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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필름 속 사건

장 크리스토프 베셰, '사건들' (출처 : 경향DB)

그는 어둠이 내리자 후미진 골목 식당가를 거닐었다. 프랑스에서 온 그에게 네온사인이 화려한 간판들은 낯설고 이국적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다음에 유리문이 젖혀진 어느 건물의 실내에 눈길을 빼앗겼다. 다만 식당가를 찍은 직후였는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동선과 관심사를 정확히 알고 있는 필름이 말해주는 단서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필름을 현상하자 분명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빛은 새어 들어왔고, 마지막에 찍은 실내는 절반만 남아 있던 필름 속에서 잘린 채로 존재하고 있다. 네거티브 필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의도치 않았기에 분명 ‘네거티브’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필름이 사진기라는 기계 속에서 스스로 일으킨 화학적 사건의 결과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두 겹의 시간과 공간이 겹쳐지고, 빛이 화려한 색을 입히면서 작가가 거리에서 찍었던 실제 풍경은 비현실적이고 허구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진짜는 가짜가 되고, 정직한 프레임은 파괴되며, 작가의 의도는 헛것이 된다. 꿈에서 혹은 기억 속에서 분명 본 듯한 어떤 장면의 강한 변주 같기도 하다. 사진가가 그곳에서 셔터를 눌렀기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이 엉뚱한 결과물은 작가의 행위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셈이기도 하다. 사진가 장 크리스토프 베셰는 자신에게 찾아온 이 우연한 결과물들을 모아 ‘Accidents’(사건들)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엮었다. 그에게는 무질서와 통제 불능 속에서 탄생한 이 우연성이야말로 무수한 변수를 만나는 실제 삶에 가장 근접한 ‘포지티브’한 사진이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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