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갖지 못한 기억 사슴이 숨어 있다고 전해지던 한 부락 마을을 사람들은 ‘녹은(鹿隱)’이라 불렀다. 신화 속에서 지상과 천상을 매개하는 신령스러운 영매이자 영생, 재생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사슴이 숨어 사는 곳이니, 그 마을의 기운은 상상 가능하다. 마을이 이름을 잃은 것은 일제강점기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노근(老斤)으로 개명당했다. ‘녹은’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름을 빼앗긴 마을에도 일상은 흘렀다. 앞으로는 서송원천이 흐르고 주변을 산들이 둘러싼 전형적인 농촌 마을 사람들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터였다. 일상이 어그러진 것은 전쟁의 폭력성 때문이었다. 1950년 전쟁을 피해 길 떠나던 이들, 굴 속에 대피해 있던 사람들을 향해 미군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았다. 300여명이 살해당했다. 당시 미.. 더보기 이전 1 ··· 560 561 562 563 564 565 566 ··· 104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