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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유경희의 아트살롱

릴케와 로댕의 섬세한 인연 “니콜라스 3세의 발이 울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때 로댕은 벌써 알았던 것이다. 우는 발이 있다는 것을, 완전한 한 인간을 넘어서 울음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모든 땀구멍에서 솟아나는 엄청난 눈물이 있다는 것을.” 나를 울컥하게 만든 릴케가 쓴 로댕론의 한 대목이다. 젊은 시절 릴케는 로댕의 비서였다. 릴케는 프라하에서 전시 중이던 로댕의 제안으로 1905년 9월15일부터 1906년 5월12일까지 로댕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비록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고 사소한 오해로 결별했지만, 릴케는 로댕의 위대한 작품에 경탄을 금치 못했고 강연과 글을 쓰는 등 로댕을 전파하는 사도 역할을 했다. 릴케는 로댕을 만난 것을 일생의 큰 행운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 위대한 조각가를 만났던 일이 어떤 문학작품보다 자신.. 더보기
책과 해골, 헛되니 어쩌라구! 책 그림은 누구나 다 좋아한다. 그래서 화가들도 즐겨 그린다. 미술에선 이런 걸 소재주의라고 부른다. 호감 살 만한 소재로 가볍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말이다. 그런데 책 위에 해골이 놓여 있다면 사람들이 좋아할까? 우리라면 거부했을 법한 이런 그림을 네덜란드인은 은근히 즐겼던 것 같다. 이런 그로테스크한 취향을 담은 네덜란드 정물화를 일컬어 바니타스(vanitas·허무, 허영, 영어는 vanity)화라고 한다. 사실 모든 정물화는 바니타스를 의미한다. 특별히 바니타스 정물화라고 명명할 때는 해골, 책, 골동품 등을 통해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보다 직설적인 메시지를 드러내는 경우이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30년전쟁’ 이후 1650~1660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그려진.. 더보기
니케, 예술이란 이런 거야! 유경희 | 미술평론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나의 멘토의 게스트룸에는 ‘사모트라케 여신의 승리’가 걸려 있다. 물론 복제된 포스터다. 나는 일년에 일주일 정도는 그 방에서 아침을 맞이한다.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인 이 작품은 고즈넉한 명상의 시간을 제공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승리를 가져다주는 니케(나이키) 여신상은 기원전 190년께 제작된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 조각이다. 로도스섬 사람들이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의 해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조상은 승리의 감격을 알리기 위해 니케가 하늘에서 뱃머리에 내려앉는 순간, 갑자기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휘날리게 해 다리에 감기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프랑스 고고학 발굴팀이 1863년 에게.. 더보기
반 고흐의 고갱 생각 반 고흐가 그린 고갱의 의자다. 아를에서 고갱과 생활을 할 때 그린 의자지만 고갱이 쓰던 의자는 아니다. 고갱을 생각하며 그린 초상화라고나 할까. 반 고흐는 다섯 살 연상의 고갱을 흠모했고, 고갱이야말로 칭송받아 마땅한 화가며, 그에게서 받은 영향을 인정했다. 귀 자르기 사건으로 고갱과 헤어지기 불과 며칠 전 반 고흐는 이 빈 의자를 그렸다. 동양식 카펫을 배경으로 곡선미가 두드러진 세련된 팔걸이 의자 위에 촛불과 책이 놓여 있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의 상징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그림은 반 고흐 자신의 의자와 두 화가의 대조적인 성격과 창작 방식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고갱의 의자는 가스등이 켜진 밤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이는 증권거래소에서 일했고, 화려한 아파트에서 살았던 세.. 더보기
반 고흐의 자기생각 이것은 의자가 아니다. 이것은 반 고흐의 얼굴이다. 이 그림은 아를시절 고갱과 함께 옐로하우스를 꾸미려던 반 고흐의 심정을 그대로 전해주는 가슴 찡한 작품이다. 소박한 의자가 붉은색 격자무늬 타일의 초라한 실내를 배경으로 놓여있다. 특히 자신의 것이었던 이 의자는 시골 카페와 음식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의자였다. 물론 반 고흐는 거칠고 소박한 것밖에는 살 수 없는 처지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그가 추구했던 성직자 같은 검소함을 드러내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이 의자는 온통 노란색으로 두껍게 칠해져 있어 아를의 선명한 여름 낮을 상기시킨다. 소나무로 만들어진 단순하고 낡은 싸구려 의자 위에는 그에 걸맞게 파이프와 담배쌈지가 놓여있다. 특히 담배는 반 고흐의 최고 사치품이었다. 칼뱅교 신자답게 하.. 더보기
겁 없는 사랑 혹은 겁나는 사랑 신화에서 최고의 사랑은? 단연코 에로스와 프시케! 프시케(psyche)는 그리스어로 ‘나비’ 혹은 ‘영혼’이라는 뜻이며, 영어 ‘사이코(Psycho·정신, 심리, 영혼)’의 어원이다. 프시케는 새벽 하늘에서 내려온 이슬이 땅에 닿는 바로 그 순간에 태어났단다. 그만큼 순수하고 천상적인지라 사람들은 아프로디테보다 더 그녀를 숭배했다.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아프로디테는 잔인한 신탁을 내린다. 프시케가 죽음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 에로스는 엄마의 명령대로 죽음과 사랑에 빠지도록 프시케에게 화살을 쏘려 한다. 그는 프시케의 미모에 놀라 자신을 찌르고 그만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 사랑은 죽음을 이긴다는 말처럼 에로스는 프시케를 구원한다. 그러나 프시케는 언니들의 질투와 자신의 의심으로 에로스를 잃게 된다... 더보기
아주 사소하고 장엄한 풍경 하나 풍경화는 열등하다? 서양미술사는 초상화와 인물화의 역사다. 동양화의 중심이 산수화였던 것에 비하면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만큼 서양미술사에서 풍경화는 아주 늦게 태어났다. 물론 풍경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풍경화는 초상화나 역사화의 배경으로 등장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중시하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멀리한 기독교 가치관은 자연을 열등한 것으로 여기고 배척했던 것! 풍경이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려면 17세기가 돼야 한다. 클로드 로랭, 니콜라 푸생, 반 로이스달에 와서 풍경은 하나의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숭고한 풍경이랄까. 마치 신의 섭리를 드러내는 일종의 신앙고백처럼 느껴진다. 여전히 기독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그러다가 19세기가 되어 사.. 더보기
과일로 만들어진 남자 밀라노 출신으로 신성로마제국의 궁정화가로 일하며 백작위까지 받았던 주세페 아르침볼도(1526~1593)는 알레고리 그림, 즉 우의화로 유명하다. 아르침볼도는 16세기 마니에리스모(매너리즘) 화가들이 그렇듯이 세련된 고객들을 위해 인공적인 성격이 강한 흥미로운 그림을 그렸다. 그는 1573년에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별 ‘식물 초상화’ 연작, 즉 ‘조합두상(composite heads)’으로 당대에 인기작가로 부상했다. ‘여름’이라는 인물은 16세기 유럽의 여름에 재배되는 야채와 과일들로 구성됐다. 이를테면 복숭아, 마늘, 아티초크, 버찌, 오이, 완두콩, 옥수수, 가지, 딸기, 밀 등이다. 오이로는 코를, 배로는 턱을, 복숭아로는 볼을, 강낭콩으로는 이빨을, 체리로는 입술을, 밀이삭과 밀짚으로는.. 더보기
조증이 만든 천지창조 천지창조를 그릴 때 미켈란젤로는 조각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엄청 투덜거렸다. 천지창조는 그의 나이 37세인 1508년부터 1512년까지 5년 동안 제작된 작품이다. 초기 프레스코 공법을 몰라 피렌체에서 온 몇몇 화공의 도움을 받은 것을 제외하면 축구장 반만 한 크기에 400명 이상의 인물을 거의 혼자 힘으로 그려냈던 것! 옷도 갈아입지 않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5년 동안 꼬박 천장을 향해 누운 채로 말이다. 빵과 포도주만 가지고 사다리에 올라가 천장만을 바라보며 일하던 버릇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평상시에도 책이나 편지를 위로 들어 고개를 쳐들고 읽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하도 오랫동안 장화를 벗지 않아 나중에 신발을 벗을 때 살점이 함께 떨어져 나왔다는 얘기도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 것이.. 더보기
조각가 베르니니를 아시나요 르네상스 조각의 거장이 미켈란젤로라면, 바로크 조각의 거장은 베르니니였다. 모든 면에서 미켈란젤로와 비견되는 베르니니(1598~1680)는 미켈란젤로만큼 오래 살았고, 산 피에트로 광장을 설계할 만큼 바티칸과의 인연도 상당했다. 그뿐 아니다. 그 역시 미켈란젤로처럼 다비드 상을 제작했다. 물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에 가려 빛을 덜 보았지만, 역동성과 활기에 관한 한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완벽하다. 다비드, 즉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미술사의 흔한 주제다. 유대의 두 번째 왕 다윗은 음악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인물로 솔로몬의 아버지다. 양치기였던 어린 다윗은 전장의 형들에게 양식을 가져다주러 갔다가 사울과 블레셋의 전쟁을 목도한다. 이때 블레셋 거인 골리앗이 다가와 일대일로 싸워 패배한 편이 노예가 될 것을 .. 더보기
마리아의 치맛자락 루브르미술관에 가면 모나리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걸작이 있다. 역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성 안나와 성모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정신분석학자 S 프로이트가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분석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미술평론가들은 통상적으로 이 작품을 세 인물의 기묘한 결합과 자유로운 움직임, 얼굴에 매우 부드럽게 퍼진 명암, 그리고 스푸마토(sfumato·‘연기’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회화에서 공중에서 사라지는 연기같이 색깔 사이의 경계선을 부드럽게 옮겨가게 하는 방법) 등으로 설명한다. 더불어 아기 예수를 희생양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지극히 모성적인 마리아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런 딸의 행위가 부질없다고 만류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는 상식적인 수준을 토로한다.. 더보기
날개 달린 존재들 예수와 4복음서 저자들, 12-14세기, 생 트로핌 대성당, 아를르, 프랑스 유럽의 오래된 성당에 가면 날개 달린 존재들이 출몰한다. 스테인드글라스, 채색사본, 팀파눔, 조각상 등에 나타나는 그들은 4복음서 저자들이다. 특히 초기 기독교에서는 복음서 저자들을 날개 달린 피조물로 표현했다. 마태는 날개 달린 사람으로, 마가는 날개 달린 사자로, 누가는 날개 달린 황소로, 요한은 독수리로 그려지곤 했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와 같이 예수가 콩가루(?) 같은 인간 족보를 가졌다는 사실, 즉 예수의 인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을 상징물로 사용했다. 마가복음은 서두가 사자의 포효하는 울음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사자를 상징물로 삼았다. 전.. 더보기
전쟁에도 격이 있다? 아테나와 아레스는 둘 다 전쟁의 신이다. 아테나가 지혜로운 전쟁의 신이라면, 아레스는 좀 무지한 전쟁의 신이라고 할까! 아테나가 도시와 문명을 수호하는 전쟁을 주관한다면, 아레스는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전쟁을 주관한다. 아테나는 자유와 정의를 구현하는 수호천사요, 아레스는 폭력과 유혈사태를 일으키는 미치광이 싸움꾼인 셈이다. 아테나와 아레스는 모두 제우스의 자식들이다. 아테나는 헤라의 눈을 피해 제우스가 혼자 낳은 딸이다. 그녀는 그리스 전역, 특히 파르테논(Parthenon·그리스어로 ‘처녀의 집’이라는 뜻) 신전에서 열렬히 숭배받았다. 이렇게 잘난 누나 아테나에 비해 아레스는 영 인기가 없었다. 아레스는 제우스와 헤라 사이의 정실 자식이다. 외모는 황홀한 수준이었으나 성격은 양아치 같았다. 그래서인지 .. 더보기
결혼을 유지하는 질투? 6월은 헤라의 달이다. 그리스 여신 헤라는 라틴어로 유노(juno)가 되었고, 이것이 영어의 6월(June)이 된 것! 흥미로운 사실은 서양미술사에서 헤라가 단독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림이 적다는 점이다. 아프로디테에게 밀리고, 아테네에게도 밀린다. 헤라의 미모가 달려서일까? 아니면 아프로디테의 관능과 아테네의 지혜보다 부족했던 탓일까? 아마 예술품을 주문했던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조강지처를 상징하는 헤라가 더 이상 구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헤라는 통상 질투의 여신으로 알려져 왔다. 사실 헤라는 결혼의 신성함과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여신이다. 자신이 주관하는 결혼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제우스의 여인들을 응징하는 데 일생을 다 보낸 여자다. 고대 그리스 같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결혼과.. 더보기
뱃놀이에서의 점심 르누아르의 ‘뱃놀이에서의 점심’은 초여름의 따사로운 햇빛과 미풍을 한껏 느끼게 만든다. 그는 모파상이 묘사했던 샤투의 시아르 섬에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 ‘푸르네즈’의 테라스에서 배를 타러 온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놀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등장인물들은 르누아르의 친구들로 당시 파리 미술계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강아지를 데리고 놀고 있는 젊은 여자는 르누아르의 전속모델이자 양재사인 알린 샤리고이다. 훗날 그녀는 결혼을 주저했던 르누아르의 무려 18살 연하 부인이 된다. 그녀는 그림에서처럼 활기가 넘치고, 분위기를 잘 맞춰주는 재주 있는 여자였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다른 소녀는 르누아르가 즐겨 그린 모델 앙젤르이다. 그녀는 드가의 그림 ‘압생트’의 모델이기도 한데, 그래서인지 벌써 낮술에 취한 느낌이다.. 더보기
세상의 모든 슬픔 죽은 아이를 안고 통곡하는 어미를 그린 케테 콜비츠의 작품은 인간이 고통받는 짐승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것은 서양미술사의 반복되는 소재 ‘피에타(Pieta·연민)’의 현대적 버전이다. 미술사상 이보다 더 사실적이고 극단적이며 강력한 슬픔을 보여주는 작품은 드물다. 케테 콜비츠(1867~1945)는 소외받고 학대받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하여 사회변혁을 꿈꾼 독일 표현주의의 대가이다. 법학자임에도 법관생활을 하지 않고 미장이로 살아온 아버지와 유명한 신학자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콜비츠는 어릴 적부터 가난한 이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되었다. 연애에는 젬병이었던 그녀는 빈민촌의 양심적인 의사인 칼 콜비츠와 결혼하면서 노동자를 포함한 빈자들과 동고동락하게 된다. 콜비츠는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린 적이 없다. 수.. 더보기
독신여성이 아이를 그린다면? 여성 미술가들 가운데는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들이 많다. 그들은 흔히 자신이 남긴 작품을 자식이라고 말한다. 조지아 오키프, 프리다 칼로, 메리 캐사트, 리 크래스너(잭슨 폴록의 부인)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메리 캐사트(1845~1926)는 예술과 결혼생활이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이른 나이에 깨달았다. 캐사트는 미국 피츠버그의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자로선 드물게 미술대학을 나왔고, 게다가 저항하듯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드가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된 그녀는 인상주의에 합류해 활발한 활동을 했고, 인상주의 미술을 미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신인 캐사트가 평생 그렸던 것은 엄마와 어린아이! 그것도 신뢰와 애.. 더보기
부부간의 우정이 싹트다 아내가 남편의 어깨 위에 팔을 올려놓았다. 모델은 네덜란드 할렘의 부유한 상인 이삭 마사(Isaac Massa)와 그의 아내인 시장의 딸 베아트릭스 판 데어 란(Beatrix van der Laen)이다. 당시 네덜란드를 포함한 유럽의 부부 초상화는 각각 다른 캔버스에 그려져 마치 결혼식 장면처럼 나란히 걸리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부부를 한 화면에, 그것도 야외에 배치한 프란스 할스(1580~1666)의 그림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더군다나 당시로선 흔치 않게 여자가 남자의 어깨 위에 팔을 올려놓았는데,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호방하게 웃고 있다. 여성의 표정은 또 어떤가! 당당하고 친근한 그녀의 웃음은 결혼의 만족도가 얼마나 큰지 가늠하게 하지 않는가. 이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중산층의 .. 더보기
경청의 달인, 위대한 멘토 피사로 피사로는 모든 인상파 화가들의 스승이었다. 인상주의 여성화가 매리 캐사트는 “돌멩이들에게도 올바른 방법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선생”이었다고 회고했다. 세잔도 자기 자신을 “소박하면서도 위대한 피사로의 제자”라고 지칭할 정도였다. 이처럼 피사로는 한결같은 평판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스승으로 묘사된다. 피사로가 진정한 스승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경청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상주의자들의 아지트인 카페 게르부아에 모여 마네와 같은 혁명적인 화가들의 담론에 귀기울였다. 피사로는 말을 아끼는 성격으로,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동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엉뚱하지만 신중한 견해를 보태곤 했다. 주로 그의 말상대는 고갱과 세잔이었는데, 고갱이 오만함에도 내치지 않았고, 괴짜 세잔의 .. 더보기
샤갈의 어머니 사랑 샤갈은 가난이 주는 은총을 몸소 체험한 화가다. 러시아 비테브스크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물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풍요로운 시기였다. 무엇보다 유대종교 하시디즘(Hassidism)의 영향이 크다. 그보다 더 샤갈의 예술에 끼친 강력한 동인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과 격려였다. 샤갈은 가난한 나머지 늦은 나이까지 초등학교를 다녀야 했지만, 미술만큼은 재주가 뛰어나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어머니는 아들을 애달피 여기며 화가로서 인정하고 자존감을 세워주었다. “그래, 내 아들아. 난 알아, 넌 재능이 있어. 우리 집안에서 어떻게 너 같은 애가 태어났을까?” 어머니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다만 몇푼이라도 벌기 위해 구멍가게를 차려 가족을 열정적으로 돌보았다. 샤갈은 “통 속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