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둘이 등을 맞댄 채 연주를 시작한다. 눈의 수신호 따위는 필요도 없다는 듯이, 한쪽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빨라지면 자연스럽게 보조를 맞춰주는 한 몸과도 같은 조화로움. 남루한 옷은 손에 익은 바이올린만큼이나 반질반질하고, 푸대접을 받은 탬버린만큼이나 얼룩져 있다. 다듬지 않은 수염, 푸석한 머릿결에 어울리는 거친 흙바닥에 앉았어도, 호젓한 물가의 운치를 내 것으로 삼을 줄 아는 풍류객들. 연주가 절정에 올랐는지 바이올린 켜는 사내의 어깨는 젊은이를 향해 더 많이 기울어져 있다. 그러나 나이 든 사내의 먼 곳을 향한 시선은 웃는 듯 슬픈 듯 그들이 연주하는 곡의 속도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든다.
성남훈, 루마니아 집시, 파리 낭테르, 1992
그들 앞에 젊은 사진가 성남훈이 있다. 연극을 하다가 갑자기 사진을 공부하겠다며 파리로 떠나온 유학 3년 차의 학생. 연극으로 길들여진 친화력은 어린 시절 미술을 동경했던 감수성을 만나 집시들의 삶 속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집을 떠나온 자는 모두 집시였기에 그들의 자유분방함과 거친 환경은 곧 자신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따듯하면서도 과감한 프레임의 사진에서는 유럽에서 여전히 소매치기로 악명 높은 집시들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다. 대신 수세기 전 인도에서 떠나왔다는 정처 없는 그들의 운명이 더 강하게 도드라질 뿐이다. 머나먼 과거, 그들은 지금처럼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난민만큼이나 많은 시련을 거쳤다. ‘꿈은 시간을 모른다’라는 제목으로 스페이스22에서 성남훈이 내놓은 과거의 사진들은 여전히 늙지 않은 풍경처럼 선연하지만, 오늘의 유럽에서 저런 낭만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 더욱 애틋하다.
송수정 전시기획자