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준모의 미술사를 바꾼 화상들 썸네일형 리스트형 7. 인상파 이전의 인상주의자, 화상 폴 뒤랑 뤼엘 7. 인상파 이전의 인상주의자, 화상 폴 뒤랑 뤼엘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근대산업사회로 발걸음을 옮겨가고 있던 19세기 중반 프랑스 화단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서사적인 고전주의나 목가적인 자연주의나 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오늘날 근대적인 조형의식과 색채와 미학의 총체라 인식되는 인상주의는 적어도 당시로서는 설 자리도 전시할 장소도 얻기 어려운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은 파리 교외를 전전하며 그림을 그렸고 파리 시내에 자리를 잡는다면 사창가나 다름없는 허름한 몽마르트의 피갈(Pigalle)거리였다. 이즈음 누구하나 눈길조차 주지 않던 인상주의자들의 혁명적인 그림을 혁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이가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폴 뒤랑 뤼엘.. 더보기 6. 그림, 세속으로 내려오다 (2) ##시민계급의 등장과 미술의 변화 미술이라는 장르가 시민들의 품으로 다가온 것은 산업혁명(18C말~19C전반)의 과실을 손에 쥔 도시 중산층들 즉 ‘부르주아’들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이들은 생산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닦으면서 신분과 문벌을 넘어 세상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시대(1837~1901), 프랑스에서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 Ier, 1773~1850)의 7월 왕정이후인 1830년대부터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 시기에 들면 도시가 확대되면서 농촌인구가 유입되어 인구는 늘고 철도가 발달하고 대중적인 신문이 발행되면서 시민계급이 확실하게 권력의 주체가 되어갔다. 이들은 경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취미의 전통이나 문화적 교양이 부족해서 스스로 열등감을 갖고 있었기.. 더보기 6. 그림, 세속으로 내려오다(1) 6. 그림, 세속으로 내려오다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왕권이 강화되던 시기에 등장한 게 바로크(Baroque, 17세기)이다. 이 시기는 교황과 가톨릭 교회가 종교개혁운동으로 인해 그 영향력이 현저하게 약화된 시기이자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커지기시작한 때이다. 이 때 자신의 권위와 우아함을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왕과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미술품의 주문자인 동시에 소비자였다. 따라서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화가나 조각가들은 기사작위를 얻는 등 신분상승과 함께 황실과 가톨릭 교회로부터 주문이 쇄도하면서 유례없는 호황을 만나게 된다. 14세기 이전 실질적으로 유럽을 지배한 것은 교황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 더보기 5. 인상파와 후기인상파를 알아 본 최초의 화상 ‘탕기 아저씨’와 고흐의 만남(2) 1886년 고흐가 파리로 나왔을 무렵, 파리는 온통 일본문화(Japonism)에 열광하던 시기이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일본문화를 접한 유럽인들에게는 경이의 그것이었다. 전에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과 입체적인 화법을 무시한 평면적인 회화, 단순한 면과 밝고 맑고 그러면서도 화려한 채색 등은 1870년대 파리의 문화계와 사교계를 강타했다. 하지만 일본 미술의 영향과 일본적 취향 그리고 일본풍을 즐기고 선호하는 화가들은 이미 한 둘이 아니었다. 마네, 모네, 로트렉, 보나르(Pierre Bonnard, 1867~ 1947)등의 화가뿐만 아니라 귀족과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포니즘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일본열풍을 뒤늦게 접한 고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문화의 단순하면서도 .. 더보기 5. 인상파와 후기인상파를 알아 본 최초의 화상 ‘탕기 아저씨’와 고흐의 만남 (1) 5. 인상파와 후기인상파를 알아 본 최초의 화상 ‘탕기 아저씨’ 줄리앙 탕기(TANGUY Julien, 1825~1894)와 고흐의 만남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화랑이 본격적으로 오늘날의 시스템을 갖춘 것은 이미 18세기 중반의 일이지만 여전히 이 시스템에 적용되는 그림들은 귀족들의 호사취미에 봉사하거나 장식적인 그림에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화풍의 그림, 특히 오늘날에는 고전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실험적인 미술이나 그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자신의 창작의 자유와 소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자초한 어려운 길을 감내해야만 했다. 특히 이 시기, 즉 산업사회로 이동하고 쁘띠 부르주아(Petit Bourgeois) 계급들이 등장하던 시절의 .. 더보기 4. 로코코시대의 두 거장, 화가 와토와 화상 제르생 4. 로코코시대의 두 거장, 화가 와토와 화상 제르생 글/정준모(국민대 초빙교수, 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Rigaud Hyacinthe 1701년 절대왕정을 완성시킨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완성시킴으로서 프랑스의 영광을 실현시킨 그 시기부터 섭정시대까지 활동했던 와토는 이런 시대적인 상황과 그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지방에 있던 유럽미술의 중심축을 프랑스로 옮겨왔다. 특히 루이 14세가 1715년 사망하자 프랑스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무려 72년이라는 재임기간 동안 소모적 전쟁과 사치로 엄청난 국가 부채에다 과다한 세금으로 허덕이던 프랑스는 어린 루이 15세를 대신해 오를레앙의 필립 공작(Phi.. 더보기 3. 근대적인 미술시장의 탄생-해방과 속박의 경계에서 3. 근대적인 미술시장의 탄생-해방과 속박의 경계에서 글 정준모(국민대 초빙교수, 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예술이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예술이 종교적, 봉건적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수백 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해방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예술과 돈과의 관계를 멀리 유지하려했지만 결국 그들의 해방은 다시 경제적 세력과의 해방과의 싸움을 알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렇게 돈과 예술이 결합하는 것이 오늘의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경제와 산업발전에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이들의 욕망은 예술에서조차 만족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언제나 돈으로 거래되었다. 예술품에 대한 욕망은 이미 기독교가 공인을 받기 전인.. 더보기 2. 화가들 상인을 겸하다-최초의 화상은 화가 2. 화가들 상인을 겸하다-최초의 화상은 화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1475~1564)가 시스틴 성당에서 천지창조를 그리는 과정을 그린 영화 (The Agony and the Ecstasy, 1965)을 보면 그림을 주문한 율리우스 2세와 다투는 장면이 가끔 등장한다. 다툼의 원인은 돈 때문이었다. 작업에 필요한 대금을 계약대로 주지 않고 지급일 넘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인문학이 절정에 이르고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과 후원이 가장 융성했던 르네상스 기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화가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놓고 다음 소장가나 컬렉터를 찾는 대신 당시의 화가들은 주.. 더보기 1. 들어가며-화가와 화상, 그 애증의 관계 1. 들어가며-화가와 화상, 그 애증의 관계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화가들과 사조들이 명멸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름이 붙어있는 많은 화가들과 사조들이 미술사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다만 미술사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미술가 무리를 넘어선 자들만 우선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이 우리 곁에 남았을 뿐이다.고흐가 생전에 그림을 한 점 밖에 팔지 못했던 시절, 당시 사람들은 그림을 사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고흐의 동생 테오가 형의 작품을 단돈 100프랑에 팔던 시절 같은 화랑에서 프랑스 화가 알프레드 드 뇌빌(Alfred de Neuville, 1852~1941)의 그림은 15만 프랑에 팔렸다. 화가들의 경제적, 세속적 성공은 그가 살아있..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