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화랑이 본격적으로 오늘날의 시스템을 갖춘 것은 이미 18세기 중반의 일이지만 여전히 이 시스템에 적용되는 그림들은 귀족들의 호사취미에 봉사하거나 장식적인 그림에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화풍의 그림, 특히 오늘날에는 고전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실험적인 미술이나 그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자신의 창작의 자유와 소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자초한 어려운 길을 감내해야만 했다.
특히 이 시기, 즉 산업사회로 이동하고 쁘띠 부르주아(Petit Bourgeois) 계급들이 등장하던 시절의 화가들에게 그림시장이란 그림의 떡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미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특히 불우한 화가들이 많았던 시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보편적으로 인류의 삶의 질이 한 단계 격상하던 이 시기와 일치한다. 이는 아마도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경제적인 부였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취미나 기호보다는 오직 일에 올 인하던 시절,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이솝 우화 속 ‘베짱이’취급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하게 즐기기 위해 노래했던 베짱이가 아니라 ‘생각하는 손’을 통해 인류의 또 다른 가치를 찾고 이를 실천했던 이들이다. 그래서 젊었을 적 어려운 가운데도 열정하나만으로 버티며 그림을 그리다 세상을 떠난 화가들의 가슴 짠한 이야기들의 이면에는 항상 두 어 명의 천사 같은 사람들이 존재해서 우리들의 심사를 흩뜨려놓기 일수이다.
우리들에게 늘 마음 저리도록 처절한 삶을 살았고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최대의 영광을 누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화가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있다. 그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 시절에 인상파에 적을 두거나 적어도 후기인상주의화가라고 지칭되던 화가들 중 대부분은 세상이 아직 그들을 ‘베짱이’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들의 새로운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 때문에 어렵고 힘든 생활을 감내해야했다. 물론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이나 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 1901) 처럼 원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화가들 몇몇을 빼고는 말이다. 하지만 이들도 당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의 길을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또는 무절제한 생활 때문에 늘 곤궁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간신히 끼니를 때우고, 카페에서 한 잔의 차를 마실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도구 즉 물감이나 캔버스 그리고 붓 같은 재료를 살 처지가 못 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이때마다 이런 가난한 화가들에게 물감 등 재료를 외상으로 주고, 때로는 돈도 빌려주면서 생활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탕기 아저씨’(Pere Tanguy)로 불리는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Julien Francois Tanguy, 1825∼1894)이다.
고흐 <탕기 아저씨의 초상> (드로잉, 1887)
1867년에 몽마르트르(Montmartre)의 클로젤(Clauzel)거리에 물감가게 즉 화방 문을 연 탕기아저씨는 당시 몽마르트르에 몰려 살았던 많은 화가들과 교류했고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를 자처했던 많은 당시의 화가들이 그를 ‘탕기아저씨’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매우 좋아했다.
그는 때로는 화가 친구들을 위해 화구들을 챙겨가지고 파리에서 무려 70Km나 떨어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가 살았던 ‘만종’의 고향 바르비종(Barbison)이나 근처 모레 쉬르 르왕(Moret sur loing),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 등 인상주의 화가들이 몰려 살면서 그림을 그렸던 아르장퇴유(Argenteuil) 때로는 인상파의 장로라 불리는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가 있던 퐁투와즈(Pontoise)까지 돌아다니며 화구를 방문 판매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당시의 화가들과 교우의 폭을 넓혔다.
<탕기 아저씨가 화구를 팔러다니던 지역을 지방으로 그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
마네, <아르장퇴유 자기 집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1883
바르비종에 자리한 밀레의 아틀리에
시슬리, <아르장퇴유의 다리>, 1872
피사로, <퐁투와즈의 얄라이스 언덕>, 1867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이렇게 화가들을 격의 없이 대하며 외상으로 화구를 공급해주거나 때로는 그림을 받고 물감을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화가들에게 팔리지도 않는 그림에 기꺼이 선불을 치르기도 했다. 사실 그 당시에 어느 누구도 그 화가들의 그림이 후대에 어마어마한 가치의 작품으로 평가받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할 적에 말이다.
이렇게 한 3년을 지내다 보니 그의 화방 뒤 창고는 언제부터 인가 그림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래서 1870년 그는 드디어 창고에 남아있는 그림들을 정기적으로 팔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고흐의 그림을 비롯해서 모네, 시슬레, 세잔느,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1903)같은 화가들의 그림 중 하나도 팔지 못했다. 그러나 살롱전에 대해 꾸준히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낙담하지 않고 꾸준하게 신선한 화풍의 이들을 도왔다.
이렇게 그는 화상이라기보다는 화가들을 도와주고자 한 마음씨 좋은 정말 ‘아저씨’같은 사람이었다. 인상주의를 세상에 알린 성공한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1868~1939)가 1895년 세잔느의 생전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어 줄 수 있었던 것도 ‘탕기 아저씨’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파리에서 세잔느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곳은 탕기아저씨네 화방 쇼 윈도우가 유일했다.
탕기는 1877년부터 1893년까지 근 15년 동안 틈틈이 세잔의 그림을 자신의 화방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세잔을 처음 본 볼라르가 전격적으로 세잔의 전시를 열어주게 된 것은 1895년의 일이고 보면 그는 비록 그림을 잘 팔지는 못했지만 잘 팔 수 있는 화상과 연결시켜주는 남다른 안목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도 항상 겸손한 자세로 화가들을 대했고 그들의 조형적 태도와 미학에 동의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변 화가들의 노력을 지지했고 그들이 비록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하더라도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술비평가로 소설가, 극작가로 활동하면서 풍자잡지『그리마스』(Les grimaces)를 창간했던 옥타브 미르보 (Octave-Henri-Marie Mirbeau,1850~1917)에 의하면 탕기아저씨의 가게에는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세잔, 고흐, 고갱, 베르나르(Emile Bernard,1868 ~ 1941)의 그림들이 소장가를 찾기 위해 걸려있었다고 전한다.
사회주의자로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인 파리코뮌에도 참가한 바 있는 탕기아저씨는 화가들을 자신의 이상향을 지키는 영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꺼이 화가들을 도왔고 이런 과정에서 모인 그림들을 팔기위해 화랑 진열장을 오늘날의 윈도우 갤러리로 사용했고 화랑 모퉁이 방을 화랑으로 운영했다.
특히 탕기아저씨의 고흐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대단했는데 그는 파리를 떠나기 전까지 3점의 탕기초상화를 그릴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고흐 <탕기 아저씨의 초상> (유화, 47*38.5cm, 1886-7)
고흐 <탕기 아저씨의 초상화> 1887@로댕미술관.
(초상화 뒤로 당시 파리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유행이었던 일본의 판화 우키요에 이미지가보인다)
고흐가 빈센트가 탕기아저씨를 만나게 된 것은 동생 테오(Theo van Gogh, 1857~1891)를 통해서 였다. 이후 탕기는 이내 고흐에게 관심을 보였고 종종 점심식사에 초대하는 등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고흐가 세상을 떠나는 그날 까지 그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첫 만남 이후 반 고흐는 탕기아저씨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왕성하게 그림을 그리던 시기는 물론 1889년 1월, 정신 질환에 시달리던 고흐가 아를(Arles)을 떠나 1889년 5월 8일, 생 레미(Saint Rémy)에 있는 생 폴 드 무솔요양원(The mental hospital of Saint Paul de Mausole)에 입원 중 일 때도 탕기아저씨는 고흐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를 돕고자 노력했다. 고흐도 이에 화답이나 하듯 병원에 있던 53주 동안 143점의 유화와 100점의 드로잉, 그리고 수많은 스케치를 그렸다. 이때 그린 고흐의 그림을 자신의 화방 모퉁이 작은 화랑공간에 전시를 하기도 했다. 이즈음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냈던 편지에 의하면 당시 고흐가 얼마나 탕기아저씨에게 의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어제 탕기 아저씨를 만났어. 그는 내가 막 완성한 그림을 가게 진열장에 걸었어. 네가 떠난 후, 그림 네 점을 완성했고 지금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야. 이 길고 큰 그림들을 팔기는 어렵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나중에는 사람들도 그 안에서 야외의 신선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야.”
약 1년 동안 병세가 호전되는 듯 했던 고흐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자 고흐는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테오는 한 걸음에 달려와 피사로가 소개해 준 오베르 쉬 즈와르(Auvers sur Oise)의 가쉐(Paul Ferdinand Gachet, 1828~1909) 박사를 주치의로 정하고 오늘 날 고흐의 마을로 알려진 이곳으로 옮겨와 라보(Arthur Gustave Ravoux)의 여관에 숙소를 정한다. 1890년 5월 20일의 일이다. 이후 심신이 피로하고 허약했지만 고흐는 이곳에서 머무르던 70일 동안 80점의 유화와 64점의 드로잉을 제작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슴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심장에 총알이 박힌 채 숙소인 라부(Ravoux)의 집으로 내려온 그는 자살을 시도한지 이틀이 지난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천재예술가였으며 평생을 고독한 영혼으로 살아온 그가 쓸쓸한 방랑객으로 눈을 감았다.
오베르 쉬르와즈에 있는 빈센트 고흐(왼쪽)와 동생 테오의 무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한 것도 탕기아저씨다. 그가 눈을 감은 다음날 급히 파리에서 내려온 탕기와 동생 테오, 베르나르 그리고 가쉐 박사가 오베르의 공동묘지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다음해 그의 동생 테오도 형의 옆에 눕고 만다.
단 한번, 알베르 오리에(Albert Aurier, 1865~1892)가 쓴 비평문이 유일할 정도로 화가로서 불우하고 외로웠던 고흐지만 그에게 있어서 탕기아저씨는 천군만마보다 더 큰 힘이 되어 주었으며 그의 가게에서 처음 본 우키요에(浮世繪)를 통해 새로운 회화로 한 발 더 성큼 다가섰던 그는 3점의 탕기아저씨 초상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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