먼지 속으로 사라진다. 어찌보면 그게 인생의 순리겠지만, 자연스럽게 나이듦을 참지 못하고 쉽게 고치고 때려 부수고 밀어내 버리는 데에는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민다. 갑자기 소중한 것을 강탈당한 느낌이랄까. 청진동과 피맛골이 사라진 낯선 풍경 앞에서 상실감과 무력감에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기억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사라져버리면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될까. 아, 어쩌다 이렇게 매정한 도시가 됐는지.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 겨우 신세계백화점 언저리까지 왔다. 신호에 걸려 한참을 서 있다 보니마음 한 구석이 묘하게 아려온다. 오늘 아침 창졸간에 접한 박완서 선생님의 부음 탓이다어떤 특정한 공간이 불러 일으키는 기억과 그에 따른 감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 이곳 - 신세계 본점 앞은 언제나 꿈결같이 아득하고 애련한 우수가 감도는 곳이다다른 지역에 비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커다란 분수대를 중심으로 서양식 근대 건축물인 신세계와 한국은행이 마주하고, 명동과 을지로 입구, 소공동, 남대문시장으로 가는 길이 방사선으로 뻗어있다. 그리고 그 길, 후미진 골목마다 옛 영화를 간직한 오래된 노포(老鋪)들이 포진해 있다.


지금 바로 옆에 보이는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은 1930년에 세워진 건물이에요. 서울에서는 아주 오래된 건물에 속하죠원래는 일본 미쓰코시 백화점의 경성점이자. 최초의 백화점으로 세워진 건물이에요. 광복 후에는 미군의 PX건물로 사용되기도 했구요. 사실 오늘 아침에 박완서라는 유명한 소설가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바로 그분이 당시에 이곳에서 일하셨답니다.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 주문을 받는 일종의 삐끼역할이었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당시 그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들 중에 한국의 국민 화가라고 불리는 박수근 씨도 있었다는 거예요. 두 사람 모두 전쟁통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PX에서 일하게 됐던 거죠. 이 운명적인 만남을 쓴 소설이 박완서 선생님의 데뷔작 나목이에요. 박수근 화백이 즐겨 그리던 소재도 바로 나목이었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분은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 몰라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랍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젊은 직원이 아주 흥미있어 한다. 정말 전쟁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두 사람이 있었을까전쟁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미군의 PX라는 낯선 곳에서 만날 수 있었을까. 전혀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대학 신입생으로 빛나는 청춘을 보냈을 터이고, 또 한 사람은 화단의 중견화가로서 화업에 매진했을 테니까 말이다.


                  미츠코시 백화점 엽서. 왼쪽이 경성우체국(현 중앙우체국), 오른쪽이 미츠코시백화점(현 신세계 본점)이다.



  
 







PX 초상화부 작업 장면. 왼쪽이 도예가 황종례, 한 사람 건너 박수근이 보인다.  1952-54년경.


위 사진 · 구글에서 업어온 사진. 6.25직후 미군 PX건물로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색 테두리의 PX간판이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나목을 읽은 것은 중학교 시절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의 몇 장면 - 특히 퇴근길에 두 사람이 을지로입구 전차역까지 함께 걷거나 명동의 노점상에서 움직이는 인형을 구경하는 장면 등은 마치 실제로 내가 겪은 일인양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래서 가끔 을지로입구나 명동을 걸을 때면 나목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곤 한다. 더구나 롯데백화점 맞은편 명동 입구 쪽에는 언제나 움직이는 인형을 파는 노점상이 있어서, 두 사람이 인형을 구경하던 곳이 바로 이 부근이 아닐까 혼자 생각하곤 한다.
 
















어렸을 땐 나도 이런게 참 재밌고 신기했는데 말이쥐...-.-;;




오래된 도시는 사람들의 꿈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과 땀과 눈물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끝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 속에서 지친 도시민들은 따뜻하게 위로받기도 하고 다시금 힘을 내기도 한다. 진짜 디자인이 잘된 도시는 이렇게 무형의 깊이를 간직한, 정서적으로 안정된 도시가 아닐까. 내게 신세계 앞은 바로 그런 곳이다. 방사선으로 난 길마다 수많은 추억들이 녹아있고, 그 길을 걸으며 나는 꿈을 꾸고 힘을 얻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당시를 추억한 박완서 선생님의 글이 어느 도록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책장을 뒤져보았다. 역시, 1999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우리의 화가 박수근>의 도록 수록글이다. 옮겨 적기엔 다소 글이 길지만, 그리운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어 인용해 본다.




박수근의 그림을 많이 보여주고 싶지만, 작품 이미지 저작권 탓에 가지고 있는 도록 몇 권을 대신 사진 찍어 올린다
· 아래 두 권은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에서 열린 <박수근과 그 시대 화가들전>(2004, 왼쪽)과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우리의 화가 박수근전>(1999, 오른쪽) 도록
위의 것은 1965년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열린 <‘65 박수근 유작전>의 출품작 79점 중 2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아 2009년 갤러리현대에서 만든 전시 도록이다.     
아래·1965년 중앙공보관화랑에서 열린 박수근 화백 유작전 팸플릿을 재현한 것. 6점의 흑백 도판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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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이 직접 쓴 도록 수록글



조금만 인용하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 모두 타이핑 하게 됐다

거칠고 황량한 시절, 그 아픔과 상처를 온몸으로 견디고 이겨내 예술로 꽃피워 내신 두 분이 문득 너무 그립고 감사하다.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들을 그림으로, 문학으로 남겨 기억하게 해주셔서 너무나 고맙다. 작품 속에서는 모두 헐벗은 나목(裸木)을 그렸지만, 분명 그것은 '희망'을 그린 것이었을 게다. 쓰라린 상실과 아픔을 넘어 다시 새순이 돋고 푸른 잎이 피는 봄을 그리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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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잠깐 넋 놓고 있다 보면, 금새 포스팅 할 시기를 놓치고 만다
. 전시 일정이라는 것이 대체로 길지 않고, 또 다른 전시가 계속 이어지다보니 , ...’ 하다가 적당한 타이밍을 놓치기 십상. 이런건 미술 쪽만의 이야기는 아닐텐데, 세상의 '파워 블로거'들은 도대체 얼마나 빠릿빠릿하고 부지런한 분들인건지. 마음 속 깊이 존경심이 일지 않을 수 없다. 블로그 업데이트에 대한 압박에, 소박하게나마 지난 1주일의 행적을 적어보기로 한다. 말 그대로 (나름) 폭풍 업뎃이닷!


신라 구법승 혜초를 따라서

16
(일요일),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영하 17도의 강추위를 뚫고 가면서 움화핫~ 오늘 박물관은 내가 접수한다고 속으로 뻐겼지만, 이런, 웬걸,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다. -,.-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학부모 관객들을 간과한 탓이다. 그러고 보니, 새로 지은 박물관이 터무니없이 크고 넓다며 불평한 것 역시 생각이 짧았다.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우리에겐 매우 적당한 크기였던 것이다. 요즘 소그룹으로 어린아이들을 인솔하고 와서 유물을 설명하는 분들이 부쩍 눈에 띄는데(한 바퀴 도는 동안 열 팀도 더 보았다) 박물관이 넓으니까 서로 크게 부대끼지 않고 관람하는 모습이었다. 연초에 용산으로 이전한 후 국립중앙박물관 관람객이 1500만 명을 돌파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과연, 요즘 대세는 박물관이었던 것이다.




현재 기획전시실에는
<실크로드와 둔황-혜초와 함께하는 서역 기행전>(2010.12.18-2011.4.3)이 열리고 있다. 8세기 신라승 혜초의 서역 여행지를 따라 파미르고원 동쪽의 실크로드 문화를 4부로 나누어 보여주는 흥미로운 전시다. 각 전시장은 실크로드 오아시스 도시들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전시용 모형까지 제작해 실감나고 입체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활발한 동서 문명 교류의 장()으로서, 찬란하고 다채로운 중앙아시아 문화를 감상하고 동시에 동서양 문화의 영향관계와 그 연결고리를 찾는 즐거움도 함께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말로만 듣던 <왕오천축국전>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왕오천축국전>은 신라승 혜초의 서역 여행기를 말한다. 723727년 다섯 천축국(인도의 옛 이름)과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 서역지방을 4년간 기행하고 쓴 여행기라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8세기 이후 여러 고문서에 <혜초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이름으로 내용이 인용되기만 할 뿐 실체를 볼 수 없다가, 20세기 들어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세상 빛을 보게 됐다. 서양인으로 드물게 유창한 중국어와 한자실력, 풍부한 동양학 지식을 갖추고 있던 펠리오는 1908년 중국 둔황 막고굴 장경동에 가서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각종 불경과 고문서 더미 중 <혜초 왕오천축국전>의 필사본 두루마리를 발견해 이듬해 학계에 보고했다. 그리고 1915년 일본인 학자에 의해 혜초가 신라의 승려라는 것이 밝혀지게 됐다.



  <왕오천축국전>(부분) 자료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 혜초는 704년경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719년 열다섯 살에 밀교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723년 홀홀 단신 인도로 구법(求法) 여행을 떠난다. 광저우에서 뱃길로 인도로 건너가 불교의 8대 성지를 차례로 순례하고 서쪽으로 간다라를 거쳐 페르시아와 아랍을,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쿠차와 둔황으로, 드디어 당나라의 수도 장안(현재 시안)에 도착한 것이 72711월!2km의 대장정이었다. 하지만 이 4년간의 여행 후에도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장안에 남아 밀교를 연구하며 78076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그러니까 ‘1300년 만의 귀향이라는 표현은 조금 잘못되었다는 생각. 또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공연히 우리가 화를 낼 일도 아니라는 생각. 왜냐하면 완전히 헐값이긴 해도 펠리오는 장경동의 석실을 지키고 있던 왕 도사에게 엄연히 돈을 주고 문서 뭉치들을 사왔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갖고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말이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라는 승려의 구법여행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불교는 물론 당시 그가 거쳐 간 여행지의 의식주, 언어, 지리, 기후 등 일상생활과 자연환경을 비롯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풍부한 내용이 생생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어 현지견문록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와 관련해 더 자세한 내용을 공부하고 싶다면, 정수일 역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학고재, 2004)을 추천한다.

 


밑에 깔려있는 종이는 이 책의 부록으로, 1987년 문화공보부에서 영인한 <왕오천축국전> 두루마리를 축소 제작한 것이다. 전시장에서 실물로 보시길. :-)

심화학습을 위한 참고문헌으로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께,

피터 홉커크 지음, 김영종 옮김, 실크로드의 악마들(사계절, 2000),

중앙아시아 미술에 대한 책으로는,

권영필 지음, 렌투스 양식의 미술(사계절, 2002)

을 추천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일단 실제 유물을 보는 것이 책보다 먼저일 듯. 그럴땐, 주저하지 말고 국립중앙박물관의 3층 중앙아시아실로 올라가보자. 놀랄만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은 중앙아시아 타림분지에 있는 고대 오아시스 도시들-미란, 호탄, 쿠차, 투르판, 돈황 등 주요 유적지의 유물을 대량으로 소장하고 있다. 석굴사원 등에서 뜯어온 벽화가 60여 점, 불화, 불상, 토기, 토우 및 생활용품 등 조각과 공예품만 17백여 점이 있는데, 이 정도면 세계 유수의 박물관과 견주어도 절대 빠지지 않는 수준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어찌된 영문일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중앙아시아에 탐험대를 보내 보물을 수집 약탈해 간 실크로드의 악마들은 대부분 서구 열강 출신의 탐험대였다. 당시 우리는 일제 강점기. 우리가 중앙아시아에 발굴 탐사대를 보낼 수나 있었을까. 우리 것을 지키지도 못하는 판에 남의 것을 빼앗아 올 여력이 있었을 리 없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이 의외의 결과는 유일한 아시아 제국주의 국가로 중앙아시아 탐사에 참가한 일본 오타니(大谷) 탐험대와 절묘한 타이밍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승려들로 조직된 오타니 탐험대는 중앙아시아를 세 차례나 답사하며 수많은 유물을 수집했다고 한다. 거리상 이들 수집품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어 있었는데, 그중 일부가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전시되던 중 광복을 맞게되었고 그결과 그대로 눌러앉게 되어버린것.


                                         조선총독부박물관 시절, 조선시대 임금의 집무공간이었던 경복궁의 수정전(修政殿)에 일본 오타니 탐험대가 수집해 온 벽화 등을 전시했다.


기획전 <실크로드와 둔황-혜초와 함께 하는 서역 기행전>4월 초까지 하지만, 이렇게 긴 전시일수록 놓치기 쉽다. 서둘러 가보자. 더불어 용산까지 먼 걸음을 한 김에, 중앙아시아실의 상설전도 둘러보고 오면 더 좋은 공부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참에 중앙아시아 문화와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져봄은 어떨지.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그 문화적 친연성에 분명 놀라운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게다가 중앙아시아의 출토 유물들은 다른 지역의 유물을 감상할 때보다 더욱 멜랑콜리한 감상에 젖어들게 한다. 대부분 사막과 고원으로 이루어진 건조한 지역이어서인지, 천년 이상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종이, 나무, 의류는 물론이고 항아리 속에 남아있는 구운 과자까지 한입 베어 물고 싶을 정도다. 바로 엊그제 일 같이 생생한 듯하면서도 돌아올 수 없는 세월의 강이 가로놓인듯 신비롭고 아득한 그 느낌. 동서교역의 요충지로서 최첨단 유행을 자랑하던 오아시스의 여러 상업도시들은 지금은 비록 모래바람 속에 파묻혀 잊혀져버렸지만, 그 화려한 영화의 흔적은 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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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새해 소망이 뭔가요? 올해 꼭 하고 싶은 일은?

지난 달 말부터 아마 대여섯 번은 들었을 거다. 글쎄... 가만히 머릿속으로 해야할 일들의 순위를 정하다가 적어도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등산을 한다라는 항목을 넣었다. 헬스장에서 뛰는 것은 답답해서 못하겠고, 그렇다고 운동을 하지 않고 살기에는 저질 체력이 염려되는 까닭이다.

쉽게 싫증을 내는 성격을 감안해 오버하지 않고 대략 2시간 안팎의 가벼운 산책코스를 개발하기로 했다. 그래서 마련한 첫 번째 코스가 삼청공원에서 출발하는 북악산 산책코스! 평소 운동과 담을 쌓은 사람도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는 초급자용 코스라 하겠다. 2시간 정도 열심히 걷다보면 살짝 땀도 나고, 약간의 난코스도 섞여 있어서 (등산하는 분들이 들으면 일제히 콧방귀를 뀌겠지만) 평소 숨쉬기 운동만 겨우 하는 사람들은 오랜만에 운동했구나 하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지난
3주간 세 차례나 실행에 옮겼으니 이미 계획은 초과달성이다.(으쓱~) 더구나 같이 간 친구들 모두 만족감을 표명한 지라 자신 있게 이곳에 소개한다. 이름 하여 미술과 미식이 있는 산책코스~!”


일단 시작은 삼청동
. 오전 11시다. 왜냐하면 서울에서 둘째로 잘하는 집이 이때 문을 열기 때문. 이건 뭐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팥죽 안에 들어있는 커다란 찹쌀떡을 먹고 나면 속이 아주 든든하고 몸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팥죽 한 그릇의 위력이란... 추위야, 가라~! 팥죽 외에도 근처 유명한 수제비집이나 다른 대안들도 많으니 취향대로 골라잡으면 된다능.


 

 

하지만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기 전, 잠깐 짬을 내어 근처 몽인아트센터(www.mongin.org)에 들러보는 것은 어떨지. 수제비집과 팥죽집 사이 길가에 자리잡고 있어서 잠깐 보고 나오기에도 좋다. 게다가 무료. 개관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월요일은 휴무다. 현재 강석호, 김윤호, 서동욱, 안정주, 최기창 등 5명의 작가가 참가한 전시 <행복>(2010.11.18.1.16)이 열리고 있는데 서동욱 씨의 비디오 작품을 빼곤 관람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도 않는다. 몽인아트센터는 5층짜리 노출콘크리트 건물로 2007년부터 국내외 유망한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좋은 기획전도 꾸준히 선보이는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일반인들에게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 지척인 삼청동수제비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바글바글한데 말이다. -.- 어차피 가는 길, 따로 시간을 낼 것 없이 한번 들러보자.


팥죽집에서 천천히 삼청공원으로 이동한다
.(대략 10분 소요) 여기서 나무계단이 아닌 오른쪽 방향이 바로 삼청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공원 곳곳에 붙어있는 야생 멧돼지 주의 현수막. 하지만 정작 멧돼지와 맞닥뜨리게 되면 119에 신고할 정신이나 있을까?


사실 삼청공원을 찾은 건 거의 34년 만이었다. 삼청동에서 저녁을 먹게 되면 소화도 시킬 겸해서 가보곤 했는데, 오랜만에 와보니 완전히 새로워진 느낌이다. 지난 몇 년간 수없이 들어온 디자인 수도 서울이라는 구호는 매우 거슬리고 수긍할 수도 없었지만, 서울의 산길은 확실히 달라졌다. 쓸모있게 '디자인'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 자꾸 걷고 싶어지잖아~


삼청공원은 말바위전망대 부근에서 서울성곽과 만난다. 말바위전망대까지는 20분 정도 소요되는데, 천천히 걷고 있노라면 문득 새소리가 크게 들리면서 속세를 떠나 크게 한 발자국 산속으로 진입했음을 실감하게 된다.

 

낑낑거리며 말바위전망대에 오른다. 안내표를 보니 말바위는 조선시대에 말을 이용한 문무백관이 시를 읊고 녹음을 만끽하며 가장 많이 쉬던 자리라고. . 말을 타고 여기까지 올랐다니. ...아마 성곽을 따라서 올라온 거겠지? 간간이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날이어서, 전망은 이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한숨 돌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팔각정, 숙정문표지를 따라 성곽 아래쪽 흙길과 산을 끼고 비스듬히 이어진 나무계단을 걷는다. 늘상 시멘트 바닥만 딛고 살다가 자연 속을 걷고 있으려니 기분이 정말 상쾌하고 좋다. 살짝 흩뿌린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서 조심스러웠지만 주변의 수려한 경관에 자꾸 정신이 팔린다.
 


숙정문으로 가려면 신분증을 보이고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 1968년 김신조 및 북한 특수부대원 30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려 했던 사건(1.21 사태) 이후, 40년 동안이나 닫혀있던 이 길이 몇 년 전 개방되었지만 아직은 정해진 시간에만 허가증을 받고 통과할 수 있다.(410월은 오전 9오후 3시까지, 113월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입장가능. 오후 5시 퇴장매주 월요일은 휴관)


여기서 숙정문까지 대략
20, 숙정문에서 성곽을 따라 청운대까지 30분 정도 걷는다. 청운대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굽어보면 멀리 세종로가 보인다. 그러니까 (인왕산으로 자주 오인받곤 하는) 북악산은 바로 청와대의 뒷산, 경복궁 바로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산이다.
 


청운대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다 보면 유명한
‘1.21사태 소나무가 있다. 무장공비와의 총격전 때 총알 15발을 맞은 비운의 소나무다. 지금은 이렇게 총알자국을 가려놓았다. 소나무 한그루가 총알을 15발이나 맞았다는 것도 놀랍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을 보면 당시의 총격전이 얼마나 힘들고 치열했는지 짐작이 간다.(윽. 어떻게 여길 뛰어다닐 수 있단 말인가.)



그나저나 정말 엄청난 내리막길이다. 거의 45도 경사로, 다리가 후둘거릴 정도다. 난간에 살짝 손을 댄 채 시선을 발끝에 고정하면서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맞은편으로 힘들게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며, 그나마 조금 위로를 삼는다. -_-;;




이렇게 정신을 집중하고 30~40
분 열심히 내려가면 드디어 창의문 안내소. 목에 걸고 있던 허가증을 반납하면 코스 완주!


총 소요시간은 (같이 가는 친구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대략 2시간 안팎으로 잡으면 될 듯하다.
 


창의문은 부암동의 명소
클럽 에스프레소뒤쪽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창의문을 나와 바로 오른쪽 오르막길에는 또 다른 명소 자하 손만두집이 있다. 두어 시간 산행에 팥죽은 이미 언제 먹었냐 싶고... 늦은 점심으로 깔끔한 개성식 손만두국을 주문한다. 후식으로 나오는 매실주스를 마시면(대개 달라고 해야 준다) 뭔가 아주 산뜻하게 마무리된 느낌이랄까.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환기미술관으로 이동한다. 길 건너 떡집 앞으로 내려가면 된다. 환기미술관은 수화 김환기(1913~1974)를 기리는 사립미술관으로,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기리고 후배 작가들을 후원하는 성격의 상설전과 기획전을 꾸준히 열고 있다.(http://whankimuseum.org)



보통은 느긋하게 그림을 감상하고 싶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지만 미술관 건물을 보러 오는 건축가 지망생들도 꽤 많다
. 미술관 건물은 올림픽선수촌아파트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설계한 재미건축가 우규승 씨의 작품인데, 솔직히 건물이 세워진 부지는 뭔가가 들어서기에는 부적절한, 가파른 계곡과 같은 곳이다.

수화의 부인 고 김향안 여사가 성북동의 옛집 노시산방
(老柿山房, 원 주인은 근원 김용준)을 떠올리며 고심 끝에 정한 곳이라고 하는데, 건축가에겐 매우 어려운 숙제였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 주변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심플한 건물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매력을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꽃피는 5, 6, 전시를 보고 건물 외곽을 도는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아트숍에서 스카프, 우산, 가방 등 예쁜 아트상품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미술관을 나와 다시 찻길로 돌아오면, 오른쪽은 평창동 방향이고, 길 건너 왼쪽 버스정류장엔 시내로 가는 3개 노선의 버스가 지난다. 교보문고에 가서 책 구경이나 좀 해볼까, 늘 생각은 하지만 아직까지 이눔의 저질체력으로는 무리인 듯. 갑자기 다리가 풀리고 졸음이 쏟아진다. 어서 어서 집으로 고, ~


창의문 주변 100m전방 가볼만한 곳

- 산모퉁이 카페 : 드라마 <커피 프린스>에서 이선균의 집으로 나온 곳. 요즘은 조금 줄었지만, 드라마 방영 후로 이곳을 찾는 이들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 걸어야 한다. 등산한다는 기분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는거. 분명히 경고했다는거. ^^;;

- Cheers : 프라이드 치킨이 맛있는 곳. 바삭바삭 잘 튀긴 치킨과 시원한 맥주 한 잔 어떠신지. 치킨 외에 다른 술안주도 매우 갠춘하다.

클럽 에스프레소 : 주차가 마땅치 않다는 게 유일한 단점. 2층은 커피 볶는 공장. 1층엔 다양한 커피 도구를 판매하며 몇 가지 커피를 시음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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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는 그림이 있다.

좀처럼 발걸음을 뗄 수 없고 볼수록 한없이 빨려들어 갈 것만 같은, 그런 그림 말이다.
홍수연의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캔버스 속으로 조용히 흡수되는 것 같은,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홍수연을 알게된 건 대략 2002∼2003년이었던 듯하다.
뉴욕에 사는 한 친구가 "홍수연 씨 알지?" "홍수연 씨 있잖아…"라는 식으로 자꾸 말을 꺼내서 처음 이름을 들었고, 이미 알고 있는 작가라고 착각하기도 했다.(홍지연, 홍지윤, 홍주희 등 비슷한 이름의 작가들이 꽤 있다.)

그러다 친구가 한국에 올 때마다 함께 만나는 사이가 되었고, 대개 미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주로 건강유지법 -_-;;) 다소 '아줌마스러운' 관계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일 년에 한두 번, 만남을 이어갔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림보다 사람을, 미술에 대한 생각보다는 그 사람의 기호와 스타일을 먼저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처음 봤을 때 홍수연은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람이었다.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몸매에 섬세한 얼굴선, 자연스럽게 휘날리는 풍성한 머리카락 등이 한 눈에 확 시선을 사로잡아버리는 보기 드문 캐릭터였다. 이런 타고난 '여신 포스'에 살짝 기가 눌렸지만, 호탕하달 정도로 큰 웃음과 진솔하고 사려깊은 성격에 이내 편안한 대화상대가 되어버렸다.

그의 그림을 '제대로' 본 건 2005년 갤러리 인에서 열린 개인전에서였다.




이 썰렁한 사진으로는 제대로 느낌이 전해지지 않지만,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나오며 숨을 고른 기억이 생생하다. 한 작품 한 작품 모두가 시선을 잡아끌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조화와 리듬, 공간의 확장과 깊이감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마치 다른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선 듯한 느낌이랄까. 그림을 마주대하는 순간 갑자기 주위가 고요해지고 작품과 나와의 내밀한 대화가 시작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후 그의 작업실을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 아득한 느낌을 다시 경험해 보고 싶기도 했지만, 전시장이 아닌 작업실에서도 작품의 우아한 아우라가 그대로일 지 궁금했다.

기회는 갑자기 찾아왔다. 갤러리 PLANT에서 열린 개인전(11.12∼12.12)에서 그를 만나 후다닥 약속 날짜를 잡고, 하필이면 대설주의보가 내린 지난 8일 오전, 나는 작업실이 있는 미아동으로 쏜살같이 차를 몰았다. 그가 뉴욕에서 돌아와 2003년부터 줄곧 사용했다는 작업실이 건물의 철거 결정에 따라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됐단다.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작업실은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차례 폭풍이 훑고 지나간듯, 살짝 난장 분위기였다. (흠...원래 그런가?^^;;)  아무튼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며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작업실은 꽤 넓었고 창밖으로는 맞은편 건물의 지붕과 멀리 희뿌연 하늘이 보였다.



작업실은 책상과 간이침대, 의자 등으로 3 : 2 정도로 양분되어 있었다.
넓은 구역을 실질적인 작업장으로 하고 나머지는 작품보관이나 휴식 등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전시에 나가 있어서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 않았지만 드문드문 작업 중인 작품들이 보였다. 그중 300호 짜리 대형 작품 두 점이 눈에 띈다. 그는 주로 100∼150호 크기의 작품을 하는데, 이건 꽤 크다. 
캔버스의 표면을 단색으로 깨끗하게 칠하고 그 위에 묽은 안료(pigment)를 흘리고 겹쳐 형태를 만들어내는 그의 작업 과정을 이해한다면 저 작품이 엄청난 노동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상해 보라, 300호나 되는 큰 캔버스를 혼자 부여잡고 쉴새 없이 기울이고 균형을 맞추는 모습을. 안료의 농도를 조절하고 방향을 결정해서 모양을 만들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엄청난 힘과 기술을 요한다. 우연인 듯 자연스런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철저한 계산이 필요한 법이다. 또 원하는 색과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없이 반복되는 안료 테스팅도 빠뜨릴 수 없다.




그는 이런 폴리머(polymer) 성분으로 여러 가지 효과를 테스팅하기도 하고 마치 안료의 '껍질' 같은 것을 만들어 설치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시장을 온통 안료 껍데기(?)로 붙여놓은 모습이다. 보통 사람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깨끗이 잘 떼어진다고 한다. 심지어 재활용도 가능하다고.





그림의 재료라면 아직도 수채화 물감과 유화 물감만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요즘 회화작가들의 작업실에 가면 대략 이런 아크릴 물감과 도무지 알 수 없는 요상한 화학약품 비스무리한 것들이 사방에 뒹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에 비해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너무 다양해져서 작가들도 열심히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 때문에 전시장 캡션에 "혼합재료(mixed media)"라고 뭉뚱그려 적어놓으면 관객 못지않게 작가들도 궁금해 하긴 마찬가지다. 

또 투명하게 비치는 얇은 필름지에 해먹(tusche, 물에 녹는 기름성분)을 이용해 이것이 마르면서 표면에 침전되는 느낌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건 안타깝게도 마땅한 사진이 없다.  사진 저 안쪽 벽면에 걸린 작품들이 바로 그것. (보이는지? ^^;;;)

 


세 가지 작업 방식 모두 ‘평면’이라는 회화에 있어 안료와 공간감에 대한 문제를 탐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움직이는 이미지와 고혹적인 색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정지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 좋아요. 뭔가 찰나를 살짝 잡아주는 그런 가볍고 아슬아슬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죠. 마치 발레리나의 토슈즈가 살짝 바닥에 닿는 듯한 느낌 같은. 그래서 작품이 감각적(sensual)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런 그의 관심은 <the widening gyre-night(점점 커지는 소용돌이-밤)>, <sashay-red on  blue(블루  위를 미끌어지듯 돌아다니는 레드)>, <lull-blue(일시적인 고요-블루)><acrobats(곡예사)> 등과 같은 작품의 제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Still life in space-acrobats>



“안료를 흘리고 겹치니까 구조적으로 조각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가 봐요. 배경이 굉장히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형태(shape)가 더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르죠. 안료 층이 겹쳐 쌓여 있어서 실제로 무겁기도 하구요. 하지만 일반적인 조각처럼 정지되어 있는 느낌을 주지는 않죠. 캔버스 표면에 굳어있는 안료들이 각각의 질량에 의해 움직임과 방향성을 갖고 있거든요.
보통 서양화에서 여러 개의 초점이 같이 등장하면 배경과 떨어져 보이면서 다양한 공간감을 드러내잖아요. 그런 일종의 착시현상을 이용했다고 할 수 있어요. 결국 안료와 원근감이라는 그림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와 표현기법을 이용해 최대한의 느낌을 뽑아내는 작업인거죠.”





이런 그의 작업방식을 동양화 기법과 비교하면, 먹을 여러번 중첩해 쌓는 적묵법(積墨法)을 떠올릴 수 있겠다. 적묵법은 말 그대로 먹을 겹겹이 쌓아 올려 묵직한 괴량감을 표현하는 준법인데, 주로 바위산이나 깎아지른 절벽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이렇듯 보통 안료는 더하고 입힐수록 텁텁해지고 무게감이 생기는 법이건만, 홍수연의 적채법(?)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겹겹이 쌓아올릴수록 공간이 더욱 확장되고 가벼워지며 투명하게 빛난다. 깊은 심연을 부유하는 듯 캔버스 표면에 떠오른 안료의 층이 만들어내는 그 무한한 공간감이란. 그의 그림을 볼 때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그의 그림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풍부한 색채감각이다. 어두운 블랙에서 그레이, 블루, 레드, 형광 옐로우 등등... 그가 색을 쓰는 방법은 매우 대담하면서도 노련하다. 신기한건 아무리 어둡고 탁한 색이라도 그가 칠하면 투명한 빛을 머금은 듯 말캉말캉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또 이렇게 다른 색의 독립된 작품들이 서로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단독으로 있을 때보다 더 다양한 운율과 공간감을 창조하기도 한다.




색을 쓰는데 ‘크게 겁이 없다’는 그는 같은 색이라도 미묘한 차이를 내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어낼 줄 안다. 하지만 색에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고. 예전에는 전시의 테마가 되는 색을 일부러 정하기도 했지만, 이번 개인전에서는 거추장스러워질 것 같아 그마저도 생략했다고.

"천천히 보이는 게 좋아요. 그런게 정말 어렵죠. 뭔가를 계속 보게끔 만드는 것. 사람을 끌어당기는 아우라를 만드는 것. 그건 정말 간발의 차이인 것 같아요. (작가에게 잘된 작품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미묘한 차이에서 비롯되지만 작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뽑아낸 것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죠."

"처음엔 우연적인 효과들이 재미있어서 시작했어요. 하지만 이런 우연적인 느낌은 사실은 가장 인위적으로 만드는 거죠. 사실, 컨트롤하기 쉽지 않은 형태잖아요. 작품은 단순한 발명품이 아니고, 있는 것 가지고 내 코드에 맞게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찌 보면 한끝 차를 두고 다투는 작업인거죠. 그래서 원하던 것이 제대로 나오면 소름 끼칠 정도로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요."


그와 이렇게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마저 자꾸만 대화가 새나가 평소처럼 신변잡기로 흘렀지만, 어쩐지 그에게 몇 걸음 더 바짝 다가간 느낌이 들었다.

때마침 함박눈이 예쁘게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면서 창문 너머로 보이던 풍경이 뿌옇게 가려지고, 깊고 아득한 공간이 새롭게 생겨났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그림이 오버랩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내리는 눈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거리를 가늠하기 힘든 도로를 천천히 달리면서, 캔버스 표면의 안료 층을 통과해 서서히 빨려들어가는 기분이 바로 이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P.S. 갤러리 PLANT의 개인전은 공식적으로 지난 11일에 끝났지만 대략 12월 동안 작품을 그대로 걸어놓기로 했단다. 혹시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들러보시길. (안국동 윤보선 고택 근처. 02-722-2826) 그마저 놓쳤다면 낙심하지 말고 근처 금호미술관으로 얼른 발걸음을 옮겨보시길. 금호미술관의 <21 and Their Times>(12.1∼2011.2.6)에서 그녀의 초기작과 근작 몇 점을 만나볼 수 있다.


홍수연은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미국 Pratt Institute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부터 포스코미술관(2001), 금호미술관(2002), 화이트월갤러리(2003), 갤러리인(2005) 등 개인전 9회, 다수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창동 미술창작스튜디오의 제1기 작가로 참여했다.(2002∼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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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화가의 작업실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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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바로 여기.

 

광주광역시 동구 지산동 275번지에 있는
() 오지호(19051982) 화백의 작업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 오지호·오승윤 부자의 작업실이다.
왜냐하면 이 작업실은 1953년 오지호 화백이 지었지만 아들 오승윤(19392006)이 물려받아 줄곧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젤 주변에는 오지호·오승윤 부자가 쓰던 색색의 유화물감이 오랜 세월의 더께처럼 남아있다
.




파스텔 빛 물감은 아버지 오지호
, 조금 진한 색은 아들 오승윤의 것이란다.

사실, 근대 이후 수많은 미술가들이 작업실을 사용했지만, 그들의 사후(死後) 작업실이 온전히 보존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선전으로 약칭)의 최고 스타작가였던 대구출신 화가 이인성(19121950)은 대구 남산병원의 병원장이었던 장인이 병원 3층에 근사한 작업실을 마련해 주었지만 지금은 사진자료로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아예 건물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또 근대기에 활동했던 화가 김두한의 예산 작업실은 당시로는 드물게 2층으로 된 작업실 전용 양옥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노래방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 남한 땅에 온전히 남아있는 작가의 작업실로는 오지호·오승윤 부자의 작업실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더욱이 이곳은 1953년 당시 모습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더욱 가치가 높다.

 


작업실에 놓여 있는 옛 작업실 사진만 봐도 지붕색만 바뀌었을 뿐
,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업실 안에 있는 물건들은 오지호·오승윤 부자의 것이 섞여 있는데, 이젤은 아들, 의자는 아버지 것이라고.




내부를 꼼꼼히 살펴보면, 3대로 이어지는 화맥(畵脈)을 찾을 수도 있다.
커튼 위에 있는 항아리를 그린 그림은 오승윤 화백의 아들 병재 씨가 미술대학에 입학하면서 그린 것이라고.

 

 


위 사진에서 커튼 왼쪽이 오지호 화백, 커튼 오른쪽이 아들 오승윤 씨의 사진이다.

대략 6평 정도의 이 작업실은 몇 가지 구조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남쪽으로 난 창문은 두꺼운 커튼을 드리워 완전히 가렸다.
남쪽 빛은 워낙 변화무쌍해서 빛의 간섭이 심하기 때문이다.
대신 채광이 일정한 북쪽 빛을 살렸다.
어두운 낮 시간을 보완하기 위해 커튼 없이 북쪽으로 창을 크게 내고 지붕 일부를 뚫어 450cm 폭의 투명유리를 끼웠다. 북쪽의 큰 창은 반투명 유리를 끼워 빛만 들일 뿐, 내부를 밖에서 볼 수 없게 했다.
과연 빛에 민감한 인상파 화가다운 작업실이라 하겠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오지호-오승윤 화백의 수많은 작품들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되었다.
워낙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두 작가의 체온과 손길이 아직도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
 




작업실 바로 맞은편은 3대가 살던 초가집이다.



오지호 가옥(吳之湖 家屋)’이라고 불리는 이 집은 원래 조선대학교의 관사로서,
조선대 회화과 초대교수가 되어 광주에 정착한 오지호 선생이 1949년부터 거처로 삼았다
.
(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표작 남향집(1939)의 배경으로 종종 오인받곤 하지만,남향집은 그가 송도고보 교사 시절에 그린 작품으로, 이 초가집과는 관계가 없다
.)
그의 사후 아들 오승윤이 매입해 현재는 미망인 이상실 여사가 거주하면서 직접 관리하고 있다
.
초가집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고 할 정도로, 이 집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과연 뒤뜰의 장독대와 소박한 집 모양새가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

사실 아무리 초가집이라곤 하지만 그 유명한 오지호 화백이 살던 곳인데...’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작년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말 그대로 초가 ‘4
인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더랬다.
사람이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모두 넉넉하게 품어내는 한옥의 신기한 능력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여기서 어떻게 3대가 옹기종기 살았는지, 방문객도 끊이지 않았을 텐데... 조금 의아스럽긴 하더라. 


현재 이곳은 광주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대문 옆에 붙은 알림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인 출입금지다.



나는 다행히 매우 강력한 빽(?)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방문할 수 있었다. ^^
제작년 광주비엔날레 취재차 갔을 때 처음 가보고, 이번에도 역시 비엔날레를 핑계로 내려가 
초가집과 작업실을 또 보고 싶다는 이유를 댔지만,
사실은...
이 집 무화과 맛을 잊지 못해서였다
. (이런, 잿밥에 눈이 먼...-_-;;;)

웬 무화과인고 하면, 바로 초가집 뒷편 작은 텃밭에 심은 무화과나무에서 따온 녀석들이다.
꽃이 없어서 무화과(無花果)라는 이름이 붙은 이 맛있는 열매는 정말 염치고 뭐고 없이 자동적으로 손을 뻗게 한다.
술안주로 나오는 달디 단 말린 무화과가 아니라 나무에서 갓 딴 싱싱하고 달콤한 무화과!

 
 



연한 껍질을 살살 벗겨서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흐물흐물 푸짐한 과육이 허물어지면서 입 안 가득 달콤한 여운을 남긴다.  제대로 씹을 겨를도 없이 미끄덩~ 꿀꺽 자꾸만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아, 이렇게 품위 있는 단 맛이란~
올해는 먹을 복이 더해
, 말로만 듣던 동부 소를 넣은 모시잎송편까지! 'ㅂ'
정말이지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다과상이었다고나 할까. ㅎㅎ

화가의 오랜 손길이 남아있는 작업실, 따뜻한 숨결과 추억이 깃든 초가집, 그리고 달콤한 무화과와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 오지호 화백의 그림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가을 빛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그런 평화로운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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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포스팅에 이어서...
일본민예관과 리하쿠(李白)는 별로 멀지 않아서 함께 묶어 다녀올 만하다.
리하쿠는 조금 찾기 어려우니 잘 따라가 보자.

다시 고마바토오다이마에(駒場東大前) 역에서 시모키타자와(下北沢) 역으로 간다. 3분 소요.
시모키타자와에서 오다큐(小田急) 선을 오다하라(小田原) 방향으로 갈아타고 교오도오(経堂) 역으로. 4분 소요.
(지금 보니 표지판에 한글로도 표기가 되어 있네요.^^)



교오도오 역에서 표지판을 보고 스즈란도오리(すずらん) 쪽으로 건널목을 건넌다.
스즈란도오리 상점가로 들어서서 10분 정도 길을 따라 걷는다.

도쿄 외곽 쪽이어서인지, 도심처럼 복작거리지 않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상점가다. 
길 양쪽에 늘어서 있는 가게들을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앗, 여기도 고서점이!
일본에서 가장 부러운건 길가에 서점들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괜찮은 고서점은 일반 서점이나 웬만한 도서관을 뺨치는 수준이다.

잠시 딴 길로 새면...
십 수 년 전 처음 도쿄 간다(神田)의 고서점가를 가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당시만 해도 '고서점'이라고 하면 '고물'이나 '폐품' 비스무리하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에 와서 보니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일단 매우 깨끗한데다, 책 한 권 한 권을 모두 깔끔하게 손질해서 진열해 놓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특유의 풍취까지 더해 마치 고급 골동품상점을 보는 듯했다.

그런 고서점이 일본 전역에 2,300여 점 정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가맹점들 간에 네트워크도 잘 되어 있고, 심지어 인터넷 검색도 가능하다. (http://www.kosho.or.jp/)

특히 도쿄 간다의 진보초 고서점가는 170개 이상의 서점이 몰려 있는 대표적인 고서점가로 손꼽히는데, 그 명성에 걸맞게 매년 고서축제를 열고 있기도.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얼마나 사재기를 할 지 생각만 해도 두렵지만. -_-;; 
올해 축제는 10월 27일부터 11월 3일까지. (http://jimbou.info/) (앗, 막 끝났구낭.ㅠ.ㅠ)

고서점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대학가 조차 서점 하나 보기가 힘들지만, 일본은 큰 서점들이 종류도 다양하게 길가에 늘어서 있다.

새벽 5시까지 문을 여는 서점도 있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여기는 일본의 대표적인 환락가인 롯폰기 한복판.
보통은 아침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문을 열지만, 일요일에는 저녁 10시까지만 운영한다고. -.-
이런 상황인데 도대체 누가 일본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는지.
예전에 비해 독서률이 낮아졌다 뿐이지 결코 우리와 비교할 수준이 아닌 듯하다.


다시 리하쿠로 돌아와서...
낮시간이라 그런지 젊은 사람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조금 초조해진다. 10분 정도 걸으라고 했는데...혹시 지나친 걸까?

지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 초등학생들이라 영어로 물어봤자 별 소득은 없을듯.
그래도 답답하면 "리하쿠 토 유우 오미세와 도코데스까?" ('이백'이라는 가게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자. (대답을 알아듣는건 개인의 역량에 따른다. ^^;;)

답답해도 대략 10분 정도, 500m 가량 걷다보면 주변이 조금 한적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갑자기 오른쪽 골목에서 강하게 머리를 잡아끄는 힘이 느껴질 것이다.(포스를 잘 느껴보시길...^^;;)


 
골목 100미터 전방에 '李白'이라는 글씨가 눈에 띈다.
휴우~





이런 곳이...!
이 찻집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부터 몇 번 씩이나 들은 터라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
리하쿠(李白)의 주인 미야하라 시게유키(宮原重之) 씨는 원래 젊은 시절 서양음악에 빠져 '모짜르트'라는 카페를 열고 10년 정도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 카페를 연 곳이 바로 고서점으로 유명한 간다 진보쵸(神田 神保町).
그는 젊어서부터 골동품에 관심이 많아 조금씩 수집을 하곤 했는데, 어느날 백화점의 작은 골동품 상점에서 우연히 조선백자를 보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가 처음부터 조선시대 물건을 모으려고 한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들은 모두 조선의 것들이었다고
.

항아리, 접시, 사발 등 도자기 류와 반닫이, 소반과 같은 목공예품, 회화, 조각 등등... 이들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일단 카페 '모짜르트'는 다방 '리하쿠(李白)'로 바뀌었다. '리하쿠'는 백자의 백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청렴결백' '실질강건(實質剛健, 꾸밈이 없이 성실하고, 굳세고 씩씩함)' 등 그가 생각하는 조선조의 이미지를 표현한 이름이기도 하다. 조선의 공예품, 예술작품을 통해 그 안에 내재해 있는 조선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것을 지키고 널리 알리고자 하는 마음도 강해졌다.  




작은 마당은 잡목림으로 자연스러운 멋을 살렸다. 잘 찾아보면 무궁화도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간단한 메뉴가 적혀있다. "커피 800엔, 전차 800엔, 말차 1000엔"




한옥을 재해석한 건물과 인테리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 한옥 문짝과 한지를 바른 조명 등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곳곳에 그의 소중한 컬렉션들이 자리한다. 6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하나 하나 그의 안목으로 걸러진 소중한 컬렉션이다. 




컬렉션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직접 설명도 해주신다고. 
특히 그는 정체성과 뿌리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재일교포 청년들에게 조선의 미와 문화의 우수성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취지에서 작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한국의 전통 무용, 전통 음악을 감상하는 자리도 함께 마련하고 있다고. 

 

리하쿠에서 가져온 전단지 3종. 
왼쪽은 지난 10월 3일에 열린 한국전통음악 공연 관련 팸플릿. 현대화한 전통음악 연주가의 공연에 전통무용가가 게스트로 참여했다. 작년부터 시작한 한국 전통문화 체험 공연은 금회로 15회째. 선착순 20명. 참가비 4천엔.(음료와 다식 포함) 예약제로 운영된다.
가운데는 리하쿠에서 열린 미술전시 팸플릿.
오른쪽은 10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총 8회, 2부로 나뉘어 진행되는 한국문화체험 프로그램 팸플릿.

아 참, 이 집 커피는 이렇게 예쁘게 나온다.
커피맛도 좋지만 함께 내온 간단한 다식도, 그릇의 질감도 매우 훌륭하다.
혼자서도 조용히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으로 여력이 된다면 자주 들르고 싶은 곳이다.



리하쿠가 도쿄에서 조선의 미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공간으로 자리잡은 지 어언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간다 진보초에서 50년을 보내고(카페 '모짜르트' 포함) 이곳 세다가야 구로 이사한 지도 10년이 되어 간다.
한국인도 아닌 그가, 일본 땅에서 이렇게 오랜 세월 '李白'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꾸려올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예술에 대한 그의 식을줄 모르는 애정과 열정, 깊은 이해와 존경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미 일백 년 전에 망해 지구상에서 사라진 조선을, 그 조선의 예술과 아름다움을 평생토록 기리고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미야자와 시게유키 씨. 조선의 후손으로서 정말 부끄럽고 고마울 뿐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어느 한 나라의 사람이 다른 나라를 가장 깊이 있게 이해하는 길은 과학이나 정치상의 지식이 아니라 종교나 예술적인 내면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미야자와 시게유키 씨가 되살린 조선, '리하쿠(李白)'를 보며 그 뜻을 마음에 새겨본다.




주소: 東京都世田谷区宮坂44
전화번호: 03-3427-3665
영업시간: 11-19시. 연중무휴




p.s. 여기서 잠깐. 사진 속 이 분은 누구일까요?
리하쿠에 걸려있던 유일한 사진이다. 정답은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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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지킴이 윤민용 기자가 필진열전에 쓴 오싹한세로드립을 보고 단풍구경 갈 짐을 싸다말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쓰고 가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실은 지난 달 말, 잠시 도쿄에 다녀왔다. 목적은 일종의 휴가. 다녀와서 바로 재미있는 글을 올리겠다는 말로 순진한 윤 기자를 안심시키고 튀었다’. 아니, ‘날았다’.

문득 달력을 보니, 다녀온 지 스무날도 더 지났다. 뭐라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백수 과로사라고, 결코 노느라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아니라고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해본다. (미안, 미안~) 



이번 도쿄 행에서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과 리하쿠(李白)라는 오래된 찻집.
십 여 년 전부터 벼르던 곳들인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이유는 찾기 힘들다는 것

다행히 이번엔 재일교포 친구의 도움으로 두 곳 모두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일본민예관과 리하쿠는 모두 조선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두 곳 모두 조선의 미에 흠뻑 빠져 평생을 산, ‘전생에 조선사람이었을 법한 일본인이 지은 곳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도쿄의 일본민예관은 일본 민예운동의 총 본산지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세운 박물관이고, 리하쿠는 컬렉터인 미야하라 시게유키(宮原重之씨가 40년도 넘게 운영하고 있는 찻집으로 모두 조선의 미를 알리는 데 열심인 곳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름을 알게된 건 대학 1학년 미학입문 시간이었다야나기 무네요시가 아닌 柳宗悅이라고 들었던지라 막연히 한국사람이겠거니 생각했고, 한국인 유종열 씨가 아니라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것을 알게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일본 민예운동의 창시자이자 종교철학자, 미술평론가, 미학자로서 지금도 일본과 한국의 미학, 미술사학계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만든 민예(民藝)’민화(民畵)’를 본래 우리말인 양 쓰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생명력 넘치는 민중의 생활미술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 그의 사상과 철학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야나기를 숭배하는 수많은 무리들은 그를 좇아 각 지방에 민예관을 만들어 민예품을 수집, 소장하고 특히 뛰어난 조선의 민예품을 애호하게 됐다. 현재 일본민예협회 회원으로 가입된 각 지방 민예관 및 공예관은 총 29개. 이들 각 지방의 민예관은 일 년에 한번 씩 민예대회를 열고 있는데 그 중심이 바로 도쿄의 일본민예관이다. 아마 일본에 다양한 잡화(雜貨)’가 발달한 것도 일찍이 생활 속의 공예, ‘민예를 중시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이 아닐까.

그가 조선의 민예에 빠지게 된 것은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형제를 알게된 뒤부터라고 한다. 1914년 아사카와 노리다카에게 조선 백자를 선물 받은 후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그는 1916년 처음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 등지를 답사하며 본격적으로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후 1922년에 조선과 그 예술이라는 첫 단행본을 냈는데, 그가 직접 서문에서 밝혔듯이, ‘조선 문제에 대한 공분(公憤)’그 예술에 대한 사모(思慕)’가 계기가 되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하나같이 주옥같은 글이다. 꼭 한번 읽어 보시길 

특히 그가 19229월 일제의 광화문 철거에 반대하며 카이조(改造)에 쓴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는 읽을 때마다 심금을 울린다.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 쓴 글이어서 더 놀랍고 부끄럽기도 하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려 있다. 네가 일찍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에 파묻혀버리려 하고 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광화문이여, 너의 존재는 멀지 않아 빼앗길 것이다. 그러나 빼앗겨서는 안 될 존재이기에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지상에서 너의 모습이 없어지더라도 나의 이 글만은 적어도 지상의 어딘가에 뿌려질 것이다. 나는 끈질기게 너를 기념하기 위해 이 추도의 글을 공중(公衆) 앞에 내보내는 것이다. 광화문이여, 사랑하는 벗이여, 도리 없이 죽음으로 몰려 얼마나 분하겠는가. 나는 네가 당해야 할 고통과 쓸쓸함을 생각한다.”

오오, 광화문이여, 너는 얼마나 서글프게 생각할 것인가. 너의 많은 친구들은 너보다 먼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서울 서쪽을 장식했던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은 이제 시민의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난해 나는 혜화문(동소문)을 찾았는데 보호하는 자가 없어 가련하게도 비바람에 지탱하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너의 귀중한 형제인 숭례문(남대문)은 성벽에서 고립되어 아무 상관도 없는 울타리에 의해 겨우 지켜지고 있다.


여기까지 읽고 있으려니, 불 타버린 숭례문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 진다 

그는 1916년 이후 몇 차례 조선을 더 방문해 각종 민예품을 수집했고, 1924년에는 드디어 경복궁 내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열었다. 이 미술관 건립을 위해 그는 자신이 편집위원이었던 문예지 시라카바(白樺)의 독자들에게 기부금을 구하기도 하고, 경성의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성악가였던 부인의 독창회를 열어 모금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가 굳이 힘들게 미술관을 연 이유가 궁금해진다.

나는 항상 한 나라의 인정을 이해하려면 그 예술을 찾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일본과 조선의 관계가 긴박한 오늘날, 나는 이 점을 더욱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 예술을 좀더 이해하게 된다면 일본은 따뜻한 조선의 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언제나 국경을 초월하고 마음의 차별을 초월한다. (중략) 나는 조선 민족의 저 우수한 작품이 우리의 마음과 깊이 교류하는 날이 올 것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그리하여 그 작자로서의 민족이 우리 마음의 벗이 될 것이라는 것도 의심치 않는다. 나는 그러한 희망과 신념을 완수하기 위해 조선민족미술관설립을 드디어 계획했다.”

나는 먼저 여기서 민족예술(folk art)로서의 조선의 풍취가 배어있는 작품을 수집하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건 나는 이 미술관에서 사람들에게 조선의 미를 전하고 싶다. (중략) 나는 이것이 사라지려고 하는 민족예술을 지속시키고 새로이 부활하게 하는 동인이 되기를 바란다. 수가 적은 조선의 작품은 아마 10년 후에는 뿔뿔이 흩어지는 슬픔을 맛볼 것이다. 지금 조선 사람들은 눈앞의 일 때문에 그것들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다. (중략) 나는 그 불행한 흩어짐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이 기획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일을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민족의 고유한 아름다움마저 마침내 과거의 것으로 묻혀버릴 것이다.”




일본에 있는 우리 것은 모두 일본사람들이 약탈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물론 약탈품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정당한 경매나 매입 절차를 통해 유입된 물건들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까지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미 우리가 팔아버리고, 잃어버린 것들 아니냔 말이다. 잃어버리는 것은 쉬워도 다시 찾기는 힘들다.  


그런 이유로 눈 밝은 그가 일찍이 조선의 민예를 수집한 것은 정말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까. 그가 조선의 민예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영영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헛되이 버려지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전쟁통에 모두 잃어버렸을 수도...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그가 쓴 글에 관심이 있다면 국내에 번역된 책이 몇 권 있으니 참고해 보자. 개인적으로는 조선을 생각한다(도서출판 학고재)수집이야기(도서출판 산처럼)를 추천한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철학이 있는 수집또는 수집의 철학을 배우고 싶은 분이라면 수집이야기》가 강추다.

아무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1920년대 그가 우리 미술의 특징을 비애의 미라고 했다는 게 원인이다. 마치 고차원적으로 식민사관을 주입시킨 지능범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선한 눈의 그를, 그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그대로 믿고 싶은 것은 글에서 느껴지는 진실함 때문이다. 


조선의 벗이고자 했던 그의 진심을 헤아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민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그의 예리한 안목을 배우고 싶었다. 그가 구축한 미의 세계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를 만나러 간다. 

도쿄에서 일본민예관에 가려면 일단 시부야(渋谷) 역으로 가야한다.


게이오 열차의 승강장으로 가는 길에는 오카모토 타로(岡本太郞)의 초대형 벽화 내일의 신화가 있다. “예술은 폭발이다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남기고 세상을 등진 이 작가는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작가 중 한 사람이다. 높이 5.5미터, 너비 30미터에 이르는 내일의 신화1970년 오사카만국박람회의 심볼이 된 태양의 탑과 짝을 이루는, 작가의 대표작이다. 본래 멕시코의 어느 실업가에게 작품을 의뢰받아 1968년 멕시코 현지에서 2년간 제작, 완성한 것이었는데, 이후 소리 없이 사라져 30여 년간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2003년 멕시코시티의 근교 어느 허름한 자재창고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어, 다음 해 일본운송과 수복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1년여에 걸쳐 원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가나사키시(川崎市)에 오카모토 타로 미술관이, 아오야마에 오카모토 타로의 기념관이 있다.


시부야역은 여러 종류의 열차를 갈아탈 수 있는 굉장히 규모가 큰 역이다. 여기서 게이오(KEIO) 열차의 이노카시라 라인(頭線)을 탄다. 기치죠지(吉祥寺) 방향, 120. 이때 주의할 점은 반.드.. ‘local(各停)’을 타야한다는 거. ‘급행(express)’을 타려는 사람들을 따라 엉겁결에 같이 뛰어 탔다간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낭패를 보게 된다. (...그래요제가 그랬어요.)
 




느긋하게 ‘local’을 타고 두 번째 정거장인 고마바토다이마에(駒場東大前) 역에서 내린다.
3
분 소요. 도쿄대 교양학부가 있는 작은 역이다.

  


계단을 내려오면 멀리 캠퍼스의 상징인 시계탑이 보인다
. 여기서 U! 뒤로 돌아 일방통행 길을 따라 죽~ 내려간다. 길가의 약도로 위치를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표시되어 있듯이 바로 눈앞에 소바집이 보인다. ‘믿을만하군. 이대로 가면 되겠어.’ 물론... 소바집에도 들어가 봤다. 자동판매기로 먹고 싶은 메뉴표를 직접 뽑아 주문하는 시스템인데 아저씨들만 드글드글 모여 있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 그냥 돌아 나왔다.

 


가는 길에는
李朝木工이라 쓴 푯말과 같이 조선시대 목공예품을 파는 골동품 상점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일본에서는 보기 힘든 교회도 보인다. 작고 단아한 모습이 맘에 든다. 아점으로 먹은 매운 카레 오므라이스. 모든 채소와 달걀은 유기농으로 목장에서 바로바로 가져와 쓴다고. 맛은? ...그냥 so so.




, 이제 나왔다. 왼쪽으로는 주차장과 서관(西館, 야나기 무네요시가 생전에 살던 저택)이 보이고, 오른쪽 건물이 민예관이다.




입장료는 일반 1000, 학생 5백 엔, ·중고생 2백 엔.
개관은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휴일은 월요일, 연말연시, 전시 교체기간이란다.

신발 속에 이름을 적어 넣어두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




1936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2층 건물로, 기획전이 열리는 대형 전시실과 7개의 작은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소장품으로 1년에 4회 정도 기획전이 열리고, 가끔 특별전이 열린. 15천 여 점의 민예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약 3천 점 이상이 조선시대의 것이라고. 그래서 일본민예관에는 조선시대 공예를 위한 상설전시실도 당당히 한 개 관을 차지하고 있다. 호랑이를 그린 조선시대 백자가 눈에 익다.

 



중간중간 놓여있던 세련된 디자인의 의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고안한 의자라고. 나가노현 마쓰모토시의 민예가구로, 제품화되어 지금도 판매되고 있다.



1층 화장실 옆 벽에 붙어 있던 각종 전시 포스터들. 오른쪽 위에 오사카 민예박물관에서 열리는 가을 특별전 <민예운동의 작가들-소장품을 중심으로>(9.11-12.12)  포스터가, 왼쪽 아래에 <흑선. 페리의 세계>(9.10-11.7)라는 전시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참고로 일본의 근현대 역사에서 페리와 맥아더는 은인으로 꼽히는 두 미국인이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을 경제 대국으로 만드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1853년 에도시대 말기 해군 제독이었던 메튜 페리는 흑선(黑船, 구로후네)을 이끌고 들어와 일본을 일찍이 근대화의 길로 나서게 해 주었다. 서툰 명암법으로 서양인을 그린 그림이 재미있다.




일본민예협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民藝. 작년이 야나기 무네요시의 탄생 120주년이었다. 20103월호의 표지 사진은 1921년 도쿄에서 열린 조선민족미술전람회에서 포즈를 취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모습을 찍은 것.


본관 맞은편에 있는 서관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생전에 살던 저택으로, 건축보호를 위해 월4회만 한정 공개하고 있다.(둘째, 셋째 수요일과 토요일) 불행히도 다섯째 수요일에 방문한 나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

하지만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 살펴보니, 신발장 옆에 고구려 고분벽화의 흑백사진이...! 그가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얼마나 큰 관심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다음 번엔 시간을 잘 맞춰서 꼭 둘러봐야지.



짧게 쓰려던 이 글은 이미 용량 초과다. 일단 그냥 올린다. 리하쿠 소개는 다음에.
잠시 광주와 담양, 지리산을 돌고 올까 한다.

일본 민예관 홈페이지는 www.mingeikan.o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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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누구에게나 가슴 설레는 일일 것이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가는 것은.
작가의 작업실은 늘 알 수 없는 비밀에 둘러싸여 있는 듯하다. 저 방안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당장 문을 밀고 들어가 창작의 비밀을 낱낱이 밝혀버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럴 수 없다면 그냥 한번 둘러보기라도 했으면.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작품이 탄생되는 건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런 까닭에 처음 미술전문지 기자가 됐을 때 제일 신이 났던 것이 바로 취재를 빙자한 작가의 작업실 탐방이었다. 그리고 그 첫 방문지가 바로 최우람의 양재동 지하 작업실이었다. 그러니까 그와의 인연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우람은 기자가 되어 처음 취재계획을 세우고 지면에 소개한 작가이기도 하다. 젊은 작가만을 소개하는 꼭지였는데, 그에겐 비슷한 경력과 나이대의 작가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움직이는 기계 작품’을 만든다는 사실. 당시 유행하던 개념적이거나 인터렉티브한 설치작품도, 전통적인 재료로 만든 조각작품도 아닌 스스로 움직이는 기계라니. 게다가 그 기계는 단지 움직일 뿐만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하나의 ‘의미 있는 생명체’로서 우리 눈앞에 버젓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나는 조각한 것이 아니다. 대리석 안에 있는 상을 끄집어 낸 것일뿐”이라고 말했다면, 최우람의 경우는 “이것은 원래 우리와 함께 살고있는 생명체다. 내가 ‘발견’했다. 어때, 신기하지?”라고 보여주는 식이다. 이렇게 말이다.




 

도시의 큰 안테나 주변을 떠돌며 송수신 전파를 먹고사는 ‘에코나비고(Echo Navigo)’(사진 위)와 그것을 전시장에 설치한 모습(사진 아래). 아래 사진의 벽에는 에코나비고의 유생 3마리도 보인다. 과연 이 녀석들의 운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의심도 버리라는 듯이, 이 ‘기계 생명체’에 정식 학술명칭을 붙이고 그것의 생식분포, 성장과정, 섭식패턴, 종의 분류 등을 마치 박물관의 생물표본 설명서처럼 작성해서 함께 제시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이 기계 생명체의 ‘창조자’라기보다 ‘발견자’이며, ‘기계생명연합연구소’(약칭 U.R.A.M., 그의 이름 URAM과 같다)의 소장님인 셈이다.

예를 들어, 2006년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전시된 녀석의 이름은 ‘어바너스(Urbanus)’다. 학술명은 꽤 길다. ‘Anmopista Volaticus Floris Uram’. -_- 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어바너스’는 주로 고도 200m 상공에서 도시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살아가는 놈들이다. 흡수한 에너지를 빛으로 방출하는 꽃 모양의 암컷과 암컷에게 에너지를 받아 활동하는 수컷들, 새끼와 촌충들…. 이 ‘어바너스’ 패밀리를 보고 혹자는 “너희는 어느 별에서 왔니”라고 물을 지도 모르지만, 최우람의 말에 의하면 이것들은 엄연히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다. 도시의 에너지를 먹고사는 이 기계생명체들은 보통은 사람의 눈을 피해 기생하지만 ‘고스트 바스터즈’같은 ‘기계생명연합연구소’의 ‘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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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때의 전시 광경을 찍은 동영상이다.(2006.3.10∼5.7) 모리미술관의 신진작가 지원 프로그램인 “MAM Project”를 통해 열린 개인전이었는데, 마침 미술관이 빌딩 53층에 위치한 터라 창 너머 도쿄의 야경이 에너지 자장으로 보이며 ‘어바너스’의 존재를 더욱 실감나게 했다. 당시 휴가를 쪼개 전시를 보러 간 나는 긴장과 흥분으로 잔뜩 고조된 그를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지하 작업실 높이가 2.4m인 탓에 3.5m 크기의 암컷 ‘어바너스’의 날개를 겨우 한쪽만 테스트해 보고 왔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려했던 작품의 설치와 움직임은 성공, 전시도 대성공이었다.    (자료: 작가 제공)


여기까지 듣고 “이 무슨 택도 없는 소리냐”라고 할 사람도 있을 테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조각의 개념에 혼란이 와서 머리가 아픈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미술작품 대부분은 실은 ‘택도 없는’ 판타지를 그린 상상력의 소산이 아닐지. 꽃의 신 플로라와 서풍의 신 제피로스의 꽃바람에 실려 커다란 조가비를 타고 파도에 떠밀려오는(어디 될 법한 소리인가 말이다) 비너스를 그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온갖 기괴하고 요망한 괴물들로 우글우글한 지옥도를 그린 보쉬의 <쾌락의 동산>, 셰익스피어 희곡의 주인공을 그린 밀레의 <오필리어>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다. 모두 우리 눈에 익숙해졌거나 그럴듯해 보이도록 작가가 ‘마법’을 건 것들일 뿐. 이러한 마법이 어떻게 실행되는 지, 그 비밀은 바로 작가의 작업실 속에 숨겨져 있다.



위·연희동 어느 모처, 여느 가정집과 별다를 것 없는 외관의 작업실  /  가운데·작업실 내부 전경. "끼릭~ 끼리릭~" "쉭~ 쉭~" 곳곳에서 녀석들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  아래·연구소 작업 모습 도촬. 오는 11월에 있을 국립현대미술관 〈Made in Popland전〉의 작품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습이다.




현재 최우람은 양재동 지하 작업실을 벗어나 2008년부터 연희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꿈에 그리던 천장이 높은 작업실이다. 첨단 연구소다운 면모도 언뜻 느껴진다. 하지만 '기계생명연합연구소'의 활동이 전세계를 무대로 활발해지고 점점 더 다양하고 엄청난 기계생명체들을 '발견'해나가고 있는지라 작업실은 금새 포화상태가 될 듯하다. 지하층과 1층 작업실에는 그 존재가 이미 세상에 알려진  ‘Una Lumino’, ‘Jet Hiatus’, ‘Cakra-2552-a’...등 녀석들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리고 2층의 연구소는 밤낮을 잊은 소장과 연구원들(프로그래머, 디자이너 등)이 새로운 기계생명체를 추적하는 곳이다.

작업실을 찾은 토요일은 최우람 씨만이 나와 작품의 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다른 스텝들은 주 5일제란다. 그는 전날 잠을 설쳤다고는 하지만 도대체 얼마동안이나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지 가늠이 안될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11월에 있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에 신작을 선보이기 위해 불철주야 작업에 매진한 탓이다. 창작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눈을 반짝이는 필자를 인식했는지, 그는 묻기도 전에 작업과정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작품의 제작과정은 어느 정도 분업화되어 있지만 상당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작품의 구상에서 전체적인 모습과 움직임이 결정되기까지는, 스텝들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수없이 많은 실험과 수정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그 복잡하고도 심오한 과정이 끝나면, 그 후의 작업은 오히려 수월하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컨셉에 맞게 멋진 외형을 완성하는 한편, 움직임을 조정하는 CPU와 모터드라이버, 메모리, 센서 등등이 내장된 작은 PCB(printed circuit board)를 만들고, 그것을 잘 장착하여 실행시키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기계생명체의 모든 비밀이 들어있는 PCB다.



게다가 (쉬잇∼!) 이날 작업실을 엿본 바에 의하면, 그의 작업에는 어떤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도시에 기생하는 기계생명체에 관한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이야기는 새로운 ‘신화’를 토대로 우주에 존재하는 온갖 잡신(?)들을 찾아내는 게 될 것이라는 것. 그야말로 ‘고스트 바스터즈’다. 나 역시 이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그가 무엇을 보여줄 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건,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것.
두둥~ 개봉박두!





약력
최우람은 1970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중앙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명∈숙주〉(1998)를 시작으로, 〈170개의 박스로봇〉(2001), 〈Ultima Mudfox〉(2002), 〈도시에너지〉(MAM프로젝트, 2006) 등 9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제1회 포스코 스틸아트 어워드〉(2006)에서 대상을, 〈오늘의 젊은 미술가상〉(순수미술 부문, 2006), 〈김세중 조각상〉(청년조각 부문, 2009)을 수상. 두산갤러리 뉴욕 레지던시 프로그램(2009)에 참여했다.



작가의 홈페이지 www.ur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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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미국 내쉬빌의 Frist Center for the Visual Arts에서 열린 개인전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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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