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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앙드레 케르테츠 그도 예술가가 되기 전 고갱처럼 증권 거래소에서 일했다. 시련을 피해 파리에 정착한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라는 점에서는 로버트 카파와 같은 운명을 지녔다. 다만 전쟁터에서 사진을 찍을 때조차도 로버트 카파처럼 참상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처럼 늘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산보했지만 결정적 순간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이 두 명의 사진가보다 덜 주목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로버트 카파와 카르티에 브레송은 그를 문제적 작가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20세기 초반, 조용히 그러나 깊게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던 앙드레 케르테츠의 작품을 성곡미술관에서 소개하고 있다. 케르테츠가 파리에 도착하던 1925년은 최초의 소형 카메라인 라이카가 출현한 해이기도 하다... 더보기
혁명의 사진, 사진의 혁명 구성주의(Constructivism)는 소비에트 혁명과 함께 등장한 예술 경향이다. 사회주의를 실천해 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 철학으로 등장해 독일의 바우하우스, 네덜란드의 추상미술주의인 데스틸 운동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 아방가르드를 추구한 서구의 문화, 예술 장르가 모두 구성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특히 건축과 디자인 못지않게 사진은 구성주의의 중심축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사진이 소비에트 사회에서 맡았던 임무는 단순한 시각 무기 이상이었다. 당시 사진은 가장 혁신적인 기계적 산물이었고, 부르주아 예술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전위적인 실험 양식이었다. 새로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식의 변화는 눈을 대신한 카메라를 통해 지각될 수 있었고, 또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더보기
고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정식의 ‘고요’ 전시가 열리고 있다. 팔순을 맞이한 그의 사진 세계는 추상 사진을 향한 질문과 답 찾기의 연작이었다. 어떤 대상이 지닌 구체적 지시성을 걷어낸 채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끌어내려는 사진적 시도는 꽤 골칫거리다. 대상에 필연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는 기계 이미지가 어떻게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의 초기 연작 ‘나무’와 ‘발’은 각 대상이 지닌 구체적 형상에서 전혀 다른 형태를 발견하려는 시도였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댄 식물이 아니라 얼굴로 보이기도 하고 에로틱한 신체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반면에 신체로서의 발은 피부의 질감과 다양한 곡선을 통해 또 다른 신체 기관을 연상시키며 지시성을 탈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형.. 더보기
즐거운 일기 시인 최승자는 ‘즐거운 일기’라는 시를 썼다.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무사함,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망감을 그녀의 시에서 읽어낸다. 그것도 처음으로 여자가 자기 현실을 여자의 목소리로 쏟아냈다는 커다란 의미 부여와 함께. 1980년대 초가 처한 시대의 우울을 내세우는 대신 스스로의 일상을 조목조목 고백하는 최승자의 목소리는 담담해서 더 오래도록 아리다. 시인의 그 독백 이후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 우리의 일기는 얼마만큼 즐거움에 다가섰을까. 최승자의 시에서 제목을 빌려온 서학동사진관의 ‘즐거운 일기’는 5명의 여성 사진가들을 소개하는 전시다. .. 더보기
거리의 타임캡슐 티셔츠의 계절인 여름이 오고 있다. 올해 예순일곱의 수전 바넷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의 뒷모습만 촬영한다. 사진가이면서 갤러리를 운영하기도 했던 그녀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낡은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선 건 우연이었다. 어느 날 아프리카 가면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지나가는 여인의 뒷모습이 강렬해 셔터를 눌렀는데, 사진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 얼굴보다도 훨씬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표정이 제거된 그녀의 뒤태에서는 신체적 특징은 물론 취향과 감각, 시대의 유행까지 모두 드러나 있었다. 티셔츠는 그야말로 거리를 활보하는 변화무쌍한 메시지였던 셈이다. 그 후 8년이 지난 지금까지 25개국에서 수천명을 촬영했다. 마치 관광객처럼 보이는 할머니로서의 연륜과 친근함은 어느 거리에서든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더보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홍진훤은 그날 이후 늘 이렇게 물었다. 그 많은 이들을 허망하게 바다에서 잃어버렸는데 국가도 사람도 침묵하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통음하듯 속으로 물었고, 4·16 기억저장소의 일을 거들면서도 물었다. 출판사 사월의눈이 그 질문을 이어받아 책을 만들었다. 소설가 김연수의 작품도 함께 실은 사진소설집. 두 개의 제목을 합쳐놓다 보니 책 이름이 꽤 길다. . 서문에서 홍진훤은 아직도 질문을 멈추지 못했다고 밝힌다. 애초에 대답이 불가능한 사건이기에 그것은 영원한 질문만을 남길 뿐이다. 세월호가 뭍 위로 올랐지만 대답이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그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없다. 홍진훤의 사진은 그들이 가려 했던 제주도의 수학여행길을 추적한다. 그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사진 속에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더보기
바바라 클렘 대선 당일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안희정의 볼 뽀뽀는 애교 있는 돌발 상황이었지만, 1979년의 이 장면은 정치인들 키스신의 대표 격이라 할 만하다. 당시 동독 정권 30주년을 기념한 자리에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은 진한 입맞춤으로 동맹국의 우정을 과시했다. 일명 형제들의 키스라 불리는 이런 입맞춤은 서구권 사회주의자들이 연대를 드러내는 상징적 방식이다. 프리랜서 사진가 레지스 보수의 클로즈업 사진과 함께 바바라 클렘의 이 사진은 당시 분위기를 전하는 역사적인 아이콘으로 꼽힌다. 바바라 클렘은 중도 우파 성향의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자이퉁’의 사진기자였다. 1959년 입사해 처음에는 사진 제판실에서 근무를 시작한 바바라 클렘은 1970년 사진기자.. 더보기
타임 리프 공간291은 사진인들이 꾸려가는 협동조합으로 전시장이자 책방으로 쓰인다. 건물 주소가 29-1번지여서 붙인 이름인데, 이건 꽤 놀랄 만한 우연이기도 하다. 미국 사진계의 거장이자 조지아 오키프의 남편이기도 했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1905년 뉴욕 맨해튼가에 열었던 갤러리의 주소도 291이었기 때문이다. 스티글리츠의 갤러리 291은 뉴욕 최초의 사진 전시장이자,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미국에 소개하는 진원지였다. 대신 서울의 공간291은 해마다 신인 작가를 발굴해 전시를 지원해 주는데, 지금은 상반기 지원 작가 중 한 명인 김레나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녀의 화두는 시간. 신인이라는 수식이 붙은 작가는 이토록 익숙한 불멸의 주제를 어떻게 신선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 횡단보도가 놓인 길 위에 무늬.. 더보기
수박과 가짜뉴스 - 5월 5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미쓰코 사노의 본래 직업은 영화 연구가였다. 중동에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에 이슬람 영화를 소개하는 일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문화가 이질적인 탓인지 아무리 좋은 작품이어도 일본에서의 반응은 신통치 않은 경우가 많았다. 대신 이미지에 대한 관심은 각 문화권이 가지는 제멋대로식 편견과 그것을 사진으로 다루는 일에도 흥미를 느끼게 만들었다. 아시아인들은 찢어진 눈매를 하고 있다든지, 온갖 종류의 카메라를 걸친 채 어딜 가든 사진 촬영에 몰두하는 식으로 묘사되는 중년의 일본 아저씨는 전형적인 사례다. 미쓰코는 이런 인종적 고정 관념을 사진으로 재현한다. 스스로가 모델로 분한 모든 장면들은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과장되어 있다. 다이소부터 미국 아마존 사이트까.. 더보기
요시다 기숙사 일본이 노벨상 수상자를 최초로 배출한 건 폐망 직후 폐허 속에서였다. 이들은 교토대학교 출신이었다. 1897년 개교 이래 여전히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대. 4차 산업을 이야기하는 21세기에 아마 이 대학 또한 미래 지향적인 연구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교토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이색적인 방문 장소로 꼽히는 요시다 기숙사에 들어서면 이 학교의 저력이 전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1913년 처음 운영을 시작한 이 기숙사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기숙사이자, 유일한 목조 건물 기숙사이다. 120개의 다다미방을 갖춘 내부에는 200명 정도의 학생이 살고 있고, 학교 당국의 간섭 없이 기숙사 자치회를 통해서만 운영이 이뤄진다. 그러나 간타 노무라가.. 더보기
장화 장화 한 켤레. 아담한 크기에 영롱한 빛을 발산한다. 제각기 굵기가 다른 빛 알갱이들은 단순한 신발에 신비감마저 감돌게 한다. 이런 걸 어쩌면 사진의 눈속임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진은 사소한 것들도 비범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런 시각 놀이에 길들여지다 보면, 점점 사진이 객관적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장화 사진은 정반대로서의 눈속임이자 반전이다. 평범했을 이 장화는 이제는 예사롭지 않은 정보를 담고 있다. 후쿠시마 원자력 사고 지대에서 주워온 이 신발이 발산하는 빛의 정체는 모두 방사능이다. 방사능에 많이 노출될수록 빛은 훨씬 굵고 찬란하다. 사진가 마사미치 가가야는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 방사능 누출의 영향을 추적하는 도쿄대 생물학자 사토시 모리 교수팀에 합류해 사진 기.. 더보기
자크 앙리 라르티그 - 4월 14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그는 직업은 화가였고 신분은 귀족이었으며, 사진은 취미였을 뿐이다. 일곱 살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으나 69세에서야 사진가로 알려졌다. 다만 데뷔 장소가 남달랐다. 뉴욕 현대미술관. 그곳의 사진부장 존 사코우스키가 그의 사진에 반해 첫 전시를 기획한 뒤로, 누구도 사진가로서의 그를 흉내낼 수 없었다. 자크 앙리 라르티그. 19세기 말에 태어나 피카소와 장 콕토 등을 친구 삼아 20세기를 즐겼던 인물. 프랑스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서 그가 유년 시절부터 일기처럼 찍은 사진에는 상류 사회의 일상이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그 모습들은 한결같이 유쾌하고 즐거운 사건사고들로 가득해 그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으며 심지어는 군인으로 참전했다는 사실마저도 잊게 만든다. KT&G 상.. 더보기
예카테리나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우크라이나. 이로 인해 섹스 관광에 대한 오명도 적지 않은 이 나라에는 예카테리나라는 도시가 있다. 이곳에는 오직 여성들만이 산다. 늘씬하고 지적이기까지 하며, 신부 수업까지 마친 이 여성들의 이름은 모두 예카테리나. 사진가 로멩 마데르는 이 이상한 도시에서 신붓감을 찾아 즐기고 방황하다 마침내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을 만난다. 젊은 남자의 욕망에 충실한 이 설정은 물론 가짜다. 그러나 허무맹랑하다고 무시할 수만도 없다. 예카테리나는 가상의 도시이지만 로멩 마데르는 진짜 사진가이자 작품 속 주인공이고, 그가 찍은 모든 사진 또한 우크라이나의 현실 세계에서 채집되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35세 미만의 젊은 사진가를 선발해 지원을 해 주는 네덜란드의 사진미술관 폼(Foam)이 올해는 가볍고.. 더보기
특이한 점 파랑 바탕에 노란 점이 박힌 스티커. 이것의 조달이 수월하지 않을 때는 비슷한 모양으로 대체 가능하다. 특이점이 없는 점 하나. 그러나 이 기호의 의미를 아는 순간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특이한 점으로 급부상한다. 이 점 위에는 단 한 사람, 흔히 VIP라 부르는 대통령만이 선다. 완벽한 경호를 위해, 차질 없는 예행연습을 위해, 절도를 갖춘 의전을 위해 이 점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점은 대한민국 최고 통치권자의 압축된 권력이다. 사진기자 김성룡은 해마다 스스로 오답노트를 작성해 왔다. 맞다고 여겼으나 답으로 채택되지 못한 것은 다름 아닌 B컷 사진. 그가 정말 찍고 싶었던 사진은 늘 지면에 실리지 못한 채 오답처리 되었다. 지난해 그의 오답노트 제목은 ‘특이한 점’. 청와대를 출입하거나 대통령 순방.. 더보기
공항 가는 길 비행기는 경계 밖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할 만큼 먼 거리에서는 당연히 여기와 다른 풍경들이 펼쳐진다. 멀리 날아갈수록 낯섦은 깊어진다. 공항 가는 길은 그곳만의 기후, 자연,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러나 정작 공항 자체는 경계에 머문다. 넓은 활주로를 위해 도심에 들어서지 못하고, 엄청난 소음은 주변으로 정착할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도 못한다. 공항에 근무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만 있을 뿐, 일상이 축적되지 못하는 곳. 여기와 저기를 잇는 허브이면서도 스스로는 외따로 존재하는 이방인 같은 존재일 뿐이다. 런던에 살고 있는 김신욱은 히스로공항을 이용할 일이 잦아지면서 점점 공항을 둘러싼 주변부에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오래전 히스꽃이 만발하던 농지의 대다수.. 더보기
청동 6각 너트 이 사진은 보통 어른의 키를 훌쩍 넘는 180×225㎝ 크기로 전시장에 걸린다. 대형 프린트의 위압감은 본능적으로 이 대상을 육중한 금속성 물질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스패너로 조이는 6각 너트란 구경이 밀리미터 단위이거나 커봤자 엄지손가락 마디 정도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 사물과 그 사물을 확대시킨 사진의 간극은 생각보다 커서, 시각적 긴장감과 함께 대상에 대한 새로운 관찰을 유도한다. 이렇듯 EH(김경태)가 사진가로서 갖고 있는 관심은 어떤 사물이 품고 있는 본연의 물성이다. 대신 사진을 통해 특정 장소나 시간에 얽힌 기억을 얘기하는 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서사가 없는 그의 사진은 차갑고 중립적이면서도, 대상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 작가에게 사진은 카메라라는 광학 기계와 분리시킬 수 없는.. 더보기
꽃 시절 그때도 세상은 어지러웠다. 4·19 혁명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59년, 나라 밖에서는 쿠바가 혁명을 완수했고 바비 인형이 태어났다. 미국 우주선 익스플로러 6호가 우주에서 찍은 최초의 지구 사진을 인류에게 선물하던 그해, 그들 또한 역사적이고 의미심장한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꽃 시절에 친우를 부여잡고서.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실제 꽃 시절에 주름살 없이 단아한 꽃다운 나이의 인생들이 카메라 앞에 섰다. 이른 봄, 배경 속 흙바닥은 아직 버석거리는데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사진 한 장 속에서 설레는 봄기운을 맡는다. 사진가이면서 지역의 시각 자료 수집에도 공을 들여온 전북 전주 서학동사진관의 김지연 관장이 그동안 모은 옛 사진들로 ‘꽃 시절’이라는 전시를 연다. 전시를 위해 사진에 글귀가 남아 있는.. 더보기
빈방 카메라 옵스큐라는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이다. 미술에서는 어둡게 만든 공간이나 상자 안에 구멍을 낸 뒤 밖에서 새들어오는 빛을 따라 맞은편 면에 거꾸로 상이 맺히는 장치를 의미한다. 오래전 화가들이 초벌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던 방법이기도 한데, 오늘날의 카메라는 이 장치를 간단히 만들기 위한 노력을 거듭한 끝에 태어났다. 조현택은 빈방을 찾아다니며 방 자체를 카메라 옵스큐라로 만들었다. 천을 둘러 암실로 만들고 구멍을 내자 바깥 풍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0번방’이라 이름 붙인 이 방에서 첫 작업의 아이디어와 맞닥뜨렸다. 정작 결과는 성에 차지 않아서, 이미지는 다른 빈방을 전전하며 다시 봄이 오기를 기다린 1년 뒤에야 얻어냈다. 생이 머물렀던 흔적은 남아 있으되 그마저도 자취를 감출 것 같은 소.. 더보기
디지털 검은 사각형 캔버스 위에 그려진 검정 사각형 하나. 러시아 화가 말레비치가 1915년 ‘검은 사각형’을 발표함으로써 미술은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무한의 가능성을 얻었다. 한편으로는 형태와 색채를 사라지게 만든 이 사각의 절대성을 넘어설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신과 인간 세계에 대한 재현의 강박으로부터 도망치던 서양 회화가 점선면으로 응축되더니, ‘검은 사각형’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회화의 모두 구성 요소를 삼켜버렸다. 그 순간 말레비치의 표현대로 예술은 대상의 멍에로부터 해방되었고, 평면의 캔버스는 한없이 깊은 비가시의 세계로 들어섰다. 덕분에 회화는 존재의 심연까지를 건드리는 숭고한 매체로 변신했다. 여기 또 다른 검은 사각형. 말레비치의 작품 제목 앞에 디지털이라는 수식을 덧보탰다. 공들여 촬영한 휴대.. 더보기
존재와 무, 그 양면성 사진 발명 초기, 혹은 사진을 처음 받아들인 사회에서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빼앗긴다고 의심한 일화가 많다. 세계에서 유일한 존재인 내 모습을 복제했다면 그 몸을 따라 영혼도 옮겨간다고 믿었다. 신체는 혼을 담은 껍데기일 뿐이었다. 이제 사진에 대한 태도는 양 갈래다. 눈에 보이는 물성만을 정확하게 재현해낸 차갑고 기계적인 이미지를 두고 생명성을 운운하는 것은 구식이라는 축이 하나. 찍는 자와 찍히는 자의 고유한 분위기와 태도로 인해 사진을 통해서도 탁월한 심리 묘사가 가능하다는 축이 다른 하나. 이현무는 이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조금 비껴간 질문을 던진다. 사진을 찍을 때 생명이 빠져나간다면, 그 분리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을까. 사진 속 인물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다. 세상과 작별할 때 눈을 감는다고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