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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원의 살랑살랑 미술산책/작가와 작업실'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1.02.05 소설가 박완서와 나목
  2. 2010.12.20 홍수연 _ 미지의 공간에 대한 탐닉
  3. 2010.11.17 빛이 머무는 곳, 오지호·오승윤 부자의 아뜰리에
  4. 2010.09.25 최우람_기계생명체의 발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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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뉴욕에서 출장 온 친구를 만나러 시내에 나갔다마침 세일기간이라 백화점 주변 도로는 말 그대로 주차장이다. 참고로 친구는 뉴욕 코리아소사이어티라는 곳에서 다양한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www.koreasociety.org) 보통은 전시 준비 차 1년에 한번 정도 혼자 한국을 방문하곤 하는데, 이번엔 다른 직원과 함께였다.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는 젊은 직원은 이번이 첫 한국방문이라고. 건축 학도답게 한옥을 보고싶어 해서 아쉬운 대로 한옥으로 된 식당에 가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사 후 행선지는 인사동. 이젠 고궁이 아니고서야 제대로 된 한옥 구경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더구나 인사동 역시 '전통문화의 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온갖 종류의 짝퉁이 넘쳐나는 지라 보여줄 것이 별로 없다.

그러고 보면, 서울은 추억이 머물기에 적당한 도시가 아닌 듯하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은 모두 부지부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그 속에 켜켜이 쌓여있는 추억들도 속절없이 먼지 속으로 사라진다. 어찌보면 그게 인생의 순리겠지만, 자연스럽게 나이듦을 참지 못하고 쉽게 고치고 때려 부수고 밀어내 버리는 데에는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민다. 갑자기 소중한 것을 강탈당한 느낌이랄까. 청진동과 피맛골이 사라진 낯선 풍경 앞에서 상실감과 무력감에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기억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사라져버리면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될까. 아, 어쩌다 이렇게 매정한 도시가 됐는지.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 겨우 신세계백화점 언저리까지 왔다. 신호에 걸려 한참을 서 있다 보니마음 한 구석이 묘하게 아려온다. 오늘 아침 창졸간에 접한 박완서 선생님의 부음 탓이다어떤 특정한 공간이 불러 일으키는 기억과 그에 따른 감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 이곳 - 신세계 본점 앞은 언제나 꿈결같이 아득하고 애련한 우수가 감도는 곳이다다른 지역에 비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커다란 분수대를 중심으로 서양식 근대 건축물인 신세계와 한국은행이 마주하고, 명동과 을지로 입구, 소공동, 남대문시장으로 가는 길이 방사선으로 뻗어있다. 그리고 그 길, 후미진 골목마다 옛 영화를 간직한 오래된 노포(老鋪)들이 포진해 있다.


지금 바로 옆에 보이는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은 1930년에 세워진 건물이에요. 서울에서는 아주 오래된 건물에 속하죠원래는 일본 미쓰코시 백화점의 경성점이자. 최초의 백화점으로 세워진 건물이에요. 광복 후에는 미군의 PX건물로 사용되기도 했구요. 사실 오늘 아침에 박완서라는 유명한 소설가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바로 그분이 당시에 이곳에서 일하셨답니다.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 주문을 받는 일종의 삐끼역할이었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당시 그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들 중에 한국의 국민 화가라고 불리는 박수근 씨도 있었다는 거예요. 두 사람 모두 전쟁통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PX에서 일하게 됐던 거죠. 이 운명적인 만남을 쓴 소설이 박완서 선생님의 데뷔작 나목이에요. 박수근 화백이 즐겨 그리던 소재도 바로 나목이었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분은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 몰라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랍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젊은 직원이 아주 흥미있어 한다. 정말 전쟁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두 사람이 있었을까전쟁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미군의 PX라는 낯선 곳에서 만날 수 있었을까. 전혀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대학 신입생으로 빛나는 청춘을 보냈을 터이고, 또 한 사람은 화단의 중견화가로서 화업에 매진했을 테니까 말이다.


                  미츠코시 백화점 엽서. 왼쪽이 경성우체국(현 중앙우체국), 오른쪽이 미츠코시백화점(현 신세계 본점)이다.



  
 







PX 초상화부 작업 장면. 왼쪽이 도예가 황종례, 한 사람 건너 박수근이 보인다.  1952-54년경.


위 사진 · 구글에서 업어온 사진. 6.25직후 미군 PX건물로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색 테두리의 PX간판이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나목을 읽은 것은 중학교 시절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의 몇 장면 - 특히 퇴근길에 두 사람이 을지로입구 전차역까지 함께 걷거나 명동의 노점상에서 움직이는 인형을 구경하는 장면 등은 마치 실제로 내가 겪은 일인양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래서 가끔 을지로입구나 명동을 걸을 때면 나목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곤 한다. 더구나 롯데백화점 맞은편 명동 입구 쪽에는 언제나 움직이는 인형을 파는 노점상이 있어서, 두 사람이 인형을 구경하던 곳이 바로 이 부근이 아닐까 혼자 생각하곤 한다.
 
















어렸을 땐 나도 이런게 참 재밌고 신기했는데 말이쥐...-.-;;




오래된 도시는 사람들의 꿈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과 땀과 눈물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끝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 속에서 지친 도시민들은 따뜻하게 위로받기도 하고 다시금 힘을 내기도 한다. 진짜 디자인이 잘된 도시는 이렇게 무형의 깊이를 간직한, 정서적으로 안정된 도시가 아닐까. 내게 신세계 앞은 바로 그런 곳이다. 방사선으로 난 길마다 수많은 추억들이 녹아있고, 그 길을 걸으며 나는 꿈을 꾸고 힘을 얻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당시를 추억한 박완서 선생님의 글이 어느 도록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책장을 뒤져보았다. 역시, 1999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우리의 화가 박수근>의 도록 수록글이다. 옮겨 적기엔 다소 글이 길지만, 그리운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어 인용해 본다.




박수근의 그림을 많이 보여주고 싶지만, 작품 이미지 저작권 탓에 가지고 있는 도록 몇 권을 대신 사진 찍어 올린다
· 아래 두 권은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에서 열린 <박수근과 그 시대 화가들전>(2004, 왼쪽)과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우리의 화가 박수근전>(1999, 오른쪽) 도록
위의 것은 1965년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열린 <‘65 박수근 유작전>의 출품작 79점 중 2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아 2009년 갤러리현대에서 만든 전시 도록이다.     
아래·1965년 중앙공보관화랑에서 열린 박수근 화백 유작전 팸플릿을 재현한 것. 6점의 흑백 도판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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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이 직접 쓴 도록 수록글



조금만 인용하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 모두 타이핑 하게 됐다

거칠고 황량한 시절, 그 아픔과 상처를 온몸으로 견디고 이겨내 예술로 꽃피워 내신 두 분이 문득 너무 그립고 감사하다.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들을 그림으로, 문학으로 남겨 기억하게 해주셔서 너무나 고맙다. 작품 속에서는 모두 헐벗은 나목(裸木)을 그렸지만, 분명 그것은 '희망'을 그린 것이었을 게다. 쓰라린 상실과 아픔을 넘어 다시 새순이 돋고 푸른 잎이 피는 봄을 그리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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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자꾸만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는 그림이 있다.

좀처럼 발걸음을 뗄 수 없고 볼수록 한없이 빨려들어 갈 것만 같은, 그런 그림 말이다.
홍수연의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캔버스 속으로 조용히 흡수되는 것 같은,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홍수연을 알게된 건 대략 2002∼2003년이었던 듯하다.
뉴욕에 사는 한 친구가 "홍수연 씨 알지?" "홍수연 씨 있잖아…"라는 식으로 자꾸 말을 꺼내서 처음 이름을 들었고, 이미 알고 있는 작가라고 착각하기도 했다.(홍지연, 홍지윤, 홍주희 등 비슷한 이름의 작가들이 꽤 있다.)

그러다 친구가 한국에 올 때마다 함께 만나는 사이가 되었고, 대개 미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주로 건강유지법 -_-;;) 다소 '아줌마스러운' 관계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일 년에 한두 번, 만남을 이어갔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림보다 사람을, 미술에 대한 생각보다는 그 사람의 기호와 스타일을 먼저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처음 봤을 때 홍수연은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람이었다.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몸매에 섬세한 얼굴선, 자연스럽게 휘날리는 풍성한 머리카락 등이 한 눈에 확 시선을 사로잡아버리는 보기 드문 캐릭터였다. 이런 타고난 '여신 포스'에 살짝 기가 눌렸지만, 호탕하달 정도로 큰 웃음과 진솔하고 사려깊은 성격에 이내 편안한 대화상대가 되어버렸다.

그의 그림을 '제대로' 본 건 2005년 갤러리 인에서 열린 개인전에서였다.




이 썰렁한 사진으로는 제대로 느낌이 전해지지 않지만,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나오며 숨을 고른 기억이 생생하다. 한 작품 한 작품 모두가 시선을 잡아끌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조화와 리듬, 공간의 확장과 깊이감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마치 다른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선 듯한 느낌이랄까. 그림을 마주대하는 순간 갑자기 주위가 고요해지고 작품과 나와의 내밀한 대화가 시작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후 그의 작업실을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 아득한 느낌을 다시 경험해 보고 싶기도 했지만, 전시장이 아닌 작업실에서도 작품의 우아한 아우라가 그대로일 지 궁금했다.

기회는 갑자기 찾아왔다. 갤러리 PLANT에서 열린 개인전(11.12∼12.12)에서 그를 만나 후다닥 약속 날짜를 잡고, 하필이면 대설주의보가 내린 지난 8일 오전, 나는 작업실이 있는 미아동으로 쏜살같이 차를 몰았다. 그가 뉴욕에서 돌아와 2003년부터 줄곧 사용했다는 작업실이 건물의 철거 결정에 따라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됐단다.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작업실은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차례 폭풍이 훑고 지나간듯, 살짝 난장 분위기였다. (흠...원래 그런가?^^;;)  아무튼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며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작업실은 꽤 넓었고 창밖으로는 맞은편 건물의 지붕과 멀리 희뿌연 하늘이 보였다.



작업실은 책상과 간이침대, 의자 등으로 3 : 2 정도로 양분되어 있었다.
넓은 구역을 실질적인 작업장으로 하고 나머지는 작품보관이나 휴식 등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전시에 나가 있어서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 않았지만 드문드문 작업 중인 작품들이 보였다. 그중 300호 짜리 대형 작품 두 점이 눈에 띈다. 그는 주로 100∼150호 크기의 작품을 하는데, 이건 꽤 크다. 
캔버스의 표면을 단색으로 깨끗하게 칠하고 그 위에 묽은 안료(pigment)를 흘리고 겹쳐 형태를 만들어내는 그의 작업 과정을 이해한다면 저 작품이 엄청난 노동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상해 보라, 300호나 되는 큰 캔버스를 혼자 부여잡고 쉴새 없이 기울이고 균형을 맞추는 모습을. 안료의 농도를 조절하고 방향을 결정해서 모양을 만들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엄청난 힘과 기술을 요한다. 우연인 듯 자연스런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철저한 계산이 필요한 법이다. 또 원하는 색과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없이 반복되는 안료 테스팅도 빠뜨릴 수 없다.




그는 이런 폴리머(polymer) 성분으로 여러 가지 효과를 테스팅하기도 하고 마치 안료의 '껍질' 같은 것을 만들어 설치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시장을 온통 안료 껍데기(?)로 붙여놓은 모습이다. 보통 사람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깨끗이 잘 떼어진다고 한다. 심지어 재활용도 가능하다고.





그림의 재료라면 아직도 수채화 물감과 유화 물감만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요즘 회화작가들의 작업실에 가면 대략 이런 아크릴 물감과 도무지 알 수 없는 요상한 화학약품 비스무리한 것들이 사방에 뒹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에 비해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너무 다양해져서 작가들도 열심히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 때문에 전시장 캡션에 "혼합재료(mixed media)"라고 뭉뚱그려 적어놓으면 관객 못지않게 작가들도 궁금해 하긴 마찬가지다. 

또 투명하게 비치는 얇은 필름지에 해먹(tusche, 물에 녹는 기름성분)을 이용해 이것이 마르면서 표면에 침전되는 느낌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건 안타깝게도 마땅한 사진이 없다.  사진 저 안쪽 벽면에 걸린 작품들이 바로 그것. (보이는지? ^^;;;)

 


세 가지 작업 방식 모두 ‘평면’이라는 회화에 있어 안료와 공간감에 대한 문제를 탐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움직이는 이미지와 고혹적인 색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정지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 좋아요. 뭔가 찰나를 살짝 잡아주는 그런 가볍고 아슬아슬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죠. 마치 발레리나의 토슈즈가 살짝 바닥에 닿는 듯한 느낌 같은. 그래서 작품이 감각적(sensual)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런 그의 관심은 <the widening gyre-night(점점 커지는 소용돌이-밤)>, <sashay-red on  blue(블루  위를 미끌어지듯 돌아다니는 레드)>, <lull-blue(일시적인 고요-블루)><acrobats(곡예사)> 등과 같은 작품의 제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Still life in space-acrobats>



“안료를 흘리고 겹치니까 구조적으로 조각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가 봐요. 배경이 굉장히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형태(shape)가 더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르죠. 안료 층이 겹쳐 쌓여 있어서 실제로 무겁기도 하구요. 하지만 일반적인 조각처럼 정지되어 있는 느낌을 주지는 않죠. 캔버스 표면에 굳어있는 안료들이 각각의 질량에 의해 움직임과 방향성을 갖고 있거든요.
보통 서양화에서 여러 개의 초점이 같이 등장하면 배경과 떨어져 보이면서 다양한 공간감을 드러내잖아요. 그런 일종의 착시현상을 이용했다고 할 수 있어요. 결국 안료와 원근감이라는 그림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와 표현기법을 이용해 최대한의 느낌을 뽑아내는 작업인거죠.”





이런 그의 작업방식을 동양화 기법과 비교하면, 먹을 여러번 중첩해 쌓는 적묵법(積墨法)을 떠올릴 수 있겠다. 적묵법은 말 그대로 먹을 겹겹이 쌓아 올려 묵직한 괴량감을 표현하는 준법인데, 주로 바위산이나 깎아지른 절벽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이렇듯 보통 안료는 더하고 입힐수록 텁텁해지고 무게감이 생기는 법이건만, 홍수연의 적채법(?)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겹겹이 쌓아올릴수록 공간이 더욱 확장되고 가벼워지며 투명하게 빛난다. 깊은 심연을 부유하는 듯 캔버스 표면에 떠오른 안료의 층이 만들어내는 그 무한한 공간감이란. 그의 그림을 볼 때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그의 그림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풍부한 색채감각이다. 어두운 블랙에서 그레이, 블루, 레드, 형광 옐로우 등등... 그가 색을 쓰는 방법은 매우 대담하면서도 노련하다. 신기한건 아무리 어둡고 탁한 색이라도 그가 칠하면 투명한 빛을 머금은 듯 말캉말캉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또 이렇게 다른 색의 독립된 작품들이 서로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단독으로 있을 때보다 더 다양한 운율과 공간감을 창조하기도 한다.




색을 쓰는데 ‘크게 겁이 없다’는 그는 같은 색이라도 미묘한 차이를 내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어낼 줄 안다. 하지만 색에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고. 예전에는 전시의 테마가 되는 색을 일부러 정하기도 했지만, 이번 개인전에서는 거추장스러워질 것 같아 그마저도 생략했다고.

"천천히 보이는 게 좋아요. 그런게 정말 어렵죠. 뭔가를 계속 보게끔 만드는 것. 사람을 끌어당기는 아우라를 만드는 것. 그건 정말 간발의 차이인 것 같아요. (작가에게 잘된 작품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미묘한 차이에서 비롯되지만 작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뽑아낸 것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죠."

"처음엔 우연적인 효과들이 재미있어서 시작했어요. 하지만 이런 우연적인 느낌은 사실은 가장 인위적으로 만드는 거죠. 사실, 컨트롤하기 쉽지 않은 형태잖아요. 작품은 단순한 발명품이 아니고, 있는 것 가지고 내 코드에 맞게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찌 보면 한끝 차를 두고 다투는 작업인거죠. 그래서 원하던 것이 제대로 나오면 소름 끼칠 정도로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요."


그와 이렇게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마저 자꾸만 대화가 새나가 평소처럼 신변잡기로 흘렀지만, 어쩐지 그에게 몇 걸음 더 바짝 다가간 느낌이 들었다.

때마침 함박눈이 예쁘게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면서 창문 너머로 보이던 풍경이 뿌옇게 가려지고, 깊고 아득한 공간이 새롭게 생겨났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그림이 오버랩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내리는 눈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거리를 가늠하기 힘든 도로를 천천히 달리면서, 캔버스 표면의 안료 층을 통과해 서서히 빨려들어가는 기분이 바로 이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P.S. 갤러리 PLANT의 개인전은 공식적으로 지난 11일에 끝났지만 대략 12월 동안 작품을 그대로 걸어놓기로 했단다. 혹시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들러보시길. (안국동 윤보선 고택 근처. 02-722-2826) 그마저 놓쳤다면 낙심하지 말고 근처 금호미술관으로 얼른 발걸음을 옮겨보시길. 금호미술관의 <21 and Their Times>(12.1∼2011.2.6)에서 그녀의 초기작과 근작 몇 점을 만나볼 수 있다.


홍수연은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미국 Pratt Institute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부터 포스코미술관(2001), 금호미술관(2002), 화이트월갤러리(2003), 갤러리인(2005) 등 개인전 9회, 다수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창동 미술창작스튜디오의 제1기 작가로 참여했다.(2002∼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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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화가의 작업실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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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바로 여기.

 

광주광역시 동구 지산동 275번지에 있는
() 오지호(19051982) 화백의 작업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 오지호·오승윤 부자의 작업실이다.
왜냐하면 이 작업실은 1953년 오지호 화백이 지었지만 아들 오승윤(19392006)이 물려받아 줄곧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젤 주변에는 오지호·오승윤 부자가 쓰던 색색의 유화물감이 오랜 세월의 더께처럼 남아있다
.




파스텔 빛 물감은 아버지 오지호
, 조금 진한 색은 아들 오승윤의 것이란다.

사실, 근대 이후 수많은 미술가들이 작업실을 사용했지만, 그들의 사후(死後) 작업실이 온전히 보존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선전으로 약칭)의 최고 스타작가였던 대구출신 화가 이인성(19121950)은 대구 남산병원의 병원장이었던 장인이 병원 3층에 근사한 작업실을 마련해 주었지만 지금은 사진자료로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아예 건물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또 근대기에 활동했던 화가 김두한의 예산 작업실은 당시로는 드물게 2층으로 된 작업실 전용 양옥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노래방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 남한 땅에 온전히 남아있는 작가의 작업실로는 오지호·오승윤 부자의 작업실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더욱이 이곳은 1953년 당시 모습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더욱 가치가 높다.

 


작업실에 놓여 있는 옛 작업실 사진만 봐도 지붕색만 바뀌었을 뿐
,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업실 안에 있는 물건들은 오지호·오승윤 부자의 것이 섞여 있는데, 이젤은 아들, 의자는 아버지 것이라고.




내부를 꼼꼼히 살펴보면, 3대로 이어지는 화맥(畵脈)을 찾을 수도 있다.
커튼 위에 있는 항아리를 그린 그림은 오승윤 화백의 아들 병재 씨가 미술대학에 입학하면서 그린 것이라고.

 

 


위 사진에서 커튼 왼쪽이 오지호 화백, 커튼 오른쪽이 아들 오승윤 씨의 사진이다.

대략 6평 정도의 이 작업실은 몇 가지 구조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남쪽으로 난 창문은 두꺼운 커튼을 드리워 완전히 가렸다.
남쪽 빛은 워낙 변화무쌍해서 빛의 간섭이 심하기 때문이다.
대신 채광이 일정한 북쪽 빛을 살렸다.
어두운 낮 시간을 보완하기 위해 커튼 없이 북쪽으로 창을 크게 내고 지붕 일부를 뚫어 450cm 폭의 투명유리를 끼웠다. 북쪽의 큰 창은 반투명 유리를 끼워 빛만 들일 뿐, 내부를 밖에서 볼 수 없게 했다.
과연 빛에 민감한 인상파 화가다운 작업실이라 하겠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오지호-오승윤 화백의 수많은 작품들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되었다.
워낙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두 작가의 체온과 손길이 아직도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
 




작업실 바로 맞은편은 3대가 살던 초가집이다.



오지호 가옥(吳之湖 家屋)’이라고 불리는 이 집은 원래 조선대학교의 관사로서,
조선대 회화과 초대교수가 되어 광주에 정착한 오지호 선생이 1949년부터 거처로 삼았다
.
(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표작 남향집(1939)의 배경으로 종종 오인받곤 하지만,남향집은 그가 송도고보 교사 시절에 그린 작품으로, 이 초가집과는 관계가 없다
.)
그의 사후 아들 오승윤이 매입해 현재는 미망인 이상실 여사가 거주하면서 직접 관리하고 있다
.
초가집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고 할 정도로, 이 집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과연 뒤뜰의 장독대와 소박한 집 모양새가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

사실 아무리 초가집이라곤 하지만 그 유명한 오지호 화백이 살던 곳인데...’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작년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말 그대로 초가 ‘4
인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더랬다.
사람이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모두 넉넉하게 품어내는 한옥의 신기한 능력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여기서 어떻게 3대가 옹기종기 살았는지, 방문객도 끊이지 않았을 텐데... 조금 의아스럽긴 하더라. 


현재 이곳은 광주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대문 옆에 붙은 알림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인 출입금지다.



나는 다행히 매우 강력한 빽(?)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방문할 수 있었다. ^^
제작년 광주비엔날레 취재차 갔을 때 처음 가보고, 이번에도 역시 비엔날레를 핑계로 내려가 
초가집과 작업실을 또 보고 싶다는 이유를 댔지만,
사실은...
이 집 무화과 맛을 잊지 못해서였다
. (이런, 잿밥에 눈이 먼...-_-;;;)

웬 무화과인고 하면, 바로 초가집 뒷편 작은 텃밭에 심은 무화과나무에서 따온 녀석들이다.
꽃이 없어서 무화과(無花果)라는 이름이 붙은 이 맛있는 열매는 정말 염치고 뭐고 없이 자동적으로 손을 뻗게 한다.
술안주로 나오는 달디 단 말린 무화과가 아니라 나무에서 갓 딴 싱싱하고 달콤한 무화과!

 
 



연한 껍질을 살살 벗겨서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흐물흐물 푸짐한 과육이 허물어지면서 입 안 가득 달콤한 여운을 남긴다.  제대로 씹을 겨를도 없이 미끄덩~ 꿀꺽 자꾸만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아, 이렇게 품위 있는 단 맛이란~
올해는 먹을 복이 더해
, 말로만 듣던 동부 소를 넣은 모시잎송편까지! 'ㅂ'
정말이지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다과상이었다고나 할까. ㅎㅎ

화가의 오랜 손길이 남아있는 작업실, 따뜻한 숨결과 추억이 깃든 초가집, 그리고 달콤한 무화과와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 오지호 화백의 그림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가을 빛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그런 평화로운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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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누구에게나 가슴 설레는 일일 것이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가는 것은.
작가의 작업실은 늘 알 수 없는 비밀에 둘러싸여 있는 듯하다. 저 방안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당장 문을 밀고 들어가 창작의 비밀을 낱낱이 밝혀버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럴 수 없다면 그냥 한번 둘러보기라도 했으면.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작품이 탄생되는 건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런 까닭에 처음 미술전문지 기자가 됐을 때 제일 신이 났던 것이 바로 취재를 빙자한 작가의 작업실 탐방이었다. 그리고 그 첫 방문지가 바로 최우람의 양재동 지하 작업실이었다. 그러니까 그와의 인연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우람은 기자가 되어 처음 취재계획을 세우고 지면에 소개한 작가이기도 하다. 젊은 작가만을 소개하는 꼭지였는데, 그에겐 비슷한 경력과 나이대의 작가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움직이는 기계 작품’을 만든다는 사실. 당시 유행하던 개념적이거나 인터렉티브한 설치작품도, 전통적인 재료로 만든 조각작품도 아닌 스스로 움직이는 기계라니. 게다가 그 기계는 단지 움직일 뿐만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하나의 ‘의미 있는 생명체’로서 우리 눈앞에 버젓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나는 조각한 것이 아니다. 대리석 안에 있는 상을 끄집어 낸 것일뿐”이라고 말했다면, 최우람의 경우는 “이것은 원래 우리와 함께 살고있는 생명체다. 내가 ‘발견’했다. 어때, 신기하지?”라고 보여주는 식이다. 이렇게 말이다.




 

도시의 큰 안테나 주변을 떠돌며 송수신 전파를 먹고사는 ‘에코나비고(Echo Navigo)’(사진 위)와 그것을 전시장에 설치한 모습(사진 아래). 아래 사진의 벽에는 에코나비고의 유생 3마리도 보인다. 과연 이 녀석들의 운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의심도 버리라는 듯이, 이 ‘기계 생명체’에 정식 학술명칭을 붙이고 그것의 생식분포, 성장과정, 섭식패턴, 종의 분류 등을 마치 박물관의 생물표본 설명서처럼 작성해서 함께 제시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이 기계 생명체의 ‘창조자’라기보다 ‘발견자’이며, ‘기계생명연합연구소’(약칭 U.R.A.M., 그의 이름 URAM과 같다)의 소장님인 셈이다.

예를 들어, 2006년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전시된 녀석의 이름은 ‘어바너스(Urbanus)’다. 학술명은 꽤 길다. ‘Anmopista Volaticus Floris Uram’. -_- 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어바너스’는 주로 고도 200m 상공에서 도시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살아가는 놈들이다. 흡수한 에너지를 빛으로 방출하는 꽃 모양의 암컷과 암컷에게 에너지를 받아 활동하는 수컷들, 새끼와 촌충들…. 이 ‘어바너스’ 패밀리를 보고 혹자는 “너희는 어느 별에서 왔니”라고 물을 지도 모르지만, 최우람의 말에 의하면 이것들은 엄연히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다. 도시의 에너지를 먹고사는 이 기계생명체들은 보통은 사람의 눈을 피해 기생하지만 ‘고스트 바스터즈’같은 ‘기계생명연합연구소’의 ‘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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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때의 전시 광경을 찍은 동영상이다.(2006.3.10∼5.7) 모리미술관의 신진작가 지원 프로그램인 “MAM Project”를 통해 열린 개인전이었는데, 마침 미술관이 빌딩 53층에 위치한 터라 창 너머 도쿄의 야경이 에너지 자장으로 보이며 ‘어바너스’의 존재를 더욱 실감나게 했다. 당시 휴가를 쪼개 전시를 보러 간 나는 긴장과 흥분으로 잔뜩 고조된 그를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지하 작업실 높이가 2.4m인 탓에 3.5m 크기의 암컷 ‘어바너스’의 날개를 겨우 한쪽만 테스트해 보고 왔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려했던 작품의 설치와 움직임은 성공, 전시도 대성공이었다.    (자료: 작가 제공)


여기까지 듣고 “이 무슨 택도 없는 소리냐”라고 할 사람도 있을 테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조각의 개념에 혼란이 와서 머리가 아픈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미술작품 대부분은 실은 ‘택도 없는’ 판타지를 그린 상상력의 소산이 아닐지. 꽃의 신 플로라와 서풍의 신 제피로스의 꽃바람에 실려 커다란 조가비를 타고 파도에 떠밀려오는(어디 될 법한 소리인가 말이다) 비너스를 그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온갖 기괴하고 요망한 괴물들로 우글우글한 지옥도를 그린 보쉬의 <쾌락의 동산>, 셰익스피어 희곡의 주인공을 그린 밀레의 <오필리어>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다. 모두 우리 눈에 익숙해졌거나 그럴듯해 보이도록 작가가 ‘마법’을 건 것들일 뿐. 이러한 마법이 어떻게 실행되는 지, 그 비밀은 바로 작가의 작업실 속에 숨겨져 있다.



위·연희동 어느 모처, 여느 가정집과 별다를 것 없는 외관의 작업실  /  가운데·작업실 내부 전경. "끼릭~ 끼리릭~" "쉭~ 쉭~" 곳곳에서 녀석들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  아래·연구소 작업 모습 도촬. 오는 11월에 있을 국립현대미술관 〈Made in Popland전〉의 작품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습이다.




현재 최우람은 양재동 지하 작업실을 벗어나 2008년부터 연희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꿈에 그리던 천장이 높은 작업실이다. 첨단 연구소다운 면모도 언뜻 느껴진다. 하지만 '기계생명연합연구소'의 활동이 전세계를 무대로 활발해지고 점점 더 다양하고 엄청난 기계생명체들을 '발견'해나가고 있는지라 작업실은 금새 포화상태가 될 듯하다. 지하층과 1층 작업실에는 그 존재가 이미 세상에 알려진  ‘Una Lumino’, ‘Jet Hiatus’, ‘Cakra-2552-a’...등 녀석들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리고 2층의 연구소는 밤낮을 잊은 소장과 연구원들(프로그래머, 디자이너 등)이 새로운 기계생명체를 추적하는 곳이다.

작업실을 찾은 토요일은 최우람 씨만이 나와 작품의 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다른 스텝들은 주 5일제란다. 그는 전날 잠을 설쳤다고는 하지만 도대체 얼마동안이나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지 가늠이 안될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11월에 있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에 신작을 선보이기 위해 불철주야 작업에 매진한 탓이다. 창작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눈을 반짝이는 필자를 인식했는지, 그는 묻기도 전에 작업과정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작품의 제작과정은 어느 정도 분업화되어 있지만 상당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작품의 구상에서 전체적인 모습과 움직임이 결정되기까지는, 스텝들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수없이 많은 실험과 수정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그 복잡하고도 심오한 과정이 끝나면, 그 후의 작업은 오히려 수월하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컨셉에 맞게 멋진 외형을 완성하는 한편, 움직임을 조정하는 CPU와 모터드라이버, 메모리, 센서 등등이 내장된 작은 PCB(printed circuit board)를 만들고, 그것을 잘 장착하여 실행시키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기계생명체의 모든 비밀이 들어있는 PCB다.



게다가 (쉬잇∼!) 이날 작업실을 엿본 바에 의하면, 그의 작업에는 어떤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도시에 기생하는 기계생명체에 관한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이야기는 새로운 ‘신화’를 토대로 우주에 존재하는 온갖 잡신(?)들을 찾아내는 게 될 것이라는 것. 그야말로 ‘고스트 바스터즈’다. 나 역시 이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그가 무엇을 보여줄 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건,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것.
두둥~ 개봉박두!





약력
최우람은 1970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중앙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명∈숙주〉(1998)를 시작으로, 〈170개의 박스로봇〉(2001), 〈Ultima Mudfox〉(2002), 〈도시에너지〉(MAM프로젝트, 2006) 등 9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제1회 포스코 스틸아트 어워드〉(2006)에서 대상을, 〈오늘의 젊은 미술가상〉(순수미술 부문, 2006), 〈김세중 조각상〉(청년조각 부문, 2009)을 수상. 두산갤러리 뉴욕 레지던시 프로그램(2009)에 참여했다.



작가의 홈페이지 www.ur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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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미국 내쉬빌의 Frist Center for the Visual Arts에서 열린 개인전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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