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경희, 터-지속된 시간, 2006
무덤은 죽은 자를 위한 곳이 아니다. 죽은 자와의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산 자가 만들어 놓은 기억의 집일 뿐. 그러므로 무덤은 산 자들을 지금의 삶에 붙들어 매놓기 위한 생의 장소다. 남겨진 사람은 무덤이 놓인 밭두렁 가장자리, 깊은 숲, 바다가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배기에 올라 꽃이 피고 지는 계절을 나누고, 소소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남은 생을 함께 산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보면, 무덤이 늙어 봉분의 키는 점점 줄어들고, 떠난 사람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진다. 더불어 무덤을 지켜주던 이 또한 세상을 떠나버리고, 병풍처럼 늘 감싸줄 것 같던 주변의 산과 바다도 모양새를 달리한다. 외롭지 않게, 먼저 떠난 이 옆으로 봉분 하나가 나란히 놓인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갑작스럽게 동생을 떠나보낸 사진가 차경희는 ‘터’ 작업을 통해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덧없다고 말을 건네온다. 첫눈에 보면 풍경만 가득한 사진 속에서 무덤은 있는 듯 없는 듯, 보일 듯 말 듯 저기 어디쯤에 터를 잡고 있을 뿐이다. 진혼의 작업이라 하기에 풍경은 무덤덤하고, 무덤 또한 무심하게 놓여 있어 그저 잔잔하기만 하다. 그러나 사진을 곰곰 들여다보면 햇볕이 드문 차분한 풍경들은 오히려 속울음처럼 깊다.
작가는 큰 카메라를 들고서, 망자들을 만나러 제주부터 강원도까지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살아 있는 자들이 늘 풍경의 변화를 경험하고, 마음의 기복을 느끼고,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듯, 작가는 무덤이 상징하는 떠난 이들 또한 이 모든 변화무쌍함을 함께 겪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터’의 사진 속에서는 연신 꽃이 피고,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린다. 그것은 마치 작가가 무덤 속 그리운 이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그를 대신해 여행을 다닌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 여행에서 작가는 그리움을 떨쳐내기 위해 허위허위 발길을 옮기는 스스로와도 조우한다. 이제 마흔을 넘긴 작가가 이 작업을 삶의 중간보고서 삼아, 지난 시간을 곰곰이 되짚었다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풍경 속에 묻혀 있는 무덤, 혹은 무덤가의 풍경은 결국에는 자그마한 터 하나로 남을 우리의 이야기다. 물론 그 터마저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기억이 망각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