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선, 해피투게더 연작 중, 옥선&랄프, 2002
시인 최승자는 ‘즐거운 일기’라는 시를 썼다.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무사함,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망감을 그녀의 시에서 읽어낸다. 그것도 처음으로 여자가 자기 현실을 여자의 목소리로 쏟아냈다는 커다란 의미 부여와 함께. 1980년대 초가 처한 시대의 우울을 내세우는 대신 스스로의 일상을 조목조목 고백하는 최승자의 목소리는 담담해서 더 오래도록 아리다. 시인의 그 독백 이후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 우리의 일기는 얼마만큼 즐거움에 다가섰을까.
최승자의 시에서 제목을 빌려온 서학동사진관의 ‘즐거운 일기’는 5명의 여성 사진가들을 소개하는 전시다. 그것은 최승자의 시만큼이나 어떤 수사도 없이 담백하다. 여성 작가라는 단서 외에 최근 뜨거운 페미니즘 논의에 대한 특별한 입장도 밝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1세대 여성주의 사진가로 꼽히는 박영숙의 강렬하고 선언적인 작품과 일상을 파편처럼 기록한 20대 황예지의 대비만큼이나 다섯 작가의 결은 개성 있다. 외국인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시작하며 가족의 정체성, 그 사적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시선까지를 냉정하게 주목하려 했던 김옥선의 ‘해피투게더’는 여성이 카메라를 스스로에게 돌렸던 시발점으로서의 공감대와 상징성을 가진다. 반면 영화배우 봉태규와의 결혼 생활을 일기처럼 소개함으로써 소셜미디어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패션사진가 하시시 박의 일상 사진들은 어쩌면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묘한 설렘과 동경을 유발한다. 주제를 강요하지 않은 전시는 오히려 사진을 삶의 언어로 삼은 주체로서의 여성을 훨씬 주목하게 만든다.
송수정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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