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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선승혜의 그림친구

슬픈 전설의 역사

천경자 화백(1924~2015)은 ‘슬픈 전설’과 화려한 작품으로 살아간 20세기 한국화의 전설이다. 그의 부고 역시 전설처럼 세상에 알려졌다. 마지막까지 ‘슬픈 전설’을 놓지 않은 삶이다. 천경자의 전설은 20세기 한국에서 예술가로, 여성으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한국의 역사다. 정치사가 한국 근현대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예술과 삶으로 방증한다.

천경자의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는 50대에 22살을 기억해낸 자화상이다. 그녀가 22살이던 1945년에서 70년이 지난 올해 ‘슬픈 전설’은 역사가 되었다. 천경자의 슬픈 전설은 <어린왕자>의 뱀과 장미를 떠올리게 한다.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서울시립미술관



욕망의 뱀. 머리에 뱀 4마리가 오글거린다. 뱀은 어린왕자에게 “사람들이 있어도 외로운 것은 마찬가지야”라고 말한다. 그녀의 외로움은 말문을 닫아버리듯 차갑다. 얼굴이 어둡고, 주변에 한기가 돈다. 슬픈 눈길로 다른 세상을 응시한다. 뱀은 “내가 건드리는 사람은 자기가 나왔던 땅으로 돌아가게 돼”라고 말한다. 천경자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뱀으로 자신으로 돌아가려 욕망했을까.

한 송이의 장미. 슬픈 전설의 그녀는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다. 어린왕자는 장미를 떠올리며 말한다. “그 꽃의 대단치 않은 심술 뒤에 애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어.” 어린왕자는 뱀에게 물린 후 죽음을 맞으며 말한다. “나는 꽃에 대한 책임이 있어. 겨우 보잘것없는 가시 네 개를 가지고 세상과 맞서 자기를 지켜나가야 했거든.” 천경자는 장미 같은 꽃의 예술로 세상과 맞서 자신을 지켜나가려 했을까.

우리에게 천경자의 ‘슬픈 전설’이 소중한 것은 한국의 20세기라는 시간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천경자는 작품으로 묻는다. 오늘날 그대들의 전설은 무엇인가? 또 그 전설은 아직도 슬픈가, 그렇지 않은가? 그 대답을 찾으며, 이제 하늘에 작은 인사를 보낸다. 장미처럼 영면하시기를.



선승혜 | 아시아인스티튜트 문화연구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