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하면 흔히 미술관이나 대기업 로비에 설치돼 있는 비디오 설치작품을 떠올린다. 여러 대의 모니터가 쌓여 있고 스타카토 같은 영상이 번쩍거리는 그런 작품들 말이다. 미술을 모르는 사람들도 백남준의 이름은 알고, '백남준 스타일'이 이렇다는 건 안다.
그런데 작품을 보고 돌아서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백남준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지 모르겠다" 유명한 미술가라는 건 알겠는데 작품이 그냥 쉬워 보이고 어떤 점이 대단한지 모르겠다는 거다.
"당신이 미술을 모르니까 그렇지!"라고 일축해버리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일단, 업계 비밀(?)을 좀 누설하자면, 실제로 백남준 작품 치고는 범작인 것들이 있다. 어디 있는 뭐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런게 없는 건 아니라는 거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품도 범작이 있는데 이 정도야 그럴 수도 있다.
근데 그런 것을 넘어서, '익숙함'의 문제일 수도 있다. 미술작품이란 걸 처음 접하던 순간부터 우리 머리 속에는 '백남준 스타일'이 입력돼 있어서, 그걸 너무 당연한 걸로 받아들인다는거다.
따지고 보면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살인 인파를 뚫고 <모나리자> 앞에 서 본 사람도 비슷한 감상을 내뱉는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지?"
하지만 우리가 만약 다 빈치가 스푸마토 기법(색의 윤곽을 흐릿하게 하여 은은한 음영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법)을 만들어내기 전에 살았다면, 그림이 이런 신비한 분위기를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마찬가지로 백남준 이전에는 그 누구도 '티비 모니터와 그 속의 영상이 미술작품의 재료로 쓰일 수 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건 콜럼부스의 달걀이다.
W. J. T. 미첼의 말대로 "언어는 차이에 의해 작동하고, 이미지는 동일화에 의해 작동한다." 어떤 이미지를 볼 때 우리는 항상 "어디서 봤더라..."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는 거다. 우리 기억 속에 저장돼 있는 어떤 이미지와 재빨리 맞춰보고 익숙한 걸 골라낸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이미지를 다루는 미술가들이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낸다는 건 참 어렵다. 처음부터 불리한(?) 게임인 것이다.
더군다나 '못보던 이미지'를 만드는 걸 너머 '못보던 예술'을 만들려고 하는 작가라면 고민이 많을 수 밖에 없다. '못보던 예술'이란 결국 이미 있는 예술로 설명될 수 없는 예술, 말하자면, '출발지점에 선 예술'이다. 백남준은 누구보다 더 '출발'을 화두로 삼았던 작가였다.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작품들이 익숙함에 의해 많이 희석되었다면, 좀 덜 익숙한 작품을 감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좀 덜 알려져 있는 사실 중 하나는 백남준이 원래 미술학도가 아니라 음악학도였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백은 도쿄대학에서 쇤베르크 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쇤베르크를 더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간다. 거기서 '플럭서스'라 불리는 일련의 전위예술가들을 만나서 함께 여러 가지 실험적 작업을 하게 된다.
플럭서스는 서구 부르주아 문화의 엘리트주의에 반대하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모토를 내걸었던 운동이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예술에 반대되는 거라면 뭐든지 했는데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이 퍼포먼스였다. 플럭서스엔 백과 마찬가지로 음악적 배경을 가진 작가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퍼포먼스는 일종의 '콘서트'로 간주되었다. '악보'도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음악 콘서트는 아니다. 그들의 공연은 '음악의 출발'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소리'다. 어떤 소리가 음악인가? 전통적인 음악에서는 음악이 될 수 있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백남준과 플럭서스 멤버들은 이 위계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바이얼린 솔로를 위한 하나(One for Violin Solo)>(1962)도 이런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에서 백남준이 한 일이라고는 바이얼린을 오분간 높이 들었다가 내려치는 것 뿐이다. 저 사람이 뭘하나 궁금해하며 기다리던 청중들은 바이얼린이 큰 소리를 내면서 부서지는 순간 화들짝 깨어난다.
이 순간, 음악이 탄생한다. '바이얼린이 부서지는 소리'라는 음악.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바이얼린이 부서지면서 오분의 시간이 끝난다. 이 순간, 침묵 속에서 흘러간 시간 그 자체가 음악의 시간이 된다. 행위를 통해 시간을 절단하는 작업, 그것이 전통적인 음악이 망각하고 있었던 음악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작업은 전통적인 음악이 관습적으로 음악이라고 불렀던 어떤 '상상의 시간'을 실재의 시간으로 절단내는 행위를 보여준다.
플럭서스에 큰 영향을 준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는 세상의 모든 소리들, 심지어 소음과 침묵조차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백남준은 한술 더 떠서 연주자와 청중의 행위조차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케이지가 음악을 '시간 속에서의 소리의 지속'으로 정의했다면, 백은 연주자와 청중의 행위라는 요소를 통해서 '음악을 공간화'시켰다(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도 또 다른 방식의 음악의 공간화 혹은 시간의 절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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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특징은 누구나 연주자가 될 수 있다는 거다. 백남준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 작품을 연주할 수 있다. 바이얼린을 들고 있는 시간이나 내려치는 강도를 자기 맘대로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이 곡을 새롭게 작곡할 수도 있다. 아래 동영상은 동시대 독일의 실험음악가 마크 로렌츠 키셀라(Mark Lorenz Kysela)가 이 곡을 연주하는 장면이다.
실험음악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이 곡을 연주할 수 있다. 집에 바이얼린이 없으면 아무 거나 집어들고 하면 된다. 단 값이 덜 나가는 물건이 권장된다. 가히 '음악의 출발'에 대한 곡이라고 할만 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곡의 단점은 자꾸 하면 걸오사형 말대로 습관된다는거다. 또 다시 익숙함이라는 놈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니 2010년의 우리가 '출발'을 꿈꾼다면 백남준이 하지 못했던 것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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